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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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지금 피로한가?


  이 책의 핵심적인 태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를 지배해온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 등, 한병철은 이를 면역학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이 적어도 20세기 말부터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등)으로 전환되었거나 전환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_ <피로사회> 76쪽.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_ <피로사회> 6쪽.

  '피로'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들이 연상적으로 생각난다. 명(明) 보다는 암(暗)인 느낌들이 그것이다. '피로'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정신이나 몸이 지치고 힘든 상태'. 어떤가? 당신도 지금 피로의 정의에 속한 사람인가?

  현대인들은 점점 더 피로해진다. 피로감이 상승하면서 행복감은 느끼는 사람도 적어지고 있다. 과거보다 오히려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것이 그 증거이다. 사회가 분화되고 세분화되면서 점점 요구조건들이 많아졌다. 2000년대 초반만해도, 대학을 평범하게 다니고, 졸업을 해도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2013년 현재는 대학을 평범하게 졸업해서는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버렸다. 고득점의 영어성적은 기본이고, 각종 대외활동, 공모전을 통한 수상경력, 동아리 활동, 높은 학점, 봉사활동 등 요구조건이 엄청나다. 취업을 하면 피로하지 않을까? 대답은 'No!'다. 일명, 워커홀릭(workaholic)'이란 단어를 봐도 그렇다. 일중독이나 업무중독이라는 말로, 여가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가정에도 소홀한 직장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단어들을 들으면 생각나는 것은? '피로하다'일 것이다.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_ <피로사회> 18쪽.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책에서 현대인의 피로의 원인에 대해서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긍정성의 과잉'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긍정성의 과잉이 어떻게 피로를 일으키는 것일까? 우선 저자는 피로를 경색성 질병이라고 파악한다. 경색성 질병은 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증적 질병을 말한다. 이러한 경색성 질병들은 면역학적인 공격과 방어를 최우선으로 하는 전염성 질병과는 다르게 면역학적 처방으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경색성 질병, 혹은 신경증적 질병들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비면역학적 질병이다. '부정성의 변증법'을 따르는 면역학적 예방법은 비면역학적 질병에는 소용이 없다. 과잉으로 인한 소진, 피로, 질식이라는 비면역학적인 시스템에서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면역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경성 질병들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닌 '긍정성의 변증법'을 따라야 한다고 저자는 제시한다.


    입시 지옥에서의 해방을 약속한 최초의 교육부 장관이 내세운 구호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20개에 가까운 교과목의 무게에 신음하던 학생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을 이 구호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_ <피로사회> 89쪽.

  이 책이 무엇보다 흥미를 끌고,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 이유는 현대사회를 너무 잘 진단했다는 것에 있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의 패러다임으로 푸코의 규율사회가 맹목적인 의식이었다. 정신병자, 감옥, 공장으로 이루어진 판옵티콘에서 푸코의 규율사회는 금지, 규율, 강제, 타자에 대한 거부 등 부정성의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의 성과사회로 변화했다.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성과사회에서는 능력, 자기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성과사회의 질병을 면역학의 패러다임으로 치료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했다. _ <피로사회> 16쪽.

  저자는 성과사회의 새로운 인간형인 성과주체를 노동만 하는 동물로 규정하고 있다. 노동만 하는 동물은 복종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가 된다. 그러나 성과 과잉을 위해 '강제하는 자유 혹은 자유로운 강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혼을 찌들게 하고 있다. 이러한 역설적인 자유로 인해 노동만 하는 동물은 자기 자신을 열심히 착취한다. 다시 말하면 노동만 하는 동물은 착취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성과사회의 심리적인 질병인 우울, 피로, 소진이라는 자폐적인 결과는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질병이 되어버린다. 또한 긍정성의 과잉에 따라 영혼이 경색되거나 탈진되고 나면 피로는 폭력이 된다. 그럴수록 자시 자신을 더욱 자학하는 괴물이 된다.

  현대사회가 우울한 까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로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이라는 시스템 위에서 모두가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있다. 경쟁이라는 시스템이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불행한 사람이 존재하는 필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존을 위한 멀티플레이를 강요한다.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해야한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_ <피로사회> 22쪽.

  그렇다면 이 피로를 어떻게 해야할까? 오늘날 우리는 피로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나 피로한 상태여서 심적으로 불안감과 우울을 느낀다. 이런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는 법을 달리해야 한다. 저자 한병철은 "깊은 심심함, 사색, 관조의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회복제를 건넨다. 극단적인 피로와 탈진상태에 놓여 있는 성과주체, 좋은 삶에 대한 관심보다는 생존자체에 대한 관심만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무언가를 하지 않을 힘, 즉 부정의 힘과 분노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이러한 방법으로 '머뭇거리는 능력', '분노하는 법', '깊은 심심함', '돌이켜 생각하기'를 저자는 제시하면서 활동적 삶을 비판하고 치유하는 실천적 지혜를 제시한다. 무한정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분노하고 돌이켜 생각하며 거부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그게 포스트모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피로회복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피로사회'에 살고 있다. 과도한 노동과 과도한 경쟁에 시달리는 성과주체로써 탈진과 고갈의 피로를 선택하며 살아갈 것인지, 깊은 사색을 통한 공동체의 가능성에 영감을 주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피로를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당신도 지금 피로한가? 라는 질문에 우선은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왜 피로한가?'라는 질문에는 각자가 선택한 삶에 따라서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낳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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