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리움
데이비드 밴 지음, 조연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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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하지 못한 상처들을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는

냉정하고도 따뜻한 메시지!

 

   ‘우리는 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가.’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때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얻은 상처가 가장 깊은 상흔을 남긴다. 화해를 함에 있어 모든 걸 다 용서하고 잊겠다 하는 것은 거짓이다. 잊었다고 하는 것 또한 망각일 뿐, 마음 한편에 묻어둔 상처는 저도 모르게 불쑥불쑥 되살아나 자신을 할퀴거나 때로는 덧나고 엉뚱하게 불거져서 또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데이비드 밴의 장편소설 <아쿠아리움>은 바로 이런 상처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어떻게 상처를 주며,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아픔을 남기는지, 또한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상처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 것인지, 아쿠아리움이라는 독특한 발상의 장치를 통해 그려나간다.

   열두 살 소녀 케이틀린은 방과 후면 언제나 아쿠아리움으로 향한다. 어류학자가 되기를 꿈꾸는 소녀는 엄마가 일을 마치고 데리러 오기 전까지 아쿠아리움 속의 물고기를 보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다. 수조 밖의 세상을 알지 못하는 물고기처럼 소녀 또한 수조 속 물고기들의 세상을 모두 알지 못하지만 그래서 그들과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소녀에게 있어 좁은 수조 속에서 느리게 유영하는 물고기는 자신과 다름없으며 자신이 가보지 못했던 세계, 언젠가 따뜻하고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이 세상은 곧 하나의 바다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좋았다. 매일 밤 잠이 들 때면 나는 수천 피트 아래 저 밑바닥을 상상하곤 했다. 저 수압을 모두 견디며, 그러나 마치 쥐가오리처럼 미끄러지듯, 소리도 없이 한없이 가볍게 저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 위로 솟아올랐다가, 저 깊고 어두운 협곡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소용돌이를 그리며 새로운 고원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멕시코나 괌, 북극이나 아프리가 어디라도, 물이라는 한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모든 곳이 집이었다. / 34p

  



  어느 날, 소녀는 아쿠아리움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매일같이 만나 함께 물고기를 구경하며 친해진다. 대부분 물고기의 외관을 묘사하며 서로 감탄하기도 하고, 물고기에 대해 꽤 깊은 상식을 가지고 있는 소녀가 노인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단순히 물고기에 대해 서로 질문과 답을 하는 대화에 불과한 듯하나 물속 생명체의 경이로움을 넘어서 삶에 대한 관조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정답이 없는 것 같은데. 마침내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정답이 없는 게 가장 좋은 질문이지. 해마가 어떻게 생겨났을지 상상이 잘 안 되는구나. 녀석들은 왜 육지의 말 같은 머리를 하고 있을까. 둘이 그렇게 닮았다는 건 아무도 모를 텐데 말이다. 말은 해마를 보지 못할 테고, 해마도 말을 보지 못할 테고, 양쪽 모두를 알아볼 만한 것들도 없을 텐데. 지금이야 우리가 이렇게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걸까? 이거야말로 제대로 된 질문이겠구나. / 26p

  



  사실 노인은 19년 전 병든 아내와 딸을 버리고 떠났던 케이틀린의 외할아버지였다. 그는 물고기를 사랑하는 손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가족들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용서받고자 용기를 내는 중이었다. 한편,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케이틀린의 엄마는 빠듯한 형편을 꾸역꾸역 살아내느라 딸과 아버지가 만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엄마에게 있어 아버지란 존재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불운했던 과거와 현재를 상기시키는 존재였기에 그의 등장으로 충격에 휩싸인다. 늘 가족이 더 있기를 꿈꾸었던 케이틀린으로서는 용서를 구하며 다가오는 할아버지에게 잔인한 분노를 토해내며 격하게 밀어내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마치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개의 세계가 만난 것처럼 도저히 맞닿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거기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어두운 수조 속에 검은 모래와 흙뿐, 몸을 숨길 만한 바위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유리에 바짝 붙어 서서 벌감펭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벌감펭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물고기 중의 하나였다. 연한 올리브색 날개에, 머리는 하연 솜털로 뒤덮인 나방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가늘고 하얀 더듬이들은 꼭 곤충의 다리 같았다. 게다가 녀석의 몸통은 마치, 서로 다른 두 마리가 붙어 있는 것 같았는데,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어둠 속에서 녀석들은 변신을 했는데, 결코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개의 세계가 만나는 것 같았다. / 144p

  



  케이틀린과 할아버지는 엄마의 눈을 피해 몰래 아쿠아리움에서 다시 만난다. 하지만 금방 엄마에게 들켜버리게 되고, 엄마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터져버린 듯 딸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꽤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기까지 한다. 수면 아래에 드리우고 있던 상처가 일순간 팍, 하고 튀어 오르는 그 낯설고 두려운 광경은 딸에게도 역시 지우지 못할 상처를 만들고 만다. 모두에게 상흔을 남겨버린 이 가족에게 과연 평화가 찾아올까? 훗날 이 때의 일을 두고 케이틀린은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용서하고 또 잊어야 할 것이다’
   케이틀린은 엄마를 간단히 용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잊어야 했다. 한 사람의 삶을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모두 알 수 없는 법이다. 우리 모두는 가슴 속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어느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도 용서를 강요할 수 없고, 상처를 쉽게 위로할 수도 없다. 그저 잊으려고 애쓸 뿐,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남기기에 최대한 끌어안는 수밖에.


어쩌면 이런 것이 우리가 용서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를 모두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현재에 받아들이고 또 인식하면서 끌어안는 것, 천천히 내려놓는 것 말이다. / 337p



  언젠가 아쿠아리움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수조 속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얼굴만 넣어서 볼 수 있는 이중 구조 형태의 수족관이었다. 그때 나는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신기하기보다 얼른 그곳에서 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마치 심연의 어두운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설의 까만 표지 속에서 부유하는 물고기들을 보고 있으려니 헤아릴 수 없이 내 마음속을 떠도는 어떤 부유물처럼 느껴졌다. 때때로 그 부유물들이 내 사람들에게도 상처가 되지는 않았는지, 나도 모르게 그들의 마음속에 상흔을 남기지 않았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을 때, 용서를 구하고 싶을 때 이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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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 직장인의 어깨를 다독인 51편의 시 배달
김기택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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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빌어 세상을 노래하는 시인의 이야기!

문학 집배원 김기택 시인이 소개하는 51편의 아름다운 시!


  나는 늘 소설은 쓸 수는 있어도 시는 쓸 수 없다고 말해왔었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촉수를 드리우고 있는 예민한 시적 감각이 내겐 없었다. 언젠가 대학교 재학 시절, 시 수업을 들을 때마다 이 시를 보며 무슨 그림이 그려지냐고 물었던 교수님의 질문에 썩 시원하게 대답한 적이 없었다. 수능시험을 치를 때, 시적 화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답은 정해져 있었고 은유와 운율을 학습하듯 암기해야 했던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다못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던 적도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니, 나는 애초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시를 그저 이해하려고만 했을까.

   이미 해석이라는 틀에 박혀버려 시를 대하는 감각이 굳어버렸던 나는 꽤 오랫동안 시를 읽지 않았다. 세상에 온갖 감상적인 이야기들은 넘쳐나지만 그것이 ‘시’가 되어버리면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그것도 가을을 목전에 두고서 시를 마주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기택 시인의 첫 산문집으로 51편의 시를 통해 감상 혹은 자전적 이야기나 시론을 엮은 책이었다. 지금 내리는 이 비가 그치면 나뭇잎의 색이 이렇게 변하려나 하고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의 표지를 스윽 쓸어보았다. 참 묘했다. 손바닥이 살짝 간지러운 것이 기분을 동하게 했다. 나와는 맞지 않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시를 읽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면 왠지 읽어도 좋을 것 같았다. 늘 숨은 쉬어 왔지만 이 책의 제목처럼 ‘시로 숨을 쉰다’면 조금은 다른 변화가 내게 찾아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책은 김기택 시인이 일 년간 평소 즐겨 읽거나 좋아하는 시 중에서 쉬운 듯하면서도 암시와 함축이 풍부하고, 상상력을 즐겁게 자극할 수 있는 시들을 엄선하여 계절별로 구성되었다. 제1부에서는 봄기운이 나거나 밝고 가벼운 느낌의 시를, 제2부에서는 여름의 기운과 같이 열정이 느껴지는 시를, 제3부에서는 스산하게 부는 가을바람 같거나 조용히 생각해볼 것들이 많은 시를, 제4부에서는 매서운 겨울 추위에 맞서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시들을 감상할 수 있다. 수록된 모든 시에 마음이 간다거나 시적 유희를 진정으로 느낀 것은 아니지만 그 중 유독 몇 번이고 읽게 되는 시도 있고, 시보다 김기택 시인의 감상글에 더욱 끌리는 것도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시가 있다면 문정희 시인의 <흙>이었다.


 

 

내주기만 하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흙은 어머니를 닮았다. 열매와 짐승과 사람에게 다 퍼주고도 밟히기만 한다는 점에서도, 그들의 똥오줌을 받아내 제 안에서 삭이기만 한다는 점에서도, 흙은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가 되어본 사람이라면 흙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고, 심장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눈물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제 몸의 양분과 정기를 씨앗에게 부어 아이를 낳고 제 몸과 영혼을 팔아 아이를 기르고도 받을 것은 거의 없고 줄 것은 앞으로도 많이 남은 어머니이기 때문에. / 26p

 


 


   울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아 삼키다 마침내 울컥하고 치미는 감정이 막 쏟아지려 할 때, 흙. 흙. 흙. 울음소리와 닮은 그 이름, 흙. 다지고 또 다져서 꼭꼭 숨겨 놓았던 그 감정처럼 참고 참았던 울음이 팍, 하고 터지는 것은 다져지고 또 다져진 흙이 밀어올린 감정의 응어리와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이 시적 언어가 좋아서 시가 마음에 닿았는데, 김기택 시인은 보다 크게 이 시를 품은 것 같다. 흙은 어머니를 닮았다고. 그런가보다. 어머니는 늘 감내하고 감내하는 존재, 늘 품고 또 품는 존재. 받을 것이 없어도 줄 것이 더 많은 어머니기에 흙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고, 거기에서 눈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어머니가 된 내가 이 시에 유독 감응했다면 반면, 아버지가 된 나의 동반자에게 읽어주고 싶은 시도 있었다. 바로 손택수 시인의 「스프링」이다.

 

 

 

제 몸보다 크고 무거운 수레를 끌려면, 제 몸무게보다 훨씬 큰 삶의 짐을 감당하려면, 「스프링」의 부부처럼 반동의 탄력을 위해 먼저 제 몸을 움츠려야 한다. 수레 끄는 사내와 미는 여자가 비틀려 흉한 모습이 된 이유는 제 안의 반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몸을 한껏 웅크렸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몹시 힘들고 위축되어 있다면 그것은 스프링이 한껏 움츠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능하거나 보잘것없는 것같이 보인다면 그것은 제 안의 꽃이 터질 순간의 환희를 기다리는 스프링이 최대한 움츠리고 있기 때문이다. / 81p

 


  나는 비록 만삭이 아니라 아이를 낳은 입장이지만 어쩐지 수레를 끄는 사내와 미는 여자가 마치 우리 부부 같았다. 가정과 일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그 고단함, 그럼에도 쉬이 나아지지 않는 일상과 자신의 업 때문에 늘 답답해하는 그에게 ‘한껏 스프링이 움츠리고 있는 상태’라고 말해주고 싶다. 봄꽃이 추위의 폭력을 일순간에 부드러운 향기로 바꾸어놓는 탄력의 통쾌함을 지니고 있듯 우리도 곧 발화할 것이라고, 움츠렸던 스프링이 팍 하고 튀어 오르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사랑에는 기교가 필요하다며 그것을 ‘아슬아슬한 수저질’의 기교에 빗대어 묵을 먹는 것과도 말했던 장석남 시인의 「묵집에서」도 인상적이었다. 이별 후에 ‘사진’속에만 있는 그를 보며 떠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를 물질적으로 표현한 나희덕 시인의 「그의 사진」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이별은 헤어지는 게 아니라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사람 즉, 투명인간과 같이 사는 것이라 한 김기택 시인에게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시는 그것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해도 나에게로 와 의미가 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동인 것 같다. 시적화자니, 운율이니 그러한 시적 기교들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저 마음이 한 번 동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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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 밸런스 - 하버드 의대가 밝혀낸 젊고 건강한 사람의 비밀
네고로 히데유키 지음, 이연희 옮김 / 스토리3.0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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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에 민감한 시기에 살고 있다. 이제는 건강을 넘어서 나이보다 더욱 젊게 사는 법을 보다 많은 매체에서 설파하고 있다. 최근에 아로니아나 아마씨, 코코넛오일 등이 각광을 받으며 여러 곳에서 소개되고 있는데, 이전에는 몰랐거나 혹은 그 효능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건강에 민감한 이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양한 운동법, 수많은 영양제와 안티에이징 화장품 및 음식, 주사를 통한 시술까지 건강과 더불어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고 있지만 뚜렷한 지식도 없이 그저 ‘좋다고 하니까’라는 생각으로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왜 늙는 것인지, 왜 병에 걸리는 것인지 그 물음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찾는 것부터가 우선이 아닐까. 그것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내 몸에 보다 효과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건강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최고의 호르몬 권위자이자 <호르몬 밸런스>의 저자 네고로 히데유키는 건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호르몬’임을 지적한다. 사람이 늙고 병드는 데는 호르몬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호르몬이란 ‘몸의 한 기관에서 합성, 분비되어 체액, 혈액을 타고 몸속을 순환하며 여러 기관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물질’이라고 한다. 쉽게 설명하면 신체 여러 곳에서 밤낮으로 분비되어 순환하며, 몸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호르몬이 100종이 넘는데, 이 호르몬에 의해 젊음과 건강이 유지되고 그 기능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서서히 저하되며 호르몬 밸런스가 무너지면 노화가 빨리 진행되고 병에 걸리기 쉬워진다고 한다.

   이 책의 목적은 단순히 호르몬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 아니라 호르몬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있다. 호르몬의 복잡한 기능을 단순하게 열거하고 최대한 쉽게 이해하여 일상생활에 활용하도록 돕는 데 있는 것이다.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장에서는 호르몬이 우리 몸에서 어떻게 활성화되고 그것이 인간의 노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한다. 호르몬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는가에 따라 건강과 젊음이 좌우되는데, 이는 특히 수면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 몸은 잠자는 동안 다시 태어나는데, 이때 우리의 몸을 매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성장 호르몬’과 ‘멜라토닌’이 안티에이징 호르몬으로써 수면 중에 활발히 움직인다는 것이다.

   성장 호르몬을 분비하는 데 중요한 습관은 ‘적당한 공복감, 적당한 스트레스, 적당한 운동’에 있다. 특히 밤 12시부터 아침 7시 사이에 잠을 깊이 자면 성장 호르몬의 분비가 높아진다고 한다. 멜라토닌의 경우는 빛에 민감하기 때문에 저녁부터 밤사이에 인공적인 빛 특히 스마트폰, 컴퓨터 등에서 나오는 블루라이트를 피할 것을 권장한다. 이러한 사소한 생활습관이 우리 몸에 유용한 호르몬을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하니 예사로 넘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평생의 숙제인 다이어트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데, 살이 찌지 않으려면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도 유념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호르몬 역시 수면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한다. 결국 적정 시간에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것이 건강과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 중에 비결인가보다.


코르티솔에는 항염증 작용이 있으며, 알레르기를 억제하는 기능도 있다. 또 지방의 연소 작용을 하므로 ‘다이어트 호르몬’이라고도 불린다. 이상적인 수면을 통해 코르티솔이 적당히 증가하면, 자는 동안 건강하고 살찌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중략)... 수면 시간이 너무 짧으면 몸은 이를 스트레스 상태로 받아들여 코르티솔이 필요 이상으로 분비되는데, 혈당치 상상, 혈압 상승을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 46p



   제 2장에서는 인생이 즐거운 만큼 호르몬도 늘어난다고 하여 인생이 즐거워지는 순간을 만들라고 강조한다. 즐거운 경험은 쾌락 호르몬인 도파민을 분비한다. 도파민은 그 잠재 능력 때문에 ‘뇌 속에 존재하는 마약’으로도 불린다 하니 ‘무언가를 하면 그 뒤에 즐거운 일이 생긴다’는 생각으로 뇌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경험의 중요성을 일러준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내키지 않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조합하라는 것이었다. 혹시 먹는 것 자체가 귀찮고 싫다면, 먹는 행위 다음에 자신이 즐거워하는 일을 보상으로 설정하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노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색깔이 있는 식품’을 먹을 것이며, 면역력을 높이는 음식을 섭취하라고 이른다. 


   제 3장에서는 호르몬 밸런스를 높이는 비결로 사고법, 행동법, 운동법으로 나눠서 설명한다. 호르몬 밸런스를 유지하는 하루 습관으로 몇 가지 꼽자면, 조식은 당질과 단백질에 중점(채소 주스, 우유, 요구르트)을 두라는 것과 일과 미팅은 ‘90분 사이클(집중력은 90분)’의 리듬을 유지할 것이며, 오후 2시는 ‘창조성’의 시간으로 생산성이 높은 작업을 주로 할 것을 권장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밤 9시 이후에는 스마트폰, 컴퓨터를 끄고 방 조명도 어둡게 하고, 밤 10~11시에는 미지근한 물에 반신욕을 하여 부교감신경을 우위로 두어 수면을 돕도록 하면 좋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개인적으로 아이가 있다 보니 아이가 잠든 후에야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탓에 늘 잠이 부족하고 피곤이 가시지 않았다. 이렇듯 어긋나버린 호르몬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자주는 아니더라도 저자가 일러준 습관을 유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4장에서는 호르몬을 내 편으로 만들어 활용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적당한 화는 중요하며, 호르몬을 운반하는 중요한 통로인 혈관 건강에 유의할 것을 이른다. 세월이 흘러가는 것은 막을 수 없기에, 불필요한 노화만이라도 예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활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 말하는 노하우들은 의외로 간단하고 아주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돈을 들이고, 인공의 힘을 빌리는 것보다 체내의 호르몬을 이해하고 작은 실천을 통해 그것들을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건강하고 젊게 살 수 있음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몸이 가진 본래의 힘을 믿을 것, 그것이 이 책이 전하는 중요한 의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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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실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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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여인, 소설가 김명순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이란 꺼지지 않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 일과 다름없었다. 책을 다 읽고 소설의 표지 속에 발그레한 두 볼과 단정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여인에게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인텔리한 여성의 고고함이 그 첫인상이었다면 책을 읽은 후에는 사뭇 달라졌다. 인텔리는 그녀가 내리 붙잡고 놓지 못했던 ‘쓰고 싶다는 열망’의 허울이었을 뿐, 고고함 뒤에는 발 딛고 서있을 곳을 잃은 처지만큼이나 위태롭고 처연해 보이는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시절을 잘못 타고나 그 운명을 끝끝내 밝게 피우지 못한 인물이야 한둘이 아닐 테지만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라는 나름의 문학사적 의의조차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던 것은 내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이렇듯 소설 <탄실>은 자칫 역사에 묻혀버릴 뻔했던 한 여인의 치열한 문학에의 열망을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한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100편에 가까운 시와 20편에 가까운 소설과 에세이, 희곡 등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름을 오늘날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의 삶을 생생하게 구현해내는 작업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작품 안에서 산다고 했던가. 부족한 기록과 삶의 행적 및 진실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김명순의 작품 속 인물과 배경, 드러나거나 혹은 드러나지 않는 작가의 목소리 마저도 들을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미실>을 씀으로써 우리가 미처 몰랐던 ‘미실’의 존재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김별아 작가 특유의 힘이 <탄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작가 김명순의 복잡다단한 삶과 배움에의 열망, 극한으로 치달은 그녀의 위태한 감정까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디테일하게 완성했다.

   명순은 평양 성내에서 고집쟁이 기생이라 불리는 산월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동강 변에서 무역상을 하는 김희경으로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서 재산이 넘쳐날 정도였다. 하지만 기생인 어머니가 정실로 들어갈리 만무했고, 명순은 늘 기생첩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했다. 꽤 똑똑하여 학교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동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고, 사랑하고 사랑받길 기도했지만 늘 진실로 마음을 둘 데를 찾지 못했다. 외로움, 그녀가 평생 지고 갔던 아픔은 이미 유년 시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만인을 위한 축제는 없다. 벚꽃이 난분분한 한봄에 치명적인 자살이 시도된다. 완전해 보이는 세계의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균열을 감지케 하는 건, 외로움이다. 외로운 사람만이 삶의 표층 아래 균열된 실금을 본다. 삽시에 모든 것이 오싹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홀로이 전율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외로운 사람들은 무감한 세계로부터 겁쟁이로 취급된다. 그리하여 더욱 외로워진다. / 57p


  불행하게도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고 그가 죽음에 이르면서 어머니는 물론, 그녀와 그녀의 동생들은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녀는 빈털터리 고아가 되었지만 아버지를 대신해 유일한 혈육인 김희선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조선 학생들에게 동경은 꿈의 동산처럼 이상향을 펼칠 수 있는 곳이었다 하니, 명순은 자신의 불타는 학구열을 마음껏 펼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운명은 엉뚱한 곳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김희선의 소개로 알게 된 육사생도 리응준에게 겁탈을 당하는 불의의 사고로 이것이 조선에까지 추문으로 나돌게 된 비극이 벌어진 것이었다. 피해자는 자신이지만 아픔은 그녀가 모두 감내해야했다. 이미 한 번 벌어진 비극의 틈으로 수많은 억측과 오해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왔고, 사실이 아니라고 밝힐 수 있는 방법이란 그녀의 작품 밖에 없었다.

   명순은 살기 위해서 글을 썼다. 죽지 않기 위해 문학을 부여잡고 창작에 몰두했다. 그녀의 첫 단편소설인 「의심의 소녀」는 육당 최남선이 주간하는 잡지 《청춘》공모전에서 기성 작가였던 이상춘과 주요한에 이어 3등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이가 그 유명한 이광수였다. 전근대적 교훈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작품을 썼다는 극찬과 함께 근대 최초의 여성 소설가로 조선 문단계에 등단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유학길을 올랐고 《창조》로부터 동인으로 참가할 것을 제안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그녀의 일생은 늘 위태로웠다. 늘 외로웠기에 사랑 앞에서 연약했던 그녀는 늘 그로인해 희생을 당해야했고, 그것은 그녀의 명성을 추락시켰으며 여전히 추악한 소문들이 발목을 잡았다.

   안타깝게도 그 중심에는 의외의 인물들이 숨어있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감자」, 「배따라기」의 저자인 김동인과 은파리라는 가명에 숨어 악랄하게 명순에게 독설을 퍼부은 이는 다름 아닌 소파 방정환이었다. 『상록수』로 유명한 작가 심훈 역시 짓궂은 장난으로 명순이 기자 시절 함께 일했던 여기자를 놀려대기도 했다. 충격적이었다. 문학사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 김명순을 폄하하고 그녀의 삶을 망쳐놓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글로써 권력을 휘둘렀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사생활로 문단을 어지럽혔다고 생각한 그녀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내세워 형벌을 내린 셈이었다.


맞서 싸워야 할 적이 보이지 않거나 적과 맞붙기를 두려워할 때, 사람들은 새로운 적을 만든다. 가까운 곳에서 가장 만만한 상대를 찾는다. ‘안정기’에 접어든 식민지의 작가들은 그렇게 서로를 물고 뜯었다. 그중에서도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없고, 돈도 집도 친구도 없는 그녀는 무방비 상태로 가느다란 목덜미를 드러내 약적(弱敵) 중의 약적이었다. / 19p

마침내 돌아왔다. 내처 평양으로 가지는 못하고 제2의 고향인 경성에 낡은 트렁크를 내렸다. 후미진 골목에 자리한 여관의 작은 방에선 쿰쿰한 냄새가 났다. 머무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냄새를 풍긴다. 삶과 삶이 구겨져 접힌 지점에 곰팡이가 피어난다. 외로움이 푸른 꽃을 피운다. / 221p


  ‘풍랑은 모든 영혼을 살아 쳐가고 부패는 모든 육체를 점령하다’
   두 번째 유학마저 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동경에서 쓴 마지막 시구는 그녀의 고단한 처지를 대변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녀를 음해하기 위해 쓰인 글이 신문화 운동의 중추적인 역학을 한다는 종합 잡지에 버젓이 실리는 현실은 변함없었다. 문학을 사랑했고, 그 속에서 살기를 희망했으나 그녀는 그저 스캔들 메이커에 방종한 자유연애주의자로 낙인찍혀 끝끝내 삶을 살아가는 의지마저 잃어버렸다.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의 그녀에게 그나마 마지막 남은 바람이 있다면 ‘아이’를 갖고 싶다는 것이었다. 바람 앞의 등불인 처지에도 ‘모성’이란 감정이라도 붙들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이 안쓰러웠다. 거리에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떠돌이가 된 아이를 자신의 양자로 삼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죽음을 택했을지도 몰랐다.


유달리 솔방울을 많이 매단 소나무가 있다. 가지가 휘어져라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솔방울을 매달고 고부라져 있다. 번식의 본능이 왕성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그때, 그러나 소나무는 건강치 않다. 솔잎은 빳빳하게 뻗치지 못해 휘늘어지고 푸른빛이 바랜 듯 누렇게 들뜨며 나무줄기는 말라 벗겨진다. 소나무는 죽어가고 있다. 죽어가는 소나무가 가장 많은 솔방울을 매단다. 일평생을 한자리에 붙박여 보낸 식물에게조차 번식의 본능은 그다지도 절박하고 처연하다. / 312p


  탄실은 그녀의 아명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딸이 열매처럼 탐스럽게 여물기를 바라며 부모가 지어 불렀던 이름이었다고. 그나마 사랑으로 충만했던 시절은 그때뿐이었기에 그녀는 작가가 된 후에도 필명으로 즐겨 사용했으며 작품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랑 받고 싶었지만 사랑 받지 못했고, 사랑하고 싶었지만 사랑할 수 없었던 현실의 벽을 외로이 글로써 이겨냈던 김명순. 그녀가 전하는 깊은 울림으로 인해 새삼 무엇으로든 표현할 수 있는 이 시대에서 살고 있음에 감사하고, 사랑을 받고 줄 수 있는 사람임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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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 1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일상이 서사가 되는 기이하고 놀라운 작품
노르웨이 문학의 정수, ‘나’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치열한 자기 고백



  탄생과 죽음. 삶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한 개인의 삶 속에서 낱낱의 일상, 사랑과 슬픔, 행복과 절망, 상처 등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글로 담아내는 작업이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나’의 민낯을 들여다보기 위해 자기 투쟁적 고백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숱한 불면의 밤과 자기 내부를 갉아먹는 치열함에 맞서 싸워야하는 것과 다름없다. 더구나 그것이 소설이라면, 픽션이라는 살을 덧붙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소설적 요소를 배제하고서 자신을 거침없이 드러낼 수 있는 일이란 가능한 것인가. 단순한 일기조차도 우리는 진실을 모두 다 담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나의 투쟁>의 저자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스스로와 주변의 모든 존재들로부터 타협하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내밀한 본능과 욕망, 자기 경멸의 순간까지 생생한 민낯을 고백하기 위해 스스로를 분해하고 해체하는 작업의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러한 소설이 있을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다소 생소하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문학이 일어나고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자리하고 있는 강렬한 세부적 요소들을 분해하고 해체해야 한다. 분해하고 해체하는 작업이 바로 ‘글쓰기’다. 글을 쓴다는 것은 창조라기보다는 오히려 파괴에 가까운 작업이다. 랭보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감탄할 만한 점은, 랭보가 너무 젊은 나이에 이것을 깨달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것을 자신의 삶에도 적용했다는 것이다. 랭보에게는 글쓰기뿐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자유가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 자유 때문에, 그는 심지어 글쓰기도 옆으로 밀쳐두었다. 그는 글을 쓰는 작업이 어느 사이엔가 자신을 얽어매는 집착과 구속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이를 분해하고 해체하게 되었다. 자유는 파괴에 움직임을 더한 것이다. / 302p



   <나의 투쟁> 1권은 저자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인 크나우스고르의 유아기, 청소년기, 장년기와 현재를 교차 반복하여 진행되는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은 ‘죽음’의 이미지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여덟 살 때 우연히 TV에서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된 기억으로부터 이야기는 전개된다. 시작이 그러했듯 소설은 시종일관 죽음이라는 그늘에서 쉬이 떠나질 않는다. 단순히 삶과 생명의 종식을 뜻하는 죽음이 아니라 숨결이 부재하는 사물처럼 자신의 방 안에 있는 벽과 바닥, 천장과 창문에서도 죽음을 느낀다.


   그 중심에는 집안을 불안으로 채우는 ‘아버지’가 존재한다. 어쩌면 아버지 자체가 그에게 불안을 주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하는 행동만 보아도 어떤 감정인지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던 그에게 때로는 엄격하고, 때로는 너그러워지는 아버지의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마주할 때 혼란스러워지는 자신에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땅의 많은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이 이와 유사할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한없이 따뜻한 존재, 아버지는 적대적인 듯 그러나 가장 강한 팔로 가족을 굽어 살피는 기둥 같은 존재. 가족이라는 집단 속에서 가장 양가적인 감정을 지닐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아버지가 아닐까.


의미에는 충만함이 필요하고, 충만함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시간에는 저항이 필요하다. 지식은 사물과 현상과의 간격이고, 정체적 상태이며, 의미의 적이다. 1976년 그날 저녁, 내 머릿속에 그린 아버지의 모습은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그 당시 여덟 살 소년의 눈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이다. 예상이 불가능하고 조금은 두려운 존재. 또 다른 하나는 지금의 내 눈, 즉 아버지와 비슷한 또래의 성인 남자의 눈으로 본 모습이다. 거쳐간 시간에 따라 삶의 의미가 하나하나 뜯겨져 나간 그런 존재 말이다. / 21p



   소설은 이런 아버지와의 관계, 한 가정을 이루어 스스로 아버지가 된 저자의 모습,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와 그의 죽음을 수습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 또한 저자가 자신의 형과 함께 아버지의 죽음을 정리하는 과정에 있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아버지의 처참하고 추악한 죽음이 낳은 흔적들은 그의 정신을 통째로 뒤흔든다. 나 또한 할머니의 죽음을 목도했고, 얼마 전 아무 것도 먹지 못하면서 몸속에 있는 것마저 토해내며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외할머니를 보고 온 탓에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먹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존재가 마치 살아서 나를 두텁게 휘감는 느낌이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마치 아버지의 무덤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여긴 말 그대로 무덤이야. 우린 마치 아버지의 무덤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아. 아버지가 앉아 숨을 거둔 그 의자는 아직도 거실에 있어. 그뿐 아니라 과거의 것들은 모두 여기 있어.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때 접했던 모든 것이 아직도 여기 남아서 나를 덮쳐오곤 해. 이해할 수 있겠니? 어떤 면에서 보면, 난 이것들에 너무나 가까이 닿아 있기 때문에 괴로워. 나의 지난날, 아버지의 지난날… 과거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나를 덮쳐와.” / 580p



   가장 원초적인 감정과 자기 인식으로 점철된 이 소설을 완성함에 있어 저자는 주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듯하다. 아버지의 추악한 죽음뿐만 아니라 저자의 삶과 주변을 둘러싼 모든 인물에게까지도 지독할 정도로 사실적이기를 요구한다. 아버지가 원고를 봤다면 고소를 했을 거라는 형의 말처럼, 실제로 작가의 삼촌과 숙모의 실명이 거론된 탓에 명예훼손으로 법정에 섰을 정도라 하니 그의 거침없는 진솔함은 혁신적이기까지 하다. 소설 속의 그의 태도는 굉장히 이중적인데 이 또한 서슴없이 드러낸다. 때로는 여성적인 것을 혐오하는 완곡한 남성에 가깝다가도 아버지의 죽음에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다. 모든 것들로부터 한 발 물러난 사람처럼 겉돌지만 사소한 순간과 공기의 흐름까지도 기억에 담아 내밀하게 문장을 통해 담아내는 섬세함은 놀라울 정도이다. 개성 있는 문장가는 아니지만 일상에 기민한 감각의 촉수를 드리우고 진득하게 글쓰기를 실천한다.


나는 슈트케이스에 달려 있는 조그마한 바퀴들을 혐오한다. 너무나 여성적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남자다우려면 뭔가를 직접 들어서 옮겨야지, 쩨쩨하게 바퀴 위에 놓고 굴리면 안 된다. 내가 슈트케이스의 바퀴를 싫어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건 간편함과 지름길과 값싼 지질함과 싸구려 이성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리 조그맣고 무의미한 것들이라도 이런 요소를 포함한 것들을 보면 반발하곤 한다. 세상 속에 살며 세상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로 산다 할 수 있는가.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우린 가벼운 그림 한 장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힘을 쓰지 않고 모아둔다면, 모아둔 힘은 도대체 어디에다 써먹을 생각인가. / 359p


내 속에도 어제의 감정들이 남긴 자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느낌과 감정은 물과 같다. 항상 주변 상황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니 말이다. 당시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거웠던 감정,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오래도록 지속될 것만 같았던 느낌들조차도 자취를 남기지 않는 까닭은 그것들이 무뎌지고 단단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니 감정과 느낌은 무뎌지고 단단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상태를 유지할 뿐이다. 막힌 웅덩이 속의 물이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 396p



   앞서 말했듯 전개 과정은 현재와 과거, 또는 더한 과거로 훌쩍 넘어갔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데 의외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현재의 순간을 붙드는 찰나의 기억이 있다면 그것까지 모두 끄집어내는 그의 글이 자신과의 투쟁에서 비롯됨을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속도감 있는 전개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개의치 않는다. 그런 것에 민감한 작가라면 애초에 이런 글쓰기의 과정이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이런 새로운 문학에 좀 더 마음을 열어도 좋을 것 같다.

   현재 노르웨이 문단에서는 입센 이후로 이 젊은 거장의 등장을 환영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또한 그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라 하니 이어지는 그의 고백에 계속 귀를 기울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투쟁> 1권이 600쪽 이상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한 권에 그치지 않고 곧 2권과 3권 혹은 그 이후의 권들까지 계속 출간될 것 같으니 미리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독자들이 많이 생겼으면 한다. 여담이지만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사진을 보는 순간, 그의 섹시한 아우라에 심쿵 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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