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의 연인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담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담담하면서 잔잔한 소설이다. 무리하게 갈등을 조장하거나 긴장감을 억지로 불어넣지 않으면서 쉴 새 없이 읽게 만든다. 그냥 보면 밋밋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와 심리묘사는 없는 듯하지만 강하게 연결되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든다. 처음에 약간의 적응기를 지나면 에둘러 각자의 마음을 되짚어 보고 그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을 한 편의 수채화처럼 들여다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치열함과 정확함 너머의 느긋함으로 가득한 타이베이의 삶이 있다. 분명 어느 부분에서는 조급함이나 분노나 안타까움을 느껴야 하는데 그 흐름에 휩쓸려 느긋하게 바라본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여 각자의 삶을 보여준다. 정밀하게 계산하여 분량을 조절하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 속에 등장하여 자연스럽게 그들의 현재와 과거를 보여준다. 굳이 중심이 되는 인물을 꼽자면 다다 하루카가 되겠지만 안자이나 웨이즈나 료렌하오나 이케가미 등도 결코 그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 이들은 모두 하나로 엮여 있다. 직접적으로 만나는 횟수는 많지 않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인연을 맺고 있다. 이 인연을 세밀하게 풀어서 느슨하게 보여주지만 그 핵심 인물들이 강하게 중심을 잡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섬세한 심리 묘사는 곳곳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긴 시간과 타이베이와 일본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신칸센 고속철도를 타이베이와 카오슝 사이에 개설하려는 입찰에서 시작하여 개통 다음 해의 춘절 운전까지 7년 동안의 긴 세월을 다룬다. 이 긴 세월 속에서 철부지 청년은 결혼을 하고, 일본적인 마인드로 일하던 상사맨은 타이완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신칸센 수주 소식을 듣고 병원에 입원한 아내에게 농담처럼 완공되면 가자고 한 노인은 이제 홀로 산다. 타이완에서 하룻동안 함께 한 일본 여자와 타이완 남자의 운명 같은 사랑은 시간 속에서 현실적으로 바뀐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다시 만났을 때도 로맨스 영화의 열정적인 사랑은 없고, 그 세월 동안 묵혀둔 감정의 열정적인 담담함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보면 답답하지만 그들은 느리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은은함과 여운이 오히려 강하게 남는다.

 

하루카와 료렌하오의 만남은 아주 작은 일이다. 하지만 이 작은 만남이 여러 가지 일들의 출발점처럼 여겨진다. 실제 이 소설에서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이 다다 하루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만남이 엇갈리게 되는 것은 료렌하오의 연락처를 적은 종이를 하루카가 잊어버리면서부터다. 그녀의 소식을 기다리던 에릭, 그 남자에게 연락하고픈 하루카. 이들은 그리워하지만 결코 만나지 못한다. 그러던 중 고베와 타이베이에서 대지진이 발생한다. 그들의 감정은 아직 열정적이다. 에릭은 하루카가 걱정되어 고베까지 온다. 이 일이 바탕이 되어 일본으로 유학 와서 일본 대기업에서 근무까지 한다. 하루카는 상사의 타이베이 근무를 흔쾌히 수락한다. 운명적인 엇갈림이다.

 

타이완 청년 웨이즈의 삶은 느슨하다. 치열함도 열정도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철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가 메이친 주변을 겉돌면서 조금씩 스며드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다. 아직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지 못한 청년이기에 낙천적이기에 웃으면서 그를 볼 수 있다. 이에 대비되는 안자이는 일에 치여 산다. 계획을 둘러싼 두 나라의 인식 차이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없다. 너무 팽팽하게 당겨진 그의 모습을 보고 하루카가 언제 끊어질지 모르겠다고 걱정할 정도다. 시간과 환경과 사랑은 그를 변하게 만든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긴장된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도 바로 안자이가 등장할 때다.

 

토목전문가 이케가미는 아내가 죽은 후 홀로 산다. 그가 태어난 곳은 타이완이다. 전후 일본으로 넘어 왔는데 절친했던 타이완 친구에게 큰 실수를 저지른다. 이것이 그를 평생 동안 괴롭힌다. 동창을 만나거나 타이완으로 가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막고 있다. 그의 평온한 일상을 보면 무력해 보인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그러다 동문회지를 보고, 료렌하오를 만나고, 타이완을 방문하면서 바뀐다. 뒤에 그가 실수했던 친구를 만나 사죄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이것을 배가시킨 것은 친구인 나카노다. 그가 그 당시 내뱉은 2등 국민이란 표현은 그 시절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일본 작가의 타이완을 보는 시선을 따뜻하고 친밀하다. 수많은 지역의 묘사는 생생하고, 음식은 아주 맛있어 보인다. 타이베이 여행에서 느낀 것이지만 타이베이 시내 풍경 속에서 일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또 그들이 굉장히 일본에 우호적이란 것도 느꼈다. 이것에 대한 답을 나카노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드디어 본래의 우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기뻐하면서도 왜 일본인은 우리를 버렸을까 원망한 적이 있었지. 나만 그렇지는 않았을 거야.” 이것이 꼭 타이완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이 한 편의 소설이 다시금 대만 여행의 열정을 되살린다. 그 당시 못 먹었던 음식들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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