
홍차가게 소정에 다녀와서... 쉼을 얻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의 향수 중에서 -
작년 이 맘때 나는 무엇을 했을까 ? 불과 일년 전 일이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일상의 반복 속에서 조금은 지루해하며, 30대의 마지막을 우울하게 보냈다. 피아노를 치는 아들의 진로 문제, 사춘기로 인한 갈등과 타성에 젖어 버린 일이 주는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 거렸다.
아쉬움 속에 한 해를 보냈지만, 다시 선물처럼 1년의 시간은 나에게 왔다.
그리고 네 번의 계절 변화를 겪으며 2013년 12월 앞에 다시 서 있다.
이 한 해를 정리하며, 내가 겪은 일을 글로 쓰기 위해서는 좀 더 나를 성숙시키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꼭 글로 남겨보고 싶다는 마음도 든다.
파도가 아무리 거세게 몰아친다 해도 다시 잠잠해 지는 때가 오는 것처럼,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 역시 시간과 일상에 묻혀 과거형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일요일 오후... 기말고사 공부를 하는 아들을 집에 두고, 오랫만에 남편과 근교로 외출을 했다.
정지용의 시 "향수"의 배경이 되며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는 옥천....
나는 시를 잘 알지 못하지만, 정지용과 백석 그리고 김수영과 기형도의 시를 사랑한다.
소박하고 아담하게 가꾼 정지용 생가는 이미 여러 번 다녀왔기에 간단히 둘러 본 후,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착한 식당으로 선정된 구읍할매묵집을 향했다.

겨울에는 메밀묵이 제 맛이라는 말에 메밀묵밥과 도토리묵밥을 시켰다.
도토리는 따끈한 육수를 부어 먹어야 하고, 메밀묵은 신김치와 듬성듬성 부숴 놓은 김, 고소한 참기름을 넣고 살살 비벼 먹는게 더 맛난다고 한다. 함께 따라 오는 반찬 역시 깔끔하고 정갈한 맛이었다.
특히 총각 무우와 갓을 넣어 시원하게 담은 동치미와 시골 간장에 푹 삭힌 고추 절임이 개운하고 맛깔스러웠다. 그럴 듯한 외식이 어느 순간부터 싫어졌다. 슴슴하게 무쳐 낸 나물 반찬이나 소박한 찌개 한 그릇이면 족하다.
무엇을 먹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먹느냐가 더 중요한데, 좋아하는 음식을 가족과 나눌 수 있으니 즐겁고 행복한 시간임에 틀림없다.

점심을 먹고,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홍차가게 소정에 다녀왔다.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에 위치한 홍차가게 소정... 입구의 빨간 간판이 매우 인상적이다.
멋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 부부가 추천하는 홍차 맛에 우리 부부는 완전 반해 버렸다. 도시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 길가에 자리 잡은 '소정'은 대청호 끝자락과 나지막한 산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차 한잔을 마셔볼 수 있는 아담한 카페이다.
20여년 간 다양한 차를 공부하면서 홍차의 매력에 빠졌다는 주인 부부는 차와 문화를 즐기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이 곳을 열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 추천해 주신 홍차와 아이리쉬 위스키 크림 바닐라라는 긴 이름의 홍차를 마셨다. 그리고 차와 함께 나오는 갓 구운 스콘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따끈하게 덥힌 찻잔에 향긋한 홍차와 스콘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책 한권...
무엇보다 이런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족이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커다란 테라스로 옅은 햇빛은 비추고, 느긋하게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즐겼다. 색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 해가 가기 전, 눈이 오는 어느 날... 꼭 한번 다시 오자는 기약없는 약속을 했다.
벚꽃이 만발한 봄, 녹음이 짙은 여름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산한 가을에도 어울리는 홍차가 준비된 곳이 홍차가게 소정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잠시 시간도 멈춰 버린 듯한 쉼과 여유가 있어 좋다.
지친 몸과 마음도 홍차와 함께 쉼을 얻은 듯...평화롭고 고요하다.
우리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얻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