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롱은 소박한 방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젖은 채 잠시 서서 머릿속 한편이 여기 이 집에서 저 사람을 아내로 삼아사는 삶은 어떨까 하는 상상으로 흘러가도록 두었다. 최근에 펄롱은 가끔 다른 삶, 다른 곳을 상상했고 혹시 그런 기질이 자기 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 P64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 - P64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 게 참 많았다. - P67

자기는 마냥 문간에서 기다려야 하는 신세인 건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면서 그 많은 시간을 이집 저집 문 앞에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보냈으니. - P68

아이는 창문을 쳐다보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처음으로 혹은 오랜만에 친절을 마주했을 때 그러듯이. - P82

방이 사방에서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뜻 모를 무늬가 반복되는 벽지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펄롱을 사로잡았고 펄롱은 홀로 낡은 옷을 입고 어두운 들판 위로 걸어가는 상상을 했다. - P91

마음 한편에는 오늘이 월요일 아침이어서 다른 건 다 잊고 그냥 도로로 나가 평일 일상의 노동에 기계적으로 빠져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이 너무나 공허하고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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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멀리 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시내에서, 시 외곽에서 운 없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 P22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 P24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 P29

여자들이 힘과 욕구와 사회적 권력을 가진 남자들을 겁내는 건 그럴 만하지만, 사실 눈치와 직관이 발달한 여자들이 훨씬 깊이 있고 두려운 존재였다. 여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측하고, 밤에 꿈으로 꾸고, 속마음을 읽었다. - P32

곧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과를 머릿속으로 돌려보고 실제로 닥칠지 아닐지 모르는 문제를 고민하느니보다는. - P36

이듬해 펄롱이 맞춤법 대회에서 1등을 하고 부상으로 밀어서 여는 뚜껑을 자로도 쓸 수 있는 나무 필통을 받았을 때, 미시즈 윌슨은 마치 자기 자식인 양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렴." 미시즈 윌슨이 말했다. 그날 종일, 그 뒤로도 얼마간 펄롱은 키가 한 뼘은 자란 기분으로 자기가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돌아다녔다. - P37

"시간은 아무리 흘러도 느려지질 않으니." - P41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P44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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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가만히 서서 잠시 마당을 바라보더니 비 이야기를 한다. 비가 너무 적게 왔다, 밭에 비가 좀 내려야 한다, 킬머크리지 신부님이 오늘 아침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이런 여름은 처음이다.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에 아빠가 침을 뱉고, 대화는 다시 소의 가격, 유럽경제공동체, 남아도는 버터, 소독액과 석회 가격으로 흘러간다. 나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실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다. 장화 뒤꿈치로 잔디를 뜯고, 차를 몰고 가기 전에 지붕을 철썩 때리고, 침을 뱉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기를 좋아한다. 신경 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 P13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 P25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 P27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 P28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 P30

나는 집에서의 내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 P70

"입 다물기 딱 좋은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 P73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 P79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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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의 탁월함을 추구하던 메디치 가문의 리더들은 동질적인 것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것, 생소한 것, 이질적인 것에 희망을 두었다. - P83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는 이데아와의 완벽한 합일을 위해 존재한다. 개별적인 존재(현상)와 보편적인 이상(초월)이 부딪치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바로 코시모 데 메디치가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면서 이룩하고자 했던 ‘생각의 빅뱅‘이었다. - P83

이질적인 것, 상이한 것에 희망이 존재한다. 서방과 동방이 만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만나고, 현상과 초월이 만났을 때, 코시모가 이끌던 피렌체와 이탈리아, 그리고 유럽이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 P84

세상과 단절된 채 폐쇄적인 성격이 강화되면서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점점 더 작아져갔다. 르네상스의 창조정신을 견인하던 긍정적인 세계전망이 사라지고, 사적인 향락추구가 일상사가 되었을 때 피렌체의 위대했던 가문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 P92

가문의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가문의 정신이다. - P96

"사업상 볼 일이 있는 것처럼 하면서 공연히 시뇨리아 궁 주위를 어슬렁거리지 마라. 시뇨리아 궁에서 소환장이 왔을 때만 그곳에 가고, 소환된 사무실만 방문하고, 다른 곳은 절대로 출입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이 널 주목하게 만들지 말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라. 만약 사람들 앞에 서야 한다면 꼭 필요한 곳에만 너의 모습을 보여주어라. 대중들의 시선에서 멀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절대로 대중들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마라." - P96

메디치 가문의 진정한 리더십은 끝까지 은둔의 미학을 지켰던 코시모의 삶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후대의 코시모들이 이름만 따르고 그 정신을 따르지 못했을 때, 메디치 가문은 멸문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 P100

가문의 대는 끊겼으나 가문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 숨 쉰다. - P100

이 엄청난 보물 중에 보티첼리의 <코시모 데 메디치의 메달을 들고 있는 청년>이 있다. 언제나 변치 않는 신중함과 겸손함으로 피렌체 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이탈리아의 국부로 불렸던 코시모 데메디치의 정신이 피렌체 청년의 품에 영원히 간직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 P101

위대한 정신이 위대한 가문을 낳았다. 그 정신이 쇠퇴하자 가문은문을 닫았다. 메디치 가문은 정신의 위대함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역사적 선례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 위대한 정신이 쇠퇴하면 그 역사도 끝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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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욕망이 서로 충돌하고 집단과 사회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전투구(泥田鬪狗)에 몰두하는 혼란 속에서 지도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 P61

대중들의 환호성에, 혹은 대중들의 야유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지도자의 덕목이 아니다. - P63

코시모란 인물은 가업을 승계한 1429년부터 1446년까지의 행적을 통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 그는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 P69

평범한 개인으로서 산다면 모를까, 지도자로서 한 시대를 이끈다는 것은 갈등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를 요구한다. 개인의 욕망이 충돌하고, 집단과 국가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투쟁을 전개할 때, 지도자는 각기 다른 개인과 집단이 추구하는 힘의 역학관계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 P69

둘째,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미래를 생각하는 지도자였다. 위기나기회가 찾아왔을 때, 냉정하게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지도자의 덕목이다. - P70

마지막으로 그가 제시한 ‘힘의 균형‘ 정책은 조직과 집단에 활력을불어넣는 리더십의 모범이다. - P70

메디치 가문은 다양한 생각, 서로 다른 분야가 서로 만나서 충돌을 일으키도록 유도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동서 사상의 빅뱅을 앞장서 이끌었던 메디치 가문의 융합 리더십 덕분에 이른바 전성기 르네상스의 찬란한 예술적 결과물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 P73

코시모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개인의 알량한 도덕성으로는 지도자의 책무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려운 결단,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 리더의 책무다. - P74

세상에 나타나고 있는 개별적 현상에는 모두 일정한 법칙과 원리가 존재한다고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피렌체 종교회의를 통해 큰 도전을 받게 된다. 각각의 개별적 현상 가운데 나타나는 법칙이나 원리에 선행하는 어떤 원형(이데아, The One)이 존재한다는 플라톤주의 사상은 서방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지적 충격이었다. 피렌체 공의회를 계기로 유입된 동방 비잔틴의 사상, 특히 플라톤 사상으로 새로운 생각의 가능성이 열렸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사람들에게 플라톤 사상은 새로운 차원을 알렸다. 모든 개별자 가운데에 보편성이 존재하고, 그 궁극적인 보편성을 추구하는 노력을 통해 신과의 합일이 가능하다는 새로운 지적 도전이 허용되었다. 신비로운 이데아를 향한 열망으로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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