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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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집의 <네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컨택트>가 원작에서 표현하지 못한 시각적 요소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고, 또 영화에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원작의 철학적 혹은 과학적 사고를 원작에서 읽을 수 있어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준다. 영화의 내용이 방대한 편이라 장편 소설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에는 <네 인생의 이야기>를 비롯한 8개의  단편이 약 440쪽 분량에 걸쳐 쓰여있다. 대부분은 50쪽에서 100쪽 사이 중편 정도의 길이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경우 100쪽 가까이 되기 때문에, 테드 창의 명성을 생각해봤을 때 아마도, (내가 어느 출판사라고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 xx 출판사라면, 단락단락마다 공페이지 넣고 단단한 하드커버 씌워서 단권 판매했음직한 책이다. 정가로 1만2천원 정도 받았겠지. 


바벨론의 탑

테드 창이 처음으로 발표하면서 동시에 역대 최연소 네뷸러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얻은 작품이다. 그런 명성에 걸맞게 처음에 읽었을 때는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어디인가, 어느 시대인가를 궁금하게 하는 배경에서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상상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바빌론의 탑을 쌓고 있는 풍경이 과학적 상상력과 만나 이루어내는 이야기는 읽으면서 느낀 문학적 지적 신선함이라는 말 이외에 달리 설명할 말이 없으나, 독자를 함께 한도 끝도 없는 상상력의 세계로 이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가 없다. 


바빌론의 탑을 쌓는데 왜 광부들이 주인공일까. 이것이 바로 상상력의 문제다. 도시 전체는 축제의 분위기 속에 듬뿍 젖어 있다.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한달 반 가량 걸리는데, 그 탑을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탑을 쌓기 위해 수레에 벽돌을 싣고 올라가기 때문에 넉 달이 걸린다. 구리를 파던 엘람의 광부들은 그 구리를 사가던 도시 바빌론에 처음 왔으며, 그들은 광부로서 온 것이다. 파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하늘의 천장을 파고 들어갈 광부들. 하늘을 뚫으면 무엇이 나타날까. 짜자자잔 기대하시라


이해

이런 이야기는 영화로도 본 듯한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이야기이지만, 소설로 읽었을 때에 접하는 지적인 구라는 그 어떤 영화로도 설명 불가능할 것이다. 사고로 극심한 뇌손상을 입은 환자에게 호르몬 K 요법은 손상된 뉴런을 대량으로 재생시키면서 두뇌 활동이 지나치게 활발해지는 '부작용'을 입게 된다. 고로 결과는 평범했던 사람이 천재가 된다는 것. 여기까지 보면 그럴 듯한 상상력이고 보던 듯한 스토리인데, 그 천재가 사고하는 방식 자체가 천재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이라는 것.


영으로 나누면

수학자 르네는 1+1=2 가 아니라 무한한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해낸다.  줄곧 믿어왔던 이론이 통째로 부정되고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모든 증거가 새 이론 쪽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황은 우리가 알고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르네는 그게 아니라 주장한다. 남편은 어떤 방법이로든 수학적 이론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1=2라는 자가 당착에 빠진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돕기 원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추구해왔던 모순되지 않고 논리 정현한 수학이라는 세계가 난센스라는 사실에 절망한다.


손가락으로 1 더하기 1을 해보면 언제나 2가 나오지만, 종이 위라면 난 무한한 수의 해답을 써넣을 수 있어. 그것들 모두가 똑같이 유효하고, 바꿔 말해서 모두 똑같이 무효한 거야. 난 당신이 본 중 가장 질서정연한 정리定理를 쓸 수 있지만, 그건 난센스 방정식 이상의 아무 의미도 없어.” 르네는 쓰디쓴 웃음을 웃었다. “실증주의자들은 수학이 동의반복이라고 주장하곤 했지. 그들의 말은 모두 틀렸어. 수학은 자가당착이야.


네 인생의 이야기

이야기의 시작은 아직 태어나지 않을 자신의 딸에게 전하는 엄마의 목소리다.  "오늘밤의 이야기, 너를 잉태했던 이 밤의 이야기를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단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네가 너의 아이를 가질 준비가 되었을 때나 할 수 있는 얘기이고 우리는 결국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겠지" 딸에게 하는 이 문장에는 미래 시제와 과거 시제가 섞여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한 어떤 소망과 또 그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엄마다. 언어는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한다라고 하는 이론이 맞다 하더라도, 그 생각하는 방식이란 게 미래를 보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납득할 수 있을까.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축복이다. 


(더 있는데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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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2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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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은 1편에서 이어저 8월 9일부터 14일까지 일기 형식으로 계속된다. 연암 일행은 열하에 도착하여 태학관에 머무는데, 태학관이라는 곳이 청나라의 고관과 과시 준비생 및 학자들이 묵던 곳이라 그곳에 머무는 동안 소중한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운 연암은 만나는 사람마다 눈코입의 상세한 생김새와 차림새를 상세하게 기록하였으며, 또한 몇마디 나누어보고 그의 학식을 판단하기까지 한다. 특이한 점은 여행 길에서도 그랬지만 태학에서는 더더욱 연암을 보고 읍을 하며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당시 태학관이라는 곳이 황제의 생일 축하연이 있는 주간동안 세계적 규모의 축제 분위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연암은 청의 여러 지식인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주제는 지리, 풍속, 제도, 천문과학, 종교, 역사 등의 여러 분야를 종횡무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엄청난 양의 지적 교류를 남긴다. 왕곡정과 윤가전과는 몇일 밤을 꼴깍 꼴깍 새워가며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지적인 대화들을 나누었으며 이들을 별도의 글로 남겼다. 열하에서 만나 인연을 만든 사람의 수만도 손에 다 꼽을 수 없을만큼 많은데, 이들의 이력과 출신, 성격, 만나게 된 배경들을 경개록이라는 별도의 글로 만들어서 열하일기 전체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개괄적인 이력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여행 중 연암은 처음 밟아보는 변방의 땅에서 눈에 띄는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들으며 예리하게 관찰하고 조선의 현실과 비교한다. 금광과 목축에 대한 사색이 기억에 남는데, 이 기록이 맞다면 당시 조선의 압록강에 많은 양의 사금이 있었으며 이것이 공공연한 비밀로 밀매되었는데, 중국에서 보는 웅장한 건물들 지붕이며 벽에서부터, 모자에 박힌 금까지 모두 조선에서 나온 금이라고 하는 것에 놀란다. 조선에서는 금이 귀해 금관자나 금띠를 두르는 이품 이상의 벼슬마저 서로 빌려서 사용하는데, 열하의 기와에 도금한 그 흔한 금이 모두 우리나라에서 난 것인지를 의심한다. 당시 사신들이 주로 사용하는 돈은 은자로서, 조선에서는 은이 흔했고 그것이 조공무역 과정에서 중국으로 흘러들어간 것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왕실에서도 모르고 중국 황제도 모르고 있는 사금 역시 알게 모르게 중국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이와 부채, 그리고 연암의 필사기인 청심환 역시 중국 사람들에게는 알아주는 물건들이었던 것 같다. 당시 정자나 누각의 모든 창호는 조선의 종이를 발랐다고 한다. 한지의 세계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청심환은 도대체 얼마나 싸짊어지고 갔을지 모를 정도로, 연암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선물이나 답례품으로 주는데, 또 여행 중 만난 중국 사람들은 이것 한 알 얻자고 별별 사기를 다 친다. 1편에서도 먼저간 사신들이 행폐를 부렸다고 거짓말로 불쌍한 척을 해서 얻어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도 뜻하지 않은 엉뚱하고 난처한 만남의 대부분이 기승전->청심환한알만 굽신굽신으로 끝나는 것이다. 사실 내게 중국 사람들은 좀 사기꾼같은 기질이 있다는 있는데, 이 사람들을 보니 딱 그렇다. 하다못해 절에 사는 중까지 목이 말라 오미자 몇알 따먹었다고 연암을 잡아먹을 구는데 결론은 청심환 한알만 주쇼로 끝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특히 당대에 연암이 홍대용과 교류하며 지구는 둥굴다는 것, 지동설, 그리고 여러가지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들을 단지 철학적 통찰만으로 추리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지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우주의 별들과 달에 대한 섭리를 만물의 세심한 관찰로부터 유추하여 통찰로 얻어내는 과정은 놀라운 것이었다. 


"지구의 본체는 둥글고 허공에 걸려 있어 사방이 모나지도 않고 또 위와 아래도 없으며, 도는 모양이 마치 문의 돌쩌귀가 돌아가듯 해서 태양과 처음으로 마주치는 곳이 아침에 먼동이 트는 지방이겠지요? 지구가 점점 돌면서 처음 태양과 마주치는 곳에서 점점 어긋나고 멀어지면서 정오도 되고 해가 기울기도 하여 낮과 밤이 되는 것이겠지요?"


"비유하자면 창구멍으로 햇살이 새어 들어와 크기가 작은 콩알만 하게 되었을 적에 창 아래에 맷돌을 놓아두고 햇살이 비추는 곳을 먹으로 표시한 뒤 맷돌을 돌리면 먹으로 표시한 부분은 처음 햇살이 비친 곳을 지키고 움직이지 않을까요? 아니면 서로 어긋나 돌아보지 않고 지나치게 될까요? 맷돌이 한 번 돌아서 처음의 자리로 돌아오면 햇살과 먹을 표시한 부분이 겨우 합해졌다 잠시 만에 다시 사이가 벌어질 것이니, 지구가 한 번 돌아서 하루가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이겠지요?

또 등불 앞에서 물레가 돌아가는 것을 관찰해 보십시오. 물레가 돌아가는 곳마다 면면이 빛을 받게 될 것이니, 이는 등불이 물레 주변을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


"해와 달은 오른쪽으로 돌아 마치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것 같아, 그 궤도가 크고 작은 것이 있고, 돌아가는 속도가 더디고 빠른 것이 있어서, 일 년이 되고 그믐이 되는 것이 모두 정해진 법도가 있습니다. 해와 달이 왼쪽으로 돌면서 지구를 두른다고 말한다면 우물 안에 앉아서 하늘을 보듯 지나치게 좁은 식견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이야기들을 뭘 잘 모르는 기풍액에게 하였는데, 그가 좀더 학식이 높은 윤가전과 왕민호에게 알려 이를 듣고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왕민호와 윤가전과 함께 그야말로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필담을 나누는 것이다. 


황제의 명으로 생신 축하연에 참석하기 위해 열하로 갈 때 사신 일행은 황제의 명에 따라 엄청난 특권을  누리며 배도 먼저 타고, 수많은 중국측 수행원들의 대접받으면서 가게 되는데 반대로 돌아갈 때는 찬밥신세가 된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는 서번(티베트)의 승왕인 반선(성승, 달라이라마)을 당시 황금 지붕으로 된 궁전으로 된 데려다 놓고 극진한 대접을 하고 있었고 조선의 사신들에게도 그를 만나보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중국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오랑캐로 보고 교류하지 않는 것을 법도로 알고 있던 융통성 없는 조선의 사신들은 이를 거절하다가 어쩔 수 없이 보러 가고, 가기싫어 죽겠는 표정으로 가서는 예도 갖추지 않고(절도 안하고) 뻣뻣하게 군다. 그것도 모자라 귀행길 안전을 빌어주는 부적으로 하사받은 구리불상 및 여러 하사품들을 하찮게 여긴다. 청 황제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었지만, 이런 일들은 황제를 명을 받들던 예부와의 매끄럽지 못한 관계로 북경으로의 빠른 귀환으로 이어진 듯싶다. 


오늘날 에세이같은 성격도 있고, 때론 과학서나 역사서 같기도 한데 여행 중 만났던 인물들과의 관계와 개성들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에 때때로 소설과도 같은 풍경이 자주 만나는데, 개성면에서 단연코 가장 빛나는 인물은 연암이다. 곡정필담에서 특히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나는데, 그는 어마어마한 지식으로 분야를 막론하고 시대와 공간을 종횡무진 마구 가로지르는 왕곡정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지식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그와 동등하게 서로 이게 옳네 저게 옳네 하며 비판하면서 심도 높은 대화를 하는 이상적인 학자면서 또 밖에 나가 술집을 기웃거릴 때에는 생전 처음 보는 '험악'하게 생긴 서역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술동이채 털어 넣는 술허세를 보이기도 한다. 


2편을 읽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는데, 읽어도 읽어도 영 모르겠는 난코스가 있다. 라마교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황교문답과 반선의 내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반선문답까지는 좋았는데, 양고기 맛을 잊게 한 음악이야기라는 망약록서와 곡정과 나눈 필담인 곡정필담 이 두 부분에서는 좀처럼 읽어도 읽어도 무슨 내용을 읽었는지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제 자체가 이 주제 저주제로 종횡무진 마구 가로지르는데다가 역사적 인물, 역사적 사건들이 자유자재로 거론되고 이것들에 대한 두 상반된 시각, 혹은 두 공유된 시각이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흘러다니기 때문이다. 


황제의 생일을 맞아 중국을 둘러싼 각국에서 조공들이 들어오고, 요술쇼도 구경하고 열하는 완전히 세계적인 축제 분위기다. 우리의 연암선생은 신났다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즐기고 먹고, 마시고, 허세도 부리면서  하나하나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처럼 편하게 편과 메모지가 흔한 세대도 아니고 글자를 쓰려면 먹을 갈아 붓으로 쓰는 시대에 어떻게 말안장에서까지 글을 썼는지, 또 필담하고 난 후에 중국인들은 그것들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 많은 말들을 기억해서 기록했는지 대단하고 또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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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세트 (반양장본) - 전3권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4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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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꾸려진 사신단이 애초에 열하에 갈 생각은 아니었다. 게다가 연암은 사신단의 꼽사리였다. 열하는 중국의 한 변방의 이름이다. 연암 박지원은 개인 여행자의 자격으로 사신단을 따라 북경 여행을 갔는데, 고생고생 그 먼길을 갔건만 황제는 그곳에 없었다. 애타게 기다렸는데 수행단의 예법이 뭔가가 거슬렀는지, 황제는 그들에게 날짜를 정해주며 짐을 줄이고 수행단 규모를 축소해 자신이 있는 여름 별장인 열하로 오라고 명한다. 북경의 선진 문물에 눈이 휘둥그레해진 연암은 처음엔 북경 구경할 기회가 줄어들 것을 우려해 북경에 남기로 결심하지만,  황제에게로 향하는 험한 길을 다시 따라나서기로 한 것은 당시 조선에 북경을 다녀온 사람들은 많지만 열하에까지 다녀온 사람은 없기에 연암이 다녀와서 열하를 소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주위 사람의 권고다. 이런 팔랑귀에서도 엿볼수 있듯, 연암의 여정을 넘치게 풍부한 컨텐츠로 채우는 것은 꽃중년 연암의 천방지축 귀엽귀엽 캐릭터다.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가는 다른 관료들과 달리, 청국 여행이라는 목적만을 가진 연암은 첫 해외 여행, 길거리와 여정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 담았다. 말 위에서 자느라 기린이 지나간 것을 놓친 것을 그토록 안타까와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자느라 구경을 놓친 이국의 동물을 안타까와하는 연암은 그렇게 보고 느끼고 말하고 쓰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하나도 놓칠 세라, 다가가서 말을 섞고, 배우고 전하며 지적 세계를 넓혀가는 경험을 한다. 중국말과 한국말이 다르지만, 한자를  공유하던 당시, 필담은 말이 달라도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도구였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당시의 가치관으로서는 도발적이기까지 한 연암의 세계관 뿐만이 아니다. 이미 망한 명에 대한 환상 속 명의 숭배와 새로운 세계로 떠오른 지 오래된 청에 대한 배격 사상을 틈틈히 비판하면서, 변화하는 세계 정세를 인식하지 못하고 과거 속에 깊이 침잠한 채 고립되고 가난한 채로  고인 물처럼 정체되어 있던 조선을 비추었던 거울이기도 하다. 명이 청으로 바뀌었고, 변발을 강요당한 채로 죽음을 선택한 명장들과 왕족들은 그 때로부터 100년도 더 지난 과거였으나, 여전히 조선인들은 청의 만주족들을 되놈들이라고 지칭했고, 오랑캐로 취급하지만, 연암은 가는 곳마다 발달된 청의 문명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여행을 하며 적은 것이라 일기니 풍경과 느낌의 산문이려니 생각할 수 있지만, 연암은 말하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였고 그것을 적었다. 그의 글에는 오만가지 잡다한 분야의 지식들이 따라다니는데, 그 분야는 문학, 사상, 과학, 예술에서부터 정치 사회 언어학까지 정말로 방대한 분야의 지식들이 자유럽게 넘나들며 유연한 사고의 과정을 보여준다. 뭐 조선의 세익스피어라고 하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몽퇴스키외에 비유된 적이 있다 하는데, 내가 읽으면서 생각난 사람은 움베르토 에코였다. 무엇보다도 에코의 유머러스함과 엉뚱함을 지녔고, 중국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면서 음과 훈의 차이로 인한 언어적인 놀이,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 골동품(서적)에 대한 애정까지. 특히 비상한 암기력이 아니면 아무리 사고의 틀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도 가능하지 않는 대화 중 툭툭 튀어나오는 선인들의 말에 대한 인용 같은 것들을 보면서 에코의 책을 볼 때 하는 감탄사가 같이 나온다. 


책은 어떤 시대의 가치를 바탕으로 깔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 시피, 조선시대의 유교관 속에서 그 숨막히는 고리타분함이 세계관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을 고전을 겁내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이유다. 아프리카나 아랍, 남미와 같이 먼 공간의 문학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먼 시간 속의 글귀들을 읽기 어려운 이유는 이렇게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서로 다른 시대적 가치라는 벽이 소통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전이 살아남은 까닭은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그 때의 가치 속에서 열광했던 어떤 것들이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열하일기의 명성은 바로 우리가 판타지 속에서나 재밌게 바라볼 수 있는 조선시대 실제했던 한 개인이 엄청난 지식과 해학과 풍자로 그 어느 여행서도, 일기도, 혹은 산문집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문학을 완성시킨 것이다. 

 

의주에서 국경을 넘는 때로 시작해서 사신단들과 함께 중국에서 북경으로 향하는 여정이 담겨 있다. 의주에서 국경을 넘기 전, 밀반출 차단을 위해 철저하게 몸검사를 받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압록강을 건너 무인지대를 지나 각 도시를 통과해가며 베이징에 도착하는 여정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이 때 사신들은 어디서 무얼 먹으며 어떻게 여행을 했는지, 또 연암이 길에서 혹은 성에서 만난 중국 사람들은 조선인들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연암과 어떻게 인연을 만들었는지 등등 수많은 흥미로운 요소들로 가득하다. 특히 윗선의 명을 어기고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도시를 구경하고, 낮에 만났던 사람들과 밤새 필담하며 대화하는 모습은 하나의 짧은 소설만큼 재미있다. 


연암은 특히 발달된 청의 기술문명을 속쓰리게 바라보았는데,  속히 본받아야 할 것을 촉구하는 것 중 몇가지가 수레와 도량형 통일, 벽돌, 난방 구조 등이다. 리처드 불리엣의 <바퀴 세계를 굴리다>라는 책을 얼마 전에 읽었었는데, 그것을 읽으면서도 중국의 바퀴 사용에 대한 의문점이 가시지 않았었고, 이 책을 통해 보다 현실적이고 풍속적인 차원에서 중국의 수레 사용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연암의 글을 통해, 조선에서도 수레 사용을 본받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길이 험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던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연암은 글을 통해 중국의 험한 골짜기 까지 다채로운 수레들이 다니는 것을 보라며 길은 다녀야 생기는 것이라고, 바퀴와 도량형 통일을 받아들여야할 시급한 과제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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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독서 - 완벽히 홀로 서는 시간
김진애 지음 / 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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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취미로 하다 보면 책이 책을 부르는 경우가 많아진다. 책 속에서 등장 인물이 읽고 있거나 저자가 특별히 좋아하는 칭찬하는 책들은 당연히 관심이 생기고 같은 책이 여러 책에서 언급되거나 하면 더욱 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이 때문인지 독서에 관련된 책도 많이 출간되고 있고 때로 이런 책들은 책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독서 가이드 책들도 그 가짓수가 많아지면 또다시 선택의 어려움에 직면하는 딜레마가 생긴다. 나에게 맞는 책을 선택하기 위한 책을 선택하는 수고까지 감수해야 한다면 독서가 너무 어려워지는 거 아닐까. 

최근 읽은 몇몇 독서 관련 책들을 돌이켜보면 이현우의 < 러시아 문학 강의>가 20세기 격동의 러시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작가와 작품 세계를 쉽고도 체계적으로 전달해서 매우 도움이 되었고, 첫 권의 성공으로 두번째 버전까지 출간된 <책은 도끼다>가 잘 알려진 고전 및 양서들을 소개하고 작가 자신이 독자로서 느낀 감동과 대략의 깊이있게 전달하고 대략의 스토리까지 소개하고 싶어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때로 읽었다는 착각까지 안겨주었다.최근 몇년간 그 밖에도 책에 관한 책들을 여러권 읽었지만 딱히 기억나는 건 여기까지고 가장 좋았던 건 꽤 오래전에 읽은 <여행자의 독서>라는 책이다. 작가가 읽었던 책에서 나온 장소를 여행하면서 책에서 받은 감동을 다시 느끼고 그 아스라한 감상을 다시 자신만의 언어로 정갈하게 전달했던 걸로 기억난다. 

세상에 책은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자신의 취향에 딱 맞는 책을 읽는 일 역시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장르 소설을 좋아한다면 해당 장르만 파면 그나마 범위가 줄어 나름 고충이 있을지는 몰라도 책의 선택에 대대적으로 실패하는 경우는 줄어들 것 같다. 반면 잡식성의 나같은 독자들은 때때로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장르에서도 흥미를 발견할 때가 자주 있기 때문에 이것 저것 시도해보는 편이고 그러다가 읽는 책이 중반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럴 때는 좋아하는 작가만 골라서 읽으면 되지 하겠지만 잡식성이 괜히 잡식성이 아니다. 여러 작가의 책을 골고루 읽어보고 싶고 국내에서 많이 안읽힌 책도 개척해보고 싶고 욕심은 점점 자라난다. 

제목이 여자의 독서여서 잠시 여성과 독서에 대해 생각해봤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시청한 효리네 민박에서 아이유랑 똑같이 생긴 민박집 가사 도우미가 손님들이 모두 외출하고 효리네 식구들도 모두 동반기절(낮잠)한 평화로운 시간에 조용히 뜰에 나와 책을 읽는 장면이 있었는데 얼핏보니 민음사 세계문학이었다. 요즘은 남여 시청율에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티브이 연속극 시대에 일일 드라마는 여성들이었다. 혹시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스토리텔링을 더 좋아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은 건 딱히 이 두가지 사실에만 기반한 건 아니고, 블로거들 중에서도 소설을 '가볍게' 읽는다며 폄허하는 분들도 있고, 많은 스타 드라마 작가들이 여성인 것도 그렇다. 그래서 여성의 독서 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여성의 독서의 서회적 패턴같은 걸 연구한 것이거나 혹은 패미니즘적인 내용일까 했는데, 알고 보니 책에 대한 책이다. 작가가 어릴 때부터 즐겨 읽고 좋아하는 여성 작개들의 책을 작가 자신의 이야기 반 책 줄거리 반 섞어서 소개한다. 문학 뿐만 아니라 만화 캔디캔디에서부터 수전 손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본인 얘기 했다가 책 얘기 했다가 좀 두서 없고 산만한 게 특징인데 다양한 여러 분야의 여성 작가의 책과 그것들을 작가가 어떻게 읽었는지가 소개된다.

내가 읽은 책들을 한 권에 압축시켜, 내 인생의 책들이라는 책을 쓴다면 내가 읽은 많은 책들 중에서 어떤 책들이 어떤 기준으로 선택되고 어떻게 쓰게 될까.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했던 말인 것 같은데 책이 단일한 작가의 의도를 갖지 않는다. 백만명이 읽었다면 백만개의 해석과 뷰가 존재하는 것이다. 김진애는 캔디캔디에서 스테아가 죽어가던 모습을 기억했는데 모두의 기억속에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캔디가 테리우스를 떠날 때 두이서 백허그를 하며 시간이 이대로 멈추어주었으면 이라고 되뇌던 장면과 스테아가 전투에서 적의 공격에 추락하면서 죽어가는 순간 캔디와 그의 연인을 함께 생각하며 이 아름다운 석양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장면이다 이 때 스테아의 얼굴은 ㅇ이미 뒤집혀져 추락하고 있지만 추락하는 장면은 마치 전쟁이 멈춘 듯 고요하고 평화롭다. 생과 사가 교차하는 그 끔찍한 시간에 그런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지만,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고 그 때의 연합군이 믿은 그 전쟁의 명분은 결국 평화였으므로 전쟁은 평화로 귀결되고 사랑하는 사람들응 위해 싸우는 스테아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살육의 현장에서도 아름답게 저무는 석양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당시 10대 소녀들의 마음을 모조리 빼앗았었다. 나에겐 또한 캔디캔디라는 만화와 관련해서 결코 잊지 못할 사연이 하나 있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 책을 돌려 읽으며 감성을 공유하던 친구. 잊혀진 시간을 떠올리는 기회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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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지독한 오후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깨알같은 일상의 디테일과 대화가 어느 한 사건이 일어나던 날의 하루와 이미 사건이 일어난 후의 두 개의  병렬된 시간 위에 나란히 배치된다. 한 편으로는 사건을 향해 진행되는 과거의 그 '정말 지독한 오후'의 아침부터 다음날 아침까지의 하루동안 사건의 발생 경위가 느린 속도로 천천히 드러내고, 또 한 편으로는 몇달 후인 현재 시점에서 그 끔찍한 하루로 인해 달라진 오늘이 과거의 사건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에게 무한 떡밥을 던지며 흘러간다. 이 두 시점은 서로 교차되며 계속되는데, 과거의 시점은 현재를 현재의 시점은 과거를 서로 설명한다. 삶의 우연과 필연, 그리고 선택이라는 명제 앞에서 과거와 현재의 연속된 삶이 서로를 어떻게 간섭하고 연결하는지를 암시한다.


그 날, 서로 이웃인 두 커플과, 서로 베프인 두 커플은 양쪽을 다 아는 커플인 에리카와 올리버 커플을 매개로 알게 되어 세 커플은 바베큐 파티를 즐긴다. 에리카는 첼리스트인 클라멘타인에게 어릴 때부터 헌신적인 단짝 친구이고, 티파니는 에리카의 옆집에 사는 부자 커플이다. 에리카와 샘  부부에게는 아장거리는 두 딸 홀리와 루비가 있고, 티파니와 비드 커플에는 10세 정도되는 딸이 한명 있고, 에리카와 올리브 커플은 아이가 없다. 그리고 비드네 옆집에는 해리라는 매우 심술궂은 독거노인이 한 명 있는데, 이 독거노인의 사망은 초반 현재의 시점에서 계단을 굴러 고독사한 노인으로 무심하게 그려지고,  바베큐 당일의 과거 시점 아침에는 살아있는 심술궂은 모습으로 잠시 등장한다. 

초반의 느린 진행과 두서없는 산만함은, 후에 빈틈없이 계산된 사건과 주제를 설명하는 장치들이며, 알고 보면 주제를 설명하거나 사건의 배후를 부연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의미없어 보이는 수다들은 후에 인물의 성격과 트라우마, 혹은 심리적 상태를 짜임새 있게 설명한다. 패미니즘, 우정, 수집벽, 양육, 상처, 트라우마에 인공수정과 난자 기증에 대한 윤리적 성찰이라는 무거운 주제까지 소설이 다루는 전방위적인 주제는 책읽기를 마친 후에도 여운을 준다.

우정에 대하여. 
에리카는 클라멘타인에게 둘도 없는 친구다. 에리카와 클라멘타인 사이는 상식적인 베프와는 다르다. 가족 이상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로 큰 의지가 되고 외롭지 않겠다는 점에서는 부럽지만, 클라멘타인이 에리카에 대해 느끼는 구속감, 또 에리카가 클라멘타인에 대해 느끼는 집요함은 그 둘 사이의 우정을 답답하고 숨막히게 보이게 한다. 에리카는 클라멘타인에게 헌신적인 친구고, 둘은 거의 매일 통화를 하고 자주 만난다.  클라멘타인이 양육하는 방식을 에리카가 일일히 참견하고 교정할만큼 밀착된 관계에 있지만, 클라멘타인은 그것을 좀 불편하게 여기는데, 거기에는 까닭이 있다. 

에리카는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양육되지 못했다. 그의 엄마는 바깥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집안에서는 강박적 수집벽(hoarding)이 있는 사람이다. 전에 TV에서 이런 강박적 수집벽 때문에 썩은 물건들 사이에 파묻혀 죽은 형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에리카의 엄마가 그렇다. 어릴 때부터 그런 자신의 엄마와 집이 부끄러워, 누가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주지 않은 채로, 몸에는 벼룩에 깨물린 자국을 드러내며 자란 것이다. 이 때 구세주가 된 것이 클라멘타인의 부모이고, 그 부모의 압력(?)으로 클라멘타인은 에리카에게 친절한(?) 친구가 된다. 에리카의 부모가 역할을 제대로 못하니, 아이를 집으로 초대하고 함께 휴가를 다니며 클라멘타인을 붙여주어 함께 놀게 하면서 제2의 부모 노릇을 해온 것이다. 변변한 친구도 없는 에리카에게 그 부모가 준 가장 큰 선물은 클라이멘타인이라는 친구다. 하지만 클라멘타인은 그녀가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는 것을 부담스럽고, 또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겨 속상하기까지 한데, 그것을 내색하지 않는다.

꼼꼼하고 성실하고 똑똑한 에리카가 클라멘타인처럼 자유분방한 성격에게는 조금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클라멘타인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녀가 한 말을 꼼꼼히 기억하고 덤벙대고 실수하는 그녀를 보살피는 것이 에리카이기 때문에 클라멘타인은 습관적으로 그녀를 의지한다.  그러던 날, 바베큐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에리카와 올리브가 2년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말하면서 상상도 하지 못한 큰 부탁을 한다. 

지켜야 할 선과 넘어도 되는 선 사이에서
여기서 나는 다시 우정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는데, 만일 난자의 문제 때문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난자 제공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베스트 프랜드라고 정의할 수 잆을까. 아니 질문이 바뀌었다. 정말로 아주 친한 친구라면 난자 제공을 부탁할 수 있을까. 게다가 에리카는 자신의 아이가 자신의 엄마의 유전자를 받아 강박적 수집벽이 있게 될 공포가 있는 데다가, 클라멘타인의 외모와 성격을 닮으면 완벽하게 원하는 아이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 점이 역겨웠다. 클라멘타인은 이 부탁을 받은 후, 더럽혀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하는데, 하필이면 그 말을 엿듣게 되고 더욱 상처를 받게된다. 


집을 쓰레기더미로  만들고, 수도와 전기까지 떨어진 집에서 아이를 거의 방치 상태로 두었던 에리카의 엄마가 아직도 철딱서니 없는 행동과 말을 하고 다니는데, 이 난자 제공 문제에 대해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녀 한명 뿐인 것 같다. 아무리 과학이니 뭐니 해도 너무 나간 거 아니냐고...늘 에리카에게 받기만 하는 클라멘타인은 자신이 한 말을 엿들었을지 모른다는 죄책감과, 그 정말 지독한 날의 오후에 있었던 사건의 영향으로 난자 제공을 결심하게 되는데,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난자로 두 사람에게 태어난 아이는, 자신의 아이 같은 느낌이 들을 거라는 거다. 그러니까, 완벽한 에리카에게서 완벽한 양육을 받지만, 사실은 자신의 아이라는 느낌이 들 거라는 거다. 


내 유전자를 받은 남의 아이라는 점을 어떻게 감당할까. 그들이 아무리 완벽한 부모라고 할 지라도, 그들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는 동안 남의 남편이 자신이 자기 아이라고 생각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아이인 남의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 그 친밀감? 혹은 가까움은 에리카는 어떻게 감당할건가. 우정이란 그런 것을 제공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우정이란 사랑과는 달라서 한 쪽이 한 쪽을 일방적으로 좋아할 수 없다. 물론 그렇게도 약한 우정 혹은 우정같은 관계가 생길 수 있겠지만, 두 사람 사이의 균형과 질서가 필요하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비중으로 여겨지는 심적 친밀감. 그런 거 말이다. 그것이 불균형을 이루면, 우정은 겉돌고, 베프에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이다. 


잘못되면 엄마 탓인 세상

클라멘타인이 조금 덜렁대는 성격이고, 자상한 샘이 아이를 주로 돌보는 쪽이다. 하짐나 그녀의 첼로 레슨과 앙상블 행사 연주는 클라멘타인의 자아 실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보탬이 된다. 많은 것을 남편이 돕고 있지만, 돕는 것과 생활의 주체가 되는 것은 입장이 다르다. 그녀는 아이들이 없는 곳, 조용한 곳에서 원없이 연습을 하고 싶다.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는 곳에서 남편의 헌신에 기댄 채 오케스트라 오디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고 있는 상태라는 사실은 슈퍼워먼 컴플렉스 시대에서 크게 나아간 게 없다. 자상하고 착한 샘이 아이들을 주로 돌보고 클라멘타인의 오디션 연습도 시키는 것이 굉장히 훈훈하고 부럽고 좋았지만 결국 아이가 잘못되면 그 모든 비난의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야 하는 쪽은 엄마라는 보편적인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를 소설은 매우 잘 반영한다.  게다가 그토록 민주적이고 훌륭한 부모까지 클라멘타인의 탓을 하는 것이 마치 내 일처럼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다. 페미니즘은 멀리 있지 않다. 아주 작디 작은 일에서 매순간 분하고 원통한 일이 일어나고, 그 때마다 자신을 죽이고 또 죽이며 살아가는 것이 여성의 인생이다.


사람들이 베프를 만들고, 베프를 챙기고, 서로를 너무 강하게 의지하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의 어떤 만족감, 자신의 파워. 그런 것들.. 그 정말 지독한 오후의 일을 계기로 매일 똑같은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반성없이 살던 이 호주의 중산층 사람들이 상처와 용서, 진실을 대면함으로써 생기는 반성 등으로 인해 서로와 서로의 관게에 대해 다시 확인하게 한다. 바른생활처럼 끝나기는 결말이기는 하지만, 엿보는 삶이 주는 인간이란 것의 보편성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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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8-06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즈번드 시크릿 재밌게 봤는데 CREEP님의 평점때문에 이 책도 기대되네요^^

CREBBP 2017-08-07 12:50   좋아요 0 | URL
매번 리안 모리타이의 소설을 재미있게 보는 편인데 이 책은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도 많았구요.

고양이라디오 2017-08-07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빌려서 조금 읽었습니다^^ 이 책이 작가의 두번째 책이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