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멜랑콜리아 I-II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한 사람을 내면을 집요하게 응시하여 이야기로 완성해낸 작품!
거듭 되뇌지 않고서는 무너지고 있는 자아를 구할 길 없는 한 예술가의 처절한 고통과 비애!
과연 ‘신비주의적 풍경화’의 표상답다. 노르웨이의 풍경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대표작 ‘티스베르에서’(1865년)와 ‘보르그외이섬’(1867년)을 감상하다보면 빛과 어둠, 환희와 우울이 동시에 매만져지는 듯한 환상적인 풍경에 그만 넋을 놓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면, 저 희뿌연 연기와도 같은 구름 속에서 어느 고독한 자의 음울한 뒷모습을 언뜻 본 것 같은 착각이 일기도 한다. 노르웨이의 거친 풍경 속에 환상성을 담아 낸 것으로 유명한 화가.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후원자를 만나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공부하며 화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동료 화가들의 냉대를 받으며 정신병을 얻었다는 라스 헤르테르비그.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욘 포세는 자신의 대표작 『멜랑콜리아 Ⅰ-Ⅱ』를 통해 사후 12년 뒤에야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이 실존 화가의 불안한 내면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빛과 그늘, 과거와 현재, 현실과 망상 속을 떠돌던 한 예술가의 음울한 고백
1853년 늦가을 오후, 독일 뒤셀도르프. 노르웨이 동부의 도시 스타방에르에서 독일로 유학을 온 화가 지망생 라스는 아주 멋진 보라색 코드류이 양복을 입은 채로 하숙집 침대에 누워 있다. 오늘은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의 교수인 한스 구데가 아틀리에에 방문해 그림을 보러 올 예정이다. 하지만 라스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다. 그는 오늘 아틀리에로 가지 않을 생각이다. 아틀리에에서 자신만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한스 구데가 자신의 그림을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림이 형편없다거나 아예 그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스는 침대 위에 누운 채 돌연 비관과 망상, 불안과 의심에 사로잡혀 침대 밖으로 한 발짝도 나서지 못하다 짝사랑하는 헬레네로부터, 하숙집으로부터, 동료들로부터 냉대를 받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고야 만다.
이렇듯 <멜랑콜리아 Ⅰ>은 라스 헤르테르비그가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전기에 가깝지만, 역사에 문학적 상상력을 덧입혀 정신 착란의 상태에 빠진 주인공이 느끼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는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독자인 나조차도 심리적 공황 상태에 이를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특별한 서사가 없이 특정한 리듬과 운율을 지닌 문장이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강화’되는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거듭된 읊조림, 환상적 독백의 열거에 가까운 실험적이고도 시적인 문체는, 거듭 되뇌지 않고서는 무너지고 있는 자아를 구할 길 없는 한 예술가의 처절한 고통과 비애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천은 유혹하듯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천을 걷어 내기 위해 손을 입술 위로 가져갔다. 나는 입속에서 천을 걷어 내야만 했다. 천 때문에 숨 막히면 안 되니까. 나는 입속에서 천을 빼내야만 했다. 나는 손을 입으로 가져갔지만, 천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천을 걷어 내고 싶었지만 벌써 그것은 내 손에서 빠져나와 자취를 감추었다. 내가 천을 거머쥐려 할 때마다 천은 내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천이 나를 죽이려 했다. / 34p
나는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천은 곧 내 눈을 뒤덮을 것이고 내 입속까지도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천이 내 입속을 가득 채우면 나는 사라질 것이다. 나는 희고 검은 천이 되어 이곳을 맴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질 게 분명하다. / 123p



한편, 치매에 걸려 망각의 기억 속에서 라스 헤르테르비그를 떠올리는 누이 올리네의 이야기 <멜랑콜리아 Ⅱ> 역시 상당히 인상적이다. 올리네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지 않으면 걸을 수도 없고, 어부 스베인이 준 생선이 아니고서는 끼니도 해결할 길이 막막한 노인이다. 가장 건강했던 동생 쉬버트가 죽어가고 있는 마당에, 그녀는 당장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어쩔 줄을 모르는 자신에 대한 비참함과 계속해서 과거로 침잠해 들어가는 기억 속에서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이렇듯 욘 포세는 지독한 망상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라스와, 치매로 기억을 잃어 일상조차 제대로 건사할 수 없는 누이 올리네를 통해 회색지대를 부유하며 떠도는 고독한 자아의 내면을 생생하게 구현한다. 덕분에 우리는 끝끝내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서 도망쳐 그림을 그릴 거라던 라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집으로 가야한다고, 발이 아픈 건 참아야 한다고, 오직 앞으로, 앞으로 걷는 수밖에 없다고 되뇌었던 올리네의 담담한 걸음에서 마침내 인간의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빛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내가 존재할 이유도 없다. 빛도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 266p
나는 그 그림이 우울할 때의 라스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고 느꼈다. 물론 그림 속의 산과 나무배는 눈에 익은 실제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그림이 가끔 우울함에 빠져 있을 때의 라스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거뭇거뭇하고 어두운 그림은 어둠에 빠져 있는 라스였던 것이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생명을 머금은 어둠, 빛을 발하는 어둠이라고 해야 할까.
이 그림은 너를 닮았어. / 416p


한 사람을 내면을 집요하게 응시하여 이야기로 완성해낸 작품. 어쩌면 이건 욘 포세만의 특별한 문학적 성취가 아닐까 싶다. 여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간결하고, 유연하게 읽힌다는 점도 이 작품의 남다른 점일 수 있겠다. 욘 포세만의 미학을 사유하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