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국적자
구소은 지음 / 바른북스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작가 이름보다 작가가 처음 쓴 소설 <검은 모래>로 먼저 각인되었다. 이 작품은 제1회 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을 읽을 당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가독성과 재미와 역사성 등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잊고 있던 작가가 새로운 작품으로 나타난 것이다. 소개글에서 <검은 모래>의 작가란 사실을 알고 반가웠고, 주인공이 프랑스 외인부대원이란 사실이 나를 유혹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이 작품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한 가족과 개인의 역사를 현대사의 흐름 속에 녹여내면서 말이다.

 

소설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는 편지 형식을 통해 두 어머니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그 사이를 현대사로 간략하게 채웠다. 작가의 관점이 담긴 이 1부는 60년대 이후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요약하고, 그 시대 속에서 외화벌이를 위해 독일로 떠났던 두 직업군을 중심에 둔다. 간호사와 광부다. 말도 통하지 않은 먼 이국에서 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열심히 일했다. 주인공 기수의 아버지도 돈을 벌어 번듯한 집을 사고 자본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서울대 출신이었던 외삼촌도 그곳에 갔다. 그리고 그 먼 이국에서도 한국의 남녀는 서로를 찾고 만났다. 숙희와 외삼촌도 그렇게 만났다. 하지만 장밋빛 미래를 위한 과한 노동이 문제가 된다. 외삼촌이 다리를 잃은 것이다. 기수가 고모의 아들이 된 이유다.

 

아들을 아들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아이는 자란다. 두 어머니는 편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소식을 전한다. 한국의 발전상과 개발독재의 폐해를 보여주고, 그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가고 급속하게 변하는 민중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 장면들을 읽으면서 내 어릴 때 기억들이 순간순간 겹쳐졌다. 나의 무식함도 같이 떠올랐다. 경제의 고속성장은 국민의 배고픔을 없앴지만 부의 불평등과 정치 민주화 욕구를 키워주었다. 아직 어린 기수와 일반 시민 가정에게는 큰 일이 아니다. 정작 큰 일은 큰돈에 대한 욕심과 친구에 대한 믿음으로 생긴다. 사기로 힘겹게 쌓아올린 가족의 재산이 사라진다. 이 일이 기수를 프랑스 외인부대로 가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함이 없이 자란 기수가 대학을 포기하고, 알바의 세계로 뛰어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집안의 몰락이 있은 후 결혼한 두 누나는 자신들의 몸만 쏙 빠져나갔다. 특전사를 제대한 후 조폭의 보디가드가 되지만 누명을 쓴 채 외국으로 달아난다. 그 사이에 불행이 또 하나 있다. 언제나 불행은 소리 없이 다가와 오랫동안 머물다 떠난다. 2부는 바로 기수가 박희준이란 이름으로 한국을 떠나 프랑스 외인부대원이 되고, 그가 경험한 일을 다룬다. 여기서는 한국의 정치 상황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수가 겪은 프랑스 자본주의의 민낯이 더 부각된다. 외인부대의 파병지들이 프랑스의 이익을 대변하는 곳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장신자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을 발견한다.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강한 생활력과 굳은 의지를 가지고 나아가는 모습 말이다. 그녀가 기수의 친모에게 보여주는 애정과 관심은 안타까움과 공감에서 비롯한 감정 때문이다. 잘만 되었다면 자신의 가족이 되었을 테다. 이 두 여인의 편지는 절제된 감정이 담겨 있다. 그 중심에 기수가 있다. 편지는 기수의 비밀을 알려주는 동시에 파독 간호사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려준다. 지금과 너무나도 다른 환경이라 그들이 겪었을 외로움과 그리움이 가슴 깊은 곳까지 와 닿지 않는다. 장신자의 마지막 편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반응이고 배려이지만 기수에 대한 아픈 미련을 가진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매몰차다.

 

지수를 중심에 둔 이야기지만 이 소설 속에는 한국 현대를 살아온 우리의 부모님들이 있다. 지수가 외인부대를 제대한 후 파리 한인사회의 비리 등을 까발리는 것도 우리 삶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삶에 깊이 들어갔지만 하나의 사건을 중심에 놓기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이 어떻게 흘러가고 변하는지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마지막 어머니의 편지는 순간 울컥하고 먹먹하게 만든다. 그 여백은 채워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상상력이다. 간결하게 그려진 기수의 삶을 보면서 긴 세월이 지난 나의 삶을 잠시 돌아본다.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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