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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와 방어구 (중국편) 판타지 라이브러리 20
시노다 고이치 지음, 신동기 옮김 / 들녘 / 2001년 8월
평점 :
품절


이 자리를 빌어 솔직히 고백컨대 몇 년 전 우연히 알게 된 한 친구의 커뮤니티에서 인기 좀 끌어보고자 무협지를 연재한 적이 있다. 나중에 원고 매수로 계산해보니 대략 400매 가량을 썼는데, 제법 인기가 있었지만 커뮤니티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다. 소설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때는 바야흐로 서기 1085년 송나라 시대의 일이었다. 일찌기 중원 문명의 맹위를 떨치던 당의 몰락 이후 중원의 은인자중하던 영웅호걸들은 저마다 군웅을 떨쳐 일어나 용맹있는 자 용맹으로, 지략 있는 자 지략으로 중원의 패권을 차지 하기 위해 운증용변(雲蒸龍變)하여 다투던 천하쟁패의 시대가 도래했다. 천하는 혼란에 빠지고 민생은 도탄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시절, 절도사 조광윤이 천하를 평정하고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서기 960년, 송의 건국이었다. 천하 통일을 이루기 위해 송 태조가 칼을 들어 천지의 도를 바로세우니 그의 칼날 앞에 형남과 후촉, 남한과 남당이 무릎을 꿇어 천하일통의 기치를 드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송 태조 조광윤은 서기 976년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급사하여 동생 광이 태조의 뒤를 이어 태종으로 등극하여 후업을 달성하고자 하나 요를 토벌하지 못한 채 연운십육주는 여전히 요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어느 날...

어둠이 소리 없이 내리는 시각, 송의 수도 개봉부를 지키는 성문의 초병들은 종각의 타종 소리를 들으며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대 최고의 상업도시이자 최고의 문화도시였던 개봉부와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두툼한 성문이 스러져가는 제국의 어둠과 함께 닫히기 시작했다. 대륙의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운하들의 최종집결지이자 북의 요가 가로막기 전까지 북방과 남방을 잇는 수많은 가도의 최종목적지,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개봉부는 그날따라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운하에서 피어난 안개들로 인해 어둠은 스산하기까지 했다. 평소 건강하였던 송의 천자 신종이 갑작스러운 병증으로 드러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붕어가 멀지 않았다는 소문마저 개봉부 장안을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법파인 사마광 일파에 의해 신법파인 왕안석의 개혁이 좌절된 이래 중원 천지에 영웅호걸의 목소리는 오간데없고, 구법파에 빌붙어 출세하려는 자들의 아부소리만이 시끄럽게 들려오던 시절이었다. 구법 일파들이 모여 산다는 천자궁 남벽 일대에는 돈 헤아리는 소리만이 들려온다는 투덜거림이 민초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주변에서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냥 재미삼아 쓰긴 했지만 이민족들과의 대결이 거듭되던 송 시대를 배경으로 왕안석의 개혁이 좌절된 후 몰락을 눈 앞에 둔 송을 시대 배경으로 삼았다. 북송과 남송의 경계를 이루는 신종 이후 휘종 시대를 배경으로 당시 일종의 재야지사라 할 수 있는 강호의 무협들과 중앙정부의 권력, 어용 무사들과 벌이는 대결 구도를 놓고, 거기에 송의 명장이자 평민 의용군 출신의 악비(岳飛, 1103~1141)가 마지막으로 시도했던 송의 부흥이 좌절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나름대로는 대하소설적인 분위기도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무협소설에 실제 역사를 곁들인 요샛말로 픽션스러운 이야기로 꾸몄다. 어쨌거나 장난삼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무협의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쓰는 입장에서 진작에 이와 같은 책을 만났다면 좀더 재미난 묘사가 가능했을 터수다. 그건 비단 쓰는 입장에서만 그런 것은 아닐 거다. 읽는 입장에서도 무협지 혹은 중국영화를 좀 더 재미있게 보는 데도 도움이 될 테니... 

예전에도 종종 말한 바 있지만 서구의 판타지에 대응할 만한 동양의 판타지는 무협지라 할 수 있다. 서구의 판타지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인 정신세계에 북구의 신화를 곁들인 것이라면 동양의 판타지인 무협지는 도가적인 정신세계를 밑바탕으로 지역적으로는 중국이라는 한 나라가 아닌 광대한 대륙을 배경으로 한다. 최근 동북공정 같은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부분만 없다면 중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그다지 마음에 걸릴 만한 사안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알게모르게 우리가 중국을 나라로 생각하기 보다는 일종의 대륙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카우보이가 실체 없는 추상화된 제국의 초상인 것처럼 중국의 무협 고수들 역시 추상화된 존재란 말이다.

서구의 판타지에 매료된 이들은 자연스럽게 피요르드의 이국적인 풍경과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안개, 켈트 뮤직에 끌리게 된다. 이 관심이 좀더 진화해가면서 북구의 신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게 되고, 그네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국내에서 판타지 붐이 일게 된 것은 근래 10여년의 일이고, 출판계에서 이에 호응하여 그간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서구의 판타지들을 소개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에겐 기본적으로 판타지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력이 없었던 거다.

들녘에서 최근 몇년 사이에 펴낸 판타지 라이브러리 시리즈를 모두 읽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하나둘씩 구해지는 데로 읽어볼 생각이다. 권당 가격이 만원이 조금 넘어서 이 시리즈(내가 알기론 30권까지 나온 걸로 아는데)를 전부 구해서 읽는 것은 약간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다른 읽을 거리들도 많고, 헌책방에 가면 손때묻은 책이긴 하지만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어서 나는 틈나는 대로 이 시리즈를 헌책방에서 콜렉션하고 있는 중이다. "무기와 방어구(중국편)"을 포함해서 "타락천사"까지 두 권을 읽었는데, 전자는 아주 훌륭했고, 후자는 어렸을 때 시중에서 천원에 두 권이던가 한 권이던가에 팔던 포켓북 판형의 "세계괴수대사전"과 흡사한 수준이다. 그러고보니 포켓북 판형의 "세계괴수대사전"이나 "로봇대사전" 같은 류의 책은 어린 시절의 나를 꽤나 흥분시켰던 추억의 책들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오래된 궁금증 한 가지를 풀었는데, 그것은 동양의 갑옷 중에서 이른바 면갑(綿甲)이란 것에 대한 것이다. 아마 역사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가끔 무관이 투구는 제대로 갖춰 입었는데 갑옷은 그냥 면재질에 놋쇠 단추 몇 개 단 것으로 보이는 무장을 갖춘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면갑이란 건데, 내 궁금증은 도대체 저런 솜옷이 갑옷 구실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해 했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면갑은 두꺼운 면이나 비단 천 속에 쇠미늘을 넣어서 동으로 된 못으로 고정시킨 개갑"이며 날씨가 한랭한 중국 북방에서 즐겨 입었고, 명나라 말기에 최종적인 형태가 완성되어 명나라 군대나 청나라 군대에서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청의 주력군이었던 팔기군의 갑주가 이와 같았다. 갑옷도 군복이고, 일상적인 생활까지 했으므로 나름대로 편의성, 보온 기능까지 해줄 필요가 있었을 거다. 가죽으로 만든 갑주는 편하기 하지만 보온 기능이나 방어력에서 뒤처졌을 것이고, 철갑은 방어력에선 좋았겠지만, 일단 무거워서 활동이 불편했을 테고, 보온 기능도 많이 떨어졌을 거다. 쇠미늘 갑옷에 면과 솜으로 앞 뒤를 대어 코트처럼 만들어 입으면 비교적 가볍고, 보온성과 활동의 편의성까지 있었으니 동양갑주의 최종적인 형태로 진화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거기에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로 넘어오면 화포를 이용한 전투도 빈발했을 터이니 과거 형태의 철갑이 방어력면에서도 그다지 메리트가 없을 테니 이해가 된다.

"무기와 방어구(중국편)"을 쓴 시노다 고이치의 약력을 살펴보니 간사이학원대학에서 문학연구를 전공했고, 문학수사(MA)를 했다는데 잘은 모르지만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취미를 넘어선 연구에 이른 모양이다. 헌책방에 가서 이 책을 고르는 나를 보고 후배가 왜 이런 책까지 읽느냐고 하길래, 사실 딱 한 마디 했다. "너 손오공 알지? 손오공이 쓰는 무기가 왜 여의봉인지 아니? 너 저팔계나 사오정이 무슨 무기를 들고 다니는 지 알아?" 사실 이런 책은 우습게 보면 참 하잘 것 없는 책이다.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읽었던 포켓북 판형의 '세계몬스터대사전'류의 책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고, 어떤 것들은 실제로도 그 수준에서 별반 앞서지 못한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세상의 모든 책이 그와 같다. 읽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낼 재간이 없다면 제 아무리 좋은 책도 그저 펄프뭉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능하다면 시노다 고이치를 중심으로 이 시리즈들을 읽어볼 생각인데, 어느 측면에서 보자면 이것이 일본 출판문화의 능력이고, 저력이다. 별걸 다 궁금해 하는 학자가 있고, 자기 연구 틈틈이 대중이 궁금해 할 만한 것을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책을 쓴다. 출판사는 그것을 잘 꾸며서 한 권의 책으로 엮고, 대중은 그것을 읽어준다. 그리고 출판사는 이를 다시 해외에 판매한다. 그것이 문화산업이고, 지적재산권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 세계에 어필할만한 책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세계에 부응할 만한 보편적 관심사, 다양한 영역에서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필자가 없어서라면 몰라도 출판시장이 개방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출판시장만큼은 거의 완전하게 개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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