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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서른 중반, 매일 아침 절망과 함께 눈을 뜨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1967년 어느날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우연히 조우한 후 그에게 세상은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한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죽은 1979년까지 결핍과 냉소를 겉옷처럼 걸치고 다니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우정과 그를 향한 숭배, 그리고 그의 열정과 천재성과 순수함과 도발적 광기에 대해, 온전히 그를 위해, 그만을 위해, 그만에 대해서 한 권의 책이 될 글을 썼다. 소설이라는 장르로 출판되었으나, 소설적 구성은 완전 파괴되어 서사라는 것을 건져내기 어렵고, 사건과 인물이 어느만큼 허구가 가미된 것인지도 힌트조차 없다. 

 

줄바꾸기 없이 한 문단으로 구성된 하나의 책. 하나의 소설. 이것이 오스트리아의 천재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특징짓는 요소라고 하니, 작가의 이 어이없는 행간없음에 우선 집중해보고 싶다. 왜 문단을 바꾸지 않았을까. 작가는 1931년 생이고, 67년이라면 36살의 나이에 그를 만나 48세의 중년의 나이에 그가 그토록 숭배하던 친구, 그의 삶에서 많은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해준 영혼의 친구 파울을 떠나보냈다. 처음 파울을 만나기 몇년 전부터 작가는 병적인 침울 상태에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을 둘러싼 무의미함에 저항하며 발버둥쳤지만 도리어 그 무의미함 속으로 깊이 침몰하고 있었고, 그런 무의미함 속에서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혐오하며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있던 상태라고 했다. 그러나, 작가 연보를 찾아보니, 작가의 이런 고백과는 달리 이 기간동안 작가는 문학가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존재를 인정받기 시작한다. 56년부터 산문, 시집, 희곡 등을 출판하고 희곡이 초연되었으며 63년 첫 소설이 신문지상에서 중요 문학적 사건으로 평가받은 이후 파울을 만나기 직전인 64년 65년에 율리우스 캄페 상, 브레멘 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휩쓸기 시작하며 전성기에 입성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그는 오랜 교육과정과 습작 등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인정받고 전성기를 보내기 시작했을 때 반대로 절망하고 있었다.

 

1982년에 출판된 이 소설은 친구 파울이 죽은 직후 2~3년 안에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그 행간없음이 뜻하는 건 파울만을 위한, 파울에 대한, 파울과 함께한 것들만 다룬다는 작가의 의지일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는 죽어가고 있는 친구를 12년동안 응시하며 그 속에 자신을 투영하였다. 그와 함께 하며 보낸 음울과 조소와 광기로 가득찬 그 날들 속에서 축복받은 순간들을 기억했고 그 속에서 자신을 찾았다. 한행 한행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파울의 침울한 기록들로 채워가며, 파울의 죽음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죽음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과 그것을 다시 이어주는 끝도 없는 문장들의 변주를 통해 파울을 알게된 12년 그 긴 시간의 기록을 단 한 문단 속에 채워 넣고, 가두었으며, 그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고집스럽게 획일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설명하였다.  


파울이 열정과 광기로 죽음에 가까와지는 동안, 작가는 열정과 질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오르내렸다. 이렇게 열정과 광기와 질병이 두 사람 사이를 관통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파울의 인생에서 고귀한 가치를 찾는다. 그는 파울이 자신의 존재를 성향과 능력 그리고 욕구에 맞게 유용한 방식으로 향상시켜 주고 그의 삶 자체가 가능하도록 그를 지탱시켜 준 사람에 속한다고 적고 있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해도 자유롭게 대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동성 친구라고 고백하고 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이러한 고백들은 비트겐슈타인이 그토록 치열하게 심취해있던 음악이라는 것의 테마처럼 변주곡의 곳곳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흩어지며 길고 긴 한 문단의 전체를 관통하며 흐른다.

 

지금 일월의 냉기와 일월의 공허를 함께 이겨내기 위하여 내 곁에 있어 줄 산 자는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과 함께 하면서 혹독한 시기를 극복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모든 죽은 자 가운데서 최근에, 그리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인물은 내 친구 파울이다. 115

 

파울은 현실 감각이라고는 눈꼽만큼도 갖지 않은 6살짜리 어린애와 같은 순수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작가가 파울을 그토록 좋아했던 것은 그의 지적, 철학적, 문화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언변, 유머 등의 능력 말고도 그가 가진 어리숙함, 전체를 관통하지 않고 표면만을 보는 선량한 마음과도 관계가 있을 듯하다. 대개 인간은 부분만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는 능력이 있다. 내가 지금 이런 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모두 나누어준다고 해서 비참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질 리도 없을 것이고, 내가 지금 가진 모든 돈을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다 써버리고 나면 훗날 자신이 대신 비참하고 가난해진다는 사실을 꿰뚫어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파울은 일반 사람들과 달리, 가난한 사람의 피상적 모습에 눈물 흘리며 끝없이 솟아나는 샘물 같던 자신의 모든 재산을 인간의 불행과 비참함의 표면만을 위해 던져버리고는, 정작 인생의 후반부엔 모두에게 심지어 그토록 숭배하던 작가에게까지 외면당한채, 불행하고 비참하고 가난하게 죽어갔다.

 

생의 초반에는 소위 영화가 끝이 없다고 하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유함을 향유하며 훌륭한 보호 아래서 자랐고, 중략. 그 이후에는 자의식이 이끄는 대로 가족들의 의사와 어긋나는 길을 스스로 닦아 나갔고,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표면적 가치였던 것들, 즉 부유함과 풍족함, 그리고 안락한 삶을 버렸다. 정신적인 삶을 영위함으로서 자기구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중략. 루트비히는 파렴치한 철학자의 길로 나섰고, 파울은 파렴치한 미치광이의 길로 나섰다. 89

그 둘의 우정은 지적 우월함에서 시작된 냉소와 그 지적 우월함의 지나친 열정에서 비롯된 광기의 공유로 이루어졌다. 책을 덮었을 때, 나는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우정보다 더 깊은, 두 사람만이 이해하는 어떤 종류의 언어와 문법, 그리고 코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불행하고 슬픈 기록이지만, 그것이 부러웠다. 우리는 친구와 가족과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때때로 어떤 한 가지 이상의 분야에 대해 자신만의 성을 쌓는다. 더 이상 가족과 친구와는 통하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고립되고 홀로되는 섬 하나를 만들고, 틈틈이 그 섬 숲에 숨는다. 그리고 그 섬 속에서 외로움과 우울에 물을 주고 꽃을 피운다. 저자는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신의 섬과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섬 사이에 서로 왕래할 수 있는 작은 구름 다리를 놓았다. 두 섬 사이를 잇는 다리는 서로의 섬을 확장시켜 섬세하고 멋진 둘만의 고유한 세계를 완성시켰다. 그 세계에서 두 개의 섬은 때로 하나의 세계가 되고 우주가 되었다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얼마나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했는지, 결핍과 우울이 가득 드리운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의 이미 완성된 문화 예술에 대한 열정적 사랑과 철학적 사고의 공유와 논쟁 속에서 둘이 얼마나 행복하고 따스한 날들을 향유하고 있었을지 상상해 본다. 그래도 슬프다. 그의 고백이 너무 솔직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죽기 직전의 몇주, 혹은 몇달, 혹은 몇 년일수도 있는 기간 동안, 그가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다니다가 스스로가 산 사람이라기 보다는 죽음의 그림자에 더 가까운 모습이 되어갈 때, 작가는 그를 외면했다. 둘이 함께 했던 그 멋있었던 유머와 세상을 향해 마음껏 내지르던 냉소와 비난을 그토록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면서도 그가 이제 너무 병약해져 살점이라고는 붙어있지 않은 채 거리를 스쳐가도 그가 더이상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자 작가는 그를 외면했다. 그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부정했다. 실제로 그랬었는지 소설적 허구가 가미된 것인지 모르겠는 부분은 가령 이 정도이다. 어떻게 외롭고 병들고 친구를 외면했을까. 하지만 그 외면을 작가는 독자에게 납득시킨다. 그래서 슬프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신랄하게 증오하고 비난했다. 그들의 우정은 증오와 저주와 비난과 조롱과 냉소와 같은 것들이 단단한 기둥을 이루었다.  여름이면 그들은 호텔 커피하우스 테라스의 늘 앉는 자리에서 오직 욕하고 비난하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가 눈 앞에 나타났다 하면 그 즉시 그것은 혹평의 대상이 되었고, 몇 시간이고 지치는 법도 없이 다른 존재들을 헐뜯고 온 세상을 비난했으며, 말로 속속들이 쑤셔대고 처절하게 난도질했다. 그러나 그가 조롱하고 비난하고 맞서는 것들은 모두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것들이다. 자연을 증오했고, 문인들을 증오했고, 그들의 조국을 증오했고, 그들을 낳은 대지와 그들을 탄생시킨 가족들을 중오했다. 그들의 질병, 광기가 불러올 죽음으로부터 구해준 의사들을 극도로 저주했고,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예술 작품들, 자신이 쓴 희곡의 초연과 오폐라 초연을 혹평하고 비난했으며 조롱의 휘파람을 불었다, 자신에게 문학상의 주최들을 하나같이 비난했으며, 상금 때문에 똥물을 뒤집어 썼어야 했다고 회상했다,  폐수술 후, 안좋은 도시 공기를 피해 시골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지만, 살기 위해 머물러야 하는 시골을 극도로 저주했다. 원하는 예술 잡지 한권을 구할 수 없는 문화 예술의 향유와는 동떨어진 시골은 그에게 혐오스러운 곳이다. 그에게 시골은 원하는 잡지 한 권을 구하기 위해 지쳐 나가 떨어질 때까지 이 도시 저 도시로 400킬로에 이르는 여행을 하게 하는 저주받은 곳이다.

너도 나도 대도시를 떠나 시골로 몰려가는 것이 유행이다. 대도시에서는 머리를 최대한으로 사용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 귀찮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연으로 가려는 진짜 이유이다. 중략. 대도시의 엄청난 장점들을 활용하고 누리기보다는 잘 알지도 못하는 자연으로 도피하여 아둔한 맹목에 빠진 채 자연을 감상적으로 칭송하면서 그 안에서 퇴화해 가는 것이다. 중략. 나에게 적합한 삶은 대도시에 있는데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내 폐를 얼마나 저주했는지 모른다. 108

 

시간과 공간은 한 시점의 기억에서 다른 기억으로 자유롭게 흩어졌다 모아짐을 반복하며 배치되고,  확장하며 변화하다가 다채로운 언어로 변주되며, 클래식 음악처럼 흐른다. 사건은 오로지 사유와 사유가 맞닿는 지점에서 사고를 설명하기 위해서만 작가 임의대로 아주 조금씩 재생된다. 자전적 소설과 에세이의 아무 지점에서라도 서더라도 성립되지 않을 것 같은 무질서한 문장은 우울과 결핍을 열정과 광기로 채색하며 행간 없이 잇는다. 한 문단의 무질서한 자유는 작가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그리움과 회환을 끌어안은 채 변주를 끝낸다. 냉소적 유머와 위트가 끝나고 책을 덮고 푸욱 한숨을 쉬고 나면, 그 다음날부터 울림은 시작된다. 슬픔도 그렇게 계속된다.  아이들이 물 속에 있어서 슬픈 것인지, 인간은 검은 죽음의 그림자를 몰고 다니는 친구의 죽음을 외면해도 그것을 납득할 수 있는 존재여서 슬픈 것인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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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4-06-11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정갈하고 성실한 리뷰,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다시 갈무리합니다.

CREBBP 2014-06-13 13: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봄밤님 글도 잘 읽었어요. 늘 잘 읽고 있어요.

rendevous 2014-06-15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토마스와 파울 (이름만 불러보고 싶은 ^^)와 좀 더 가까워진 기분입니다. 특히 작품 창작기간 전후로 토마스의 상태에 대한 정보가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질문드리면 마지막 단락에 '사건은 오로지 사유와 사유가 맞닿는 지점에서 사고를 설명하기 위해서만 작가 임의대로 아주 조금씩 재생된다'는 문장을 풀어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연수 소설가가 말하는 것처럼 정해진 현실-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과 눈이 충돌하면서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고, 그렇게 재구성딘 사건은 작가의 지향성에 따라 부분적으로 재생된다는 의미일까요?

CREBBP 2014-06-16 13:07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시는 의미가 맞는 것 같아요. 제가 소설론은 잘 모르지만 플롯이라거나 서사라거나 그런 것들이 완성되려면 일반적으로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을 통해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생각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 소설의 경우, 생각이 우선이라는 거죠. 에세이처럼요. 그런데 그 생각은 오로지 파울에 대한 기억, 파울에 투영된 자신에 대한 기억에 의존해요. 추상적인 생각들을 먼저 하기 시작하고, 그 사고의 여기저기에 사건들이 개입하는 식이요. 그런데 그것이 급작스럽게 문단바꿈 챕터 바꿈을 통해 주목되지 않고, 딱 클래식 음악으로 치면 변주곡 같아요. 문장 한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가면서 앞의 문장의 생각과 부분을 끌어오고 그다음 문장도 또 그 다음문장으로 그렇게 끝없이 한권끝까지 계속되요.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 이거 뭐야 왜 갑자기 얘기가 바꼈어 이런 생각이 들을 새가 없이요.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문단을 끊을 수 있는 데를 끊어봤어요. 여기 저기서 계속 문단끊기를 시도했는데, 그게 잘 안되는 거에요. 전체적으로 한 문단으로 유기적으로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굳혔지요. 또 다른 예를 들면, 작가가 문학상 시상식 때의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건이 먼저 나오는 게 아니라, 자신과 파울이 세상을 증오하고 냉소하는 것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나가다가 시상식이 똥물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변주되고 계속 읽다보면 그건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사고의 일부, 파울에 투영된 자신의 일부(사실 가끔 파울과 자신이 큰 차이가 없기도 해요) 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의견 교환 좋군요. ^.^

rendevous 2014-06-16 22:34   좋아요 0 | URL
클래식 음악에 대한 메타포 좋은 것 같습니다 ^^ 실제로 토마스가 음악애호가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몰락하는 자> 글렌 굴드 나오는 거 보면 음악적 소설을 안 했을 지 몰라도 음악에 확실히 애정이 있었던 것 같아 보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