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 - 치열하게 살고, 장렬하게 죽은 명작 속의 인생들
서지문 지음 / 이다미디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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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삶이요, 식사라고 일갈하던 시대도 있었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독서는 아주 고풍스러운 취미가 된 것이 사실이다. 이를테면 우표수집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비디오와 하이퍼텍스트가 넘쳐나는 시대에도 고전적인 독서는 취미로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우아한―쫌스러워 보이는 취미는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독서를 취미로 인정하고 본다면 꽤나 즐거운 취미임에는 틀림없다. 맛나게 끓여낸 차나 과일을 옆에 두고 작가의 세계로 풍덩 하고 빠져 드는 것이 얼마나 즐거울까?

『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은 저자가 스무 편의 영국소설을 소개하며, 시대를 관통하는 이 소설들에 드러난 삶의 모습과 시대와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국의 소설인 이유는 당시 영국의 18~20세기는 오늘날 서구를 만든 근대화의 과정과 부작용에 대응하는 인간의 저항과 몸부림의 시대로 당대를 투영한 이 시대의 소설들이 현대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근대화의 과정 속의 영국의 모습과 삶은 오늘날 '현대화'도 대체된 우리의 모습과 놀랄 정도로 닮아 있다. 저자 역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책의 구성은 평범하다. 책의 리뷰, 줄거리, 작가 소개로 스무 편의 소설이 이어진다. 중간에 영국 소설에 대한 해설이 첨부되어 있는 것을 뺀다면 다른 책과의 차별점은 보이지 않는다. 소설에 대한 정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소설 자체를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독서 이후에 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독서는, 비슷한 고전적인 취미인 음악 감상과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문화적인 취미와는 비슷하지만 반대로 몸을 써야하는 스포츠 같은 취미와는 다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전정보가 해가 될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자전거 도로의 경치가 좋고 길 상태가 좋다는 것이나 특정 자전거 메이커의 탑승 소감 같은 사전정보는 스포츠 같은 취미를 즐기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독서나 영화 감상 등에서는 이런 정보가 도움이 될까? 『Y의 비극』의 내용은 이렇고 결말은 이렇더라, <올드 보이>의 주인공은 이래서 갇혀 있더라 같은 사전정보를 알게 되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작품의 리뷰를 사전에 읽는 것은 자신만의 독해를 방해할 위험이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독재자에게는 자신이 꿈꾸던 『멋진 신세계』의 이야기일 수 있지 않을까? 『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은 좋은 독서 길잡이일수 있겠지만 책을 직접 읽으려는 독자에게는 책이 우선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전거를 탄 소감을 백번 읽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직접 타봐야 얼굴에 맞는 바람이나 발의 느낌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독서도 마찬가지로 읽으며 느껴야 한다. 모든 취미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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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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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학교 다닐 때의 무조건적인 암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피상적인 것들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경우인데 이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차라투스트라가 조로아스터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에라스뮈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에라스뮈스라는 이름을 듣게 되면 『우신예찬』이라는 연결고리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에라스뮈스가 누구인지, 『우신예찬』이 무슨 책인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에라스뮈스가 아닌 에라스무스라는 기억이겠지만 말이다.

르네상스는 14세기에서 시작하여 16세기 말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하며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예술 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종교 중심의 사상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사상인 인문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는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시기였지만 인간의 정신에는 그 어떤 것보다 충격의 시기이기도 했다. 에라스뮈스는 이 폭풍 같은 시기에 신본주의의 경직된 사고방식을 시정하려 함으로써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이 책은 에라스뮈스의 평전으로 그의 삶에서 사후의 평가까지를 보여준다.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에라스뮈스의 출생부터 시작한다. 로테르담 사제와 의사의 딸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에라스뮈스는 어린 시절을 수도원에서 보냈다. 에라스뮈스는 라틴어에 몰두했으며 시인에 대한 꿈을 키웠다. 신부 서임을 받고 주교의 비서로 보내던 그는 이후 파리대학에서 신학연구에 몰두한다. 에라스뮈스는 『격언집』과 『대화집』 등의 저작을 통해 고전정신을 의욕적으로 유통하려 했다. 이후 『우신예찬』은 이런 에라스뮈스 인본주의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하다. 『우신예찬』을 통해 유익한 어리석음이 진정한 지혜라는 것, 이에 반해 망상에 빠진 지혜는 완전한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 책은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상식적 풍자로 경쾌한 필치를 보였으나 면죄부, 기적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 수도사의 질투 등과 같은 기성 종교에 대한 비판도 포함시켰다.


“에라스뮈스가 가는 길은 중도 또는 중도라고 보는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타협자가 아니었다.”―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에라스뮈스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쪽에서 비난을 받았다.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주체 모두에게 비난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양측 모두 에라스뮈스를 거부할 수 없었는데 그와 같은 온건하고 지적이며 중도적인 세력들은 종교적 증오를 뛰어넘는 완충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에라스뮈스는 타협이 아닌 보편적인 자비로움을 외친 인문주의자였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닐 지라도 광기로 얼룩진 중세의 혼란 속에서 자유와 평화를 지키고자 애쓴 고독한 인문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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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스트라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9
미겔 시후코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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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시후코는 소설 어디쯤에서 제목 ‘일루스트라도Ilustrado’라는 스페인 말이 필리핀에서 누구를 가리키는 데 쓰이는지 설명했다. 몇 글자라도 끼적이게 되면 그 부분을 정확하게 인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나 당최 못 찾겠다. 따로 표시해 놓지 않더라도 어느 맥락에서 튀어나온 설명인지 기억해 놓으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또 스스로를 속였다. 지금은 어느 맥락이었는지도 어렴풋하기만 하다. 내 나이의 기억력은 의지할 만한 것이 결코 아님을 잊지 말자(나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지금 읽고 있는 책의 몇몇 부분에 황급히 북다트를 끼워두었다). 아무튼 정확한 문장은 생각나지 않지만, 대충 일루스트라도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필리핀을 개혁하려는 지식인’을 뜻하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유학생인 셈이다. 다만 여러 용도로 쓰일 수 있는 개인적인 이력 한 줄이 아니라 좀더 공적인 사명감이 부여되어 있는 지칭이다. 미겔 시후코의 소설은 그 일루스트라도라고 자칭하거나 지칭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심 일루스트라도 둘, 크리스핀 살바도르와 미겔 시후코이다. 크리스핀은 필리핀에서 사랑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국제적인 작가로 뉴욕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자발적인 망명 작가’를 자처하는 그는 자신을 따돌리는 필리핀 문단에 ‘거장의 귀환’을 확인시킬 소설 <불타는 다리>를 야심차게 집필 중이다. <불타는 다리>에는 필리핀의 권력과 돈을 틀어쥔 정재계 거물들의 부정과 부패와 위선을 폭로하는 내용이 적나라하게 담겨질 것이다. 『일루스트라도』는 그런 크리스핀의 의문사에서 시작한다. 호의적인 관심이든 악의적인 관심이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불타는 다리>는 사라지고 크리스핀은 뉴욕 허드슨 강에서 시신으로 떠오른다. 미겔은 그의 죽음에 대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의혹을 품고 필리핀으로 돌아와 그가 남긴 이름 다섯 개를 좇으면서 스승이자 친구인 크리스핀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이후 내용은 크리스핀이 남긴 책들과 인터뷰, 크리스핀에 대한 비평가의 악평과 지인의 이야기, 크리스핀이 일으킨 소란에 대한 신문 기사와 인터넷 댓글, 미겔의 크리스핀 전기 등에서 인용한 토막글들과 함께 크리스핀의 미스터리를 쫓는 미겔의 여정이 줄곧 이어진다.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중요한 장치 역할을 하는 이 인용들은 크리스핀이 실제 인물이 아니듯이 작가가 전부 만들어낸 것들이다. 『일루스트라도』 전체에 걸쳐 조각조각 해체하여 배치해 놓았는데, 그 덕분에 메타픽션의 분위기는 달아오르고 수수께끼는 깊어진다. 대신 작가가 아무리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배치해 놓았어도,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을 길 없는 독자는 암초처럼 불쑥불쑥 등장하는 인용들에 걸려 넘어지기 쉽다. 이 인용들을 해체 이전의 퍼즐로 짜맞추려는 시도도 공이 많이 들 것이다(나는 잠깐 시도해 보려다가 형편없는 기억력에 의지해 책장을 앞뒤로 수없이 뒤적일 생각을 하니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만 대강 그려보건대 수고만 감수한다면 가능한 작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즉 가독성이라는 것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메타픽션을 좋아한다면 이 정도의 장애물은 유쾌하게 도전해 볼 만한 것이다. 인내심은 다소 필요하지만, 미겔에게 이입하여 이 인용들을 단서 삼아 크리스핀의 삶과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탐정 기분에 빠져들 수 있다.


인용문들 외에 크리스핀이 이름 다섯 개를 남겨놓았다. 딩동 창코 주니어, 마르셀 아벨라네다, 누레딘 반사모로, 마르틴 신부, 둘씨네아. 그 이름들은 익숙하지 않아서 기억하기도 어렵지만, 각각 특정 계층과 유형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꼭 필리핀에만 있지는 않다. 이들은 다른 이름으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 존재한다. 딩동 창코 주니어는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 횡령을 일삼으며 부패를 발판으로 대기업을 세운 총수를 대표한다. 누레딘 반사모로는 소수 종교(필리핀 무슬림) 출신의 입지전적인 야당 지도자로, 종교를 뛰어넘은 정치를 표방하면서 정세를 읽고 줄타기와 힘겨루기에 교활한 정치가를 대표한다. 마르틴 신부는, 의지할 데 없어 종교라도 부여잡는 하층 계급의 쌈짓돈을 착복하여 대저택에서 호의호식해도,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추종하는 맹신자 혹은 광신도 무리들을 몰고 다니면서 막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주를 대표한다. 그러고 보니 다수의 사람을 이용해 먹는, 그래서 추악한 욕망으로 가장 먼저 썩는 경제계, 정치계, 종교계가 다 모여 있구나.


크리스핀이 남긴 이름들 중 이 세 사람은 사실 미겔이 굳이 만나지 않아도 필리핀 언론에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떠들어댄다. 미겔이 크리스핀의 지인들을 만나 그의 발자취를 더듬는 동안 필리핀의 사회적 이슈들은 모두 그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사건들이 어지럽게 난립하다가 서로 도화선으로 작용해, 폭우가 쏟아져 마닐라 곳곳이 잠긴 날의 대시위로 폭발한다. 가정부 살해 사건과 무죄 판결, 그에 분노한 가정부의 연인이 벌인 인질극. 대기업(폭죽 공장)의 폐수 무단 방류와 환경지킴이 세계파수꾼의 시위. 무슬림 과격 단체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폭탄 테러들. 횡령 혐의를 받는 마르틴 신부의 체포. 여기에 댄스 가수 비타 노바 야동(그 야동에는 폭탄 테러가 계엄령을 발동하여 권력을 이어가려는 대통령의 자작극이라는 증거가 담겨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의 실체까지. 모양은 다를지라도 이 정신없는 사건들은 결코 낯설지 않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씁쓸하게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애인이 억울하게 살해되고 그녀를 살해한 자들이 뇌물을 써서 불합리한 무죄로 풀려난) 전후 사정을 참작한다 해도 가정부의 연인이 인질범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없지만, 사람들은 사랑을 잃은 슬픔과 복수로 인질극을 낭만화하여 잘생긴 그에게 열광하며 옹호한다. 대기업이 불법을 자행해도 ‘대기업이 잘못되면 더욱 가난해질지 모른다’는 논리로 대기업을 걱정하고 지지한다(정말 그런가?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 자신이나 걱정하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대기업은 가소로운 당신들을 비정하게 이용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테니. 대기업의 불법도 당신들이 눈감아주고 있으니. 쥐가 고양이 생각을 끔찍이도 해주는 격이다). 사제의 이중생활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신자들은 두 눈과 두 귀를 몽땅 틀어막고 그를 석방하라는 대규모 집회를 벌인다. 그의 거짓에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횡령하기 전에 자신들이 알아서 조공했어야 했다는 태도이다.


그리고 마침내 대시위의 날,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대기업의 폭죽 공장이 불꽃 축제처럼 폭발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이 이 소설에서 가장 강렬하고 아름다운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압권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의 모든 혼란스러운 이야기가 이 장면 하나를 향해 응축됐다가 순식간에 대폭발을 일으키면서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한 불꽃놀이를 벌인다.


“필리핀 퍼스트 코퍼레이션 폭죽 공장이 화염에 휩싸였다. 사방으로 불길이 솟는다. 폭죽이 하나, 둘, 여기저기서 빵빵 터진다. 진짜 폭죽이 하늘로 치솟는다. 녹색, 파랑, 노랑. 펑펑 튀는가 하면 휘이익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그러더니 동시다발로 터진다. 거대한 오렌지색 불꽃이 빗속에서 시들어간다. 무지갯빛으로 폭발하다가 파란 불꽃 덩어리가 인근 비타 노바 광고판을 비춘다. 시뻘건 바람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예수만이 구원이시다’라고 쓴 간판을 때린다. 네온사인 글자들이 부서져 유리가루가 되어 떨어진다. 더 많은 폭죽이 터진다. 그러더니 아예 공장 건물 한 동이 화염 덩어리로 변한다. 허연 건물이 해골처럼 비틀거리더니 강물로 쓰러진다. 화염이 강 표면으로 번져 나가는 것이 마치 휘발유에 불이 붙은 것 같다. 오렌지색과 노란색 불덩어리들이 천천히 번져나다가 오염된 물 위로 솟아오른다. 이제 강이 화염에 휩싸였다. 물이 불타고 있다. 머리칼 타는 냄새, 유황 냄새, 설탕 타는 냄새 같은 게 코를 찌른다. 먹구름 낀 낮은 하늘 아래 화약 연기가 피어오른다. 멀리 수평선까지 동틀 녘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래서 크리스핀을 죽인 범인은? <불타는 다리>는? 크리스핀의 전기는? 여기쯤 책장을 넘기면 더는 궁금해지지 않는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진다. 미겔과 크리스핀이 묘하게도 닮은꼴이라는 점, 그들 둘 다 어느 정도 반골 기질의 일루스트라도라는 점, 그러나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와 그 자손들이 대대손손 잘 먹고 잘사는 우리나라처럼 필리핀도 그런 기득권층이 나라의 핵심부를 장악하며 최상류층을 형성하고, 그들 역시 그 집단에 속한 일원으로 특혜를 누렸다는 것이 자명하다는 점. 그런 점들이 의문사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이야기 위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미겔과 크리스핀의 목소리를 자성(自省)의 시작으로 받아들이든, 여유로운 이단아의 치기로 간과하든,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은 이 소설을 읽은 독자의 몫이다. 결말은 열려 있다. 거기에 작가가 마련해 둔 크리스핀의 반전까지 더하면 결말은 무수히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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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조류학자의 어쿠스틱 여행기 - 멸종 오리 찾아서 지구 세 바퀴 반 지식여행자 시리즈 3
글렌 칠튼 지음, 위문숙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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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나이를 먹게 되면 새 이름 정도는 몇 개는 알게 된다. 학교에서건 TV에서건 다른 사람들에서건 말이다. 간혹 독특한 새들을 알게 되는데 생김새가 특이하거나 신기한 습성을 가졌거나 멸종될 위기에 쳐했거나 하는 경우에 그렇다. 이를 테면 내가 날개가 퇴화해 날 수 없어 다리가 발달했지만 수많은 개체가 인간에게 잡혀 멸종되었다는 도도새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새들이야 그렇다 쳐도 이런 새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류학자라 불리는 사람들인데 우리나라에도 새 박사로 알려진 윤무부 교수가 유명한 것을 보면 어느 나라나 새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상한 조류학자의 어쿠스틱 여행기The Curse of the Labrador Duck』는 멸종된 까치오리를 찾아 5년에 걸쳐 10개 국가의 40개 도시, 44곳의 자연사박물관을 방문한 조류학자의 이야기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번역서는 유쾌하고 낭만적인 여행담 제목을 가졌지만 원서의 까치오리의 저주(책의 17장의 제목)라는 어쩐지 음산해 보이는 제목을 보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그 저주에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1970년 전후, 커피와 차를 만들던 식품회사에서 끼워 팔던 아이들용 카드의 주제가 멸종된 동물이었다. 그 첫 번째 카드가 까치오리였는데 수집광이었던 꼬마 글렌 칠튼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성인이 된 후 까치오리에 대한 것은 잊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해설서를 쓰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저자는 까치오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하고 싶어서 까치오리의 표본을 찾아 세계를 떠돌 궁리를 하게 된다. 태어나기도 전에 멸종해버린, 수집카드로밖에 볼 수 없었고 나이를 먹어도 박제나 표본으로 밖에 볼 수 없었지만 글렌 칠튼은 세상에 남은 모든 까치오리 박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까치오리의 저주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세계를 떠돌고 졸업여행과 제2의 신혼여행을 빙자해서, 아내를 대동하기도 한다. 이 정신 나간 듯한 여행담은 그저 까치오리에 대한 것 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의 도시와 자연사박물관에 대한 흥미진진한 기록이기도 하다. 익살스럽고 좌충우돌하는 그의 여행기를 읽다 보면 박제가 되어버린 까치오리가 저자에게 유쾌한 저주를 내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도새가 그러한 것처럼 까치오리 역시 인간에 의해 멸종되었다. 그리고 박제된 까치오리를 소유했던 사람들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멸종되는 생물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 생명의 기원과 질병의 근원을 알려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유전자와 DNA의 연구에는 수많은 돈을 쓰면서도 그것들의 집합체인 한 생명체가 완전히 사라져 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개체만 보존된다면 나머지들은 모조리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이 인간일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인간은 더더욱 오래 살게 되겠지만 다른 생명체들은 동식물원에서야 구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것이 진짜 저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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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독서 - 감성좌파 목수정의 길들지 않은 질문, 철들지 않은 세상 읽기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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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도, 편견도, 인습도 목수정을 가두지 못한다. 목수정의 자리는 그녀가 이해하는 세상만큼 늘어난다. 그리고 그녀의 세상을 넓혀준 책들이 그녀만의 펄펄한 시선으로 우리를 향해 마구 손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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