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의 밑줄 - 나와 일 모두 함께 크는 사람의 성장법
김상민 지음 / 더퀘스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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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터로서의 태도와 감각을 넘어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진솔한 고민을 담은 책!





  애청하는 프로그램인 <최강야구>에서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과 배팅 훈련을 할 때 늘 “힘을 빼고 쳐라”고 강조한다. 힘을 빼고 가볍게 툭. 그렇게 무심한 듯 부드럽게 돌린 배트에도 공이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보다 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 삶에도 힘을 빼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잘 해야 한다는 욕심에 새로운 시도 앞에서 번번이 망설이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느라 정작 결과물을 내는 데에는 더딘 나다. ‘중요한 건 꺾여버린 김에 하고 싶은 거 해버리는 마음’이라던 『마케터의 밑줄』 속의 글귀처럼, 꺾이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보단 때로는 꺾여도 까짓것 해보자는 마음 같은 것이 더 필요하다.



  이 책의 저자인 전 배달의민족 브랜드 마케터이자 현 오롤리데이의 김상민 CBO는 수많은 변수가 끊임없이 나타나고, 과거의 성공 공식이 지금도 통용된다는 보장이 없는 시장 속에서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마케터라면, 더더욱 ‘해봐야’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무거운 결심이 아닌 무심히 뻗은 가벼운 한 걸음이 때로는 더 큰 성과를 낳는 법이라고. 다만, 그렇게 켜켜이 쌓인 걸음의 총합만큼은 믿어보길 응원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마케터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감각과 태도는 아닐까.



천재 마케터가 아니라 하여 좌절할 이유 없다. 그렇게 최선의 마케터로 살아가면 된다. / 36p









문장에서 길어 올린 것들



  저자는 스스로를 타고난 재능도, 태도의 단단함도, 하다못해 인싸력도 부족한 마케터라 고백하며 이따금 생각이 복잡해질 때면 현자에게 답을 구하듯 책에 밑줄을 그었다고 한다. 급변하는 트렌드와 불확실한 시장 속에서 마케터로서의 역량과 균형 감각을 기르기 위해 책을 읽고, 문장에서 길어 올린 것들로 하여금 자신을 반추한다. 문득, 내가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발췌하여 지금처럼 글을 쓰는 마음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따금 좋은 마케터의 요건에 대해 생각해본다. 여러 가지를 썼다 지우는 와중에도 한 자리만큼은 예약되어 있다. ‘맹렬한 몰입의 경험’은 좋은 마케터의 필요조건이다. 몰입이 몸에 밴, 집요함이 마음 어딘가 새겨진 이는 대부분 훌륭한 창의 노동자로 거듭나다. 흔히 창의성 하면 나인 투 식스의 나와는 조금 다른, 예술가의 면면을 떠올린다. 진짜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고 바라본 창의성은 그와는 반대편의 이야기다. / 116p


간절함 섞인 객기가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클래식이 된다. 누구도 쉬이 가지 않은 길을 거쳐왔기에, 누구도 쉬이 모방하기 힘든 고유함을 지닌다.

(…) 마케터의 삶도 다르지 않다. 겉으로는 한없이 밝고 유쾌해 보이나 현실을 뜯어보면 마케터의 일 상당수가 단순 작업과 반복, 그리고 이따금 객기처럼 느껴지는 꾸준함으로 채워진다. / 272p


마케터로서 축조한 모든 가치관의 발아래 폭탄 하나씩을 설치한다. 언제든 아니다 싶으면 터뜨려 무너뜨리기 위함이다. 나의 세계를 정교히 축조하는 것도 중요하나, 공들여 쌓은 탑이라도 오늘과 맞지 않는다면 언제든 내 손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한 세상이다. 어찌저찌 10년을 버텨온 현시점에서 앞으로의 10년 혹은 더 많은 시간을 마케터로 남기 위해 그리 해보려는 참이다. 옳지 않다 생각되면 언제든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동시대적인 가치와 철학으로 다시 쌓아 올릴 수 있게 상시 대기한다. / 292p








  마케터로서의 태도와 감각을 넘어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저자의 진솔한 고민이 깊이 와 닿는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실무에 필요한 직접적인 기술이나 노하우를 전하기보다는, 더 나은 직업인이기를 꿈꾸며 일과 삶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성장과 경험담으로 읽히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서사를 써내려가는 삶의 기획자다. 마케터를 업으로 삼고 있는 분들 뿐만 아니라, 직업가이며,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공감과 위로, 용기를 전하는 책이 필요하신 분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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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붙잡힌 사람을 위한 책 - 복합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삶을 되찾는 법
아리엘 슈워츠 지음, 김준기 외 옮김 / 수오서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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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은 과거의 산물일 뿐, 미래를 결정짓지 않는다!

각종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 자기돌봄과 치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책!





  꽤 오랫동안,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태도,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이유라고 해봐야 그저 나의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감정 조절의 어려움, 공황, 절망감, 만성적인 수치심, 타인에 대한 불신 등의 증상을 겪고 있는 현대인들 대부분 역시 이러한 정신적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이자 임상심리학자인 아리엘 슈워츠는 우리가 다양한 정신적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어린 나이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당신이 겪고 있는 대부분의 증상은 장기간에 걸쳐 발생한 트라우마의 결과물이다.” / 13p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을 트라우마라 일컫는다. 특히 현대인들의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PTSD는 단발적인 사건이나 일시적인 충격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반 트라우마와는 달리 어린 나이에 반복된 트라우마 사건에 대한 반응이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불안정한 애착, 거부, 학대, 방임, 폭력과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 신경계가 취약해지면, 장기간에 걸쳐 감정적이고 생리적인 고통의 패턴이 형성되는데, 이 패턴이 치유되지 않고 끊임없이 재생되어 성인기까지 이어지게 된 결과라는 것이다.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지속되거나 반복되는 트라우마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어린 시절에 일어난 트라우마 사건은 대개 예측할 수 없거나, 혼란스럽고, 두려운 경우가 많다. 부모나 보호자로부터 여러 차례 학대, 방치, 무시, 방임이 이루어졌거나 혹은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을 반복적으로 목격했을 수도 있다. 복합 PTSD에서 ‘복합’은 트라우마가 너무 어린 나이에 자주 반복되어 감정적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 8p


PTSD 주요 증상은 재경험, 회피, 만연한 위기감이다. 재경험 증상은 침습적 기억과 플래시백, 혹은 강렬한 감정이나 감각을 동반한 악몽을 말한다. 회피 증상은 특정 장소, 활동에 참여하는 것, 혹은 트라우마 사건과 관련된 사람을 피하는 것이다. 과거 생각을 회피하기 위해 과도하게 술을 마시거나 약물을 사용하는 등 중독 위험이 큰 행동을 한다. 만연한 위기감은 실제 안전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위험 상황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데, 이것을 ‘과도한 경계’라고 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쉽게 놀라고 매 순간 경계심을 느끼며 긴장을 풀지 못한다. / 22p








  『과거에 붙잡힌 사람을 위한 책』은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더 이상 트라우마에 고통 받지 않을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그중에서도 PTSD로 잘 알려진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주목하며, 복합 트라우마의 다양한 증상과 원인을 이해하고 또 이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책을 읽다보면 ‘이건 내 이야기야’, ‘나도 이런 증상이 있는데….’ 하고 나와 유사한 증상과 경험들을 떠올리게 되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 책을 자기돌봄과 치유의 기회로 삼아보시길 추천드린다. 아울러 다른 사람을 신뢰하거나 친밀감을 느끼기 어렵고,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거나 극도의 불안과 우울감에 시달리는 분이라면, 혹은 그러한 가족이나 친구를 둔 이들이라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치료법에 도움을 받아보시길 바란다.



명상을 하면서 각각의 생각이 도움이 되는지, 도움이 되지 않는지에 주목하면서 관찰한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점은 생각을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는 어떤 생각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어떤 생각이 스트레스를 주는지 단순하게 구분한다. 이 연습의 목표는 마음을 선명하게 하는 것이다. 흐릿함이나 혼란을 만들어내는 모든 생각이 지나가도록 허용한다. / 96p


지속적으로 고통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어린 시절의 특정 사건이 있다면, 그 사건으로 연습을 해보자. 잠시 동안 사건을 이미지로 떠올려보고 당시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불러온다. 만약 당시의 사진이 있다면, 사진을 활용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사진 속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가? 또 다른 무엇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이제 그 경험에서 무엇이 빠져 있는지 잠시 생각한다. 당시 어린 당신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또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나? / 162p


+ 내가 지금 어떤 어려운 감정을 느끼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가? 슬픔인가, 분노인가, 두려움인가, 실망인가, 혼란감인가, 아니면 수치심인가?

+ “내가 너무 예민했어”, “그냥 넘어가야 해”, “이런 감정은 어리석은 거야” 등 스스로를 판단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생각이 있는지 알아차려 보자.

+ ‘내가 언제부터 이런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지?’ 또는 ‘어떤 상황이 내 감정에 영향을 미쳤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해 감정의 원인을 찾아본다. / 177p











  고백하자면 나는 감정을 표현하거나 내 안의 연약함을 드러내 보이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편이다. 내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알아차리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나는 유년 시절에 슬픔, 상처,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고 표현해도 괜찮다는 것을 지지받은 적이 없거나 취약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책의 조언대로 과거에 힘들었던 사건을 떠올리거나, 현재의 내 감정을 알아차려보는 연습을 많이 해보기로 했다. 옳다, 그르다로 내 감정과 표현을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힘든 일을 겪을 때 내 몸과 마음은 무엇을 느끼는지, 감정에 이름을 붙여봄으로써 포용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결국 ‘트라우마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당신만의 고유한 과정’이며, ‘고통으로부터 의미를 찾는 것은 당신의 습관적인 생각과 행동을 탐구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것’이라던 이 책의 메시지를 꼭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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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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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랄하고 통렬하며 우아하다!

놀랍다는 말로는 부족한, 여성에 관한 가장 강렬한 서사를 선사하는 작가!





  놀랍게도 마거릿 애트우드는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은 쓰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책에서도 “모든 이야기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야기’는 사회적 리얼리즘의 경계 안에 머무는 단편 소설일 수도 있고, 우리가 대체로 이견 없이 ‘실제 삶’이라 부르는 것에 관한 실화일 수도 있다”고 밝힌다. 이것이 전작 『시녀 이야기』, 『증언들』, 『그레이스』 등의 작품을 비롯해 신작 『스톤 매트리스』 속 아홉 편의 이야기가 거침없고 괴랄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깊이 발을 붙이고 있는 듯한 감각을 선사하는 이유다. 이 작품집에서도 그녀는 환상과 현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남성 중심 사회와 ‘여성성’이라는 표상을 향해 가장 비범한 방식으로 복수를 단행한다.



아름다움은 일종의 환상이다. 또한 일종의 경고다. 아름다움도 독나비처럼 어두운 이면을 간직하고 있는 터다. / 「알핀랜드」 중에서 9p



  ‘처음에 버나는 아무도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표제작 「스톤 매트리스」에는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에게 속은 대가로 일생을 뒤틀린 욕망 속에서 살아야 했던 중년의 여인, 버나가 등장한다. 강간은 어떤 미치광이가 수풀에 숨어 있다가 덮쳤을 때 벌어지는 일이지, 무도회 공식 파트너가 황량한 숲에서 겁박하다가 한 겹 한 겹 찢어발겨도 남자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절이 있었다. 버나는 우연히 북극으로 향하는 유람선에서 그날의 밥을 만난다. 하지만 밥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할 뿐더러 내내 평온한 삶을 살았던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호감을 내비추기까지 한다. 어떻게 그 치욕스러운 과거를 지울 수 있단 말인가. 버나는 과거로부터, 상처로부터 도망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아주 은밀하고도 교묘한 방법으로 그에게 최고의 복수를 가하려 한다.



버나는 얼굴을 톡톡 두드리며 화장을 고치고 방수 기능이 있다지만 볼까지 번져 버린 마스카라 흔적을 지운다. 용기를 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힘겨워도 견뎌낼 것이다. 지금은 밥 다섯 명이 덤벼도 상대할 수 있다. 게다가 이번에는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 「스톤 매트리스」 중에서 311p


바로 지질학 역사 초기, 그러니까 어류, 공룡, 포유류가 등장하기도 전에 화석화된 무려 19억 년 된 스트로마톨라이트를, 지구에서 최초로 보존된 형태의 생명체를 보는 특권을 누리게 되실 겁니다. 스트로마톨라이트가 뭘까요? 그가 눈을 번득이며 수사적인 질문을 던진다. 스트로마톨라이트라는 단어는 매트리스를 뜻하는 그리스어 스트로마에 돌을 뜻하는 리토스의 어원을 결합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스톤 매트리스, 즉 청록색 조류가 층층이 쌓여 둔덕이나 돔 모양을 형성한 화석화된 쿠션인 거죠. 이 청록색 조류는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산호를 형성한 것과 똑같은 조류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 「스톤 매트리스」 중에서 322p










  호색한인 시인 개빈과 그를 둘러싼 여성들의 이야기인 연작 단편 「알핀랜드」, 「돌아온 자」, 「다크 레이디」 역시 단연 눈에 띈다. ‘그 시절에 여자애들은 그렇게 살았다. 자기 몸이 녹초가 되도록 일해 가며 스스로가 천재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의 허황한 생각을 떠받쳤다.’던 「알핀랜드」 속 문장처럼, 개빈의 연인이었던 콘스턴스는 가난한 시인인 개빈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알핀랜드’라는 가상의 세계를 바탕으로 한 판타지 소설 작가가 된다. 하지만 개빈은 마저리라는 여성과 외도를 벌이고, 마저리는 ‘뮤즈’라는 그럴 듯한 말로 자신의 신체를 유린당한 뒤 버림받는다. 이제 세 번째 부인인 서른 살 연하의 여성 레이놀즈가 개빈의 말년을 지키고 있지만, 그녀 역시 헌신하는 아내로서의 존재감만 겨우 붙들고 있을 뿐이다.



“바보같이 굴지 마. 내 말 이해했잖아. 내 말은, 세상 모든 게 엉덩이와 관련된 건 아니라는 거야. 그 여자 이름은 너비나야. 존중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지.” / 「돌아온 자」 중에서 71p


이런 올림머리는 뭐랄까, 너무도 우아하고 단정하며, 너무도 처녀스럽다. 게다가 틀어올려진 머리를 풀고 헝클어뜨리면 머리칼이 자유롭게 흩날리며 스르르 어깨 아래로, 가슴 위로, 베개 위로 흘러내린다. 개빈은 머릿속으로 그런 광경을 하나하나 그려 본다. 내가 아는 올림머리들. / 「돌아온 자」 중에서 81p


하지만 조리는 틴의 팔을 놓더니 움직이지 않는다.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다.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모든 게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제 삶 전체가요.” 우는 건가? 그렇다. 청동생과 금색으로 반짝반짝하며 흐르는 진짜 눈물이다.

“나도 고통스러웠어요.” 콘스턴스가 말한다.

“알아요.” 조리가 말한다. 두 사람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정신적 교감 속에 갇힌 채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장소에 살고 있어요. 알핀랜드에는 과거가 없어요. 시간 자체가 없죠. 하지만 여기에는 시간이 있어요.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시간이요. 우리에게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어요.” / 「다크 레이디」 중에서 161p








  연작 시리즈의 말미에서 개빈의 장례식장에 모인 여성들은 각자의 과거를 용서하고 서로를 이해한다. 평생 마음속에 가둬두기만 했던 상처들로부터, 무력하고 연약했던 시간들로부터,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당해야 했던 사회적 시선과 통념들에 작별을 고한다. 어쩌면 이것이 마거릿 애트우드가 문학이라는 언어로 새기고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스톤 매트리스는 아닐까. 역시 마거릿 애트우드는 놀랍다는 말로는 부족한, 여성에 관한 가장 강렬한 서사를 선사하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녀의 이야기가 영원히 멈추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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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째 열다섯 텍스트T 1
김혜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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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들이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을 것만 같다!

단군 신화와 여우 전설의 이야기가 만나 완성된 매력적인 판타지!





  한 명도 아니고 무려 세쌍둥이 자매의 전학 소식에 수석중학교 2학년 2반이 떠들썩하다. 슬로바키아에서 왔다는 세쌍둥이 모두, 긴 생머리에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하얀 데다 눈꼬리까지 살짝 올라간 것이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 봄, 여름, 가을이란 이름의 이들은 사실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한 야호족(여우)으로, 삼 대에 걸친 모녀지간이다. 할머니인 봄, 엄마인 여름은 오랜만에 열다섯의 나이로 둔갑해 앞으로 펼쳐질 학교생활에 한껏 들뜬 모습이지만, 오백 년째 열다섯의 나이로 살고 있는 가을은 이제 이런 생활이 지긋지긋하다.




열다섯, 너의 순간들을 응원해



  오백 년째 열다섯의 나이로 산다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오백 년째 열다섯』은 인간으로 둔갑한 여우, 야호족의 이야기를 다룬 한국형 판타지 소설이다. 환웅이 인간 세계로 내려와 신단수 밑에 터를 잡았을 때, 인간이 되고 싶었던 곰과 범과 달리 인간이 되길 거부했던 여우가 단군을 도와 달라는 웅녀의 부탁으로 최초의 구슬을 받고 야호족을 이루었다는 독특한 설정을 바탕으로, 야호족이자 오백 년 동안 열다섯 살로 살아온 한 여자아이의 비밀스러운 운명과 성장을 담고 있다.



  서희라는 이름에서 선화로, 이제는 89번째 이름인 가을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기 마련인 청소년들의 불완전한 자아가 엿보인다. 가을은 오백 년 째 열다섯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열다섯일 자신의 운명을 끔찍하게 여긴다. 야호로 살면서 항상 누군가로 위장해야만 하는 제 삶은 그저 빈껍데기일 뿐이라고,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내어줄 수 없는 현실에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목숨과도 같은 구슬을 가을에게 남기고 떠난 령의 가을에 대한 확신과, 세상 전부가 등을 돌려도 신우만은 곁에 있어줄 거라는 믿음은 가을을 점점 변화시킨다. ‘나’는 누구일까, 내가 가진 가능성을 의심하고 고민하기 마련인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가을이 느끼는 고뇌와 그 속에서의 성장은 든든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좁고 어두운 곳에서 계속 그렇게 문 닫고 살면 답답해. 문 열고 나와야지.” / 35p



“우린 껍데기야. 우리 삶은 없어. 항상 누군가로 위장하며 살아. 오백 년째 열다섯 살로 사는 거 진짜 끔찍하다고.”

가을이 소리를 질렀고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좋았던 것도 많았잖아. 좋은 사람들도 만났고.” / 100p



  ‘여우 누이’, ‘은혜 갚은 까치', '호랑이 형님' 등 우리 옛이야기와 단군 신화를 엮어 새로운 한국형 판타지를 완성해낸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몰입도 높은 전개에 누구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메시지 또한 따듯하다. 청소년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판타지 소설을 찾으시는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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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한한 우주를 건너 서로를 만났고 이 삶을 함께하고 있어 - 펫로스, 반려동물 애도의 기록
최하늘 지음 / 알레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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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온 우주를 건너 내게 온 선물 같은 존재야!

펫로스 심리상담가가 전하는 펫로스, 반려동물 애도의 기록!





  반려인이라면 누구나 반려동물에게 곁을 내어주고 교감을 나누었던 나날의 감각을 기억할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보드라운 털, 품속을 파고드는 따스한 온기, 때로는 반려인의 기분과 마음까지 헤아리고 있는 게 분명한 듯한 눈망울까지. ‘반려’란 삶의 동반자를 의미한다. 우리가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에게 ‘반려’라 이름붙이는 이유는 그만큼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긴밀하고도 각별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허물없이 나의 품을 내어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존재. 따라서 반려동물의 죽음은 누군가에겐 ‘매일 함께하던 일상의 상실이자 무조건적인 사랑의 상실’일 수 있다. 반려동물이 내 삶에 이토록 큰 자리를 차지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감당하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무한한 우주를 건너 서로를 만났고 이 삶을 함께하고 있어』에서 반려동물을 떠나보내고 상실을 경험한 이들은 정상적인 일과를 제대로 해낼 수 없을 만큼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깊은 통증을 호소한다. 이를 펫로스 증후군(반려동물 상실 증후군)이라 하는데, 국내 최초의 펫로스 심리상담사인 저자는 슬픔 속에서 애도의 시간을 보내는 반려인들의 이야기를 엮으며 소중한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나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고통을 어떻게 견디는지, 슬픔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세밀한 과정을 기록한다. 사랑하는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났거나 반려동물의 죽음과 이별을 앞두고 있는 분들이라면 치유와 회복이 모두 담긴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네가 내 삶에 남긴 자국을 잊지 않을게



  소중한 존재를 잃는 것은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지만 반려동물과의 사별은 사람과의 사별과 유사하면서도 분명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동물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은 사회적으로 여전히 공감받기 어렵다는 점이다. “네가 예민해서 그래.” “자식 앞세운 부모도 있어.” 같은 표현들로 반려동물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는 감정을 과장된 것이라 치부하기도 한다. 때문에 반려인들은 치료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애도 반응에 혼란을 느끼거나 슬픔을 소화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한편, 반려동물의 죽음에 대해 강한 책임감도 반려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유다. 이 책에서 대부분의 반려인들이 심한 죄책감과 자책으로 자신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반응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듯하다. 우리는 슬픔을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과정’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애도의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죽음을 이해하고 삶을 재조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사랑하는 이를 잃는 고통 앞에서 조금 더 성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



“난 아직 괜찮지 않아요.”

상담 선생님이 ‘힘들다는 걸 부인하지 말고 느껴보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그 순간 나 자신을 받아들이며 편해졌다. 슬픔을 숨기려고 했던 나를 발견했다. 괜찮지 않다는 확인이 역설적으로 힘들 때마다 위안이 됐다. 다시 말해, 괜찮지 않다고 받아들인 것인 나를 괜찮게 만들어주었다. / 69p


자신의 소중한 존재를 끝까지 지켰고 강한 책임감을 발휘했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평생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해왔기에 이러한 자아상의 변화는 획기적인 성과였습니다. 그 출발이 무엇이었든 간에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리라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 105p


살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의식하고 인생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되었습니다. 주경진 님은 좋은 일을 계속해나가며 살아가겠다고 삶의 목적을 다졌습니다. 이는 마음속 존재인 사랑이가 알려준 것이며 자신이 적극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경진 님이 사랑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스스로 발견해낸 성숙의 결과입니다. / 133p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별과 죽음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태도와 마음을 지녀야할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이 무한한 우주를 건너 우리가 만나 서로의 삶에 자국을 낸 순간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내내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슬픔과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분들에게 이 책을 전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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