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리움
데이비드 밴 지음, 조연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화해하지 못한 상처들을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는

냉정하고도 따뜻한 메시지!

 

   ‘우리는 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가.’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때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얻은 상처가 가장 깊은 상흔을 남긴다. 화해를 함에 있어 모든 걸 다 용서하고 잊겠다 하는 것은 거짓이다. 잊었다고 하는 것 또한 망각일 뿐, 마음 한편에 묻어둔 상처는 저도 모르게 불쑥불쑥 되살아나 자신을 할퀴거나 때로는 덧나고 엉뚱하게 불거져서 또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데이비드 밴의 장편소설 <아쿠아리움>은 바로 이런 상처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어떻게 상처를 주며,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아픔을 남기는지, 또한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상처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 것인지, 아쿠아리움이라는 독특한 발상의 장치를 통해 그려나간다.

   열두 살 소녀 케이틀린은 방과 후면 언제나 아쿠아리움으로 향한다. 어류학자가 되기를 꿈꾸는 소녀는 엄마가 일을 마치고 데리러 오기 전까지 아쿠아리움 속의 물고기를 보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다. 수조 밖의 세상을 알지 못하는 물고기처럼 소녀 또한 수조 속 물고기들의 세상을 모두 알지 못하지만 그래서 그들과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소녀에게 있어 좁은 수조 속에서 느리게 유영하는 물고기는 자신과 다름없으며 자신이 가보지 못했던 세계, 언젠가 따뜻하고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이 세상은 곧 하나의 바다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좋았다. 매일 밤 잠이 들 때면 나는 수천 피트 아래 저 밑바닥을 상상하곤 했다. 저 수압을 모두 견디며, 그러나 마치 쥐가오리처럼 미끄러지듯, 소리도 없이 한없이 가볍게 저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 위로 솟아올랐다가, 저 깊고 어두운 협곡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소용돌이를 그리며 새로운 고원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멕시코나 괌, 북극이나 아프리가 어디라도, 물이라는 한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모든 곳이 집이었다. / 34p

  



  어느 날, 소녀는 아쿠아리움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매일같이 만나 함께 물고기를 구경하며 친해진다. 대부분 물고기의 외관을 묘사하며 서로 감탄하기도 하고, 물고기에 대해 꽤 깊은 상식을 가지고 있는 소녀가 노인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단순히 물고기에 대해 서로 질문과 답을 하는 대화에 불과한 듯하나 물속 생명체의 경이로움을 넘어서 삶에 대한 관조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정답이 없는 것 같은데. 마침내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정답이 없는 게 가장 좋은 질문이지. 해마가 어떻게 생겨났을지 상상이 잘 안 되는구나. 녀석들은 왜 육지의 말 같은 머리를 하고 있을까. 둘이 그렇게 닮았다는 건 아무도 모를 텐데 말이다. 말은 해마를 보지 못할 테고, 해마도 말을 보지 못할 테고, 양쪽 모두를 알아볼 만한 것들도 없을 텐데. 지금이야 우리가 이렇게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걸까? 이거야말로 제대로 된 질문이겠구나. / 26p

  



  사실 노인은 19년 전 병든 아내와 딸을 버리고 떠났던 케이틀린의 외할아버지였다. 그는 물고기를 사랑하는 손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가족들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용서받고자 용기를 내는 중이었다. 한편,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케이틀린의 엄마는 빠듯한 형편을 꾸역꾸역 살아내느라 딸과 아버지가 만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엄마에게 있어 아버지란 존재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불운했던 과거와 현재를 상기시키는 존재였기에 그의 등장으로 충격에 휩싸인다. 늘 가족이 더 있기를 꿈꾸었던 케이틀린으로서는 용서를 구하며 다가오는 할아버지에게 잔인한 분노를 토해내며 격하게 밀어내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마치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개의 세계가 만난 것처럼 도저히 맞닿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거기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어두운 수조 속에 검은 모래와 흙뿐, 몸을 숨길 만한 바위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유리에 바짝 붙어 서서 벌감펭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벌감펭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물고기 중의 하나였다. 연한 올리브색 날개에, 머리는 하연 솜털로 뒤덮인 나방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가늘고 하얀 더듬이들은 꼭 곤충의 다리 같았다. 게다가 녀석의 몸통은 마치, 서로 다른 두 마리가 붙어 있는 것 같았는데,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어둠 속에서 녀석들은 변신을 했는데, 결코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개의 세계가 만나는 것 같았다. / 144p

  



  케이틀린과 할아버지는 엄마의 눈을 피해 몰래 아쿠아리움에서 다시 만난다. 하지만 금방 엄마에게 들켜버리게 되고, 엄마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터져버린 듯 딸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꽤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기까지 한다. 수면 아래에 드리우고 있던 상처가 일순간 팍, 하고 튀어 오르는 그 낯설고 두려운 광경은 딸에게도 역시 지우지 못할 상처를 만들고 만다. 모두에게 상흔을 남겨버린 이 가족에게 과연 평화가 찾아올까? 훗날 이 때의 일을 두고 케이틀린은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용서하고 또 잊어야 할 것이다’
   케이틀린은 엄마를 간단히 용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잊어야 했다. 한 사람의 삶을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모두 알 수 없는 법이다. 우리 모두는 가슴 속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어느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도 용서를 강요할 수 없고, 상처를 쉽게 위로할 수도 없다. 그저 잊으려고 애쓸 뿐,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남기기에 최대한 끌어안는 수밖에.


어쩌면 이런 것이 우리가 용서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를 모두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현재에 받아들이고 또 인식하면서 끌어안는 것, 천천히 내려놓는 것 말이다. / 337p



  언젠가 아쿠아리움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수조 속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얼굴만 넣어서 볼 수 있는 이중 구조 형태의 수족관이었다. 그때 나는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신기하기보다 얼른 그곳에서 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마치 심연의 어두운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설의 까만 표지 속에서 부유하는 물고기들을 보고 있으려니 헤아릴 수 없이 내 마음속을 떠도는 어떤 부유물처럼 느껴졌다. 때때로 그 부유물들이 내 사람들에게도 상처가 되지는 않았는지, 나도 모르게 그들의 마음속에 상흔을 남기지 않았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을 때, 용서를 구하고 싶을 때 이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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