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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 이름은 보리, 진돗개 수놈이다. 태어나보니, 나는 개였고 수놈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기는 소나 닭이나 물고기나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 태어나보니 돼지이고, 태어나보니 사람이고, 태어나보니 암놈이거나 수놈인 것이다.

      개로 태어났으므로 나는 내 고향의 이름을 모른다. 이름은 사람들에게나 대단하고, 나는 내 몸뚱이로 뒹구는 흙과 햇볕의 냄새가 중요하다. 내 이름 보리도 사람들이 붙여놓은 이름이고 개로 태어난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10쪽)

 

 2. 개의 공부는 매우 복잡해. 개는 우선 세상의 온갖 구석구석을 몸뚱이로 부딪치고 뒹굴면서 그 느낌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야 해. 그리고 눈, 코, 귀, 입, 혀, 수염, 발바닥, 주둥이, 꼬리, 머리통을 쉴새없이 굴리고 돌려가면서 냄새 맡고 보고 듣고 노리고 물고 뜯고 씹고 핥고 빨고 헤치고 덮치고 쑤시고 뒹굴고 구르고 달리고 쫓고 쫓기고 엎어지고 일어나면서 이 세상을 몸으로 받아내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지. (24-25쪽)

 

3. 어깨가 늘어지고 고개가 숙여지고 눈동자가 초점을 잃으면 그건 사람들이 슬퍼하고 있는 거야. 사람들은 따스한 집과 옷과 밥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 사람들은 부모형제와 이웃과 논밭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집을 짓고,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우물을 파고 땀 흘려 논밭을 일구는 거지. 또 죽은 사람도 잊지 못해서 산소를 만들고 다들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거야.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히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만으로 살아가지를 못해. 나는 좀더 자라서 그걸 알았어. 그것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이고 사람들의 약함이고, 모든 슬픔의 뿌리라는 것을. (41-42쪽)

 

4. 개들은 언제나 지나간 슬픔을 슬퍼하기보다는 닥쳐오는 기쁨을 기뻐한다. (55쪽)

 

5. 주인이 가끔씩 나를 꾸짖고 때려도 주인이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끔씩 쓰다듬어주고, 주인의 몸에서 사람의 기쁨과 슬픔의 냄새가 풍기는 한 지금의 주인이 영원한 주인이다. 이 말은 내가 지나간 시절의 주인을 배반한다는 말이 아니다. 지나간 날들은 개를 사로잡지 못하고 개는 닥쳐올 날들의 추위와 배고픔을 근심하지 않는다.  (63쪽)

 

6. 주인님의 몸에서 나는 경유냄새는 고단하고도 힘찬 냄새였는데, 어딘지 쓸쓸한 슬픔도 느껴지는 냄새였다. 나는 그 경유냄새를 아침바다의 차갑고 싱싱한 안개냄새보다 더 사랑했다. 그것은 일하는 사람이 풍기는 냄새였고, 내가 지키고 따르고 사랑해야 하는 냄새였다. (69쪽)

 

7. 사람들은 구두가 낡으면 헌 구두를 내버리고 새 구두를 사 신지만 개들은 발바닥 굳은살을 도려내고 새 살을 붙일 수가 없다. 굳은살은 한 벌뿐이다. 등산화도 축구화도 조깅화도 장화도 군화도 없다. 그래서 내 발바닥 굳은살은 이 세상 전체와 맞먹는 것이고 내 몸의 모든 무게와 느낌을 저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의 저 가볍고 미끄러운 몸놀림은 얼마나 부러운 것인가. 나는 내 발바닥 굳은살로는 건너갈 수 없는 사람들의 세상에 가슴이 저렸다. (102쪽)

 

8. 앞발을 창문틀에 올리고 사람처럼 뒷다리로 서서 교실 안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정말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은 내가 달을 밟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내가 사람의 아름다움에 홀려 있을 때도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르고 있었다. (124쪽)

 

9. 주인님은 어디에 계시나. 주인님은 왜 땅 속에 계시나.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럴 수는 없고 이럴 리가 없고 이래야 할 아무린 이유도 없었다.

   (...)

   나는 넓게 파내려갔다. 주인님 몸의 경유냄새와 땀냄새와 발냄새를 향해서 나는 파고 또 팠다. 냄새가 맡아질 때 땅 속을 향해 우우우 짖어대면 주인님이 흙을 털고 일어서서 땅 위로 걸어나올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194-195쪽)

 

10. 내 마지막 며칠은, 가을볕에 말라서 바스락거렸고 습기 빠진 바람 속에서 가벼웠다. 어디로 가든 거기에는 산골짜기와 들판, 강물과 바다,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 안개 낀 새벽과 저녁의 노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고 세상의 온갖 냄새들로 내 콧구멍은 벌름거릴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여전히 흰순이와 악돌이 들이 살아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여전히 냄새 맡고 핥아먹고 싸워야 할 것이었다. 어디로 가든, 내 발바닥의 굳은살이 그 땅을 밟을 것이고 나는 굳은살의 탄력으로 땅 위를 달리게 될 것이다.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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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따라 아내가 내게 오고, 내가 아내에게 갔듯이, 뭐든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가리라. 무엇에건 연연할 필요 없이, 세상이 적게 주면 적게 먹고, 많이 주면 많이 먹고, 나눌 수 있으면 나누리라. (23쪽)

 

소소한 생명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문틈처럼 느껴지는 게 참 좋아요. (...) 저에게 좋으니까,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기를.

(...)

중요한 건 하루하루가 에누리 없이 존재의 절정이어야 한다는 것. (31쪽)

 

"눈 가고 바람이 왔다.

늘 그렇듯 풍경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풍경은 옛일 기억하지 않는다.

늘 이 순간을 살지.

거친 바람 마다하지 않고." (33쪽)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된 생명들에게 인사 건네고 먹습니다. 미안하게 되었다고, 네 목숨값을 내가 잘 하마고, 인사하는 거지요. (76쪽)

 

문제는 수렵 시대에 사람들이 가졌을 법한 자족과 겸손에 비해 이제 너무 잔혹하다는 것, 도에 넘치는 풍요 속 포식이라는 것, 너무 많은 피를 흘리는 섭생이라는 겁니다. 제 손으로 짐승을 잡아야 한다면, 지금처럼 포식에 포식을 더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

그러나 농사는 생명과 대화하는 일이고 이게 농사가 갖는 최고의 의미예요. 씨앗이 땅에서 싹을 틔우고, 비바람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고, 그렇게 낱낱의 싹들이 사람의 인생과도 같은 곡절을 겪다가 마침내 땅으로 돌아가고...... 존재는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99쪽)

 

우리에게 절실하게 소중한 일도, 하늘의 큰 눈으로 보면 사소할 뿐. (122쪽)

 

비 온 뒤에 흐르는 저 개울물은 흙탕입니다. 그러나 흐르고 흘러 결국은 맑아지지요. 어떤 생명인들 이렇지 않을까요. (133쪽)

 

인류가 지구에서 멸절한다 하더라도 그마저 사소한 소식일 수 있잖아요? 기적처럼 아름다운 이 지구에서,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지 못하면 결국 멸절은 당연한데, 궁극의 어떤 큰 힘, 또는 법계(法界)가 그걸 애석하다 할까요? 슬프다고 할까요? (138쪽)

 

때로 꽃들도 밤하늘의 별과 다를 게 없다는 걸, 존재 하나하나가 별자리처럼 저마다 빛난다는 걸. (143쪽)

 

자연의 투명한 달빛을, 때로는 햇빛까지 가려버리는 도시의 문명은 아마도 거대한 커튼 같은 게 아닐까요. (144쪽)

 

세상은 우리에게 넋 놓고 살기를 요구하는 것 같은데, 거기에 두 손 들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삶을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 (164쪽)

 

물에 빠진 병아리나 생쥐처럼 가여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외로움을 이해해요. 여기 궁벽한 시골에도 아이들의 자살 소식이 들려요. 파편처럼 들리는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처녀아이가 갖고 싶은 것도, 얻고 싶은 것도, 자랑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그걸 좇아 살다 보니까 욕심이 지나쳐 카드 빚이 생기고, 그걸 감당 못 해 유흥업소를 드나들고, 결국은 인신매매 시장에서 물건처럼 팔리다가 견딜 수 없어서 목을 맸나 보더군요. 길에서 비명횡사한 로드킬 희생물과 그 아이가 다를 게 무엇이겠어요?

(...)

욕망은 끝이 없죠. 욕망의 근원을 들여다보려 노력하는 수밖에요. 욕망의 뿌리를 봐야 해요. 아무것도 없을, 그 깊은 데...... (168쪽)

 

무엇보다, 마음공부는 '홀로 서기'의 출발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내가 내게 묻는 방법을 배우는 거니까요. 그렇게, 시작할 수 있는데......(169쪽)

 

'욕심의 강이 흐른다. 때로 물살 거칠다. 흐르는 강에 눈길 주지 말고, 강 건너 큰 나무 한 그루 바라보아야지.' (173쪽)

 

'염주 끈이 풀렸다

 나 다녀간다고 해라

 먹던 차는

 다 식었을 게다

 새로 끓이고

 바람 부는 날 하루

 그 결에 다녀가마

 몸조심들 하고

 기다릴 것은 없다' (185쪽)

 

 누군가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지만, 저를 지켜준 건 온통 사람이었어요. 대숲에서는 쑥도 곧게 자란다고, 좋은 사람 곁에 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예요. 제가 스스로 많이 모자라고 상처도 많았지만, 좋은 분들 덕분에 그럭저럭 사람이 됐어요. (197쪽)

 

30년도 더 된 이야기예요. 어느 이른 봄에 가뭄이 들었는데, 메마른 들판 길을 둘이 거닐었어요. 절 배웅하시는 길이었지요. 선생께서 타들어 가는 보리밭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리십니다. '저것들이 목이 타겠다!' 하시면서...... (198쪽)

 

메마른 보리밭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멀고 가까운 모든 불쌍한 죽음을 아파하고 슬퍼한 사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참 적게 쓰신 분. 이런 분이 성자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평생 어려운 문자 한 번을 쓰지 않았어요. 당신께서 몸에 병이 들어 씩씩하게 살긴 어려웠지만, 의롭지 않은 것과 결탁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름다우셨지요. (202쪽)

 

늘, 마음 그릇이 작아서, 다 받아낼 수 없었던 게 제일 문제였어요. (209쪽)

 

불평하거나 분노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의 상처가 얼마나 아팠으면 저럴까, 그가 처한 조건을 이해하려 노력해요. 그가 던지는 가시건 둔한 망치건, 이해하려 해요. 때로 아픈 맘이 들더라도, 나는 오죽했었나? 하는 쪽으로 생각을 돌려요.

(...)

인간관계라는 거, 그것 참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못 견뎌서 버리고 떠날 만큼이 자리는 아녜요. 그게 사는 거기도 하고. (212쪽)

 

그 누군들 이름값 하기 버겁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당산나무나 낙락장송처럼 자연에서 천수를 누리며 장엄한 생명이 되는 일조차 어려운데, 이름값을 하고 살기는 더 어렵죠.

(...)

무명과 익명의 삶들을 절망스럽게 만들고 있잖아요. 딱한 일이예요. 허명의 범람, 그게 평범한 삶을 실패한 삶으로 비하하게 하지요. 참 좋은 평범한 삶을 이룰 수 없게 훼방해요. 헛된 꿈을 좇게 하고.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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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상을 끌고 나가는 건 2%의 인간이다.

   입버릇처럼 담임은 그런 얘길 했는데, 역시나라는 생각이다. 치수 

  를 보면, 확실히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출마를 하 

  고, 연설을 하고, 사람을 뽑고, 룰을 정하는- 좋다, 납득한다. 이 많 

  은 인간들을 누군가는 움직여야 하는 거니까. 수긍한다. 나머지  

  98%의 인간이 속거나, 고분고분하거나, 그저 시키는대로 움직이거 

  나- 그것은 또 그 자체로 세상의 동력이니까. 문제는 바로 나 같은  

  인간이다. 나와, 모아이 같은 인간이다. 도대체가


 데이터가 없다. 생명력도 없고, 동력도 아니다. 누락도 아니고, 소외도 아니다. 어떤 표현도 어떤  

동의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살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

 나는 혼자다. 늘 마흔한명 속에 앉아 있지만, 또 육백삼십칠명의 졸업앨범에 나란히 사진을 넣기 

도 하겠지만, 실은 천구백삼십사명과 오만구천이백사명과 육십억의 인류가 나를 둘러싸고 있다고 

도 볼 수 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내가 말을 걸 수도 없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잘못된 일이다. 누구에게나 이름을 알고, 매 

일 얼굴을 봐야만 하는 마흔한명 정도의 인간들이 있다. 마흔한명 정도의 그 인간들이, 실은 그래 

서 천구백명과 오만구천명, 나아가 육십억 인류를 대표해 한 인간과 대면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 

했다. 지독하다. 과연 

 
니들이 인류를 대표한 거냐?

 

 3.

 
소외가 아니고 배제야

 벌판을 향해 걸어가며 나는 중얼거렸다. 뭐가? 모아이가 물었다. 따를 당한다는 것 말이야... 소 

외 가 아니라 배제되는 거라고. 아이들한테? 아니, 인류로부터. 살아간다는 건, 실은 인류로부터  

계속 배제되어가는 거야. 깎여나가는 피부와도 같은 것이지. 그게 무서워 다들 인류에게 잘 보이 

려 하는 거야. 다수인 척, 인류의 피부를 파고들어가는 거지. 아무렴 어때. 모아이가 말했다. 그건  

그래.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4.

 
무엇보다 
 그걸 용서할 수 없어요.
 60억이나 되는 인간들이
 자신이 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걸 용서할 수가 없어요
 

 (...) 이윽고 세끄라탱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얘야,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란다. 이 세계 

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것을 지켜봤단다. 그리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탁 

구를 가르쳤어. 어느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은  

나지 않았단다.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 

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28345792629921:172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5.

 인간의 해악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은 거야.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누군가에게 상 

처를 주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다수인 척하는 거야. 이탈하려 하지 않고, 평형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 

렬로 이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만 볼트의 파괴자가 남아 있을까? 학살 

을 자행한 것은 수만 볼트의 괴물들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전쟁이 끝난 후에 남는 건 모두  

미미한 인간들이야. 독재자도 전범도, 모두가 실은 9볼트 정도의 인간들이란 거지. 요는 인간에 

게 그 배치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이기(利己)가 있다는 거야. 인간은 그래서 위험해. 고작 마흔한 

명이 직렬해도 우리 정도는 감전사할 수 있는 거니까.


6.

 남은 건 결정뿐이야. 앞서 말했듯 인류를 유지할 것인가, 언인스톨할 것인가... 즉 <핑퐁>의 마지 

막 순서가 남았을 뿐이지.

 (...) 제거한다면... 그뒤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우선 인류가 언인스톨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생 

태계는 다시 무(無)로 돌아갈 거야. 하지만 너희 둘은 여전히 지구에 남게 돼.

 (...) 반대로... 유지한다면요?

 이대로 계속,
 변함없이.

 (...) 세계에서의 일상이 떠올랐다. 아니 나는, 세계에서의 일상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어떤 곳이 

었던가, 그러나 곧- 기억을 떠올릴수록 그것은 추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랬다.  

모든 것은 추측일 뿐, 나는 인류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 



 (...) 어떻게 할까? 나는 모아이에게 물었다. 아마도

 고등학생 정도로 부패한다면

 지금과 같은 생각은 못할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세끄라탱 앞에 섰다. 물 

끄러미 우리를 들여다보던 세끄라탱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보았다. 언인스톨?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 박민규,「핑퐁」중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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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열은 오랫동안 결점이고, 결핍이며, 매우 전형적인 영혼의 병이라고 여겨져 왔다. 정열  (passion)이라는 단어가 속해 있는 의미군 안에 이 단어를 다시 가져다 놓아 보면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수동적(passif), 병적(pathologique), 비극적(pathetique) 등의 단어들이 같은 의미군에 속해 있다.
 (...) 정열을 행동 안에 통합시켜 넣었던 것은 낭만주의 혁명의 고유한 특성이었다. 낭만주의는 정열을 행동의 내적 동기로 여긴다. 헤겔은 정열 없이는 그 어떤 위대한 일도 이룰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까지 했다.

 (...) 헤겔과 베토벤, 그리고 그들의 동시대인들은, 정열의 지배를 받으며 행동하는 인간은 그를 초월하여 그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역사의 힘에 관통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천재에 대한 정의이다. 천재는 전형화된 낭만주의적 理想인 것이다.
 

       - 미셸 투르니에,「생각의 거울」중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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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느끼는 어떤 개인의 행동을 지극히 단순하게 만들어 버린다. 자기 혼자 힘으로는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개인은 자신의 행동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방법 밖에는 없다. 바깥 세계의 공격에 직면해서 더이상 어떻게 할 방법도, 할 말도 없는 사람에게는 눈물을 터뜨리는 마지막 방법이 남아 있다. 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액화시켜 버리면 새롭고 적절한 대답이 생겨날지도 모르니까. 울고 있는 인간은 모든 부품들이 따로따로 흩어져 버린 기계처럼 '분해되는' 것이다.  

 

   - 미셸 투르니에,「생각의 거울」중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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