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SF 걸작선들을 읽으면서 인간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거대해질 수 있는지 보았다. 그 거대함과 기발함과 환상들은 그후 읽은 작품들을 평범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를 읽으면서 기발하고 독창적이라고 칭찬할 때 이미 더 큰 것을 본 나에게 그냥 평범하게 다가왔다. 재미는 있지만 엄청난 작가로 평가받는 것에 반감이 생긴 것이다. 이번 작품도 혹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가는 거대함이나 독창적임을 강조하기보다 기묘함으로 다가왔다. 서문부터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환상, 기담으로 예상하지 못한 재미를 준다. 사실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 난해하고 지루한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모두 열네 편이 실려 있다. 서문도 하나의 이야기로 본다면 열다섯 편이다. 각 단편이 길지 않는데 그 짧은 이야기 속에 담긴 놀랍고 기묘한 이야기는 사람을 책 속으로 쉽게 끌어당긴다. <밀감>이 첫 예상과 다르게 이어지면서 기괴함을 넘어 섬뜩함을 전해주고, <아르헨티나 주교>에서도 역시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이어진다. 어느 날 거리와 상관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의 심리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지금은 모두 죽어버린 몇 작가에 대하여>에선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설명들이 정말로 그런 책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자아낸다. <착각의 나라(야푸족은 어떻게 말하는가)>는 논리와 수학의 정밀함을 추구하는 우리 삶을 비틀어 비판하고, 자연에 대한 인류의 재앙을 역설적으로 다룬 <기름 바다>는 인간의 욕망을 터무니없는 희망에 비유하고 다시 그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뒤섞인 사랑>은 정해진 일정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한 남자의 양심이 환상과 결부되어 빚어내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유럽과 기타 지역의 음악 비평 몇 편>은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생기고, 곧바로 만약 가능하다면 어떤 음악일까 하는 호기심을 자아낸다. 어쩌면 가장 읽기 편하면서 익숙한 이야기가 <살인청부업자의 추억>이다. 제목 그대로 살인청부업자의 추억을 하나씩 다룬다. 그의 직업관과 양심과 욕망이 간결한 이야기 속에서 청부대상들의 욕망과 뒤섞이면서 풀려나오는데 재미있다. <수첩>은 남의 것이 커 보이는 한 남자가 유명한 작가의 수첩에서 아이디어를 훔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데 마지막 반전이 웃음과 씁쓸함을 준다. <기상천외한 피에르 굴드>는 한 편의 콩트를 읽는 것 같다. 그 간략함 속에 담긴 유머와 해학은 순간순간 웃게 만든다. 알에 그림을 그린다는 특이한 인물보다 그가 마지막에 그린 알의 비밀과 의문이 더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 <희귀조>다. 과연 그 알의 정체는 무얼까? 혹시 박혁거세처럼 그 속에 위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멋대로 상상해본다. <영원한 술판>은 술꾼들이 외치는 즈벡에 대한 비밀을 파헤친 소설이다. 만약 이런 술이 실제 존재한다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무서운 무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과 나도 과연 마시게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마지막 표제작 <육식 이야기>는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지만 마니아의 광기와 한 통의 편지가 알려주는 사실들이 뒤섞여 낯익은 결말로 인도한다. 가끔 유럽 환상소설을 읽을 때 지루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은 아니다. 피에르 굴드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정체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지 의문이 생긴다. 기묘함 속에 블랙유머와 깊은 사색이 담겨 있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야기에 맞춰 변하는 문장은 지루함을 들어내고, 많지 않는 분량은 쉽게 집중하게 만든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있다고 하는데 그 책은 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