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 용접공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제프 르미어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서문은 ABC의 드라마 <로스트>의 공동 원작자 겸 총괄 제작자였던 데이먼 린들로프가 썼다. 그는 이 작품을 <환상특급>에서 아쉽게도 누락되었던 에피소드 중 가장 뛰어난 이야기라고 말한다. 단순히 수중 용접공의 힘든 일상과 부성애를 다룬 그래픽노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미스터리 환상이 곁들여 있다. 덕분에 거친 그림에도 불구하고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후반부로 가면서 작가가 깔아놓은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그것을 풀어내고, 그 답 너머에 있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 와 콕 박혔다. 미스터리 환상을 바탕으로 진한 부성애를 다룬 작품이다.

 

거친 그림체를 가졌다. 주인공 잭과 그의 아내 얼굴을 보면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 30대 중반인데도 50대처럼 보인다. 이런 얼굴이 작가의 의도적인 연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겪고 있는 일상의 무거움과 힘겨움이 잘 느껴진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연출보다 비교적 간결하고 평범한 연출로 그들의 대화와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수중 용접공이란 직업에 대한 설명이나 작업 장면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처음에 예상한 수중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사건도 없다.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은 아니다. 물밑에서 발생하는 액션이나 미스터리를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빈 공간을 채워주는 이야기가 있다.

 

잭은 출산 예정일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아내의 반대도 무릅쓰고 얼음처럼 차가운 바다 속 작업장에 들어간다. 이날은 핼러윈 데이 전날이다. 열심히 일하는 그에게 한 인물이 잠수하는 장면이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해저에 회중 시계가 하나 놓여있다. 바다 위에서 그에게 통신을 보내는데 어느 순간 신호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밖에서는 그가 사고를 당했다고 말한다. 정신을 잃은 후 깨어난다. 몸에 이상은 없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머릿속은 회중 시계와 바다 속 경험들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잭의 아버지도 잠수부였다. 그런데 그는 핼러윈 데이 전날 술을 먹고 잠수했다가 죽었다. 아버지는 늘 바다 속에 가라앉은 보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혼한 후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바다로 가서 잠수하고 바다 속에서 수집한 물건을 가지고 나온다. 이 물건들 중 하나를 아들이 가지고 싶어한다. 바로 회중 시계다. 이 과거는 현재와 교차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드러난다. 그러다가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다. 현실의 벽이 무너지고 환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잊고 있던 기억을 하나씩 되살려준다. 현실의 아픔과 고통 뒤에 숨겨져 있던 비밀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

 

현재, 잭은 곧 아버지가 될 예정이다. 그의 아내가 바라는 바를 그는 실천하지 못한다. 아기 침대 조립도 도와주지 않고, 함께 조산원에게 가는 것도 시간의 흐름을 잊은 탓에 놓치고 만다. 만삭의 아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그는 채워주지 못한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사고가 났던 순간 있었던 이상한 경험이다. 이 부부의 엇나감은 가정의 불화와 불안감을 조성한다. 이미 환상에 사로잡힌 잭에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는 홀로 배를 몰고 나간다. 그리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깊은 바다 속에서 다시 한 번 더 과거의 환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뒤틀었던 진실을 마주한다.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과정 속에 잊었고 가라 앉아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낯설고 황량하고 외롭던 분위기를 깊은 바다 속 풍경과 기억을 나란히 놓으면서 잘 묘사하고 있다. “시간이 됐어”란 말을 아버지가 하고, 그 시간을 아들이 맞이할 때 꼭꼭 숨겨두었던 기억들이 단숨에 풀려난다. 하지만 바다 속에 잠겨 있던 그를 구해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다. 이 구조 뒤에 그의 머릿속을 사로잡는 것은 아내 수전이다. 그의 아이다. 집으로 달려간다. 그곳에서 그를 맞이하는 것은 그의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가슴 한 곳이 점점 따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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