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만 18세의 여성 A씨는 집 앞에 찾아온 어떤 남자로부터 집요한 요구를 받고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자는 갑자기 돌변해 A씨를 쓰러뜨리고 키스를 하려고 했고, 도망가려는 그녀를 세 번이나 붙잡고 쓰러뜨렸다. 바닥에 쓰러진 A씨는 실랑이 끝에 자신의 입속으로 들어온 남자의 혀를 깨물어 그 혀가 일부 절단되었다. 며칠 뒤 남자는 A씨가 자신의 혀를 끊었다는 이유로 10여 명의 청년들과 함께 그녀의 집에 침입하여 식칼로 A씨의 아버지를 죽인다고 위협했다."(36쪽) 성폭력범이 오히려 흉기를 들고 찾아와 협박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뒤 벌어진 일은 더 당황스럽다. "남자는 자신의 혀를 깨물어 자른 A씨를 중상해죄로 고소했고, 경찰은 그녀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판단했으나 검찰이 이를 뒤집었다. 검찰은 A씨 행위가 과잉방위라면서 그녀를 중상해 혐의로 기소하고 구속했다."(37쪽)

 법원의 판단 내용은 더욱 당황스럽다. 


법원은 A씨의 정당방위 주장에 대하여 강제키스로부터 처녀의 순결성을 방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젊은 청년을 일생 불구로 만들었고, 사춘기의 처녀가 범행 장소까지 자유로운 의사로 따라간 것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의 소치이며, 이는 남자로 하여금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키스하려는 충동을 일으키게 한 데 대한 도의적 책임도 있다고 할 수 있는 점 등을 들어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법원은 A씨가 소리를 질러 구조요청을 하지 않았다고 질책하였다.  - 37쪽

형량은? A씨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남자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A씨가 더 중한 형을 받은 것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재판과정에서 '어차피 이런 험한 일 당한 처녀가 혼인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남자도 불구의 몸으로 혼인이 어려울 것이니 둘이 혼인하라'는 설득이 지속되었다고 한다"는 부분이다. 오 마이 갓... 


다행스럽게도 1988년 일어난 유사한 사건에서는 1심이 여전히 혀를 절단한 여성에게 유죄를 선고한 데 반해 2심과 대법원은 무죄를 인정하였다. 정당방위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진: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64년도 사건의 피고인이자 피해자인 A씨는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하는 용기를 냈다. 

관련기사 링크 - https://www.yna.co.kr/view/AKR20200504115000051

그녀는 "나의 재심 청구로 아직 용기 내지 못한 여성이 당당하게 사실을 밝히고 상처를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 2월 부산지법은 재심청구를 기각했고, 지난 9월 항고심도 항고를 기각했다. 

관련기사 링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08324

재심은 워낙 법률에 정해진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에만 허용되는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는 하나 아쉬운 결론이다. 그래도 A씨가 내 준 용기 덕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잊혀졌던 피해자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2017년, 택시 기사인 여성 B씨(67세)는 승객으로부터 추행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초등학교 교감으로 근무하던 그 승객은 해임처분을 받았다. 교감은 해임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소송을 했다. 1심 재판부는 해임이 정당하다고 판단했으나, 2심 재판부는 해임처분이 부당하다고 판단하면서, 그 이유로 '피해자가 사회 경험이 풍부한 60대 여성이고, 진술 내용상 성적 수치심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들었다(31쪽 참조). 그러나 대법원은 "피해자가 사회 경험이 풍부하다거나 상대적으로 고령인 점 등을 내세워 사안이 경미하다거나 비위의 정도가 중하지 않다고 가볍게 단정 지을 것은 아니다"라면서 2심 판결을 파기했다.

관련기사 링크- https://www.yna.co.kr/view/AKR20200108129400004


최근에는 여성 버스기사들에 대한 직장내 성희롱 사건에서 버스회사 대표이사와 회사 측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나왔다. 이들은 성희롱 피해에 대한 사후조치에 대해 논의하다가 "내가 앞으로 과부는 절대 안 뽑는다.""여자들은 안 쓴다"는 발언을 하는 등 2차 가해를 했다.

관련기사 링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12349



64년도 법원의 '황당 판결'은 그저 이상한 개인이 내린 판단이 아니다. 당시 시대가 여성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88년도 사건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된 것은 시대가 그만큼 변했다는 것이다. 2017년 교감해임처분 사건 2심을 맡은 고등법원에서 '사회 경험이 풍부한 60대 여성'은 수치심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은 여전히 사회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중년 남성들의 성폭력에 대한 편견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대법원에서 그 판결을 파기했다는 것과 2021년 버스기사 성희롱 사건에서 사측의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됐다는 것은 법원이 조금씩이나마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저자가 서문에 쓴 이야기는 옳다. 우리는 한발씩 나아가고 있다.


여성들의 싸움은 돌을 굴려 산 정상에 올려놔도 내일 다시 또 굴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절망과는 다른 것이다. 같은 싸움이 반복되는 것 같아도 같은 싸움은 없다. 포기하지 않은 싸움에는 늘 한발 전진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 12쪽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릴레이 같은 거란 말씀이죠?"

 "(...) 물론 자꾸 잊을 겁니다.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 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손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 <피프티 피플> 380,3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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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03 16: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2쪽 인용문이 의미 있네요. 달라졌고 달라지고 있기를 바랍니다

독서괭 2021-11-03 17:33   좋아요 4 | URL
같은 싸움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계속 힘내서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scott 2021-11-03 17: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처벌이 더 강해 져야 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강력 처벌과 엄벌의 의지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

독서괭 2021-11-03 20:23   좋아요 4 | URL
넵 예전엔 범죄라고조차 제대로 인식이 안 되었던 행위들에 대해 제대로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하고 감시와 예방을 철저히 해야하겠습니다!!

새파랑 2021-11-03 19: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사건 아주 예전에 영화인가 드라마로 본 기억이 나네요. 그래도 지금이 예전보다는 더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독서괭 2021-11-03 20:29   좋아요 3 | URL
오 보셨군요. 전 영상으로 못 봤어요. 나아진다는 것만으로 희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2021-11-03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03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11-03 20:1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 출간과 비슷한 시기로 기억하는데 [왕진가방 속의 페미니즘] 이라고 추혜인 의사가 쓴 에세이가 있거든요. 혹시 독서괭님 벌써 읽으셨는지도 모르겠어요. 아주 오래된 유죄는 변호사, 왕진가방 속의 페미니즘은 의사. 이렇게 나와서 막 그 자체로 신났더랬어요. 여성들이 각자가 서있는 자리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써주는 일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저는 씐나서 두 권을 다 읽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추혜인의 책이 좀 더 좋았어요. 이건 읽고 엄마와 여동생에게도 읽어보라 주었는데 여동생은 엄청 밑줄 그으면서 읽더라고요.

최근에 독서괭님도 읽고 쓰는 일을 계속하시고 계시잖아요. 그거 너무 좋아요. 어떤 책이든 부지런히 읽고 그에 대한 글을 부지런히 쓰는 것이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열심히 합시다, 독서괭 님!!

독서괭 2021-11-03 20:43   좋아요 3 | URL
아 그 책 예전에 팟캐스트에서 소개하는 거 듣고 담아둔 지는 오래됐는데 아직 못 읽어봤네요~ 두 책이 비슷한 시기에 나왔군요. 왕진가방이 더 좋으셨다니 꼭 읽어봐야겠어요.
읽는 것도 쓰는 것도 근육이 필요한 것 같아요. 잘 안 되는 것 같아도 자꾸자꾸 해야 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력 중입니다. 북플이 큰 자극이 돼요. 다락방님처럼 열심히 읽고 쓰는 분들 느릿느릿 따라가며 즐겁습니다~^^ 함께 힘내요 다락방님!!

붕붕툐툐 2021-11-03 2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한발씩 나아가고 있다는 말씀에 완전 동의해요! 저 어린 시절에 비해서도 지금은 완전 나아졌다고 느껴요~ 어이없는 판결들을 보니 더욱 나아짐이 느껴집니다. 근데 저 피프티 피플 읽었는데 저 구절 너무 낯설어서 차암... 머리 속에 왕지우개가 있네용~

독서괭 2021-11-03 22:42   좋아요 2 | URL
최근 대법원이 특히 성 관련 문제에서 많이 진보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백래시에 지지 말고 계속 나아가기를!
왕지우개 ㅎㅎㅎㅎ 저도 뭐 마찬가지라 그저 공감한다는 말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