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우의 수학경시대회 점수가 나왔다.  초등학교 3학년이 뭔 경시대횐지 학교측의 처사가 못마땅하긴 하지만 점수가 궁금한건 어쩔수 없다. 게다가 녀석은 최근 며칠동안 나름대로 복잡한 지문이 제시되어 있는 문제를 풀어보며 연습을 하곤 했다.

그런데 건우의 점수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 점수를 물으니 주저주저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시험지를 보내주는것도 아니고 아이에게 달랑 점수만 알려준것으론 뭐가 문제인지 알수가 없다.  이럴때 나이값을 하여야 하거늘 기분이 울적해지는 것을 감추기가 어렵다.

시험을 볼때마다 건우는 어려운 문제를 다풀어 놓고 사소한 실수로 틀리는것을 되풀이하곤 한다. 그래서 시험볼때마다 모르는것 틀리는 것은 어쩔수 없으나 아는 것을 틀리면 속상하니 끝까지 집중을 하라고 다짐을 받곤 하건만 아마 이번에도 그런 문제가 제법 있었으리라 짐작을 하며 혀를 끌끌찼다.

경시대회점수를 잘 받겠다는 전제하에 녀석은 유희왕 카드를 사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혹 점수가 목표에 미달이면 2주간 컴퓨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함께.

숙제를 하며 주말내내 건우는 울적해 있었다. 건우아빠는 왜 아이에게 무리한 약속을 받았느냐며 혀를 찼다.

못들은척 하였지만 나도 적잖이 신경쓰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6시에 일어나 영어테이프를 듣는 건우에게 유자쥬스를 한잔주고 가만히 마주 앉았다.

"건우야, 게임 못해서 우울해?'

"네, 그리고 나도 점수 잘 받고 싶어요. 근데 엄마가 실망하는 것 같아서 더 우울해요."

"건우야,  성적이 잘 안나오는건 네 잘못이 아니야."

건우가 뜨악해서 나를 보았다.

"사실은 네가 더 어렸을때 테레비나 게임을 하는 것을 적절히 조절해주고 책을 읽는 습관을 길러주고 또 그것을 잘 요약하거나 끝까지 집중하게 습관을 길러줘야 했던 것은 엄마몫이야.  그런데 네가 자꾸 끝까지 집중을 못하는 버릇을 지금 고쳐주지 않으면 앞으로 네가 더 힘들어질까 걱정이야. 네가 아기때 잘못 든 습관은 엄마 잘못이지만 앞으로 고치지 못하는건 엄마 잘못에 네 잘못도 덧붙여지는 것이거든."

얼핏보니 건우의 눈에 눈물이 돌았다.

공부를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책을 꼼꼼하게 읽고 독서록과 일기도 맞춤법과 어법에 맞춰쓰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하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 거렸다.

초등학교 3학년짜리의 성적이 안나오는 것이 어찌 아이책임이겠는가마는 공연히 아이에게 짜증을 부리게 되는 마음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힘들게 건우의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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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5-2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의 잘못도, 건우와 연우님 잘못도 아니에요.
이 사회의 잘못된 교육제도 탓이지.
건우가 참 순하고 어집니다.
모자의 대화에 뭉클.^^

물만두 2006-05-2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우리 잘못입니다. ioi

건우와 연우 2006-05-29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로드무비님 물만두님 어른들의 잘못이죠...
물만두님 들러주셔서 반가워요^^

치유 2006-06-01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뭉클합니다..그놈의 성적 끌고 가는 것도 아니건만 왜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지..ㅠㅠ
너무 속상해 마세요..

건우와 연우 2006-06-01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금요일 오후 1시 38분, 휴대폰에 낯선번호가 떴다.

나: 여보세요?

발신자: 안녕하세요 기호0번 후보 자원봉사입니다.

나: <버럭> 여보세요? 내 전화번호 어떻게 알아냈어요?

발신자: <뜨악한 목소리로> 휴대전화번호야 여기 저기 많이 있잖아요?

나: <버럭 버럭>댁들이 내가 그 동네에 사는지 어떻게 알구 번호를 알아냈냐구요?

발신자: <더듬 더듬>주차해놓은 차에 전화번호가 있어서요...

나: <싸늘한 목소리로>나는 운전안하거든요.

발신자: <더듬 더듬>왜 연락번호 남겨놓으시는거 있잖아요?

나: <다시 버럭>아 그러니까 어떤 놈이냐구요? 내 연락번호는 나한테 연락하라구 알려줬지 댁들한테 넘겨주라고 준거 아닌데 어떤놈이 넘겨줬냐구요?

발신자: <더듬 더듬>그게 저...

나: <싸늘한 목소리로>몇번 운동원이라구 하셨지요?

발신자: 아니요 저기 죄송합니다......

 

전화가 끊겼다. 그녀는 아마도 재수 옴붙었다고 생각할런지도 모른다. <뭐, 이런 여자가 다있어. 나이는 먹을만큼 먹은 여자가 세상 참 힘들게 사는군 쯧쯧...> 혹 그렇게 혀를 찼을지도...

어쩌면 내가 지지하려고 했던 후보가 표다지기 차원에서 전화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내편이든 남의 편이든 그런식의 룰을 깨트리는 행위가 싫다. 그냥 싫은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혈압이 확 오를정도로...

그럴때마다 사람들은 불편해한다. 이제 대충 넘어갈 나이 아니냐고...

혹은 피해의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거기까지일뿐이다. 휴대폰에 남아있는 전화번호를 보면서 이걸 정말 끝까지 확인해볼 생각은 나지 않는다. 아마도 몇년전이었다면 기운이 펄펄넘쳐 끝까지 확인해보고 따져댔으리라.

그래, 이렇게 대충 넘어가고 있다. 세월을 따라 노쇠해감에 씁쓸해진다.

사무실밖에서는 선거운동원들의 요란한 연설이 들리고 초등학생들이 한무리 지나가고 있다. 건우나이쯤 되었을까?

숨을 들이키며 생각한다. 아이들아, 빨리커라. 어른들이 더 비겁해지기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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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5-29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난하고 까탈스러워서 그런 게 아닌데 그런 의심을 받게 될 때가 있어요.
저도 물어봅니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죠?"
그러면 대개 깨갱하는 분위기.
 

늦은 저녁을겸해 연어구이와 활전복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다.

두어시간을 마시다가 밖으로 나와 탄천쪽 하늘을 보니 햇솜같은 구름이 떠 있는게 보인다.

좀전까지 줄창내린 비탓일까, 어두운데도 구름이 가벼워보이는것은.

감기에 지친 연우는 진작에 잠들었고 건우는 아빠가 내준 수학문제를 풀다 잠이 들었다.

조용한 틈을 타 밖을보고 있는데 좀전에 할인매장에서 장보고 오는길에 흘러나왔던 라디오 멘트가 생각났다. 나이에 관한 거였나. 대충 들었는데 세월을잡고싶다는 의지를 나이에게 표현하는 그런 거였는데...

사실 나는 한번도 나이, 혹은 세월(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세월은 가라고 있는거 아니냐, 그리고 그흐름속에서 나는 별 아쉬움없이 살다가 어느날 자연스럽게 죽으리라, 그렇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스스로에게 한번도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삼십대가 끝나가도록 정말 절절한 아쉬움이나 후회가 없는 것이냐하고...

나는 무기력의 끝에서 결혼을 했고, 하늘을 찌르는 책임감으로 이후의 관계에 대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 왔다. 그러나 나에 대한 의무는 잘 해온 것일까? 대답이 무서워 나는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을 의도적으로 회피해왔다. 나는 가끔씩 비는 시간이 무섭다.

건우아빠가 늦게 공부에 매달린게 어느새 7년이다. 그는 그렇게 그의길을 간다. 그리고 별다른 고민없이 그의 생활을 영위한다. 그가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때나 혹은 그전에 돈안되는 단체의 일을 맡겠다고 했을때도 나는 늘, 그래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지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이제 나이 사십을 바라보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다닌 직장은 눈감아도 할수 있는 일들뿐이지만 나이가 돌덩이처럼 어깨에 앉아  어느새  경력은 거추장스러운 짐일뿐이다.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던 이십대가 그리워지는것은  나이먹음의 반증이다. 그리하여 세월을 되돌린다면 나는 무엇으로 살고 싶은것일까?

이렇게 불쑥 생각나는 것은 용기인지 혹은 취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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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6-06-0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론장에서 다시 여러분이 십년전으로 돌아간다면 여러분은 뭘 할 것인가?..란 질문을 받았었어요..그런데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더라구요..글쎄, 십년전의 내 꿈이 무엇이던가..무엇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았던가..싶더라구요..앞으로 십년후엔 내가 뭘 하고 있을까??또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난 꿈도 없나 싶을때가 있어요..

건우와 연우 2006-06-01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정말 십년후를 위해선 지금부터 열심히 질문해봐야 할까봐요.

카페인중독 2006-09-15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의 나이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없는데...
가끔 시간이 의미없이 흘러갈때는 pause 버튼을 누르고 싶어요
 

며칠전, 동료들과 점심을 먹다가 투기와 세금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백궁정자지구에 누가 빌딩을 샀다는둥. 그게 몇배로 불어서 몇년만에 백억을 남겼다는둥.

그리고 숱한 탈법행위들이 줄줄이 화제에 오르고...

사람들이 열을내며 대화를 하는 도중에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동료들이 그들을 비난하는게 아니라 노골적으로 부러워해서...

그리고 어느새 수다의장에서 고립무원이 돼버린 외로움으로 인하여...

한때나마 같이 노조간부를 하기도 했던 모모가 결국은 내가슴에 비수를 날렸다.

<나도 능력만 돼면 투기할거야. 그리고 절대 세금 안내!>

순간 그녀보다 조금더 초라한 나의 살림살이가 슬펐고 주변을 설득할 용기를 상실한 나의 말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쓸쓸히 패퇴했다. 다만, 뒤통수에 한마디 남겨주었을 뿐이다.

<그래, 열심히 해라. 그렇다면 나의 비난을 불만스러워하지 마라. 그 행위를 씹는건 유리지갑을 지닌 월급쟁이의 천부인권이다.>

나는 건우와 연우가 공정한사회에서 공정한 대우를 받고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또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얼마나 많이 외롭고 서글퍼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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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5-25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부터 그러려니 하던 사람의 말은 화가 날 것도 씁쓸할 것도 없는데......

건우와 연우 2006-05-25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포기가 잘 안돼요 ㅠㅠ
 

퇴근길엔, 학교에서 혹은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먼저 일러바치느라 두아이의 입질이 바쁘다.

친구와 다툰얘기, 선생님흉보기, 놀다가 다친얘기, 시험본 얘기등...

아이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실제 있었던 일과 본인의 추측이 적당히 버무려져 있다.

그추측이 아이들특유의 상상력으로 넘어갈 수 있는 귀여운 내용이면 다행이다.  그러나 요즘은 유치원이고 초등학교고 간에 마음놓고 들어넘길 수 없는 일들이 허다하다.

아이들은 민감해서 선생님들이 부잣집아이를 더 예뻐하는지, 엄마가 공부잘하는 아이를 좋아하는지 혹은 아무개 엄마가 집을 나갔다든지, 누구집이 몇평이라든지 하는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제나름의 방식으로 소화를 해서 전달한다.

건우는 유치원셔틀버스를 나와함께 타고 출퇴근을 했다.

아파트분양이 봇물을 이루던 무렵  녀석의 유치원에서 아파트평수가 아이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나보다.  셔틀버스안에서도 아이들이 여기저기 제집의 평수를 들이대며 숫자가 큰녀석들이 의기양양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건우녀석,  아무말도않더니 갑자기 아이들을 둘러보고 큰소리로 제아빠의 나이를외치는 것이었다.

<우리아빠 나이 00, 야! 우리아빠보다 나이 더 많은 사람?>

문화센터와 함께 있는 유치원인지라 제법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어른들의 웃음이 터지고, 어쨌든 아이들은 순식간에 제압이 되었다.

그러던 녀석이 어느새 초등학교 3학년이다.

 

세월은 이렇게 잘도 흐르는데,  인테넷을 검색하다보니 이회창과 김종필의 정치적 움직임이 기사로 떠 있는게 얼핏보인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흘러가지도 않는것일까?

구정치인들의 지긋지긋한 야망과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를 있는 공주의 불행한 사건.

이제 그러한 사건들조차 정치적 이면을 의심하지 않고 나이든 노인들의 여가생활이나 액면 그대로 불행한 사건들로만 받아들일수 있는, 딱 그만큼의 세월이 정치판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내아이들이 어른이 되기전에 있는 있는 그대로 사회를 받아들일수 있는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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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6-05-2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가 참 당차네요. 3학년이면 한창 개구질 나이일 것 같아요.

치유 2006-05-24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예요..문제..

삼학년멋진아들과 일곱살 이쁜공주님의 어머님이신군요..^^&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