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만 1년 전 8월 하치오지 교외 신축 주택단지 느티나무 언덕에 지은 단독주택에서 부부 살해 사건이 일어난다. 그들은 오기 유키노리, 리카코 부부다. 이들을 죽인 남자는 한동안 집안에 머문다. 이 부부를 살해한 후 욕실까지 옮기고, 그 흉악한 현장이었던 복도에 피로 쓴 글자를 남겼다. ‘분노’란 단어다. 이 남자가 오기 저택에서 나온 것은 새벽 1시 무렵이다. 옆집 사람이 인사를 건넸고, 자전거 불을 켜지 않고 달리다 검문 중이던 경찰관에 제지당했다. 자전거 등록 번호를 조사하기 시작하는 순간 도주했다. 다음 날 범행이 발각 났고, 몽타주가 작성되어 지명수배되었다. 곧 이 남자의 신원과 주소를 밝혀졌다. 남자의 이름은 야마가미 가즈야다. 하지만 만 1년 동안 도주 중이다. 간략한 사건 개요를 설명한 후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작가는 노련하게 세 명의 남자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가출한 후 매춘업소에서 일하는 딸 레이코를 데리고 온 요헤이 주변에 살고 있는 다시로 군, 게이 유마가 섹스를 위해 찾아간 장소에서 만난 나오토, 이즈미의 엄마가 저지른 불륜으로 도망간 오키나와의 작은 섬에 숨어 있는 배낭여행객 다나카 등이 바로 그들이다. 작가는 이들을 직접 화자로 등장시키지 않고 요헤이, 유마, 이즈미 등의 일상 속에 등장시켜서 혹시 이들이 살인범 야마가미 가즈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계속 품게 만든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속 수사 중인 형사 기타미를 등장시켜 야마가미에 대한 최신 정보를 언론을 통해 알린다. 하지만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마음속에 의심의 싹을 틔우게 만든다. 독자도 마찬가지지만.

 

이 세 명의 남자들의 외모와 과거는 분명하지 않다. 일단 의심의 싹이 자라면 분명하지 않은 과거가 무시무시한 환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자신과 그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순간 그 환상은 어느새 부쩍 자란다. 마음은 요물이라 신뢰라는 거대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조그만 바람에도 쉽게 넘어가게 된다. 그것은 자신들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때 더 쉽게 일어난다. 아이코의 좋지 않은 과거가 걱정인 요헤이나 게이란 사실이 알려지길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유마나 나쁜 일을 겪은 이즈미와 다쓰야 등이 바로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등장인물들이 의심하는 만큼 독자도 같이 이들 중 누가 과연 범인인지 혹은 전부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책 후반부가 되기 전까지 이 의심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첫 도입부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분노’란 단어를 적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소설은 바로 이 분노의 원인과 이유를 찾아서 긴 여정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하지만 다른 세 곳에 나타난 수상한 남자와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노보다 관계에 더 많이 집중하게 되었다. 노련한 작가가 이들의 일상을 편하게 보여주면서 경찰의 공개수사 과정에서 보여준 단서를 이들과 살짝 연결시킨다. 이 작은 연결 고리는 누군가 혹은 자신들이 품게 된 자그만 의심으로 인해 점점 부풀려진다. 현실에 만족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와중에도 이 의심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언제나 그들의 마음을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있다.

 

이 세 명의 남자 외에 또 한 명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형사 기타미와 사귀는 미카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다. 기타미가 형사라고 했을 때 달아나려고 했지만 그녀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들은 사귄다. 하지만 기타미가 그녀를 강렬하게 원하고 열망하게 됨에 따라 이 관계는 깨어진다. 그녀의 삶을 자신의 삶 속으로 끌고 들어와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다. 이것과 반대의 현상이 벌어지는 사람들이 세 곳에 등장한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남자들이다. 세 남자와 관계된 사람들은 이들을 자신들의 삶 속에 편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의심의 싹을 틔운다. 물론 이 세 명 중에 범인은 있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지 않는다. 의심이란 귀신에 먹힌 사람들의 심리 묘사와 행동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엄청난 가독성을 보여준다. 이야기를 묵직하게 전개하지 않고 약간은 가볍지만 일상의 모습과 문제들을 보여주면서 불안과 걱정에 시달리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범인의 심리를 깊게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 살인범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면서 또 다른 방식의 범죄소설을 썼다. 공개수사를 통해 야마가미의 사건 전후의 흔적을 경찰이 쫓아가지만 좀처럼 살인 현장에 있던 ‘분노’란 단어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분노란 단어가 꿈틀거리면서 사람을 잠식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단서를 제공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불친절하지만 열린 결론으로 맺으면서 분노보다 더 무서울 수 있는 의심이란 심리를 아주 잘 표현했다. 생각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 조금 아쉽지만 다른 방식으로 만족감을 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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