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의 거짓말 : 성서 편 명화의 거짓말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북폴리오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익숙한 것의 다시 보기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종교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 혹은 종교화를 통해 성서와 역사와 화가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이교도가 보는 성서에는 '괴상한' 부분이 잔뜩 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은 기묘한 이야기를 과연 화가는 이런 식으로 궁리해서 표현했던 것이구나, 하는 걸 알아차리면 갑자기 그 그림은 매력이 더 커질 것입니다.

_ <저자 후기> 중.


  <명화의 거짓말> 그 두 번째 이야기다. 첫 번째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였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제목처럼 성서를 다룬다. 『구약성서』의 '천지 창조',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등을, 『신약성서』의 '수태고지', '세례자 요한', '예수의 십자가 처형', 최후의 만찬' 등을 다룬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다룬 명화를 소개하면서 성서에 대한 주요 에피소드와 명화에 대한 해설을 친절하게 진행한다. 

  이 책의 최고 장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비종교인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종교와 친숙하지도 않고, 그림과 친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책에 대한 내용을 재미있게 습득했다. 전공 서적이라는 느낌보다는 교양 서적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온다.(더군다나 작가인 나카노 교코도 비종교인이다. 그래서 비종교인이 읽기에 쉽게 서술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신약성서』의 이야기를 다룬 명화들 보다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명화들이 더 흥미로웠다. 아! 설명하고 가자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나누는 기준은 옛것(舊)과 신(新)의 구분이 아니다. 그리스도(구세주) 예수가 내세운 새로운 구원의 계약을 '신약'이라고 부르면서 그보다 앞선 계약에 '구약'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즉 『구약성서』는 예수의 출현을 예언한 오래된 계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가 공통으로 읽는 성서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신약'의 이야기보다 '구약'의 이야기가 더 익숙하다. 

  

  <저자 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 작가는 성서에 '괴상한' 부분이 잔뜩 있다고 믿고 있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종교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독자의 영역을 밝히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종교인이 보기엔 작가의 말이 터무니 없이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저자 후기>에 나오는 마지막 말을 들어보자.

  '종교화도 신화화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문화로서 즐기면 된다'라고 하면 기독교도들은 불쾌할지도 모르지만, 부디 너그러이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이나리 신사를 매일 참배하는 우리 동포(일본사람들)에 대해 이교도인 외국인이 '여우 따위에 손을 모으다니'하고 코웃음을 쳤다지만 우리는 누구 한 사람 크게 화내지 않습니다. 여우를 모시는 데 이른 민중의 마음을 알고 싶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비웃는 상대를 이론으로 굴복시켜 여우 신앙을 전도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8백만의 신을 지닌 일본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터라, 유대교, 카톨릭, 개신교를 신봉하는 분들로서는 화가 날 부분이 많을지도 모르지만, 부디 너그러이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마지막 부분을 듣고 놀랐다. 작가의 말을 정리하자면, '종교화를 이렇게 설명했던 것은 하나의 문화로서 즐길 거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에 대한 비판은 거절한다.'라고 들린다. 8백만의 신을 지닌 일본인이 종교화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충분하다라고 하면서. 작가의 이런 한 발 물러섬은, 책을 읽어온(혹은 책의 내용을 믿은) 사람들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작가는 종교화에 대한 기존의 해석과 다르게 다른 해석을 제시했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 역시 지면을 할애하면서 풀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비판은 거절한다니. 그럼 작가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남긴채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가만히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책의 가치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결론은 익숙한 것의 다시 보기였다. 작가는 이러한 여러 해석을 통해서 기존의 것이 틀렸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권위와 편견을 버려라. 그리고 즐기듯 다시 보라. 이러한 가르침이 책의 가치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학문은 투쟁의 역사가 아니다. 서구 사회처럼 스승의 입장을 비판하며 논쟁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스승의 말을 따르는 학계의 분위기다. 공자와 맹자가 후대에 비판받기까지 시간을 보면, 서구 사람들은 놀랄지도 모른다. 이러한 분위기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즉, 귄위자의 말이라면 맹신하는 분위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사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의 첫 단계, 첫 연습으로 종교화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이 책은 읽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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