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결사의 세계사
김희보 지음 / 가람기획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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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을 펴다가는 전문가의 세계에서 매장당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음모론이란 것이 지적 성실성이 의심스러운 설명이기 때문이다. 증거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는 없지만 어쩌고 하는 식으로 모든 의심스러운 것을 가져다 붙이는 논리는 지적 불성실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이책에서 다루는 비밀결사들은 바로 그런 음모론의 단골메뉴이다. 프리메이슨, 유대게이트 성전기사단 등등. 이책은 그런 비밀결사의 세계사란 제목으로 나온 책이다. 그러나 더 맞는 제목은 비밀결사의 잡탕일 것이다.

hodgepodge란 영어단어가 있다. 이것저것 그러모은 잡탕이란 뜻인데 우리 요리에서 그에 해당하는 것이 부대찌개이다. 이책이 바로 그런 요리에 해당한다.

이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재미있다거나 지루하다거나 하는 심리적인 증상이 아니라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육체적 증상이었다.

책의 1부는 비밀스런 의식을 올리던 고대 이집트 종교부터 디오니소스 축제, 아프리카 부족의 성인식 까지 정말 제목에 걸맞게 온갖 비밀집회들을 추적해 간다. 그 와중에 중국사에서 이름은 정말 많이 들어봤지만 실체는 확실히 모르는 오두미교라든가 무협에 뻔질나게 등장하는 백련교라든가 삼합회까지 언급이 된다(이 부분은 나름 꽤 흥미가 있었다).

그러나 너무 넓은 범위의 대상을 작은 분량에 우겨넣다보니 주마간산격이다. 사전을 통채로 처음부터 읽는 기분이었다. 중학교 때 영어사전 외우기가 유행인 적이 있어서 해봤던 바로 그짓을 수십년만에 다시 하는 기분이었다.

프리메이슨을 다루는 2부에서 이런 두통은 좀 가라앉았다.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 이 부분은 나름 얻은 것이 많았다. 이책에서 얻은 지식을 나름 정리하자면 이런 식이다.

프리메이슨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프리메이슨은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프리메이슨이 내선 강령은 당시 계몽주의를 반영한 것이었고 프랑스와 미국에 퍼져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의 사상적, 인적 기반을 제공했다.

사실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을 보면 어느날 갑자기 뚱딴지 같이 터져나온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혁명의 주도자들이 프리메이슨 회원들이라는 설명에서 의문이 풀렸다. 프리메이슨이란 네트웤을 통해 인적자원이 형성되어 있었고 협회의 기치인 계몽사상을 요약하는 자유 평등 박애가 혁명의 이념이 된 것이다.

프리메이슨이란 네트웤은 1,2차대전 연합군의 연계와 전후 미국중심의 블럭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엇다.

괜찮은 발견이다. 그러나 갑자기 음모론이 제기된다. 프리메이슨이 세계정부를 세우려한다는 논의를 전개하면서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공감시키기 위해 공황을 일으키고 전쟁을 일으키고 환경재앙을 일으킨다는 논의를 하고 있다. 프리메이슨과 관련된 음모론의 단골메뉴이다.

그러나 그런 논의가 음모론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증거가 잇어야 한다. 그러나 마땅한 증거를 이책에서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기겁을 할 수 밖에 없다. 유대인들의 음모를 다루는 3부에서는 그런 음모론적 접근이 누그러든다. 유대인의 음모라 하는 것이 사실 악의적인 공격이라는 것이다. 로스차일드가에 대한 중상모략도 대단히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로스차일드가에 대한 책을 보면 저자의 설명은 대체로 객관적이다.

그러나 유대게이트 부분을 읽다보면 다시 두통이 도진다. 여기저기 그러모아놓은 사전을 읽는 기분이다. 프리메이슨 부분도 사실 그런 감이 잇었지만 전체적으로 프리메이슨이란 네트웤을 세계사의 배경으로 읽을 수 잇다는 사실을 발견한 개인적인 흥미때문이었다.

두통의 원인은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잇다. 저자의 입장이 이책에는 없다. 무슨 말이냐 이책 저책 마구 그러모은 편집물이기 때문이다. 다빈치 코드나 X 파일은 재미라도 잇다. 그러나 음모론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을 표방하는 이책은 두통만 일으키는 즉 머리의 구역질을 일으키는 부대찌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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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인록 - 중국 역사를 뒤흔든 5인의 독불장군
이중텐 지음, 박주은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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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저자 이중톈 삼국지강의로 유명하다. 이미 그의 삼국지 강의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책의 조조를 다루는 파트에서 상당부분이 중복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저자의 다른 책인 초한지강의와 항우 파트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책의 전체적인 주제인 중국역사에서 사회와 개인이란 주제도 제국을 말한다는 다른 저서의 주제와 겹친다.

그의 다른 저서들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면 이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달리 말해서 그책들을 읽었다면 이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가? 우선 답을 하자면 충분히 읽을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책의 내용은 이책에 등장하는 5명의 생애사를 안다는 데 있지 않다. 이책의 독자는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을 상대로 쓰여진 것이다. 한국인이 이순신이나 이성계, 세종대왕에 대해 기본적인 사실을 알고 있듯이 이책이 다루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중국인이라면 당연히 기본적인 사실은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독자를 상대로 쓰여진 이책은 그들에 대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500페이지를 5명에게 할당하면서 보통 알고 있는 수준보다 더 깊이 있는 지식을 알려준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책의 목적은 이책의 제목처럼 사람을 품하는 것 즉 평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본적인 행적을 넘어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란 전체적인 평가를 하기 위한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책은 그들의 삶에서 그들의 내면을 알 수 있는 사건들을 선택적으로 보여주고 그들이 내면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파고 들어간다.

이책의 목적은 그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 즉 그들의 개성을 아는데 있다. 그리고 이책이 대상으로 한 5명은 중국역사에서도 특히나 개성이 뚜렷했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책은 개성만 강하면 아무나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저자는 중국역사에서 5명을 뽑을 때 기준으로 중국의 문화 즉 집단주의 문화와 충돌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역사에 각인시켰던 사람들을 뽑아 서술한 것이다.

항우는 그의 귀족적 가치관 때문에 죽어야 했고 조조는 그의 마키아벨리주의적 행동 때문에 천년이 지나도록 욕을 먹었으며 무측천은 여성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고 증명했기에 악명을 들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중국의 문화전통과 충돌하면서 그들이 낸 파열음을 파고들면서 그들이 어떤 개성을 가졌기에 그렇게 충돌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개인의 자질과 능력에 우월성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문화에서 그런 개인들은 용납될 수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대체적으로 이상이 이책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주제 자체로 보면 이책을 보는 것보다는 저자의 제국을 말한다를 보는 것이 더 좋다. 그러나 이책만이 줄 수 있는 장점은 중국역사상의 문제아들을 개인으로서 느끼면서 그들의 개성을 느낄 수 잇다는 것이다. 조조나 항우의 경우 삼국지강의나 초한지강의에선 전체적으로 그 시대에 주안점이 두어졌지 그들의 개성만에는 촛점이 두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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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면경 - 조조의 얼굴철학에서 배우는 처세의 법칙
사마열인 지음, 홍윤기 옮김 / 넥서스BOOKS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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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책의 제목인 면경이란 말은 체면에 관한 경서란 말이다. 면경이란 말 앞에는 조조의 란 말이 있지만 물론 이런 책을 조조가 쓰지는 않았다. 조조의 저술로는 시 십수편과 손자병법에 관한 주석이 남아 있고 그가 쓴 수많은 공문서가 남아있을 뿐이다. 그의 수많은 저술들이 유실되어 전하지 않지만 그 중에도 면경이란 저술은 없었다. 즉 이책은 사마열인이란 사람의 창작물로 조조가 어떻게 처세했는가를 기술하는 책이다.

그러면 제목의 면경이란 말에서 면 즉 우리말로는 체면 중국어로는 면자란 말은 무엇인가? 체면이란 말은 우리말에서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이책에서 제목으로 붙인 면자란 말의 뉘앙스는 나쁘지 않다. 이책에서 쓰는 면자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란 중국 사대부들의 처세관과 맞아 떨어진다.

사람이 체면을 세우려면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어떤 인정을 받는다는 말인가? 여기서 한국어의 체면과 중국의 전통 개념으로서 면자가 부정적이 되고 긍정적이 되는 갈림길이 나뉜다.

이책에서 말하는 체면이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 것이다. 문벌귀족이 아닌 고위환관의 양자를 아버지로 둔 조조이지만 어쟀든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천하 즉 당시 한나라로 보았다. 즉 천하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이책은 조조를 보면서 조조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어 갔는가를 이책은 조조의 일화들에서 하나 하나 교훈을 얻는 형식으로 책이 구성된다.

언뜻 이책의 목차만 보면 정말 대단한 책처럼 보인다. 처세의 모든 것을 조조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배울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상당부분은 실제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이책을 읽고 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런 교훈들보다 조조에 대한 이미지 즉 조조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이미지를 얻는 것이 더 크다.

이책의 각 절의 내용은 조조를 통해 처세의 원칙을 배운다는 측면도 있지만 조조를 바로 안다는 측면이 더 강한 것이다. 아마도 조조에 대해 이 정도 분량으로 쓰인 책도 없지 싶다. 그러면 그 분량만큼 이책을 읽으면서  조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는가가 이책을 읽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책은 조조가 쓴 손자병법의 주석서는 물론 그의 시들과 그리고 중요한 공문서들을 광범위하게 인용하고 있고 당시 그가 살던 시기를 언급하고 잇는 수많은 역사서를 거의 다 동원하고 있다. 물론 대중적인 삼국지연의도 상당한 양이 인용된다. 아마 조조에 관해 이만큼 많은 문헌을 동원한 책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책에서 조조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저자는 단순히 문헌을 파고 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문헌들을 동원해 대범하면서 쪼잔했고 호탕하고 덕이 있으면서 잔인하고 교활하며 간사했던 조조의 모순된 모습을 그리면서 조조의 내면을 이해하고 평가하고 있다.

평가

삼국지연의가 왜곡한 조조의 이미지를 바로 세우려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는 이책뿐만이 아니다. 그러면 그 많은 재평가에서 이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조조에 대한 재평가로서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 보다 이책이 더 뛰어난 것같지는 않다. 사실 이중톈과 이책의 저자가 내리는 조조에 대한 평가는 그리 차이가 없다. 그리고 그들이 동원한 자료도 기본적으로 양의 문제이지 범위는 차이가 없다.

게다가 이중톈의 경우는 직업 역사가로서 단지 사료에 의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료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하면서 조조의 진실을 재구성해내려고 하고 있는데 비해 이책의 저자는 그런 수준까지는 가지 않고 있으며 이중톈이 입체적으로 조조의 모순된 성격을 그리면서도 일관된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는데 반해 이책에선 조조에 대한 입체성만 나열되고 있고 그 다중성을 한데 모아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내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이중톈이 그린 이미지와 이책이 그리는 조조의 모습이 다르지 않기는 하다. 그러나 책의 구성 때문에 난삽하게 여기 저기 흩어져 잇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반복적으로 이절에 언급된 사건이 다른 절에 또 언급이 되는 문제도 있다.

그렇다면 이책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중톈의 삼국지강의와 같은 조조에 대한 좋은 책을 읽고 난 사람에게 의미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책의 압도적인 분량은 어떤 책도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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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민수 2023-03-16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보고갑니다.
 
행복의 경제학 - '슬로 라이프'의 제창자 쓰지 신이치가 들려주는
쓰지 신이치 지음, 장석진 옮김 / 서해문집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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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라 물으면 결국 답은 행복이 될 것이다. 부자가 되고 싶다 명성을 얻고 싶다 좋은 배우자를 얻고 싶다 좋은 가정을 만들고 싶다 등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행복이다.

그러나 행복에는 조건이 있다. 누구나 다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득도한 스님이나 요가의 구루가 아닌 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위한 충분조건은 어느 정도의 부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득도한 수도승이 아닌 한 굶주리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부부싸움의 대부분은 인간관계가 미숙한 것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결국 돈문제로 귀결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돈만 많다고 행복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물직적으로 풍요로울 때 더 행복할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이상한 문제가 일어난다. 저자는 인류학자라는 직업상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부자나라의 수위를 다투는 미국과 일본에서 살았다.

이상하게도 부탄같은 저 밑에서부터 세는게 빠른 가난한 그것도 극빈국의 사람들이 미국이나 일본사람들보다 더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가 그리는 일본인의 모습은 한국인과 아주 닮았다. 항상 바빠보인다. 피곤에 찌들어 있다.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항상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싶어한다. 객관적으로 부탄 사람들은 한국의 최저임금 정도로 한해를 살아간다. 어떻게 돈이 더 많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행복의 가능성은 더 높아야 하는게 아닌가?

저자는 자본주의 경제의 시스템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지구온난화와 자원고갈이란 인류멸종을 향해가는 문제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지적이 아니다. 인간의 사회가 환경이란 제약을 벗어나 독자적인 (시장이란) 규칙에 따라 움직이면서 환경의 한계를 무시하게 된 결과이다.

문제는 거시적인 것만이 아니다. 미시적으로도 한국과 일본의 시한폭탄인 저출산 고령화를 들 수 있다. 아이와 노인은 생산하지 못한다. 소비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선 천덕구러기 무가치한 인간이 되는 시스템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아이를 갖는 것이 경제활동에서 핸디캡이 되는 사회 나이가 많은 것이 무능력한 밥벌레가 되는 사회 무언가 이상한 사회이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시스템의 동력이 경쟁이 되면서 빈부격차의 확대,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일어난다.

피곤한 사회이다. 물건은 넘쳐나는데 사람들은 빈곤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다.

이정도가 되면 무엇을 위한 풍요인가 하고 물을 수 밖에 없다. 사실 새삼스러운 질문도 아니다. 웰빙이니 여가니 취미니 로하스니 환경운동이니 이런 유행어들은 우리가 사는 방식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평가

사실 이책의 내용은 위와 같은 정도로 요약될 것이다. 물론 이책의 저자는 슬로 라이프란 운동의 제창자로서 질문만 던지는 것은 아니다. 이책의 논의 구조는 지금의 경제 시스템이 무언가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와 같은 식이다.

그러나 이책의 가치는 대안에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누구도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있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경제성장 지상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시장에 참여하는 기업들로 이루어진다. 기업들은 이윤이 목적이고 이윤은 이윤 자체가 목적이다. 그결과는 GDP 성장으로 나타난다.

경제성장 지상주의의 결과는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삶을 피곤하게 한다. 그러나 시장을 부정하지 않는 한 다른 대안은 없다.

저자의 문제제기는 상당히 재미있고 생각할 점이 많다. 우리의 일상에서 느끼는 것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경제학은 어떻게 옹호해왔고 어떻게 무시해왔는가 등 얇은 책에서 깊이 있는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대안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문다. 만족을 알자는 불교식의 가르침을 결론으로 맺는다. 사실 개인적 수준의 실천 이외에 다른 대안이 있는가도 의심스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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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생각한다 - 도시 걷기의 인문학 정수복의 파리 연작 1
정수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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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생각한다'는 제목이 붙은 이책의 부제는 '도시 걷기의 인문학'이다. 이책의 내용은 두 제목을 모두 담고 잇다.

 

모든 책이 그렇듯이 이책 역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책의 관점은 도시를 걷는 사람의 시점이다. 두발로 뚜벅 뚜벅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사람의 관점에서 본 파리는 이상적인 도시이다.

 

한 나라의 수도답게 파리에는 대통령부터 노동자까지 온갖 계층의 사람이 모여있다. 거기다 제국주의 국가였던 나라답게 북아프리카에서 온 무슬림들과 흑인들이 모여사는 거리가 있고 아시아인들이 밀집해 사는 거리도 있다. 사는 방식이 다르면 문화도 다르다. 사는 사람들이 달라지면 그 거리의 문화도 다를 수 밖에 없다. 파리의 20개구를 건널 때마다 국경을 넘는 것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람들만 파리의 다양성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2천년 가까이 지금의 자리에 있어온 파리의 역사 자체가 다양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파리라는 도시의 공간 자체이다.

 

도시는 공간이고 도시라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건축물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파리는 물리적으로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 파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로마제국 시절의 건물부터 중세의 건물, 절대왕정 시절의 건물, 공화정 시대의 건물, 20세기와 21세기의 건축물까지 파리란 도시의 공간에는 파리가 여행한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잇다.

 

서울의 역사가 600년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서울의 얼굴에서 그 시간을 읽는 사람은 없다. 일제시대를 거치고 전쟁에 부서진 잔해를 마져 부수면서 개발되고 성장한 서울이란 도시의 나이는 기껏해야 30년 정도이다. 과거가 없는 도시는 경박할 뿐이다.

 

파리란 공간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은 단순히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다. 파리 곳곳에 새워진 박물관과 미술관, 거리마다 새워진 역사적 인물들의 동상, 역사의 흔적을 가진 건물에 그 사연을 말하고 말하는 표지판 등은 의식적으로 역사를 기억하려는 노력들이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노력이 필요하고  역사의 무게는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파리란 공간에 사는 사람들과 역사의 흔적은 산책자의 눈과 생각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다양하기만 하다고 산책자에게 이상적이지는 않다. 파리를 파리로 만드는 것은 다양성의 조화이다.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를 꼽으라면 파리가 가장 많이 언급된다. 파리가 아름답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파리만 아름답지는 않다. 사람들이 파리에 대해 갖는 이미지는 일종의 브랜드 효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파리란 브랜드를 만들어낸 것 역시 파리의 역사이다. 19세기 유럽이 세계의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던 시절 파리는 프랑스 만이 아닌 유럽의 수도로서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였다. 오늘날 파리라는 브랜드는 그당시 만들어진 이미지가 지금까지 과거의 영광으로서 후광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문화는 뉴욕보다 패션은 런던과 밀라노보다 못하다.

그러나 파리가 오늘날까지 프리미엄 브랜드의 지위를 누리는 것은 과거의 유령으로서가 아니라 그만한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실체를 파리의 아름다움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다양성의 조화라고 말한다.

 

위에서 말한 다양성만이 있다면 그 도시는 서울처럼 혼란스런 공간이 될 뿐이다. 다양성이 어울려 하나로 통일될 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오늘날 파리의 모습이 결정된 것은 19세기 나폴레옹3세 시절이다. 그때까지 좁고 지저분하며 혼잡한 중세도시의 모습을 가졌던 파리에 마차와 전차가 다닐 수 있는 방사상의 직선대로가 뚫렸고 건물의 높이를 7층까지 제한했으며 도심에는 석재로만 건물을 짓도록 했고 대로가 만나는 곳마다 광장을 만들고 공원을 만들어 쾌적한 도시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다시 만들어진 파리는 산책자를 즐겁게 하는 공간이 되었다. 석재와 (적색이 아닌 갈색의) 벽돌로 이루어진 도시건물들의 소재는 회색과 베이지, 미색의 뉴트럴 컬러로 도시를 채색했다. 정장의 컬러가 뉴트럴인 이유처럼 그런 컬러는 안정감을 준다.

 

자극적인 강렬한 노란색만 고집하는 맥도널드가 파리에선 가라앉은 금색을 쓸 수 없었던 것은 도시의 톤을 조화롭게 하려는 파리시의 고집때문이었다.

 

산책자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은 색조만이 아니다. 7층으로 건물의 고도를 제한한 것도 안정감을 준다. 강남역의 대로변을 걸어보라. 안정감이 느껴지는가? 유리와 콘크리트의 무표정한 절벽들이 늘어선 거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한없이 작아지는 위압감이다. 사람은 하늘이 시야에 잡힐 때 안정감을 느낀다.

 

파리가 산책자에게 이상적인 것은 기본계획이 1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자체도 큰 이유이다. 도시계획에서 자동차가 당연한 변수가 되기 이전, 사람이 걷는 것이 당연했던 19세기에 만들어진 파리의 골목길들은 자동차에 어울리는 직선이 아니라 사람의 동선에 어울리는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몇분 거리마다 박물관이 있고 랜드마크 건물이 있으며 공원이 있고 광장이 있다.

 

그리고 파리의 규모 역시 산책자에게 적합하다. 런던의 1/19, 서울의 1/6에 불과한 파리는 한나절이면 도시 끝에서 끝까지 걸어갈 수 있으며 차로 20분이면 횡단할 수 있는 도시이다.

 

그리고 보행자의 기준에서 하루 생활권으로 묶인 도시이기에 파리의 조화가 가능하다. 서울처럼 여러개의 부도심이 만들어질 정도로 도시가 확대되면 도시의 다양성은 어떤 계획으로도 묶어내기 곤란할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 그렇다고 제네바 정도로 작다면 다양성 자체가 없어진다.

 

파리의 크기는 적당한 다양성이 가능한 크기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성으로 묶일 수 있는 크기이고 도시가 아름다울 수 있는 크기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산책자에게 아름다운 도시이다.

 

평가

 

이상이 이책에서 저자가 말하려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이책에 담긴 내용은 그 이상이다. 위에서 요약한 것은 책의 뒤 부분 일부에 불과하다. 책의 앞 부분엔 산책에 관한 수필에 가까운 내용이 한 챕터를 이루고 그 뒤엔 파리를 사랑한 사람들의 역사가 한 챕터를 이루는 식으로 저자는 이책에 많은 내용을 담으려 한다. 그러나 이책의 제목이 말하는 파리에 대한 생각은 위에서 요약한 정도가 실질적이다. 나머지 내용은 사실 잡설에 가깝고 과학인 사회학을 전공한 사람다운 글이 아니라 인문학자 아니 수필가에 더 어울리는 내용이다. 그렇다고 그 잡설에 가까운 내용들이 저자의 사적인 느낌들을 담아 문학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잡설에 가까운 내용보다는 위에서 요약한 알맹이 있는 내용을 더 깊게 들어갔었으면 내용이 휠씬 깊이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책의 내용 상당수는 설익은 파리에 관한 생각들을 그냥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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