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Company 500 : 세계 명문기업들의 흥망성쇠 CEO의 서가 1
래리 슈웨이카트 & 린 피어슨 도티 지음, 장세현 옮김 / 타임비즈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고전이 된 아리기의 ‘장기 20세기’는 미국이 어떻게 패권을 잡게 되었으며 어떻게 패권(hegemony)을 잃어가는가 란 질문에 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 책이 쓰인 1994년은 미묘한 시점이었다. 역사의 종말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로 미국의 징치, 군사적 패권은 정점에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황혼인 것으로 보엿다.

그 시점에서 아리기는 세계경제의 패권자(hegemon)로서 미국은 현재 어떤 상태에 있으며 앞으로 패권의 향방은 어디로 갈 것인가 란 질문을 던졌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아리기는 자본주의가 시작된 13세기 이탈리아까지 거슬러 올라가 20세기까지 내려오는 장대한 탐색을 시작한다. 그 탐색의 결과 아리기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일반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경제를 세계경제로 이해할 때 세계경제의 패권은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스페인으로, 네델란드로, 영국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옮겨졌다. 아리기는 이러한 패권의 이동의 메커니즘에 대한 일반이론을 제시한다.

패권국이 시장을 확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한 그 패권국의 지위는 유지된다. 그러나 그 패권국의 시장확대능력이 한계에 이르면 이윤율저하 경향이 나타나면서 시장에 자본은 더 이상 투입되지 않는다. 아리기는 (맑스보다는)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따라 이윤율저하 경향이란 시장의 규모에 비해 자본의 총량이 커질 때 일어난다고 본다. 단순한 나눗셈의 문제란 말이다. 시장이 확장될때 자본은 M-C-M의 정상적인 순환을 따른다. 그러나 이윤율저하 경향이 나타나 자본이 시장에투입되지 않을 때 순환은 M-M의 사이클을 따르게 된다. 다시 말해 물질적 확장은 멈추고 금융확장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이 시기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에드워드 시대에 해당한다.

패권국이 더 이상 세계경제를 확장할 능력을 보이지 않을 때 패권의 붕괴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패권이 붕괴하는 혼란기에 패권의 그늘에 있던 후보가 정상으로 등극하는데 이 후보는 패권국이 할 수 없었던 시장의 확대를 가능하게 하는 다른 조직구조를 가진다. 아리기에 따르면 미국이 패권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의 패권이 해결할 수 없었던 시장확대의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조직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리기는 그 조직구조를 챈들러가 말한 경영혁명이라 말한다.



“As Chandler has shown, the internalization within a single organizational domain of activities and transactions previously carried out by separate business units enabled vertically integrated, multi-unit enterprises to reduce and make more calculable transaction costs – costs, that is, associated with the trasfer of intermediate inputs through a long chain of separate organizational domains connecting primary production to final consumption. The economies thus created were ‘economies of speed’ rather than ‘economies of size’” (Giovanni Arrighi)

이책은 700페이지가 넘는 두께에 어울리게 식민지시대부터 21세기까지 400년이 넘는 미국경영사를 다룬다. 저자들은 나름 각 시대의 특징과 그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기업들의 사례를 보여주면서 요령있게 그 긴 기간을 정리하지만 400년이란 시간을 생각하면 700 페이지는 결코 충분한 분량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은 한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그 시간을 정리한다: 챈들러가 말하는 경영혁명이 왜 미국에서 일어났는지 그 혁명이 어떻게 변해갔는가.

독립 이전 미국은 농업중심의 경제였다. 식민지 시절 미국은 영국의 삼각무역의 한축을 담당하면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서인도제도에 식량 등의 생필품을 팔아 번 돈으로 영국에서 공산품을 수입했다. 그러나 독립 이후 삼각무역의 시스템이 무너졌고 미국은 영국에서 수입하던 제철, 섬유 등의 물품을 자급하면서 산업화가 시작된다.

산업화와 맞물린 도시화는 “규모의 경제를 가능케 하여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다. 1810년까지만 해도 14명중 13명이 시골에 거주했을 정도로 도시화가 미미했지만 인구의 집중으로 발생한 시장효과는 제조업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수요가 보다 광대해지면서 이전엔 장인들만 만들던 물품을 제조업자가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이는 규모의 경제로 이어졌다. 생산량을 늘려 물품의 단위당 생산비용을 낮춤으로써 높은 수익을 유지할 수 잇었고 이를 통해 미국기업가들은 박리다매의 이점을 습득햇다. 또한 도시화는 한 주요 사업체 가까이에 그와 고나련된 다수의 부수적 사업체가 모여드는 현상을 야기했다.”

클러스터링은 기술과 조직 상의 발전을 촉진했다. 예를 들어 “휘트니는 일정한 규격의 부품 이용(프랑스에서 차용), 대량생산(아크라이트와 모즐리에게서 차용), 단순한 디자인(휘트니 본인의 아이디어0이라는 세가지 요소를 받아들엿다. 이 요소가 ‘미국식 제조업’의 토대를 형성했다. 정확한 수치에 따라 규격화된 금형을 사용하는 휘트니의 방식은 숙련되지 않은 노동자들가지 모두 장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동력기계가 대량생산의 한 축을 담당했다면 부품의 규격화를 통해서는 호환성이 확보되었다. 휘트니가 너스킷 총 제조를 통해 구현한 새로운 제조업 방식은 북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가 발명한 조면기로 남부는 ‘목화 단일경제’로 이행할 수 있었으며 수익성 있는 노예제도를 영구화할 수 있었다. 사실 초대 대통령을 제외한다면 신생 미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자리 잡는데 휘트니만큼 공헌한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세기초에 이미 미국은 기술적으로, 특히 제조공정에 있어 영국을 능가했다. 미국에서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도 노동력 부족때문이었을 것이다. 식민지 시절에도 미국의 생활수준은 영국보다 앞서 있었다. 노동력이 부족해 임금이 높은 이유가 컸다. 귀한 노동력을 대체하려는 인센티브가 충분했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알프레드 챈틀러가 ‘보이는 손’에서 제기한 명제, 즉 1850년대에 이르러 철도의 등장과 함께 ‘경영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수직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명제를 인정해왔다. 그러나 그 주장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철 생산과 출판, 적어도 이 두 가지의 주요 영역에서는 철도가 등장하기 한참 이전부터 수직적 통합의 징후가 드러났다. 뉴욕에서는 상인들이 철을 비롯한 철 제품을 취급하는 사업을 확장해 생산, 보관, 운송, 판매를 아우르는 정교한 시스템을 개발해 철 생산이 활발히 이뤄졌다. 제철 회사들은 이미 1800년대 초반에 공장을 통합하고 회사 소유권을 주주들에게 분배했다. 이로써 제철회사는 소유권과는 무관한 전문 경영인ㄴ을 고용한 ‘초기 기업군’에 속하게 되었다. 1850년대에 이르러 출판업자들은 제철업자들이 실행애쑈던 혁신을 채택했다. 통합된 공장 시스템을 개발하고 (챈들러적 의미의) ;경영자적 관점’에서 시장을 통제햇다 편집, 인쇄, 제본, 보관, 운송, 소매, 도매 등이 한 군데에서 처리되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저술과 활자 주조까지 해결했다. 미국에서 기업 활동이 발달한 것은 철 제조업과 출판업 등의 초기 기업들이 변화의 밑바탕을 다져놓은 덕분이엇다. 그리고 훗날 등장한 철도산업이 이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본격적인 변화의 파도가 밀려왔다.”

저자는 18세기 초반에 제조공정의 혁신에서 얻은 기술적 수익과 제철업과 출판업에서 등장한 새로운 구조적 수익 두가지가 챈들러가 말하는 경영 혁명의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교통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동이 불편했고 운송비용도 높았다. 자연히 18세기 초의 기업들은 소기업 중심일 수 밖에 없었고 기술적 수익과 구조적 수익을 제대로 실현할 효율성을 갖우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이 바뀐 것은 운송혁명과 함께 전국시장이 형성되면다. “도로, 운하, 철도 네트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지리적으로 먼 지역ㄱ들이 긴밀히 연결되엇다. 정보의 흐름은 과거 어느 때보다 신속해졌고, 이동 거리가 짧아지면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지불해야 할 대가도 낮아졌다.” 운송혁명과 함께 우편 시스템, 신문/잡지, 전신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툴 덕분에 전국시장이 만들어질 조건이 갖춰진다.

남북전쟁 이전까지 미국의 전형적인 기업은 “소유자-창업자가 운영하는 ‘기업가 본위 회사’”였다. 그러나 “지리적 확장과 인구 증가로 인한 국가 규모의 호가대로 점차 대중 시장이 도래함에 따라 개인 운영으로 성공을 거두는 기업가는 극히 드물어졌다. 또 철도, 증기선, 전신 등에 의해 거래 속도가 단축되면서 회사 소유자가 단독으로 경영을 하기는 한층 더 어려워졌다.

이전보다 규모가 커진 기업은 다수의 투자자를 통해 자본 수요를 충족했다. 그에 따라 회사 지분이 회사와 직접적 관계가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넘어갔고 결과적으로 전문경영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더 이상 ‘야망’과 ‘비전’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시대가 되엇다.”

“1800년대 중반, 세가지 요소가 결합해 새로운 ‘기업 운영체제’가 탄생햇다. 세 요소란 거래, 통신, 이동의 ‘신속화’, 종업원 수와 자본 수요를 포함한 ‘회사규모의 성장’, 수천 Km에 걸친 ‘운영범위의 확대’ 등이었다. 이로써 더 이상 회사 운영에 오너가 단독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통제하기란 불가능해졌다. 기업은 수천 명의 직우너을 고용하여 세개의 표준 시간대와 10여개의 주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기업은 서로 얼굴도 모르는 수천명의 주주들이 공동으로 소유하게 되었고 회사 운영책임은 전문경영인에게 넘어갔다.”

기업의 시스템은 갈수록 관료제를 닮아갔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챈들러는 경영혁명을 규모의 경제가 아니라 속도의 경제라 부른다. 관료제란 정보의 유통을 위한 시스템이다. 대륙 단위의 시장을 다루려면 방대한 정보가 효율적으로 처리되어야 하며 그런 정보의 흐름을 위해 기업은 관료제를 구축해야만 했다.

일단 관료제를 구축해 속도의 경제가 실현되면 이는 막강한 진입장벽이 되었다. “Even in industries in which techniques of mass production were crucial to business success, organization rather than technology came to constitue the real barrier to entry: The most imposing barrier to entry was the organization the pioneer had built to market and distribute their newly mass-produced products. A competitor who acquired the technology had to create a national and often global organization of managers, buyers, and salesmen if he was to astride the major marketing channels, Moreover, where the pioneer could finanace the building of the first of these organizations out of cash flow, generated by hign volume, the newcomere had to set up a competing network before hign-wolume output reduced unit costs and created a sizeable cash flow. And he had to do this while facing a competitor whose economies of speed permitted him to set prices low and still maitain a margin of profit” (Chandler)

미국이 대기업 시스템을 구축할 때 영국은 여전히 소기업 중심의 경제였다. 아리기는 바로 이것이 미국이 영국을 대신할 수 있었던 이유라 말한다.

조직혁명은 조직 자체가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었고 챈들러가 말하듯 scale and scope, 즉 규모의 경제를 가능하게 했다. 미국식 경영시스템은 19세기 후반 자본주의 경제를 괴롭혔던 이윤율저하 경향에 대한 해답이었다. 이윤율저하 경향은 근본적으로 경쟁의 문제이다. 자본총량이 시장이 수용할 수 있는 양보다 많아져 자본간의 경쟁이 격화되고 그 결과 이윤율이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떨어지는 현상이다.

미국식 경영시스템은 진입장벽을 세우고 속도와 규모의 경제를 통해 효율성을 높여 경쟁을 돌파하는 해답이엇다.

“당시 미국의 대기업들은 심대한 기술혁신과 조직혁신의 장이었으며 이는 경영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 두가지 중요한 측면은 한편으로는 피라디드 형태의 위계조직을 구성한 고아대한 일반 경영진과 노동자의 등장이었고 다른 판편으로는 테일러주의와 조립라인 등 작업장 수준에서 일어난 변화엿다. 사실 경영자와 노동자층의 형성이 경영의 모든 측면에서 진정한 혁명을 가능게 했다. 이는 (유동자산과 자금조달)의 금융관리와 함께 재고관리와 상거래의 수행을 통한 작업장 수준에 변화를 가져온 넓은 의미의 경영혁명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우선 철도와 통신부문에 영향을 미쳤고 이후 몇십년ㄴ에 걸쳐 점차 전 산업과 상업(새로운 형태의 대중 마케팅)과 금융에까지 확산되었다.” (제라르 뒤메닐, 도미니크 레비)

저자는 이런 흐름의 선두주자를 록펠러와 카네기로 꼽는다. 록펠러와 카네기가 자신들의 제국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생산성을 높여 단가를 낮춰 시장을 장악하는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시장은 지배해야 할 대상이지 자신들을 지배하는 신의 손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시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던 기업이 이제 경영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영을 중시하는 새로운 유형의 회사들은 외부와의 경쟁보다는 내부통제를 통한 ‘효율성 증진’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대신 경영자의 보이는 손(Visible hand)이 지배하는 챈들러의 세계에서 관료가 된 경영자들은 기업가 정신과 리스크 감수를 안정성과 보수성으로 바꿔놓는 경향이 있었다.

1차대전과 2차대전의 전시경제에서 정부관료와 기업관료들은 서로 궁합이 잘 맞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정부든 기업이든 관료는 “그 속성상 통계에 입각한 통제와 안정성을 중시”한다. 전쟁과 뉴딜로 정부의 영향력이 확대될 때 기업과 정부는 서로에게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전후 세계경제는 경영혁명과 케인즈주의를 내세운 혼합자본주의라는, 시장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지배하고 길들이려는 시스템이 지배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부터 이윤율저하 경향이 다시 나타난다. 경영혁명의 수명이 다되어간다는 증거였다. 19세기 이후 꾸준히 증가해온 생산성이 정체되고 이윤율은 낮아졌다.

“1960년대가 되자 한때 미국기업들에게 국제적 우위를 부여했던 조직 구조는 이제 혁신과 유연한 변화에 장애가 되었다.” 포드에서 “맥나마라가 중용된 것은 1960년대 후반에 미국 기업을 휩쓴 개로운 경향을 감안할 때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재무통과 숫자통이 마침내 생산통을 밀어내고 기업 내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자동차 산업만큼 경영 위계제도가 뚜렷한 분야는 없었다. 자동차회사들은 사업부 책임자들을 제조업 외무에서 영입해 회사의 통제권을 맡겼다.

그러나 대다수 재무나 회계 출신 경영자들은 자동차에 대해 즉 무엇이 자동차 산업을 움직이는지 무엇 때문에 소비자들이 자동차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인 무엇 ㄸ매누에 사람들이 자동차를 사는지 이해하지 못햇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0년대에 이르자 다수의 회계, 재무 궈너위자들은 애당초 재무와 회계 부서가 있는 이유를 망각하고 그와 반대되는 행동을 햇다.

초기 철도회사들은 자본 수요가 대단히 높았던데다 철로와 차량의 노후와에도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계획부서를 두었다.” 재무와 회계는 그 계획의 수단으로 도입되었다. “철도회사들은 재무 영역을 ‘투자를 관리하는 곳’으로 간주했으며 카네기는 오늘날 ‘원가회계’라 불리는 회계방식을 적극 활용했다.

그러나 1800년대 후반 이루어진 경영의 전문화는 20세기 초에 예기치 않은 영향을 미쳤다. 경영자들은 투자와 회계에 특화된 교육을 받았고 회사에 들어와 그런 업무만 담당했ㄲ다. 그들은 밑바닥부터 시작해 회사의 다양한 업무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생산과 제조가 다른 분야와 분리되면서 경영진은 기업에 필요한 혁신과 투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나타났다.

재무 회계부서의 부상은 경영에 또 한가지 영향을 미쳤다. 소유권이 대중에게 분배된 회사는 주주에게 이익을 제공하고 어느 정도 정기적으로 배당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었다. 주가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해지면 경영진은 장기 이익보다는 단기 이익을 낼 수 있는 전략을 채택할 수 밖에 없다.

챈들러가 제시한 경영 위계제도의 특징은 경영 혁명 이후 첫 80년동안 각 사업부 사이의 균형이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1960년대에는 그런 균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재정부문이 통제권을 획득한 것은 증권시장에서 단기적 성과를 요구한 것과 정확히 같은 시기였으며 그 결과 자동차 산업은 근시안적 사고와 품질저하의 악순화에 빠졌다.”

이런 문제는 자동차 산업만이 아니었다. 경영혁명을 주도한 거의 모든 산업들이 같은 병을 앓았고 경영혁명을 주도했던 미국의 제조업은 70년대 이후 몰락의 길을 걷는다.

미국의 경제가 다시 르네상스를 맞은 것은 과거 경제를 지배했던 경영 위계제도 밖에서 성장한 기업들 때문이엇다. IT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IT 기술은 전통적 대기업들이 조직구조를 바꾸는 수단을 제공하면서 90년대의 르네상스가 가능하게 했다. 전통적 대기업의 “경영진은 회사규모를 축소하고 경영 위계제도를 구성하는 관료층을 제거하는 작업을 통해 변화를 꾀했다.”

“1990년대에 존재앴던 불안의 상당 부분은 1980년대에 시작된 급격한 변모에서 기인했다. 대기업들은 큰 힘을 가지고 상당수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듯 보였으나 그들은 221세기 경제에서 ‘공룡’이 될 가능성 즉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거대한 몸집으로 비틀거리다 결국 더 작고 빠른 동물과의 생명을 건 싸움에서 패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들이 생존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주요 희생자는 오랜 기간 그들에게 힘이 되엇던 ‘경영 위계제도’인 것으로 보엿다. 국의 기업은 챈들러가 찬양한 바로 그 관료제 때문에 몸집이 비대해졌고 그 결과 더 이상 신흥시장의 등장이나 수요의 급격한 변화에 신속히 대응할 수 없었다. 기업들은 놀라운 다운사이징을 감행하고 자동화와 컴퓨터를 이용하여 효율성을 제고했다. 기업들은 말 그대로 몸집을 줄여 수익을 냈다. 이와 동시에 전통적 경영 위계제도를 버리고 톰 피터스 같은 인기 컨설턴트나 드러커 같은 경제저술가들이 높이 평가한 독특한 구조를 채택하며 과거와 다른 새로운 경영방식을 추구햇다.”

‘이와 같은 변화가 낳은 결과 중 하나는 미국의 ‘생산성 향상이었다. 또 다른 결과는 1990년대 일어난 실로 놀라운 투자 붐이다.”

19세기의 경영혁명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80년대 이후 다운사이징, 리스트럭처링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새로운 경영혁명은 효율성을 제고해 생산성을 높이고 결과적으로 60년대부터 시작된 이윤율저하 경향을 끝낼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의 구조적 위기의 종언과 20세기 후반의 구조적 위기의 종언은 똑 같은 과정이 두 번에 걸쳐 진행된 형태를 취한다. 20세기 초에 나타난 위기의 첫번째 극복기간에는 생산체제가 경영혁명으로 불리는 최초의 격변을 겪었다. 경영혁명은 새로운 기술과 조직을 서로 상호작용시키며 확립했고 작업장과 생산의 성걱을 근본적으로 바꿨는데 그 영향이 미친 범위는 더욱 넓어서 기업활동의 모든 측면을 변화시켰다., .이것이 우리가 ‘경영’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다. ㅜ20세기 후반의 몇십년 동안에도 주요 변수(생산성이나 자본 대 노동 비율)의 관점에서 보면 비슷한 영향을 가져다준 발전이 나타났다. 다시 그 본질은 경영의 진보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이는 이제 정보통신기술에 기초한 생산과정의 고도화와 연관이 있다. 이러한 진보와 생산, 유통,금융을 조직하고 비용을 줄이는 능력의 효율성을 향상시켰다. 더욱 개ㅛ선된 경영이 그 원칙을 스스로에게 적용해 그 성과가 더욱 개선되었다.” (제라르 뒤메닐, 도미니크 레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 진정한 개인의 행복을 찾은 동양 지식인들의 내면 읽기
김시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음악의 모티브가 그렇듯, 책의 첫머리는 그 책의 톤을 결정하게 마련이다. 논어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얼핏 보면 논어는 두서없이 되는대로 그러모은 잡탕 어록으로 보인다. 그러나 엄연히 논어에도 편집자가 있고 편집자의 의도가 있다.

논어의 첫머리에 학이시습지로 시작하는 구절을 놓은 것은 되는대로 하다보니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첫장이 책 전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편집자는 그 장을 머리에 놓은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학이편 1장을 어떻게 주석하는가를 보면 주석자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학이 1장에 대한 주석으로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리쩌허우와 박재희의 해석이다. 그중에서 박재희의 해석은 1장을 논어에 대한 선언적 의미로 읽는다.

박재희는 공자의 생애에서 보거나 중국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을 세운 목적에서 보거나 그리고 그에게 배우려 한 제자들의 목적으로 보나 1장은 공자학당의 정치적 선언서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학이시습지에서 학의 대상은 당연히 정치학이 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방법이 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음 구절 '유붕이자원방래'에서 붕은 불알친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뜻을 같이 하는 정치적 동지를 말한다. 곳곳에서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오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세번째 인부지이불온 은 그 정치적 뜻의 좌절을 말한다. 남들이 우리의 정치적 뜻을 알아보고 써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우리는 분노하고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는 군자니까!

논어의 모든 구절이 그렇듯 박재희의 1장 독해만 정답일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적 맥락에서 1장을 읽어야 한다는데는 누구도 반대하기 힘들다. 소라이가 말하듯 논어는 제도사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박재희의 독법이 맞다면 논어의 근본 구분은 군자/소인이 된다.

군자의 원래 의미는 귀족을 말했다. 공자가 말한 군자나 그 이전의 군자나 모두 정치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공자가 재정의한 군자는 자리에 걸맞는 능력을 갖춘 자이다. 큰 자리에서 "큰 것을 쓰는 만큼 그에 맞는 인격이 따라야 하고 큰 것을 쓰는 만큼 그것을 쓰는 사용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논어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큰 사람인 군자는 작은 사람인 소인과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공도자가 물었다.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큰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작은 사람인 것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큰몸(大體)을 따르면 큰 사람이 되고 작은 몸(小體)을 따르면 작은 사람이 된다.

공도자가 물었다.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큰 몸을 따르고 어떤 사람은 작은 몸을 따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귀와 눈의 기능은 생각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외부의 사물에 의해 가려진다. 귀와 눈이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면 귀와 눈은 외부 사물에 이끌려가게 된다. 이와 달리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데 있다. 생각하면 도리를 이해할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도리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ㅁ마음은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그 큰 것을 확고하게 세우면 작은 것이 큰 것을 빼앗아가지 못한다. 이거쇼이 큰 사람이 되는 까닭이다." 맹자 - 고자 상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멋진 말이다. 인간의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생각한다는 것만 남는다면 그는 인간이란 말이다. 데카르트의 이 말은 이후 서양철학의 톤을 결정햇다. 인간은 이성의 존재이고 이성의 존재이니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다르게 규정한다. 인간은 언제나 어떤 감정의 톤을 갖는다.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도 그 감정의 일종이다. 합리적 존재자라 하지만 그 합리성이란 특수한 감정의 일종일 뿐이다. 하이데거 식의 인간 이해는 동양에선 적어도 중국에선 낯설지 않다.

"혜시가 말했다. 사람이면서 정이 없다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장자가 말했다. 도가 사람에게 얼굴을 주고 하늘이 사람에게 형체를 주었는데 어찌 사람이라 아니 할 수 있습니까?

혜시가 말했다. 이미 사람이라고 한 이상 어찌 사람에게 정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장자 - 덕충부

여기서 情이란 초코파이의 정이 아니다. 희노애락의 칠정, 감정을 말한다. "고대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생각한 '정'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었다. 아니 '정'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었다."

"'性'이란 타고난 경향이요 情이란 그 性이 움직이는 바탕이요, 欲은 情의 사물에 대한 감응이다." 순자 - 정명

순자의 정에 대한 정의이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지향성은 흔히 불교에서 말하는 欲으로 해석된다. 현상학에서 인간의 의식은 언제나 무언가 대상을 향한다. 그것이 외물이든 내물이든 항상 어떤 대상을 지향하는 것이 인간의식의 본질이다. 의식을 이렇게 정의하면서 훗설은 칸트의 물자체란 딜레마를 해소해버렸다. 하이데거는 지향성을 불교적인 欲으로 재해석하면서 지향성의 본질을 감정, 또는 중국식의 情으로 재정의했다.

그러나 고대중국에서 정은 문제가 된다. "정이란 모든 외물에 대해 감응하는 몸의 반작용 모두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 외물에는, 적어도 사람에게는, 두가지가 있다. 심리학이 말하는 식으로 하자면 인간에게 외물은 그냥 외물과 사람이 있다.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 또는 7정은 파충류 시절부터 내려온 본능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본능을 진화했다. 동정심같은 것이 그것으로 맹자가 말하는 4단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듯 7정만 있다면 인간은 이기적 차원에만 머물러 사회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동물로 진화한 인간은 이타적 차원을 갖게 되었고 이 역시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性은 7정과 함께 4단도 포함한다는 맹자의 말은 옳다.

문제는 4단이 7정보다 약한 본능이란 점이다. "신유학에서 말하는 이기론 혹은 성정론은 결코 이성 대 감성 혹은 이성 대 욕망의 처절한 투쟁의 기록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오히려 똑같은 정인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대한 논의다. 즉 보다 문화적(사회적이라 보는 것이 옳겠다)으로 고양된 감정(理-4단)을 키워 상대적으로 원초적이고 격렬한 정(氣-7정)이 초래할 수 있는 부조화를 극복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안은 성인에게는 희노애락의 정이 없다고 하는데 그 논의가 매우 치밀하였다. 종회 등 당시의 유명한 논자들이 모두 하안의 학설을 추종했다. 그러나 왕필은 이에 동의하지 안고 성인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것은 神明이고 보통 사라과 같은 것은 五情이라고 하였다. 신명이 뛰어나기에 늘 마음이 조화로워 어떤 상태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오정이 같으므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없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지닌 정은 다른 사람처럼 감응흐면서 그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얽매이지 않는 것을 감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 생각했다." 삼국지 -하소왕필전

왕필은 논의는 맹자가 군자(성인)와 소인을 구분한 논리와 연결된다. 소인도 군자도 자신의 정에 충실하게 산다. 저자는 소인이든 군자든 자신을 위해 살기에 모두 이기적이라 말한다. 그러나 군자와 소인은 이기적으로 사는 방식이 다르기에 구분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사람들은 제 몸을 위해(爲己) 공부했는데 요즘 사람은 남을 위해(爲人) 공부한다." 논어 - 헌문

공자는 위기 즉 이기를 위인 즉 이타보다 더 좋은 것으로 말한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주자는 이 장을 이렇게 풀이한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공부하는 것이고 남을 위한다는 것은 인정받으려고 공부한다는 뜻이다."

"우리 같은 소인들에게는 뜨끔한 이야기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오로지 출세와 취직을 위해 공부하는게 우리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주희의 성리학은 다른 말로 도학 혹은 성학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성학이란 곧 위기지학 즉 스스로가 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고자 하는 학문을말한다. 그런데 주희는 성학의 교본이라 할 '근사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대부가 닦아야 할 학문이다' 공자가 말하는 위기지학이란 바로 국가의 관직에 있는 사람 혹은 적어도 그런 위치에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닦아야 하는 것이다."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이라 해서 테레사 수녀같은 이타적 인간이 되기 위한 학문이 아니란 말이다. "동아시아 전통에는 오늘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대립이란 없다. 이타적이란 말은 사실 보통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우리가 공자나 주희, 퇴계나 율곡 같은 인물을 성인이라 추앙하겠는가." 테레사 수녀같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이들은 우리 소인들과 달리 '자신을 위하는' 방법마저도 우리와 달랐기 떼문이다".

"그런데 이런 걸 두고 이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시커먼 중형차 안에 계신 분께서는 '이기적'인 게 아니라 '몰상식'한 것이라거나 '방종'한 것이고 해야 한다. 법률적으로는 '위법'이라ㅏ고 하는게 맞다. '이기적'이란 말을 그렇게 쓰는 것은 무식한 것이ㅏㄷ.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이기주의'는 근대 서구문명의 치초가 되는 대단히 의미있는 사상이다.

이기주의를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해라고 읽어서는 안된다. 자기 혼자만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기주의자와는 관계없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우주로 내보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공자나 그를 추종한 유학자들이 '수많은 몸들의 집합'인 백성을 위해 스스로 성인이 되어 올바른 인간의 길을 열려고 한 것은 그러한 개개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윤리학적 이기주의'라고도 볼 수 잇다. 그것이 지금 우리식의 표현으로는 ';큰 사람의 이기주의'이며 그런 노력과 실천을 공자는 '위기'적이어야 한다고 표현했다."

이렇듯 공자는 이기주의에 대해 부정적이 않았고 소인을 소인답게 하는 利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공자가 주자가 소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할 때도 많았다. 그건 무슨 이유였을까?

"인간은 누구나 이로운 것을 추구한다. 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이익을 대부는 자신의 집안을 그리고 선비와 서민은 제 한 몸의 이익을 생각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왕이나 대부의 지위에 있으면서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공자나 주희가 '소인'을 극단적으로 욕했던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다. 대인의 자리에 있으면서 소인철럼 사는 인간을 욕햇던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도 소인의 시대인 지금도 (대인을 위한 책인) 논어가 쓸모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소인은 소인을 잘 알아본다. 그리고 소인이 대인의 자리에 앉았을 때 대인이 어떻해야 하는가를 논어를 보며 알자는 것이다. 우리는 소인이 대인인 척하며 산 장구한 역사를 겪어왔다. 무능한 군자, 덕도 없는 군자, 다시 말해 소인에 불과한 위군자들. 그런 자들을 알아보고 그런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논어를 보며 배우자고 저자는 말한다. 바로 아래와 같은 경우 때문에 저자는 지금도 논어를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의 유학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라의 중추인 지식인이자 예비 관료들인 유생들이 직업이 없었다.! 선비는 장사를 할 수도 없었고 물건을 만들어 팔 수도 없었다. 농사도 사대부의 할일은 아니었다. 율곡이 해주에서 생계를 위해 호미를 만들어 팔았을 때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율곡의 선택은 그만큼 예외적이었고 체모가 손상되는 일이었다.

貧富有命이니 貨利에 有情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자기 검열과 사회적 시선으로 의식해온 사람들이다. 그 빈자리는 아내들이 감당해야 했다. 바느질과 길쌈. 식구들의 밥을 벌기만 했는가, 봉제사 접빈객에 가정의 경제를 도맡아 하느라 주부의 수명이 단축되었다. 아내가 죽으면 상실의 그리움보다 고생시킨 회한 플러스, 앞으로 식구들 데리고 살 일이 막막하여 슬피 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을 스스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적은 기록도 숱하다. 식솔을 팽개치고 세운 도덕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선비들도 직업을 가졌어야 했다. 다산은 헛기침을 접고 학당이라도 열어 아이들이라도 가르치라 권했다. 사대부들의 유일한 직업은 정치와 행정, 즉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관료가 되는 것도 떳떳한 직업이 아니다. 우선 누구도 거기 취직할 자격을 갖추기 힘들었다. 과거가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아니다. 거기 사적 관심과 이해를 철저히 배제한 성인의 인격을 갖추어야 했는데 ‘내가 그렇다’고 나설 파렴치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 높은 기준으로 다른 집안. 다른 지역, 다른 당파 사람들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직에 임하는 그 포부의 스케일이 자못 컸다. 사대부가 정치라는 직업을 맡는 취지는 자잘한 사무를 처리하고 제도를 가다듬는 데 있지 않고 ‘이 땅에 인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요순의 시대’를 재현하는 데 두었다. 이 이 험준함 때문에 자부가 심하고 명망이 무거운 사람일수록 정치라는 직업을 택하기를 꺼렸고 물러나 비판에 주력하는 것으로 책임을 대신했다.

그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정치’에 취업한 사람들은 정작 그 직책에 걸맞는 지식과 기술이 부족했다. 이 실무적 노하우는 주자학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주자도 짧은 기간 행정을 맡았지만 그는 주로 재야에서 당대의 군사적 정치적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한 사람이다. 건설에 필요한 학문과 비판에 필요한 학문은 서로 다르다.

사대부들은 본령인 정치에 나아가서도 군사나 재정, 생산에 관련된 업무를 맡기면 체모를 깎는다 하여 화를 냈다. 그들이 선호한 직책은 세자의 교육이나 임금과의 학문 토론 그리고 정무에 대한 비판이었다. 훈수하기는 얼마나 신나겠는가. 밖에서는 천하를 들었다 놓을 수 잇지만 안에서는 반걸음을 떼기도 험난하다.

그 진흙탕에서 뜻있는 사람들은 혹은 다치고 혹은 절망하여 한사코 물러나고자 했다. 물러나면서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이 같은 ‘은둔 권위주의’는 그들이 추앙하는 만세의 성인 공자의 지향과는 아무래도 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의 도통은 항거자와 은둔자를 축으로 하여 이어져왔다. ‘무능과 도덕은 자주 이웃한다!’ 山林이란 이런 재야 군자들의 집합적 이름이었다. 이상을 외치고 도덕을 선점한 사람들이 정치에 개입할 때 그 폐단은 상상외로 심각하다. 무능한 ‘군자’가 권력을 주리 때의 위협과 혼란을 직접 겪은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소인은 물정에 밝지만 군자는 사리에 어둡기 쉽다. 사람들은 소인이 나라를 그르친다 알지만 군자가 더 큰 병폐를 끼친다는 것을 모른다. 소인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은 바로잡을 수 잇지만 군자가 재주도 덕도 없이 당면한 현실에 어둡다면 나라에 독을 끼치는 것이 누구나 알 숭 ㅣㅅ는 소인의 폐단보다 더 심하다.’” (한형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제학의 배신 - 시장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라즈 파텔 지음, 제현주 옮김, 우석훈 해제 / 북돋움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매년 미국에서 팔리는 빅맥은 5억 5000만개이다. 이 빅맥을 만들기 위해 2억 9700만 달러의 비용이 들고 12억 킬로그램의 CO2가 배출된다. 탄소 배출 말고도 물 사용과 토양 파괴 드으이 더 폭넓은 환경영향도 추가할 필요가 있겠다. 게다가 당뇨병과 심장병 같은 식단 관련 질병의 치료를 위한 건강비용도 추가해야 한다.

이 비용 중 어느 것도 빅맥의 판매 가격에 반영되지 않지만 누군가는 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문제는 맥도널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우리가 환경 재난 비용, 기후변화로 인한 이주 비용, 더 놓은 보건의료 비용 등을 부담하게 된다.

다른 비용은 모두 제쳐놓더라도 숲의 나무를 모두 베어버린 땅에서 사육된 소의 고기로 만든 햄버거의 값은 족히 200달러는 나가야 한다. 200달러란 수치가 터무니없게 들릴지 몰라도 사회 전체에 끼치는 비용을 고려하면 4달러짜리 빅맥을 만드는 데 드는 돈은 오히려 그보다도 높을지 모른다. 기업은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할 비용을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종 다양한 보조금가지 받아 챙기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비자는 자신이 내는 세금으로 값싼 햄버거에 들어간 비용을 치르고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200달러 가치의 햄버거에 4달러를 붙이는 '시장 메커니즘'이 과연 제대로 작동하는 것인가 묻는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의 대주제는 두가지이다: 성장과 분배.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란 말로 시장 메커니즘을 설명한 이래 경제학에선 시장이 가장 효율적으로 자원을 분배하는 최상의 제도라 말해왔다. 그러나 저자는 그 시장이 가격을 결정할지는 몰라도 가치와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어떻게 200달러짜리 햄버거가 4달러에 팔릴 수 있는가 묻는다. 그 답은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다.

"시장은 시장을 둘러싼 사회에 결부(원어는 embedded로 보임)되어 있다고 폴라니는 주장했다. 폴라니는 자본주의를 돌아가게 하려면 특수한 사회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햇다.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특정 물건이 경제체제 안에서 매매 가능한 상품으로 전환되도록 사회가 허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폴라니가 '전환(transformation)'을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이다. 그는 '거대한 전환'에서 사회의 가장 강력한 집단들이 토지와 노동을 예전에 시장에서 거래되어온 상품들과는 원칙적으로 전혀 다른 '허구적 상품'으로 '전환'시키려고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기술한다."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읽을 때 그가 왜 어떤 배경에서 그 책을 썼는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시대 유럽인들처럼 폴라니는 문명이 어떻게 두번의 세계대전과 같은 야만으로 바뀔 수 있는가에 경악했고 그 이유를 알려 했다.

폴라니의 해답은 자본주의 또는 시장경제 자체였다. 문명은 원래부터 야만이었다는 말이다. 맑스가 자본론에서 말했던 원시적 축적에서부터 거대한 전환은 시작한다.

"과거 커먼스(commons, 공유지)는 그 사용자에게 식량과 연료. 물, 약초를 제공했다. 공유지는 극빈자에게는 생명유지 시스템이었다. 이것이 바로 영국에서 공유지가 '거대한 전환'의 시작점인 이유이다. 무언가에 가치를 매긴다는 것은 그것을 파악하고 사회가 그것을 어떤 규칙에 따라 사용할지를 정하는 일이다. 커머닝(공유화)의 규칙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공공이 사용하던 토지가 사유화를 거쳐 하나의 상품이 되자 농촌 빈민은 유일한 생존수단을 박탈당했다. 결국 농촌 빈민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것, 즉 노동을 팔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공유지의 인클로저를 통해 지대와 임금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보수가 탄생했고" 토지와 노동이란 상품이 탄생했고 자본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사유재산이 성립하려면 그것을 공공의 손에서 떼어내는사유화에 대한 사회적 승인이 필요하다. 재산은 사회적인 것이다. 누군가 땅에 울타리를 치고 다른 이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허용하는 일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맑스는 공공 자원을 공유할 권리를 폐지한 것에 대한 반발로 급진파가 되었다. 원래 그의 정치적 견해는 낙관적 자유주의와 통했다. 근 ㄴ 19세기의 '와이어드'지 독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바꿔 말해 자유로운 언론과 제 역할을 하는 의회가 있다면 미래는 밝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두 가지 사건이 이런 그의 생각을 바꾸어놓은 듯 하다. 첫 번째는 라인 지방의 삼림에서 관습적으로 이루어져오던 땔감 채취에 대한 권리를 둘러싼 지방 의회에서 벌어진 논쟁이었다. 이때 그는 재산권 문제가 정치의 핵심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두번째는 프러시아의 검열이 그가 편집하는 신문을 너무나 쉽게 폐간한 일이었다. 젋은 맑스를 정치와 사회에서 재산 문제가 핵심이라고 생각하게끔 몰고 간 것은 이런 사건들이었다."

폴라니의 논의는 청년 맑스가 깨달은 정치와 경제의 그리고 사회의 불가분성에 대한 것이다. '거대한 전환'의 핵심 논점은 시장경제의 성립은 주류경제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완결적(self-regulating)일 수 없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는 근대국가의 성립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 말한다. 자본주의 경제가 성립하려면 그 경제가 작동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국가의 권력으로 사회에 강제해야만 가능하다.

그런 강제력에 의해서만 토지와 노동은 상품이 될 수 있으며 토지와 노동이 상품이 되어야만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맑스가 말했듯이 토지와 노동은 특이한 상품이다. 폴라니는 그 특이함이란 사실 '허구성(fictitious)'이라 말한다. 허구적 상품인 토지와 노동이 상품이 되려면 시장은 (토지와 노동이란) 사회의 요소를 시장의 법칙에 복종하도록 강제해야만 한다(“subordinate[s] the substance of society itself to the laws of the market.” (폴라니)

그러나 그런 복종의 결과는 사회적 재앙이다. 19세기 내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던 공황이 좋은 예이다. 시장의 변덕에 노출된 사회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시장에 저항할 수 밖에 없다. 폴라니는 사회의 저항을 couter movement라 부른다.

"한편에선 토지와 노동을 매매할 수 있도록 바뀌기 위해 광범위한 권리 박탈이 필요햇다. 이것이 첫번째 운동이다. 두번째 운동은 자기조정적 시장이 할퀸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회로부터의 대응이다. 그리고 이 두 운동 모두 시장사회의 틀안에서 일어난다." 첫번째 운동 역시 정치적이었듯 두번째 운동 역시 정치적이다. 폴라니는 이중운동의 역학에서 볼때 시장과 사회 그리고 정치를 분리해서 보는 주류경제학의 관점은 좋게 말해서 넌센스 나브게 말해 진실을 은폐하려는 수작에 불과핟고 본다.

19세기 후반의 대공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독일이 보호무역주의로 선회하고 복지국가의 원형을 만든 것은 대항운동의 좋은 예이다.

"The epicenter of the protectionist coutere-movement was newly created Imperial Germany. When the slump of 1873-79 hit Germany, Chancellor Bismarck believed as strongly as any of his contemporaries in the self-regulating powers of market mechanisms. Ironically, he found consolation in the world-wide scope of the depression and waited patiently for the slump to hit the bottom. However, when this occured in 1876-77, he realized that the verdict of the market on the viability of the German state and of German society was too harsh to take and that, moreover, the slump ahd created unique oppurtunities for the continuation of his state-making endeavors by other means. the spread of unemployment, labor unrest, and socilaist agitation; the persistence of the industrial and commercial slumps; plummeting land values; and, above all, a crippling fiscval crisis of the Reich - all combined to induce Bismarck to intervene in protection fo German society lest the ravages of the self-regulating market destory the imperial edifice he had just built." (아리기)

폴라니가 세계혁명이라 불렀던 금본위제의 붕괴 역시 마찬가지로 해석된다. 금본위제 시스템의 붕괴는 대공황의 반작용이었고 그 결과 미국의 뉴딜과 유럽의 복지국가가 등장한 것 역시 대항운동의 예이다.

"폴라니가 말하는 자기조정적 시장의 신화는 겉보기와 달리 사회를 통한 기능의 보완 없이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조정적 시장이 보다 확산되려면 경제와 사회가 두개의 구별된 영역이라는 신화가 더 널리 전파될 필요가 있다.

위기의 시기에는 그 신화의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은행의 실패는 그것을 지탱할 공공 부문이 없었다면 총체적인 경제 붕괴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는 자기 능력으로 지탱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다. 시장은 언제나 사회에 의존했다. 그래서 대마불사란 말은 '너무 큰 탓에 쓰러져도 사회에 의지해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왜 그런 신화가 필요한 것일까? 저자는 그 답을 맑스의 자본론에서 찾는다. 맑스는 자본의 특징을 무한증식이라 보았다. 이윤추구의 무한추구는 "기업을 탐욕으로 내몰고 윤리를 가차엇이 무시하도록 충동한다." 이러한 자본의 특징은 놀라울 정도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정의와 맞아떨어진다. 경제학이 말하는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현실에서 찾는다면 정확하게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그 현실태이다. 그리고 기업의 행동 역시 정확히 그러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무엇을 생산할지 어떤 가격에 내다팔지 결정할 때 기업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해야 할 법한 행위를 할 뿐이다. 생산에 투입되는 모든 요소를 사고팔 수 있는 시장에서 기업은 아무런 악의도 없이 ‘아주 합리적으로’, 합법적이든 때론 불법적이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윤을 남기려 노력할 뿐이다."

반사회적인 인격은 사회에선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윤리가 당연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시장이며 그 시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화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시장은 언제나 있어왔다. 그러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새로운 현상이다. 저자가 말하듯 시장이 사회와 분리되지 않은 것과 분리된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보자.

"1000킬로미터에 달하는 파키스탄의 해안선은 천혜의 수산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수세기 동안 18만명 이상의 소규모 어민이 생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어획량의 급격한 감소를 겪고 있다. 어획량이 70-80% 감소하면서 아라비아 해안 마을 전역에 기아와 채무, 빈곤이 증가했다. 수세기동안 아무 문제없이 꾸려왔던 어장이 갑작스레 고갈된 이유는 무엇인가?

현지인들은 정부가 수출소득을 높이려는 욕심에서 외국 트롤선에 대한 제한을 완화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기업적 트롤선은 현지 어민들과 달리 큰 바다를 밤낮으로 훑을 수 있다. 3킬로미터에 달하는 어망으로 모든 것을 건져 올린다. 트롤선의 어획량 중 국제시장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10%뿐이고 나머지 90%는 버린다.

파키스탄의 해양 공유지는 탐욕스런 현지 어민 탓에 고갈되는 것이 아니다. 그 공유지는 정부의 방조 아래 초국적 기업들이 사유화(인클로저)해왔다. 이 기업들은 자신의 생존 근거를 파괴당할 위험이 없다. 파키스탄 어장이 무너지면 수익성이 더 좋은 다른 바다로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어민에게 갈 수 있는 더 풍족한 바다란 없다.

20세기 대규모 환경재앙을 보면 행패를 부리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다. 더스트볼에서 열대우림과 대양의 대멸종에 이르기까지 환경재앙은 자본주의적 농업, 임업, 어업의 결과이며 기업이 벌인 행위의 결과다. 더스트볼이 일어난 이유는 무어ㅓㅅ일까? 그것은 개개인으로서는 표토의 가치를 충분히 알면서도 자본주의적 농업에 편입됨으로써 오직 단기 이윤의 관점에서 주변세계와 관계를 맺게 되고 자신의 생존터전인 땅을 착취하는 자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저자와 폴라니의 논점은 '공유지의 비극'과 비슷하다. 그러나 저자는 공유지의 비극은 잘못된 이론이라 말한다. 공유지의 비극이 성립하려면 특정한 조건이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행위자가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남이야 어떻게 되건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회적 제약에서 해방된 행위자가 전제되어야만 공유지의 비극은 성립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경제학에서 공유지의 비극에 대한 처방은 책임이 분명하도록 공유지를 사유지로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 역사적 사례에서도 위의 파키스탄 어장에서도 공유지는 문제없이 돌아갔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유지라고 해서 누구나 원하는 만큼 ‘다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유지는 (공유지의 비극 이론을 말한) 하딘이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무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과거에도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공동체의 원칙과 생태계의 조건에 따라 협의해 구체적인 공유의 방식(commoning)을 결정햇다. 공유지에 대한 권리는 공유지의 물리적 지형 변화 아니라 공유지를 둘러싼 세력 간의 권력 구도에 따라 진화햇다. 다시 말해 공유지는 공유의 방식과 조건을 협의할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장소이자 ‘자유의 과정’이엇다. 누군가 공유지에 ‘비극’이라는 단어를 덧붙이려고 한다면 악몽은 공유지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 소유권 아래에서 진행되는 파괴 과정에서 시작된다.”

저자가 말하는 공유지의 비극은 일종의 외부효과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파키스탄 어장에서 일어난 사회적 비용은 경제학 용어로 말하면 외부효과이다. 외부효과란 가격 메커니즘이란 그물에 걸리지 않고 새나가는 비용이다. 파키스탄의 어장이 고갈되는 비용을 고갈을 일으킨 기업은 지불하지 않는다. 단지 이익만 거두고 딴 곳으로 갈 뿐이다. 어장 붕괴의 비용은 뒤에 남은 자들이 치룰 뿐이다. 빅맥의 가격이 200달러가 아닌 5달러가 될 수 있는 것도 나머지 195달러가 외부효과를 통해 사회가 부담하기 때문이며 “오존층 파괴, 나무가 주는 생태계 서비스와 어족 손실, 산업적 농업에 의한 수질 오염, 기후변화로 인한 홍수와 가뭄의 증가” 등도 모두 이윤지향적 시장경제에서 포착되지 않는 외부효과이다.

저자는 이러한 외부효과는 근본적으로 인클로저와 같다고 말한다. 기업이 그 비용을 치루지 않고 사회가 부담하도록 할 수 있는 이유는, 외부효과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힘있는 자로부터 힘없는 자 쪽으로 기울어진 불균형”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폴라니가 말하듯 근본적으로 외부효과, 또는 공유지의 비극은 정치현상이라는 말이다.

“공유에는 어떤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이 축적할 수 있는지 재화를 어떻게 나누어 가질 것인지에 대한 제한이 따른다. 자유시장에는 그러한 제한이 전혀 없다. 지갑 가득 들어있는 현금과 약간의 기업가 정신만 있으면 세상은 당신 발 아래에 있다. 이러한 종류의 자유에 가장 잘 조응하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다.

“시장은 다양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상품을 거래하는 장소로서 모든 인류 문명에서 존재해온 개념이다. 그러나 오늘날 시장은 욕구 충족을ㄷ 위한 거래가 아니라 이윤 추구를 위한 거래로 특징지워진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사회가 제 기능을 다하는 최상의 방식은 시장이 이윤을 추구하도록 놓아두는 것이고 개입을 최소화할 때 시장은 가장 잘 작동한다는 생각은 진리가 아니라 순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시장이 작동하는 조건은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정해진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했다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이 비극은 이윤지향적 시장이 진정한 가치를 알려줄 것이라는 명백히 잘못된 약속에 대한 믿음을 놓지 못해 생긴 병이다.”


평점 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계 3세 대해부 - 매경 기자들이 현장에서 전하는 주요 그룹 오너 3세 이야기
매일경제 산업부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애가 울면서 들어오니까 애를 달래는게 아니라 더 때리는거야. 왜 지고 들어오냐고” 어느 재벌가에서 과외를 했던 선배가 술자리 잡담으로 한 말이다.

 

현실의 재벌가과 막장 드라마의 재벌가는 다른 세계이다. 누구보다 생존이 문제인 사람들이 그들이다. 아이들 싸움에서조차 이겨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 곳이 그런 집안이다. 재벌가 사람이 느끼는 생존의 압력이 얼마나 거대한 가는 삼성가를 예로 들 수 있다.

 

식탁에 이병철씨와 아들 셋이 모여있다. 이병철씨가 눈을 부릅뜨고 상석에 앉아 있으면 첫째 맹희씨는 어버버 미친 시늉을 하고 둘째 창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을 감추려 한다. 셋째 건희씨는 자신이 그자리에 없는 것처럼 존재감을 지우고 자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묵묵히 식사만 한다.

삼성가와 알고 지내던 선배가 그 집안의 분위기를 이렇게 말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사람이란 평을 듣고 살았던 이병철씨에겐 있을 법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 선배의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일이라기 보다는 삼성일가에서 부자관계를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다. 이병철씨에게 아들은 자식이 아니라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후계자라면 권리만큼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의무를 다하려면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병철 씨가 자식에게조차 가혹했던 이유는 그 자신이 기업세계의 치열함을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1965 100대 기업의 현주소는 어떨까? 2009년을 기준으로 보면, 100위권 내에 12개사, 101-200위 내에 6개사, 201~300위 내에 4개사, 301~1000위 내에 1개사가 눈에 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세가 크게 위축되어 1000위권 밖으로 밀려난 기업은 2개사, 흡수합변 대상이 된 기업은 4개사, 그리고 나머지 기업들은 도산이나 해체 또는 무명기업이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창업되어 이제껏 이름을 보전하고 잇는 대기업들은 그것만으로도 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공병호)

 

이루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그것은 당대에도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대를 이어간다면 그것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창업자는 스스로 기업경영으ㅢ 길을 선택한 사림이다. 그러나 2 3세로 넘어가면 스스로의 선택이라기보다도 불가피하게 선택한 경우가 많다. 다행히 2세와 3세들이 창업자에 비견할 정도로 사업을 즐기고 자질도 있다면 창업자로서는 대단한 행운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행운을 가질 수는 없다. 사업은 무척 고된 일이다. 자신이 사업하는 일 자체를 좋아해야 하고 자질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공병호) 좋아하면서 자질까지 갖추기가 쉽지 않다.

 

20세기초 미국에선 전문경영인체제가 정착된 이유이다. 챈들러가 경영혁명이라 부르는 체제가 정착된 이유는 여러가지이지만 창업자가 관리하기엔 기업의 경영이 과거보다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전국규모 또는 세계규모로 확대된 시장과 더 치열해진 경쟁은 질적으로 다른 경영능력을 필요로 햇다. “철도회사 오너 혹은 경영자에 관한 조사결과가 수록된 ‘미국기업 인명 백과사전’의 19세기 부분을 보면 제철분야에서 경영자 이상의 지위에 오른 인물 184명이 열거되어 있다. 회사 상속자 127명 중 아버지나 할아버지 수준의 성공을 거둔 이들은 64명이었으며 이들 중 1900년 무렵에 아들이나 손자를 경영에 참여시킨 인물은 단 한명 뿐이었다. 아버지의 기업을 더욱 발전시킨 이들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회사가 쇠퇴하는 데 일조한 레밍턴 가의 후손과 같은 이들이 수십 배는 더 많았다. 백과사전에 수록된 거물 기업가 가운데 보다 근대적인 산업에 종사한 16명의 아들이나 손자 중에는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낼만한 위치에 오른 인물이 없었다. 철도회사 오너의 2세 대부분이 경영자 지위에 올랐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 부유한 기업가 계급의 자녀로 태어난다는 것은 분명 유리한 점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전문가로서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녔는가하는 관점에서 보면 계급 문제는 별개다. 나아가 3대째에 이르면 할아버지의 지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점은 거의 없다시피 햇다. (래리 슈웨이카드, 린 피어슨 도티)

 

흥미와 재능이 없다면 “2세와 3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일은 기대보다도 훨씬 빠른 시간 내에 기업을 몰락으로 이끌 수 있다” (공병호) 사업의 어려움을 잘 알고 스스로도 망할 뻔한 일을 수도 없이 겪었고 망하는 것을 수도 보아온 가문의 사람들의 후계자는 우리가 꿈에 그리는 모습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때로는 동화 속 왕자처럼 때로는 술과 여자를 끼고 사는 한량처럼 그려지는 재벌 3,4세이잠 이들의 실체는 TV 드라마와는 거리가 있다.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혹독하게 경영수업을 받으며 자신의 사생활이 거의 없는 생활을 하는 재벌 3.4세가 대부분이다.

 

이책은 그런 재벌 3.4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잇는지를 말하려 한다. 그러면 실제 이책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월터스: 사람들은 당신이 냉정하고 신비스러운 인물이며 연기하는 주인공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게 두려우신가요?

 

이스트우드: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연기하는 인물의 이미지는 절제된 것인데 아마도 그렇게 연기하는 게 쉽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다 말로 나타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을 압니다.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겟지요.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이 돈을 그렇게 많이 버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특별히 누굴 보고 대리만족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월터스: 정신과 의사한테 가본 적은 없나요?

 

이스트우드: 강박증 같은 것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밖으로 나와 이 들판을 거닐며 꽃과 나무를 보면서 나 자신을 내려 놓습니다.

 

월터스: 가깝게 이야기를 나누는 여인이 있습니까?

 

이스트우드: 조금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100% 다하지는 않지요. 100%를 기준으로 하면 60% 정도 이야기하는 정도라고 할까. 당신은 알아야 할 것은 100% 다 알고 싶으세요?

 

월터스: 알면 좋지요. 내가 당신한테 홀딱 반하면 아마도 나 때문에 미쳐 버릴걸요? 궁금한 걸 계속 물어 댈 테니까요.

 

그러자 이스트우드는 내 눈을 지그시 쳐다보면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좋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나 한번 해봅시다.'

 

어느 순간엔가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터뷰하는 도중에 정신을 놓아 버렸다. 당황하고 얼이 빠져 나는 카메라맨에게 테이프를 멈추라고 말했다. 더 고약한 것은 인터뷰가 끝난 다음 이스트우드가 나보고 남아서 저녁을 같이 하겠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나는 크루들과 함께 LA로 돌아가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속으로 나는 인터뷰를 그렇게 끝내는게 아니라 남아서 저녁을 먹고 싶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누가 알아? (바버라 월터스)

 

인터뷰의 여왕이라 불리는 바버라 월터스의 회고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책의 문제는 월터스의 인터뷰와 같은 긴장감이 없다는 것이다. 긴장감이 없는 이유는 진실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 이책을 받고 읽으면서 그 기업 홍보부 직원이 쓴줄 알았다. 물론 거짓을 쓰고 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늘어놓더라도 그 사실을 어떻게 배열하는가에 따라 진실이 되기도 하고 뻔한 거짓이 되기도 한다. 이책은 무미건조한 사실을 무미건조하게 나열한 사실상의 거짓이다. 진실이 주는 긴장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책이 비판하는 드라마만도 못하다.

 

"대담 프로그램이 시청자에게 말해주는 바가 아무 것도 없다면 나 자신에게나 출연한 게스트에게나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무언가 전하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동시에 재미있지 않고서는 아무 내용도 전할 수 없다. 내용이 전달되기도 전에 시청자들은 리모콘을 잡을 것이니까." (래리 킹)

 

이책은 전하는 내용이 있는가? 있다고 보기 힘들다. 공식적인 이력서에 나올 내용, 밝혀도 아무 문제없을 내용만 나열하고 사실 이면의 진실은 보이지 않으니 전하는 내용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재미는 있는가? 차라리 드라마가 더 잘한다.

 

이런 책이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기자들이 그것도 경제지 기자들이 썼다는 것이 아마 유일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책 팔아서 얼마 번다고 취재원을 밥줄을 건드릴 수는 없지 않은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달 2022-06-28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유진 스미스 W. Eugene Smith 열화당 사진문고 12
샘 스티븐슨 지음, 김우룡 옮김, 유진 스미스 사진 / 열화당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한 말이다. '언젠가 스미스가 사진 대학에서 강의할 때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가으이 마지막에 가서 학생이 항의했다. 사진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고 강의 시간 내내 음악 얘기만 했다. 스미스는 한 인간에게 아주 소중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가치가 있다는 말로 학생을 진정시켰다."

유진 스미스에게 음악은 중요했다. 2차대전 때 종군사진가로 일할 때도 음악을 들어야만 했던 그에게 음악은 사진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는 종종 그의 사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음악이엇다고 말햇다. "음악적 질서를 불어넣기 위해 내가 음악을 의도적으로 이용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간단히 말해 음악은 나의 스승이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관점이다. 모든 예술은 음악을 지향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아니더라도 공간의 예술인 사진에 시간의 예술의 관점을 접목한다면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사진 강의에서 사진은 말하지 않고 음악만 말한다는 것은 그에게 문제가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스미스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 것은 미국의 저널리스트들이 대개 그렇듯 자신의 경력이 끝났을 때였다. 1960년대 내내 스미스는 대학과 강연회에서 강의를 했다. 그 당시 이미 스미스는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직 사십대 중반의 스미스는 애가조의 회고를 거듭하면서 마치 그의 경력이 이미 끝나 버린 것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학생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 ''라이프'에서 박하고 나오고서도 포토에세이스트로 활동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스미스는 머뭇거리다 이렇게 말했다. '글쎄..., 흠..., 그건 나도 잘 알 수가 없어요.'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스미스 특유의 유머엿다. 학생들은 예상 밖의 이 대답에 크게 웃었고 스미스도 웃었다." 그러나 그의 유머는 그의 진실이었고 그의 웃음은 텅 빈 웃음이었다.

라이프의 촉망받는 사진기자였지만 스미스는 편집진과 갈등이 많았다. 물론 사진작가와 잡지사의 갈등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스미스 만의 문제도 아니다. 라이프 등의 유력 잡지사들과 일했던 베르너 비숍은 잡지사와의 작업을 "끔찍했다"고 말햇다. "비숍은 자신이 생각한 바에 따라 문제를 최대한 강하고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잡지사는 이익을 올리고 싶어햇다. '편집진과 다른 구매자들이 사진 속의 불쾌한 진실에 손질을 가하고 별 신통치 않은 이유로 톤을 약화하고 독자들에게 영합하기 위해 그것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을 때 그는 아주 기분 나빠 했다.' 사진에 대한 해석을 오도하는 왜곡된 설명과 기사, 엉망으로 잘리고 뒤집힌 사진들, 정치적 편향과 멜로 드라마적 이미지를 요구하는 취재지시 등, 편집과정에서 그의 사진과 관점에 가해지는 모욕에 비숍은 몹시 괴로워했다." (클로드 쿡맨)

언뜻 보면 스미스와 라이프 지의 갈등 역시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리고 그 갈등은 비숍처럼 투덜 투덜 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편집권에 대한 도전으로까지 격상되었다. 스미스가 라이프의 잘 나가는 지위를 박차고 나온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비숍과 달리 스미스의 도전은 도가 지나쳤다. 스미스의 경우엔 잡지사로선 참을만큼 참았다고 두둔할 수 밖에 없다.

"스미스의 방식은, 언제나 첫 사진을 찍기 전 며칠 또는 몇 구간 그 지역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곳 사람들과 섞여 지내는 등 대상에 대한 사전 이해의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엇다. 촬영할 대상과 아주 친근해지는 한편으로 그 대상과 배경에 아예 녹아 들어감으로써 거부감이 없어지도록 최대한 노력한다는 태도였다. 객관적 태도를 냉정히 견지한다는 저널리즘의 원칙을 엎고 스미스는 어떤 경우에라도 대상과 자신의 거리감을 없애려 애를 썼다. 개인적 거리감이든 직업적 거리감이든 그에게는 없애 버려야 할 적일 뿐이었다. 스미스에게 한 장의 사진은 그가 보고 느끼고 겪었던 바로 그 이미지엿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보았던 그 순간 그대로를 생생히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이런 사진가이니 유명해지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대학 졸업장도 없는 그가 라이프 지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전쟁사진 때문이엇다. 그의 전쟁사진은 간결하면서 요점이 분명하면서도 생생하다. 아마도 그의 작업 방식은 병사들과 함께 전장을 누비면서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업방식이 문제엿다. "'라이프'에 있는 동안 쉰 건 이상의 프로젝트를 맡았지만 스미스와 잡지사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잡지의 편집진은 사진가의 역할이 네거티브를 만드는 것에서 끝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엇다. 스미스는 그 네거티브로부터 제대로 된 프린트를 만들고 그것을 지면에 배치하는 것까지 사진가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어떤 편집자가 시인에게 묻지 않고 시를 뜯어고칠 수 있단 말인가. 사진이 시와 달리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편집진에게 요구했다. 기사 하나가 나갈 때마다 격렬한 갈등과 최후통첩의 말이 오갔고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타협이 있은 후에야 겨우 지면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사진은 감동적이었고 아름다웠으며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거기까지였으면 어떻게 타협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미스의 집념 나쁘게 말하자면 편집증이 더 큰 문제였다.

예를 들어 “1952년의 작업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1953년 작업인 ‘미시간 주의 이주 노동자’의 경우 스미스는 수개월을 들여 수백 점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잡지가 필요로 하는 것, 또 청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엇고 비용은 모두 ‘라이프’가 지불했다. 두 작업 모두 겨우 잡지의 몇 페이지를 채울 기사엿다.”

그의 작업은 놀라웠지만 그 작업의 뒤에는 인간의 폐허가 있었다. “라이프의 강력한 채널을 통해 스미스야말로 함게 일하기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져났다. 당시의 스미스는 잡지사가 기다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프린트 하나를 만들기 위해 휴식 없이 며칠을 매달리곤 했다. 나아가 사진에 대한 이런 강박적 몰두와 약물 의존으로 일상생활 역시 황폐해졌다. 갈수록 작업실에서 보내는 날이 많아지고 네 아이들과 아내가 잇는 집에서는 점점 멀어졌다. 1950년 9월 그의 불후의 명작 ‘스페인 마을’ 작업 도중 지친 스미스는 팬티 바람으로 작업실 앞길을 돌아다니다 경찰에 체포된다. 그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몇주간 치료를 받아야 햇다.”

가족을 팽개치고 나와 살던 맨해튼의 로프트에 자주 들렸던 드러머 로니 프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마치 미친 과학자 같았다. 그가 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앉아 잇는 것마저 본 기억이 없다. 언제나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의 완벽주의 또는 강박증을 잘 보여주는 예는 ‘불타는 코크스와 춤을(1955)’일 것이다. “피츠버그 작업에서의 걸작 인화인 이 사진에서 “한 노둥자가 코크스 가마 위에 두껑을 덮고 잇다. 인간과 인간이 만든 문명 사이의 의문 가득한 관계성이 이사진에 드러나 잇음을 본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사진의 압도적인 충격은 스미스 사진 인화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다.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완벽주의자 스미스는 프린트 하나를 위해 버닝, 닷징, 블리칭을 평균 백오십 회가량 햇다고 한다. 때론 프린트 하나에 수일이 걸렸다. 이 사진을 보면 전설은 사실일 것같다.”

라이프를 박차고 나와 매그넘과 손을 잡은 후에도 그의 극단성은 도를 더해갔다. “매그넘에서 첫 작업은 피츠버그 시를 촬영하는 일이었다. 역사가이자 저명한 편집자인 슈테판 로란트가 피츠버그 시 이백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되는 대형 간행물을 시민 대표 자격으로 맡았다. 스미스는 이 간행물 가운데 현대 피츠버그 시에 대한 한 대목을 맡아 삼 주간의 예정으로 백 점의 사진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그의 작업방식대로 “첫 한달을 이리저리 도시를 배회하고 그 역사를 찾아 읽고 가능한 모든 것을 입력하는데 보냈다. 그리고 거의 한 해를 피츠버그 시를 찍는데 바쳐 만삼천 점의 네거티브를 얻었다. 라이프에서의 싸움과 다를 바 없는 전쟁을 로란트와 치른 후 스미스는 수백점의 프린트를 넘겨주고 작업을 마무리짓는다.” 그러나 피츠버그 프로젝트는 스미스 자신의 과업이 되어 이후 3년을 바치고도 마무리 짓지 못한다.

이러니 아무리 그가 대가임을 알아도 그에게 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고 스미스는 가난과 싸워야 했으며 60년대에 들어서면 과거의 영광을 되씹으며 대학 강의실을 떠도는 보따리 장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진기를 평생 놓지 않았다. 돈이 되건 안되건 알아주건 말건 찍고 또 찍었다.

“1975년 12월에 스미스의 주치의가 그의 상태에 대해 써 놓은 한 통의 소견서가 남아 잇다. 쉰일곱의 스미스는 이때 ‘당뇨병, 간경화, 심한 고혈압, 정맥류, 울혈성 피부염, 심혈관질환, 관상동맥질환 그리고 심장비대증’을 앓고 있었다. 주치의는 ‘금주’하라는 명령으로 자신의 소견을 맺는다.. 스미스가 의사의 소견을 마움에 두엇는지는 의문이다. 친구들은 스미스가 뉴욕을 벗어나 보다 안정되고 건강한 환경으로 옮기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음을 알고 잇었다. 거의 잠을 자지 않고 광적으로 일하는 습관, 알코올과 약물의존, 그리고 다른 여러 위험한 강박 상태가 그의 몸을 근 삼십년 동안 짓눌렀다.” 친구들의 주선으로 애리조나 대학의 강사직을 맡아 옮겨가게 된다. 그러나 일년을 넘지 못했다. 1978년 편의점에서 고양이 먹이를 사던 스미스는 심장마비로 급사한다. 쉰아홉이엇다.

매그넘 갤러리
http://www.magnumphotos.com/Archive/C.aspx?VP=XSpecific_MAG.PhotographerDetail_VPage&pid=2K7O3R139C2T&nm=W.%20Eugene%20%20Smith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