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K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이리나 레인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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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안나 K(결혼 전 이름 : 안나 로이트만). 나이 : 서른여섯. 직업 : 출판사 해외 판권 부서. 취미 : 독서. 이상형 : 자신을 소설 속 낭만적인 여주인공으로 만들어줄 히스클리프 같은 작가. 『안나 K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프로필이다.

이 책은 제목만 들어도 어떤 소설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안나 K, 특히 K라는 이니셜은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강력하게 환기한다. 맞다, 이리나 레인은 『안나 카레니나』를 현대 뉴욕이라는 시공간으로 옮겨와 대놓고 이야기의 커다란 얼개를 톨스토이에게서 빌렸다. 이리나 레인의 안나도 톨스토이의 안나와 같은 행보를 따른다. 그렇다고 뻔한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것은 성급하다. 사람 난 이래 세상에서 완벽하게 새로운 이야기란 없을뿐더러 ‘안나’는 슬픈 일이지만 무수한 시공간에서 무수히 태어났고, 태어나고, 태어날 것이다. 모두 사회적인 제약과 인간적인 한계를 어찌하지 못해 한길로 내몰리겠지만, 그럼에도 무수한 안나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새로운 이야기로 퍼뜨린다. 이리나 레인의 안나도 무수한 안나들과 닮았으되 또 닮지 않았다.

『안나 카레니나』와 비교하자면, 일단 소설의 배경이 19세기 말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21세기 현대 뉴욕의 러시아 이민자 사회로 바뀌었다. 당연히 새로운 환경에 맞춰 직업, 성격, 취향, 취미, 가족 관계 등 인물들의 세부적인 특성이 다시 부여된다. 안나 카레니나 역의 안나 K에 대해서는 이미 대충 이야기했고, 알렉세이 카레닌 역의 알렉스 K는 50대 초반의 유능한 사업가로 정숙하되 자신에게만 관능을 드러내는 아내를 원한다. 전통적인 관습에 충실하고 남의 이목을 신경 쓰는 그는 젊은 시절에 달리기에 열중했으며 예술품을 수집해 과시하는 것을 좋아한다.


알렉세이 브론스키 역의 데이비드 주커먼은 창작을 강의하는 20대 중후반(많으면 30대 초반)의 계약직 겸임교수로 독서와 글쓰기가 취미이며 소설을 써서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는 어느 정도 낭만적이고 어느 정도 열정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별안간 달아올랐다가 쉽게 식어버리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치기도 부리는 파파 보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러시아 여자들에게 사족을 쓰지 못한다.


콘스탄틴 레빈 역의 레프 가브릴로프는 20대 초중반의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약사로 전통적인 관습이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거기에서 일탈할 용기를 내지는 못한 채 영화에서 그 답을 찾으려 한다. 특히 프랑스 영화를 사랑하는 그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이 이상형이다. 현실적인 속물근성과 거리를 둔 채 낭만적인 감성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키티 오블론스카야 역의 카티아 자부로프는 안나를 흠모하면서도 ‘여자=현모양처’라는 전통적인 관습에 순응하는 20대 초반의 아가씨이다. 폐쇄적인 러시아 이민자 사회 바깥의 데이비드를 사랑하게 되면서 작은 일탈을 꿈꿔보기도 하지만 데이비드가 안나에게 반해 자신을 배신하자 더욱 움츠러들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현실로 돌아와 단단히 뿌리내린다.


이 네 인물들과 안나가 엮어가는 『안나 K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는 그러므로 『안나 카레니나』와 다르다. 현대적이고 좀더 감각적이며 발랄한 현실 밀착형 이야기이다.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자가 아낌없이 선물하는 “은쟁반에 놓인 초콜릿을 입힌 딸기, 싱싱하고 풍성한 모란꽃 꽃다발, 불가사리 모양의 은 펜던트가 달린 티파니 목걸이, 초콜릿 수플레 속에 감춘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것들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 결혼을 결심하고도 의구심을 떨치지는 못하는, 여자의 심리 묘사는 섬세하고 탁월하다.


남자가 다음 데이트에서 안겨줄 선물까지만 챙기고 나서 이별 절차를 밟아야지 마음먹지만 그다음 데이트 선물도 눈앞에 아른거려 어정쩡한 공모의 시간을 암묵적으로 흘려보낸 후 결혼을 돌이킬 수 없게 됐을 때, 여자는 그제야 그 남자와의 결혼을 선택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포기했는지 저울질해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단 결혼하고 나면, 그 결혼으로 향유하는 풍요롭고 화려하고 안정적인 일상은 원래 누려왔던 것처럼 그 달콤함이 밍밍해지고 자신이 포기한 것은 더욱 절실해진다. 이제 그것 없이는 도저히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것과 맞바꿔 24시간 상주하는 베이비시터를 두고 세일 여부 상관없이 마음껏 신상 명품을 쇼핑하며 돈 걱정 없이 안락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런데 여자가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게 반짝거리는지 생생하게 상기시키는 남자가 있다. 그는 그 강렬한 눈빛을 여자에게서 떼지 못한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결혼할 때는 그토록 재고 따지던 안나가 이번에는 무엇을 잃을지 저울질하지도 않은 채 앞뒤 없이 알렉스와 아들을 두고 데이비드에게 간다. 물론 알렉스와 데이비드를 비교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알렉스도 근사하다. “그가 그녀의 우비를 받아 옷장에 걸고, 옷걸이가 마치 그녀의 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스카프를 늘어뜨리는 모습. 세르주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번번이 공갈 젖꼭지를 들고 나오는 버릇. 받침대까지 단정하게 받쳐놓은 화장대 위의 물 한 잔. 잠자기 전의 입맞춤은 더 이상 뜨겁지 않아도 여전히 다정했고, 폭 끌어안는 포옹, 등에 쓸리는 수염의 기분 좋은 느낌”은 여전히 안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하지만 안나의 요리를 맛도 보지 않은 채 소금부터 찾는 습관, 잼을 듬뿍 떠서 흘러넘치도록 빵에 바르는 모습, 기타 등등은 점점 참을 수 없어진다. 게다가 알렉스는 ‘작가’도 아니다.


사실 안나가 데이비드를 선택한 것은 그의 꿈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시작한 문장을 이 남자가 받아서 마무리하는 바람에 남은 말을 꿀꺽 삼키는 느낌은 얼마나 에로틱한지”처럼 안나가 데이비드에게 왜 이끌렸는지 독자들을 납득시키고자 하는, 꽤 멋진 문장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어쨌든 데이비드가 작가를 꿈꾸지 않았다면 안나는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나는 뮤즈가 되고 싶었다. 그녀가 불러일으킨 영감을 받아 남자가 쓴 소설 속 낭만적인 여주인공으로 불멸하고 싶었다. 뮤즈가 되고 싶었던 안나의 노력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안나에게 존 키츠의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를 바쳤던 시티뱅크의 계약직 직원에게는 문예창작 강좌까지 끊어주고 문학 인사들이 모여드는 술집에 데려가기도 했다. 데이비드가 “나는 당신과 함께 있어야 해. 당신에 대한 글을 써야 해”라고 이혼을 부추기자 안나는 대번에 알렉스 곁을 떠난다.


안나는 왜 직접 작가가 되어 자기 작품 속에서 불멸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남보다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편이 더 확실하지 않았을까? 이 의문에 안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녀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작가를 사랑할 수는 있었다.” 작가적인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깨달음. 그 자명한 현실 앞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작가를 사랑하는 일이었다고 안나는 말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것 같지만, 어쨌든 그것이 안나의 선택이었다. 꿈도 없고 낭만도 없고 돈과 속물적인 취향만 넘치는 알렉스의 현실을 벗어나 안나는 데이비드의 소설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러나 “자기 내면에서 오히려 더 생생하게 움직이는 인물들, 상황들, 신화들 앞에서 현실을 부정할 수도 있으며, 실생활보다 책을 읽을 때 그녀의 삶이 더 풍요로웠을지라도” 현실을 마다하고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판타지는 누구에게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안나는 따분하고 무료한 현실을 버리고, 구차하고 구질구질한 현실로 들어갔을 뿐이다.


데이비드는 정작 뮤즈가 되어주겠다고 안나가 그의 변변찮은 공간과 일상으로 밀고 들어오자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부담스러워한다. 그들은 사랑했다. “몇 시간씩 입을 맞출 때도 있었건만 갑자기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이 먹먹할 정도로 길어지고” 데이비드는 곧 향수 가격표를 확인하면서 “나는 당신 남편처럼 해줄 수 없어”라고 선언한다. “그 이후로 선물은 점점 뜸해지고, 식당은 점점 저렴한 곳으로 바뀌었으며, 입맞춤만 깊어졌다.” 그것도 잠시, 데이비드는 안나 때문에 “돈이 마르고” 있으니까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을 틀지 말라고, 뭐든 제발 가리지 말고 일하라고 내몬다. 소설 따위는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안나는 정말 데이비드를 사랑했을까? “맞아요, 나는 늘 러시아 여자들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라고 안나를 우스개 삼아 아버지와 함께 키득거리는 데이비드 곁에서 머뭇거렸던 것은, 그를 사랑해서라기보다 그때 그녀가 부여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가 그, 특히 그녀를 주인공으로 썼다던 그의 미완성 실패작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안나가 사랑한 것은 데이비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환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안나는 그의 부모도, 추억도, 옛 여자 친구도, 이제껏 그의 삶을 이루어왔던 어떤 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데이비드가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 아예 귀와 마음을 닫아버렸다. 사랑으로 뜨거워졌던 시선이 어느 순간 날카롭고 또렷하고 차가워졌다. 데이비드와 사는 동안 안나가 내내 신경 쓴 것은 자신이 데이비드를 사랑하는가,가 아니라 데이비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쩌나,이다.


안나는 여자 유혹용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진지하게 사랑하는 레프가 자신을 구원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안나는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레프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또한 착각일 것이다. 이 소설의 결말이 바뀌어 레프가 ‘타이밍’을 탓하지 않고 용기를 낸다 한들, 사랑의 열기가 가시고 엇비슷한 일상이 이어지면 그들에게도 현실은 범속하고 속물적인 얼굴을 드러낼 테니까 말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안나가 자기 구원의 문제를 마지막까지 남에게 맡기려 했다는 점이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뿐이다. 그런데 말이다. 안나에 대해 결국은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해도 안나를 판단하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이성으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도 어느 순간 허방을 짚고 휘청거리며 남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것은 나뿐만은 아니겠지. 언제든 나약하게 무너질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샘솟는다. 나에게도 누군가 연민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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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이 울렸다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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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로는 국가는 사람보다 더한 생명체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한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국가의 삶을 함께 누린다. 사람의 몸을 이루는 세포들처럼 말이다. 아프가니스탄이 사람이라면 큰 병을 오래도록 앓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와 중동, 남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내륙에 위치한 국가로 수도는 카불이다. 아프가니스탄은 그 위치 덕에 세계 정세와 더불어 큰 변동이 있던 국가다. 아프가니스탄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탈레반의 국가라고 하면 잘 알아들을 정도로 현대에 와서도 분쟁에 휩싸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알카에다와의 연합으로 인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현재까지도 유혈이 낭자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과거 푸른 보석의 나라라고 불렸던 영광을 뒤로 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분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 자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할레드 호세이니의 전작인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와 『천 개의 찬란한 태양 A Thousand Splendid Suns』에서 그 간극을 여실히 보여준다. 6년 만에 출간된 신작 『그리고 산이 울렸다And the Mountains Echoed』에서도 역시 가난 때문에 운명적인 이별을 맞게 된 남매와 가족의 사랑을 더듬어가면서 희생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 이야기는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952년 아프가니스탄, 작은 마을 샤드바그에 살고 있는 압둘라와 여동생 파리는 아버지 사부르와 새어머니와 지독한 가난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사는 것 자체가 힘든 나날이지만 압둘라는 여동생인 파리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는다. 오빠처럼 아버지처럼 파리를 보살피고 아낀다. 이런 가난 속에서 결국 아버지인 사부르는 파리를 카불의 부잣집에 입양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삶 때문에 동생과 생이별을 한 압둘라는 평생을 그리움에 사무쳐 지내게 되며 시간은 무심한 듯 흐르게 된다.

9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각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 준다. 다양한 삶의 모습들, 하지만 결국 이야기는 압둘라와 파리의 이야기인 동시에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다. 특히 1장의 동화는 『그리고 산이 울렸다』를 관통하는 이야기다. 가난했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던 가족에게 악마가 찾아와 아이를 잡아간다. 악마에게 잡혀간 아이를 구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겪으며 악마를 찾아간 아버지 아유브는 자신의 집에서보다 풍요롭게 살고 있는 아이를 보고 갈등하다가 결국 악마에게 아이를 남겨두고 온다는 이야기다. 사부르는 아이를 입양 보내면서 동화를 떠올렸을 것이고 풍요롭게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가난하지만 행복을 느끼기에는 삶이 너무나 힘들었으므로... 아프가니스탄보다는 훨씬 풍족한 삶을 누리는 우리들이지만 이런 비극이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 역시 비극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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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세트 - 전3권 샘깊은 오늘고전 15
유성룡 원작, 김기택 지음, 이부록 그림 / 알마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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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懲毖) 라는 말은 시경(詩經)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군무의 으뜸 벼슬인 도체찰사 및 정무의 으뜸 벼슬인 영의정 자리에서, 임진왜란을 둘러싼 국방, 군사, 정치, 외교, 민사 작전 등 모든 분야에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 대신 유성룡이 쓴 임진왜란의 기록이다. 이 징비록은 임진왜란 전사의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참혹하지만 패자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공식적으로는 조선은 임진왜란의 승전국이다. 하지만 이 전쟁은 패전국인 일본보다 승전국인 조선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임진왜란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에 대한 욕심과 군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발생한 전쟁이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조선에서도 이런 일본의 전쟁에 관련된 움직임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대비도 하지 못했고 대규모 침략을 예견하지 못해 조선은 쑥대밭이 되고 만다. 이런 국론 분열과 준비 부족은 전쟁 발발 후 열흘 만에 한양까지 밀고 들어오게 된다. 조선의 이름난 장수들도 허수아비처럼 쓰러졌지만 가장 큰 문제는 지도자였다. 선조라는 최악의 왕을 가진 조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명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병권을 가져간 명이지만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의 나라에 일본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뿐이었고 조선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이런 조선의 재상이었던 유성룡은 피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조선을 구해낸 것은 이순신의 수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들 한다. 현재의 일본을 본다면 정확히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쟁범죄자들의 무덤에서 참배하고 군대를 회복시킬 궁리만 한다. 정치권뿐만이 아니라 일본 사회도 다를 것이 없다. 하켄크로이츠와 다를 게 없는 전범기를 스포츠 경기에서 펄럭이고 있으니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죄의식은 이미 버린 듯하다. 양심 있는 일부의 사람들이 핍박을 받는 사회가 어찌 정상적이라 할 수 있을까. 독일과 비교되는 이런 일본의 모습은 언제라도 다시 전쟁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는 듯 해 공포스럽다. 하지만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이런 일본의 모습에 동조하는 몇몇의 우리나라 인간들이다. 일본의 던져주는 떡고물을 먹고 거대해진 우리나라의 괴물들은 여전히 힘이 있다. 제때 징계하지 못한 스스로의 벌이다. 이 책은 박종화의 소설을 이야기하며 끝맺음을 하는데 임진왜란과 6.25가 꼭 닮은 형태라는 것이다. 이 책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2차 대전의 일본의 침략전쟁을 두고 전혀 성격이 다른 6.25를 비교 대상―소련, 중공의 공산주의 패권과 김일성의 탐욕이 더해져 남침한 전쟁과 2차에 걸친 왜란의 공통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으로 삼았다는 것에 의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의 문장을 삽입한 것이라고는 하나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이라면 작가의 진정성에 의심이 갈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면 작가는 구제불능의 멍청이일 것이다. 3권의 마지막 한 페이지는 그야말로 사족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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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신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44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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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아는 그리 매혹적이지 않았다. ‘팜 파탈 지니아’가 독자를 끌어당기기 위해 번역서가 내세우는 주요 셀링 포인트이고, 마거릿 애트우드도 『도둑 신부』에서 지니아의 캐릭터를 그렇게 설정해 놓았지만 말이다. 소설이 어떤 캐릭터에 대해 아무리 그렇다고 여러 번 주지시켜도 거기에 선뜻 동의하고 공감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지니아에 대한 묘사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그렇다고 하니까, 지니아가 환상적인 미모에 늘씬하고 육감적인 체형, 사회적인 관습이나 타인의 시선에 속박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거침없이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단지 거기까지일 뿐, 지니아는 토니와 웨스트, 로즈와 미치, 캐리스와 빌리를 사로잡았을지라도 독자인 나까지 매혹하지는 못한다. 물론 지니아의 불가사의한 매력이 나에게 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도둑 신부』의 매력까지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감정이입한 대상은, 그 이유와 감정이 충분히 납득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지니아를 동경하고 휘둘리다가 상처 입은 토니와 로즈와 캐리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지니아가 토니의 시점으로도, 로즈의 시점으로도, 캐리스의 시점으로도 그려지지만 정작 지니아 자신의 시점으로는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둑 신부』에서 일방적으로 악의 역할을 떠맡은 지니아는 아무런 변명의 기회도 얻지 못했다. 지니아에 대한 내 판단은 그러므로 불완전하고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 이야기가 그녀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역시 그녀의 죽음으로 끝날지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피해자는 지니아가 아니다. 그녀의 올가미에 사로잡혀 호되게 당한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있는 토니와 로즈와 캐리스이다. 세 사람은 ‘우리 셋에게 공통점이라고는 지니아뿐’이라고 생각한다. 똑똑한 머리와 냉정한 이성으로 무장한 채 자신만의 아성에 틀어박힌 전쟁사학자 토니, 사업 감각이 탁월하고 활력과 배려와 자선으로 여유 만만해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끊임없이 계산하는 여성 사업가 로즈,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고 세상 모든 사물과 영혼의 영기를 느끼고 명상을 즐기고 얼마간 애니미즘에 빠져든 신비주의자이자 채식주의자 캐리스는 외모도, 성격도, 취향도 딴판이고 일상의 반경도 그리 교차하지 않는다. 그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에 의아해할 법한 조합이다. 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독자만 아는 또 하나의 강력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뿌리 깊은 결핍감이다. ‘지니아’도 그다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핍감의 옵션이랄까. 결핍감이 자석처럼 지니아를 끌어당겨 그들의 인생에 끼어들게 했다.

어린 시절, 토니는 ‘우리 결혼은 전쟁의 애꿎은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부모의 불화 속에서 아이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을 요구하기는커녕 부모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눈치를 살피며 ‘착한 아이’처럼 행동하려고 애쓴다. 끝내 엄마를 잃었을 때도 냉담해진 부부 사이나 엄마의 불륜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는 어린아이들의 반응이 대개 그렇듯이 자기 잘못 탓이라고 자책한다. 역시 전쟁둥이인 로즈는, 하숙을 쳐서 생계를 근근이 꾸려가면서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아빠만 기다리는 엄마와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언제나 돌아오려나 알 수 없지만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는 남편을 위해 항상 깨끗한 집을 준비해 놓고 싶은, 혹은 남편이 언젠가 돌아오리라고 믿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불어나는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속이고 싶은 욕망은 강박적인 결벽증으로 표출된다. 불안한 기다림의 시간 동안 엄마의 사랑 대신 결벽증을 온전히 견뎌야 하는 것은 ‘착한’ 딸의 몫이다. 캐리스는 미혼모의 아이일 가능성이 크다. 엄마가 얼굴 윤곽마저 뭉그러진 빛바랜 사진 한 장 속의 무표정한 군인이 아빠라고 말했지만 결혼사진도 없을뿐더러 캐리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전사했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캐리스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그래서 극도로 예민한 엄마의 유리 같은 신경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존재로 자신을 억누른다. 그리고 아빠를 대신해 캐리스를 때리면서도 캐리스에게 아빠 대신 자신을 챙기고 위로해 주길 바라는 엄마를 위해 가혹한 매질을 견디는 ‘착한 아이’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한다. 캐리스는 엄마의 매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예민한 신경 탓이라고, 그러니 엄마도 어쩔 수 없으므로 자신이 견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자신을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다고 믿고 싶다.

건강한 가정에서 아이의 본능적인 욕구를 표출하며 마음 편히 응석을 부리는 대신, 토니와 로즈와 캐리스는 ‘착한 아이’의 가면 아래 진짜 자신을 감춘다. 그리고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부모의 위태로운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혹은 더는 악화되지 않길 기대한다. 그것은 어린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최선의 생존 전략이었다. 슬픈 일이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의 기대도 보상받지 못한다. 그들은 각자 살아남았지만 똑같은 상처를 가졌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비슷한 구석이 너무 없다고 서로서로 말하는 그들이 실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진실을 독자가 알 수 있는 것은 지니아 덕분이다. 그들은 가장 근원적인 상처를 서로에게도 내보이지 않는다. 그들 안에 꽁꽁 감춘, 도저히 채워질 길 없는 결핍감으로 상처가 점점 깊어지는 ‘작고 연약한 아이’, 즉 진짜 자신을 지니아에게만 보여준다. 그리고 지니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상처의 잔상을 투영해 자신이 바라보고 싶은 대로 규정한다. 거울은 하나이다. 단지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달라져 거울에 비치는 얼굴들도 제각각일 뿐이다. 지니아는 그녀 자신을 내보이는 대신 상대방을 되비추는 거울을 온몸에 두르고 상대방이 그녀를 보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여실히 보게 한다. 세상의 모든 얼굴을 품은 거울이나 다를 바 없는 지니아가 다중인격장애자처럼 그들에게 각각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은 어쩌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

여하튼 애트우드의 표면적인 이야기 속에서 내밀한 상처를 간파하고, 그로 인해 왜곡되어 나타나는 욕망을 부추기고, 스스로 그 실현체가 되어 환심을 사고는 그 호의를 서슴없이 등치는 지니아는 분명 ‘나쁜 년’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몰염치와 파렴치와 거짓말 같은 단어들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듯 거침없이 행동하는 지니아에게 너무나 화가 나고, 그런 지니아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토니와 로즈와 캐리스가 답답해 견딜 수 없어진다. 그런데 그들이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결국은 같은 질문을 하기 위해 한 사람씩 마지막으로 지니아를 찾아갔을 때, 지니아는 그들이 보려 하지 않았던 진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치부까지 잔인하게 헤집어 보인다. 토니와 로즈와 캐리스의 이야기만으로는 그 개연성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그제야 제 연결 고리를 드러낸 듯 조금 후련해진다. 그러나 지니아에게 확인한 실체들은 그것이 아무리 진실일지라도 겨우 딱지가 꾸덕꾸덕 앉은 상처를 벌겋게 벌려놓는다. 상대방에 대한 연민은 사라지고 오로지 자기감정에 따라 제 욕망을 채우는 데 필요해서 함부로 놀리는 입은 끝없이 잔혹해진다. 여과 없는 지니아의 입은 솔직함을 가장한 양면의 칼날이다.

그렇다면 지니아의 마지막 칼날을 맞은 토니와 로즈와 캐리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뭐,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지니아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야기한다. 알리고 싶지 않은 말은 빼고 전부. 지니아의 사악함을 다시금 확인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은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그들의 지니아는 일단은 사라지고, 그들은 또 다른 지니아가 나타날 때까지 그럭저럭 상처를 딱지로 덮으며 안간힘을 다해 살아갈 것이다. 한 번 생긴 상처는 어쨌거나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 상처를 안고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인 것이 때론 무자비한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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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집에는 고양이가 산다 - 어느 회의론자의 작가의 집 방문기 지식여행자 시리즈 1
앤 트루벡 지음, 이수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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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론(주의)이란 보고 느끼는 세상이 현실 그대로의 세상이 맞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는 방법론의 한 종류다. 인터넷에서 창궐하는 의심병류의 가짜 회의주의가 아니다. 앤 트루벡의 『헤밍웨이의 집에는 고양이가 산다A Skeptic’s Guide to Writer’s Houses』의 부제이자 원저의 제목에 가까운 <어느 회의론자의 작가의 집 방문기>라는 책의 ‘회의론자’라는 글귀를 보며 떠올린 것은 ‘왜?’라는 것이었다. 회의론자의 방문기는 무언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도 좋다는 선전 문구일까? 대체 둘의 상관관계가 무엇일까? 등등이었다. 사실 이 책은 일반적인 작가의 집 탐방기 등과는 다르다. 흔하게 생각하는 작가의 집 방문기라면 이런 것을 떠올릴 것이다. 작가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작가의 집을 방문해 그 흔적이 녹아 있는 책상이나 책꽂이, 타자기 등을 보며 감상을 이야기하는 식이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저자는 작가의 집이란 ‘권위’와 ‘낭만’에 휩싸이지 않고, 그것이 진짜 작가의 존재를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깐깐하게 들여다본다. 이는 통쾌한 ‘기존 관념 파괴하기’의 하나로 읽힐 수 있다”는 책의 소개글이 있긴 하지만 TV에서 보이는 것 말고는 저자의 집 탐방기에 ‘권위’적이었던 글을 별로 본 기억이 없다. ‘낭만’이라면 많았겠지만.

저자는 작가의 집이란 본디 우울한 곳이며 작가의 집 순례는 헛수고라고 한다. 작가의 집에서는 어떤 문장도 만날 수 없으며 그저 주전자가 걸려 있는 빈 방 뿐이라고 한다. 또한 작가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들려고 하는 기획자들을 비웃으며 박물관이 된 작가의 집을 방문하고 사진을 찍어 대는 무리들을 비웃는다. 책 소개에는 작가의 집이란 ‘권위’와 ‘낭만’에 휩싸이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저자인 앤 트루벡은 다른 의미의 '권위'와 '낭만'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작가의 집이 박물관화되는 것을 증오한다. 저자의 집은 본디의 모습대로 우울하고 어두운 장소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잭 런던의 집이 불타지 않았다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집이 이 책에 어떻게 소개되었을까. 사실 이 책을 꿰뚫고 있는 주제는 작가의 집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집과 그 도시의 경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의 집 때문에 관광객이 몰리는 도시, 도시의 사정 때문에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는 작가의 집 등, 저자가 바라보는 작가의 집은 경제학자가 방문한 작가의 집이라는 부제가 어울릴 듯하다. 하지만 저자는 결국 그토록 증오하는 박물관이 되어서라도 작가의 집이 보존되는 것도 나쁘게 볼 수만은 없다는 이야기로 끝맺는다.

작가와 집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돈이 없어 셋방을 전전했던 포는 자신의 집이 이렇게 관광지가 될 줄 알았을까. 포에게 집이란 그저 글을 쓸 수 있는 하나의 공간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집일 뿐인데 우리는 왜 이렇게 열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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