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여름은, 내가 자라온 곳의 여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 P10

이곳에 온 지 몇 달 만에 깨닫게 된 사실은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떠날 사람들은 보여줄 수 있는 만큼, 아니 보여줘도 되는 만큼, 아니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을 드러낸 채로 제한된 삶을 살았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래 나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 P15

엄마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사실, 거짓말은 엄마의 소통방식이었다. 엄마의 거짓말은 내가 하는 것들과는 무언가 달랐다. 거짓말에 생동감이 넘친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엄마는 언제나 거짓말을 했다. - P16

나는 집 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여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엄마에게 일주일에 한 번쯤 전화를 했었다. 그렇지만 막상 전화를 걸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우리 사이에는 일곱 시간의 시차보다 더 먼 거리가놓여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좁혀야 하는지 둘 다 알지 못했다. - P21

입학 허가서 없이 나는 내 행방을 알 수 없었다. - P23

한두 문장으로 요약한 타인의 삶이 얼마나 진부해질 수 있는가를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무수한 시간들이, 기억들이, 몸짓들이, 지극히 통속적인 한 문장으로 완결되었다. - P25

우리 이혼하자. 내 말에 남편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끊고 나니까 우습더라고요. 휴대전화 액정에 4월 1일 저녁 다섯시 반이라고 찍혀 있었거든요. 한국은 만우절이 지나갔겠구나, 하고 깨달으니 뭔가 상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그 순간, 그는 진실을 말하는 날에, 나는 거짓을 말하는 날에 서 있다는 것이 말이에요. - P26

알고 있는 단어가 한정되어 있었고, 만들 수 있는 문형이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우리는 종종 설명해야만 하는 많은 부분들을 생략하거나 변형시켰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 속에서 고향에 흐르던 실개천은 강물이 되기도 하고, 미처 외우지 못한 8월이라는 단어는 3월로 대체되기도 했다. 내가 묘사한 나의 과거 역시 실제의 내 과거와 같지 않았다. 내가 그려내는 내 미래가 그러하듯이. - P31

우리가 하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 진실한 것이 하나라도 존재했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행위.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 P31

엄마는 이 세계가 그럴듯한 거짓말들에 의해서 견고히 다져질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거짓말이야말로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주려 했던 가장 건전한 소통 방식이었는지도.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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