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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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내면을 집요하게 응시하여 이야기로 완성해낸 작품!

거듭 되뇌지 않고서는 무너지고 있는 자아를 구할 길 없는 한 예술가의 처절한 고통과 비애!

 

 

 

  과연 신비주의적 풍경화의 표상답다노르웨이의 풍경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대표작 티스베르에서’(1865)와 보르그외이섬’(1867)을 감상하다보면 빛과 어둠환희와 우울이 동시에 매만져지는 듯한 환상적인 풍경에 그만 넋을 놓게 된다그러다 어느 순간이면저 희뿌연 연기와도 같은 구름 속에서 어느 고독한 자의 음울한 뒷모습을 언뜻 본 것 같은 착각이 일기도 한다노르웨이의 거친 풍경 속에 환상성을 담아 낸 것으로 유명한 화가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후원자를 만나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공부하며 화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으나동료 화가들의 냉대를 받으며 정신병을 얻었다는 라스 헤르테르비그.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욘 포세는 자신의 대표작 멜랑콜리아 -Ⅱ』를 통해 사후 12년 뒤에야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이 실존 화가의 불안한 내면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빛과 그늘과거와 현재현실과 망상 속을 떠돌던 한 예술가의 음울한 고백

 

 

 

  1853년 늦가을 오후독일 뒤셀도르프노르웨이 동부의 도시 스타방에르에서 독일로 유학을 온 화가 지망생 라스는 아주 멋진 보라색 코드류이 양복을 입은 채로 하숙집 침대에 누워 있다오늘은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의 교수인 한스 구데가 아틀리에에 방문해 그림을 보러 올 예정이다하지만 라스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다그는 오늘 아틀리에로 가지 않을 생각이다아틀리에에서 자신만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한스 구데가 자신의 그림을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림이 형편없다거나 아예 그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그렇게 라스는 침대 위에 누운 채 돌연 비관과 망상불안과 의심에 사로잡혀 침대 밖으로 한 발짝도 나서지 못하다 짝사랑하는 헬레네로부터하숙집으로부터동료들로부터 냉대를 받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고야 만다.

 

 

 

  이렇듯 <멜랑콜리아 >은 라스 헤르테르비그가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전기에 가깝지만역사에 문학적 상상력을 덧입혀 정신 착란의 상태에 빠진 주인공이 느끼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는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사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독자인 나조차도 심리적 공황 상태에 이를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특별한 서사가 없이 특정한 리듬과 운율을 지닌 문장이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강화되는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이른바 거듭된 읊조림환상적 독백의 열거에 가까운 실험적이고도 시적인 문체는거듭 되뇌지 않고서는 무너지고 있는 자아를 구할 길 없는 한 예술가의 처절한 고통과 비애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천은 유혹하듯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나는 천을 걷어 내기 위해 손을 입술 위로 가져갔다나는 입속에서 천을 걷어 내야만 했다천 때문에 숨 막히면 안 되니까나는 입속에서 천을 빼내야만 했다나는 손을 입으로 가져갔지만천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나는 천을 걷어 내고 싶었지만 벌써 그것은 내 손에서 빠져나와 자취를 감추었다내가 천을 거머쥐려 할 때마다 천은 내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천이 나를 죽이려 했다. / 34p

 

 

나는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여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천은 곧 내 눈을 뒤덮을 것이고 내 입속까지도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천이 내 입속을 가득 채우면 나는 사라질 것이다나는 희고 검은 천이 되어 이곳을 맴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질 게 분명하다. / 123p

 

 

 




 

 

 

 

  한편치매에 걸려 망각의 기억 속에서 라스 헤르테르비그를 떠올리는 누이 올리네의 이야기 <멜랑콜리아 역시 상당히 인상적이다올리네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지 않으면 걸을 수도 없고어부 스베인이 준 생선이 아니고서는 끼니도 해결할 길이 막막한 노인이다가장 건강했던 동생 쉬버트가 죽어가고 있는 마당에그녀는 당장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어쩔 줄을 모르는 자신에 대한 비참함과 계속해서 과거로 침잠해 들어가는 기억 속에서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이렇듯 욘 포세는 지독한 망상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라스와치매로 기억을 잃어 일상조차 제대로 건사할 수 없는 누이 올리네를 통해 회색지대를 부유하며 떠도는 고독한 자아의 내면을 생생하게 구현한다덕분에 우리는 끝끝내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서 도망쳐 그림을 그릴 거라던 라스가 그러했던 것처럼집으로 가야한다고발이 아픈 건 참아야 한다고오직 앞으로앞으로 걷는 수밖에 없다고 되뇌었던 올리네의 담담한 걸음에서 마침내 인간의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빛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내가 존재할 이유도 없다빛도 사라질 것이다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 266p

 

 

나는 그 그림이 우울할 때의 라스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고 느꼈다물론 그림 속의 산과 나무배는 눈에 익은 실제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지만그럼에도 나는 그 그림이 가끔 우울함에 빠져 있을 때의 라스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거뭇거뭇하고 어두운 그림은 어둠에 빠져 있는 라스였던 것이다그것은 어둠이었다생명을 머금은 어둠빛을 발하는 어둠이라고 해야 할까.

이 그림은 너를 닮았어. / 416p

 

 

 



 

 

 

 

  한 사람을 내면을 집요하게 응시하여 이야기로 완성해낸 작품어쩌면 이건 욘 포세만의 특별한 문학적 성취가 아닐까 싶다여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간결하고유연하게 읽힌다는 점도 이 작품의 남다른 점일 수 있겠다욘 포세만의 미학을 사유하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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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기 좋은 시간
김재진 지음 / 고흐의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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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돌고 돌아 헤매어도 별이 빛나고 있는 한 나는 돌아올 수 있어!

 

 

 

  비애의 그림자가 밟히는 계절이다. ‘꽃들의 체온이 그리움의 온도로 바뀌’(수상한 계절)낙하하던 잎사귀의 마른자리가 지천에 가득할 즈음이면온 세상이 상실의 내음으로 코끝을 먹먹하게 채운다그러나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란’ ‘기쁨과 아픔이 절반씩 몸을 섞는 일’(회상)이라던 김재진 시인의 시처럼 이왕이면 상실이나 소멸이 아닌헤어지기 좋은 시간이라 달리 쓰고 싶다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애끓던 시끄러운 마음들과 작별하고 이제는 차분하게 내려앉은 그림자와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좋은 계절이 아니겠느냐고그렇게 말하고 싶다.

 

 

 

떠나는 모든 것이 상처인 듯 아리다 해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음대에 진학했다 방송사 피디로 젊은 시절을 보낸 뒤 40대 초홀연 직장을 떠나 바람처럼 떠돌다 지금은 아틀리에에서 책 쓰고 그림을 그리며 명상하는 삶을 살고 있다던 시인그래서인지 김재진 시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눅눅한 사연을 실어 나르는 바람’(바람의 시·1)을 맞으며 유리조각 밟듯 살아왔던 지난날’(여름의 안부)을 떠올리는 어느 고독한 자의 옆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생의 뒤편으로 물러나 존재의 비애를 마주하고울음과 고독 속에 놓여본 이라면그런 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의 시가 가득 와 닿을 것이다.

 

 

 

가을이 내게 쓴 몇 줄의 편지

 

 

(중략)

늘 안에서만 아픈 이빨과

이빨 대신 아프지 못해 질근거리는 세월과

언제나 바깥을 떠돌기만 하던 나의

오래되어 힘 잃은 바람기야,

늙어서 미안하다며 울먹이는

문 밖의 저 계절을 보아라.

어디로 가라는 것인지 가르쳐주지도 않는다며

투덜거리며 지나가는 아픈 날들의

수고하고 무거운 나의 짐들아,

하늘 향해 열어놓은 저 창문 좀 보아라.

바람 불면 덜커덩거릴

여려서 자주 아픈 마음 좀 보아라. / 42p

 

 

 




 

 

 

 

  또 한편으론 이쪽 가지에서 저쪽 가지로 날아가는 새와 마찬가지로생의 이별 앞에서 나는 그저 저 별에서 이 별로 여행하러 온’(새의 이유것이라 초연히 마음을 가다듬는 자의 뒷모습을 엿보게 되기도 한다시 문지리 천사의 시에서 진짜라는 말에 속지 말라 너는 언제나 내게 부재의 존재라 단언했던 것처럼내 안에 의미의 세계를 비워냄으로써 단단해지려는 시인의 여문 마음이 시집 곳곳에서 느껴진다.

 

 

 

뻐꾸기

 

 

나는 째깍거리고

너는 두근거리지.

나는 늙었고

너는 젊다는 말이야.

그냥 그것뿐이야.

벽에 걸린 저 시계가 우리를

똑같이 만들 거야. / 16p

 

 

 

  그러나 아무리 초연해지려 해도 기어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온 마음을 다해야만 간신히 가 닿을 수 있는 존재들을 향한 절박한 마음이란 것이 있기에그것을 헤아리는 시들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너를 향해 다가가는 나의 보행은직립이 아니라 반직립이다./ 허리 숙여 바닥에 닿는키 작은 꽃잎처럼낮춰야 흐를 수 있는 시냇물이다./ 네게로 가지 뻗는 나의 나무는뿌리째 무릎 꿇는 투항이다.” 시 투항은 미처 온전한 마음으로도 다 전할 수 없어 뿌리째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애타는 마음들을 들여다보게 한다그렇게 시는 우리에게 물어온다기꺼이너는누군가에게 네 온 마음을 바쳐본 적이 있느냐고.

 

 

 

일생

 

 

한 평생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겨울 아침

들판에 눈보라 휘몰아치는 소리

바람이 매달려 있는 풍경을 때리고 가는 소리

낙엽이 서로 살 비비는 소리

추락하는 고드름이 쨍그랑거리며

햇살과 부딪히는 소리

누가 혹시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리라.

아무것도 없으면서 가득한 항아리를

아직 비우지 못했다고. / 150p

 

 

 




 

 

 

 

찌르고 또 찔리며 연명하는

삶이라는 형벌은 누가 쓰는 무기인가

 

 

  발문에서 윤일현 시인은 이렇게 쓴다. “세상을 살아보면 안다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걸어가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초롱불을 들고 마중 나와 주고두렵고 먼 미지의 곳으로 떠날 때괜찮다고잘될 것이라고 말해주며 가장 멀리까지 배웅해 주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다.” 김재진 시인은 상실과 비애생의 파고를 넘어 절망과 죽음을 통과한 언어들을 품고 있으면서도, ‘세상의 약한 것들과 연결된 마음과 우리를 품어 안는 더 큰 우리’(연결)를 감각케 한다는 점에서 삶이란 마냥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준다. “나는 다시 돌아올 거야./ 뭔가를 그린다는 것은 어딘가로 돌아간다는 말이지./ 별이 어디에서 빛나건그것이 카페 테라스에서 빛나건고갱의 머리 꼭대기에서 빛나건빛나고 있는 한 돌아올 거야.”(고흐의 별아무리 돌고 돌아 헤매어도 별이 빛나고 있는 한 나는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기를바로 그래야만 내 안에 드리워진 오랜 비애의 그림자와 작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김재진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나에게 깊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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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를 위한 변론
송시우 지음 / 래빗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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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잃은 이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그 안에서 발견되는 미스터리의 힘!

적절한 위트와 진지한 물음 모두를 아우르는 확신의 페이지터너!

 

 

 

  통상적으로 미스터리 소설은 살인사건’, ‘살인동기와 알리바이’, ‘헛갈리는 용의자들’, ‘뜻밖의 반전’ 등의 지배를 받는 장르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하지만 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고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플롯과 다양한 변주를 향한 시도는 늘 독자들을 즐겁게 한다그런 의미에서 송시우의 미스터리 소설집 선녀를 위한 변론은 익숙한 전래동화를 법정 미스터리로 재탄생시킴으로써 발상을 전환시킨 데에 대한 탁월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목소리를 잃은 인어와 날개옷을 빼앗긴 선녀가 현대적 사법 체계 속에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목소리를 획득할 수 있다면과연 이야기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중요한 것은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라대상화되고 무력했던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미스터리 본연의 힘까지 야심차게 밀고 간다는 점에서 송시우의 작품들은 매우 특별하다.

 

 

 

법정과 일상범죄를 부추기는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까지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인어의 소송과 선녀를 위한 변론은 왕자와 나무꾼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유사 설정을 통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인어공주인 에일은 주변 인물들 중 왕자를 죽일 가장 절박한 동기를 가진 인물이었기에 유력한 살인범으로 체포된다왕자를 구한 것으로 알려진 카스 공주와 왕자가 결혼하게 되면마녀의 마법에 의해 에일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에일은 자신에게 쏠린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마녀를 상대로 불공정 계약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한다.

 

 

 

  판사는 인간이 되는 조건으로 마녀가 에일의 신체를 훼손한 정도가 너무 가혹하여 사회질서에 반하고맥스 왕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무슨 희생을 감수해도 괜찮다는 식의 분별없는 생각에 빠진 어린 인어의 궁박과 경솔무경험을 이용하여 현저하게 불공정한 계약을 맺었다며 이 계약을 무효라 선고하고덕분에 에일은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다이렇게 목소리를 되찾은 에일은 왕자와 본인카스 공주 사이에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낱낱이 밝히고이로 인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면 뒤집어지며 살인 사건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입장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다과연 에일은 자신의 혐의를 벗을 수 있을까?

 

 

 

  한편고리아 왕국이라 불리는 동아시아의 작은 반도에서도 사법 체계에 격변이 일어난다이때 사법 시스템과 과학수사의 첫 시험대에 오른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나무꾼 살인 사건이다피해자 이쇠돌은 식구들과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경부터 뒷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었는데오후 4시경 산보하러 방 밖으로 나온 이쇠돌의 친모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경찰은 평소 남편에 대한 불만이 누적돼 있던 선녀가 남편을 살해했다고 발표했고이에 심순애 변호사가 나서 선녀에 대한 유죄 판결을 규탄하고 선녀의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앞서 인어의 소송에서 인어 에일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돌려주었듯 선녀를 위한 변론」 역시인간 세계에 아무런 인맥도 자원도 없었던 선녀가 이쇠돌이 강요하는 삶 이외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로 이쇠돌의 아내로 살며 홀어머니를 부양하고 자식들을 낳았던 처지를 변론하며그간 동화 속에서 묵인되었던 선녀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부여한다그런 가운데 선녀에게 쏠린 혐의를 하나씩 무너뜨리며 명쾌한 논리로 허술한 사법 체계를 파고드는 심순애 변호사의 활약 또한 흥미를 더한다.

 

 

 




 

 

 

 

가지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눈앞에서 없어지길 원했던 거군요.” / 110p

 

 

 

  이 외에도 누구의 편도 아닌 타미모서리의 메리알렉산드리아의 겨울로 이어지는 작품들은 혼자 사는 여성이나 소외된 자들을 노린 범죄비상식적인 범죄를 부추기는 커뮤니티의 양산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감수성 결여가 낳은 사회적 문제 등에 공감하며 현실 감각과 미스터리를 유연하게 아우른다특히특정한 세계관이 설정되고 각자 자기를 대변하는 아바타라 할 수 있는 자기 캐릭터들이 참여하여 하루에도 수천수만 건의 잔혹한 살인과 고문사체 유기학대능욕이 벌어지고 있는 커뮤니티의 실상을 드러낸 작품 알렉산드리아의 겨울은 우리 사회에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쎄 보이니까요.”

김윤주가 말했다.

쎄 보여그런 게?”

관종이니까.”

김윤주가 뻐기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존나 금지된 게 나에겐 아니라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거지개쩔잖아보통 사람들은 듣기만 해도 지랄펄쩍 놀라면서 하지 말라고 하는 걸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이거지.” /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중에서 215p

 

 

김윤주는 촉법소년 연령을 잘못 알고 있었다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을 할 수 없고 보호처분에만 처할 수 있는 촉법소년의 범위는 만 14세까지인데김윤주는 미성년자가 곧 촉법소년인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상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었다.

죽여도 처벌받지 않을 테니까! /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중에서 221p

 

 

그거 알아요형사님아무리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정말 별짓을 다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글쎄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면 돼요.”

음산한 목소리였다.

그럼 내가 좀 행복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중에서 237p

 

 

 



 

 

 

 

  아마도 미스터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인물들의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 쉽게 진범이나 사건의 정황을 포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 점이 얼마간 아쉬울 수 있겠으나하드코어나 잔혹한 설정으로 일관된 미스터리와는 또 다른 담백한 맛의 미스터리를 즐기고 싶은 분들이라면 충분히 매력을 느끼실 수 있을 듯하다송지우 작가의 차기작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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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스 택시에는 특별한 손님이 탑니다 여기는 커스터드, 특별한 도시락을 팝니다
가토 겐 지음, 양지윤 옮김 / 필름(Feelm)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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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한 거랍니다!

따뜻한 언어와 신비한 이야기로 마음을 울리는 힐링 판타지!

 

 

 

  여기아주 특별한 택시가 있다택시 기사인 기무라는 유령을 볼 줄 아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종종 유령이 그의 택시를 멈춰 세우기도 한다택시는 이들의 안타깝고슬프고쓸쓸하며때로는 유머러스하다 못해 기상천외한 사연을 싣고 오늘도 달린다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왜 이들은 택시에 오르는 걸까그 사연이 궁금하다면 유령을 태우는 택시에 올라타 보자.

 

 

 

오늘도 저희 로터스 교통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전기사 기무라입니다.

목적지까지 짧은 시간이나마 아무쪼록 편히 모시겠습니다. / 9p

 

 

 

미스터리와 감동의 판타지로 당신을 모시겠습니다

 

 

  김재진 시인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란 기쁨과 아픔이 절반씩 몸을 섞는 일이라 했다다만로터스 택시에는 특별한 손님이 탑니다』 속의 특별한 손님들은 생의 끈을 쉽게 놓을 수 없을 만큼 절반의 아픔이 사무치도록 깊었던 탓에 아직도 돌아갈 곳을가야만 하는 곳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유령을 보는 눈을 가진 기무라는비록 어수룩하고 소심한 구석은 있지만 특유의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특별한 손님들의 내밀한 사연에 마음을 기울인다.

 

 

 



 

 

 

 

  자신의 주인을 죽인 음주운전 뺑소니범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분해야 했던 고양이 손님자식을 잃은 고통으로 괴로워했던 부모의 마음을 달래주고픈 어린이 손님원망과 미움만이 가득하다 못해 유령이 되어서도 서로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부부 손님 등에 이르기까지이들은 로터스 택시를 타고기무라에게 자신의 애끓는 회한과 미련비통함죄책감에 얽힌 사연들을 토로하면서 어느 새 응어리진 마음들을 위로받는다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으로부터 마음을 회복하고사무치는 원한의 감정들을 해소할 수 있는 건 역시 내 곁에 함께 했던 사람들과 그들과 나누었던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언제 불의의 사고로 죽어버릴지 몰라요해야 할 일은 당장 시작해야 해요.” / 38p

 

 

그걸로 충분해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은 머지않아 희미해지기 마련이니까하루하루 기억을 쌓으면서 과거를 덮어나가는 거야산다는 건 그런 거니까.”

하지만 잊진 못할 거야.

살아있는 사람한테는 잊어버리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아프고 괴롭기만 한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건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일 뿐이니까추억은 옅어지다가 결국 너그러워지지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 140p

 

 

미움받는 남자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해어제랑 똑같은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식이지그 어제까지가 문제인 거야해답은 전부 어제까지의 행동에 담겨 있었어. ‘어제까지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오늘이라면그걸로 끝인 거야. / 198p

 

 

 



 

 

 

 

  기묘한 힐링 판타지 로터스 택시에는 특별한 손님이 탑니다는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현재바로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진정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노력의 중요성을 전하는 따뜻한 소설이다전작 여기는 커스터드특별한 도시락을 팝니다를 읽어보진 못했지만작가 가토 겐은 어긋나있던 마음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보드라운 언어와 다정한 정서로 전달하는 힘이 남다른 듯하다잔잔하게 가슴을 울리는 한 편의 동화 같은 소설을 만나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당신이 무사히 돌아와 웃어주는 것.

제게는 그게 가장 큰 선물이에요.

 

오늘도 저희 로터스 교통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2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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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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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찾기 위한 이유의 세계가 의 존재를 이해하는 세계로 변화해갈 때,

나는 마침내 새로운 우주를 얻게 되었다!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내가 열일곱 살이고네가 열여섯 살이었던 그 여름너는 나에게 8m 남짓의 견고한 어느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냇버들이 늘어진 아름다운 모래톱이 있고외뿔 달린 과묵한 짐승들이 곳곳에 있는 도시의 사람들은 오래된 공동주택에 살면서 간소하지만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한다고 했다하나뿐인 출입구에는 문지기가 지키고 있고벽은 견고해서특별한 자격이 있지 않다면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으며 따라서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도 없는 그곳에서 너는 오래된 꿈을 보관하고 지키는 일을 한다고 했다진짜인 네가.

 

 

 

를 찾기 위한 이유의 세계가 의 존재를 이해하는 세계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어느 특별한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가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아니그 도시에 가면 진짜 너를 만날 수 있을까물론 그곳은 둘이 함께 만들어간상상 속의 특별한 비밀 세계에 불과하겠지만그동안 가 들려주었던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묵묵히 기록하며 진짜 너를 만날 수 있는 날만을 상상해왔던 는 어찌된 일인지 정말로마침내 그 도시에 입성하게 된다대체 이 도시의 정체는 무엇일까. ‘는 를 만날 수 있을까.

 

 

 

난 머리맡에 공책과 연필을 챙겨두고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지난밤 꿈을 기록해시간에 쫓겨 바쁠 때도 마찬가지야특히 생생한 꿈을 꾸다가 한밤중에 깼을 땐 아무리 졸려도 그 자리에서 최대한 자세하게 적어줘그것들이 중요한 꿈일 때가 많고소중한 것들을 많이 가르쳐주거든.” / 42p

 

 

가끔 내가 무언가의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너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듯 말한다.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 같은 게 없고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 / 111p

 

 

 




 

 

 

 

  김연수 작가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 속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이 우주는 조금이라고 바뀔 수 있다고 했다마찬가지로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과 를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로 인해 벽을 둘러싼 가상의 도시아니 실제할 지도 모를 세계 속으로 이행된 이제껏 정면으로 마주해본 적이 없는 자신의 그림자와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를 찾기 위한 이유의 세계가 의 존재를 이해하는 세계로 변화해갈 때나는 마침내 새로운 우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경계를 넘어나를 쪼개고 부단히 이행함으로써 다른 나와 만나는 것은 라는 존재의 가장자리를 끊임없이 늘리는 일이다. ‘이쪽과 저쪽’ 사이완전함과 불완전함 사이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는 동안 는 어느 누구와도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자기만의 속도와 방향이라는 것을 감각하게 된다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어쩌면 내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중요한 것은 그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든 그 자체로 라는 것그 어디에 있든 나를 받아주고온전히무조건적으로 받아줄 사람이 존재하리라는 사실을 믿는 데 있다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하루키의 메시지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곳은 다름 아닌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장소여야 합니다.”

가끔 저 자신을 알 수 없어집니다.”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혹은 잃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이 인생을 저 자신으로저의 본체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습니다나 자신이 그저 그림자처럼 느껴지곤 합니다그런 때면 제가 그저 나 자신의 겉모습만 흉내내서교묘하게 나인 척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집니다.”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고야스 씨가 나지막히 말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당신 자신이니까요.” / 452p

 

 

 




 

 

 

 

  “당신의 생년월일을 알려주시겠어요?”

  이 책을 읽고 소년의 질문을 따라 내가 태어난 날은 무슨 요일일까를 검색해보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아쉽게도(?) 나는 금요일이었다수요일이신 분들은…… ……그냥 여기서 생략하겠다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그럼에도 첫째로는이렇게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왠지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랍니다.”란 글귀를 쓸 수 있는 이 작가의 글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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