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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신부 1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44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니아는 그리 매혹적이지 않았다. ‘팜 파탈 지니아’가 독자를 끌어당기기 위해 번역서가 내세우는 주요 셀링 포인트이고, 마거릿 애트우드도 『도둑 신부』에서 지니아의 캐릭터를 그렇게 설정해 놓았지만 말이다. 소설이 어떤 캐릭터에 대해 아무리 그렇다고 여러 번 주지시켜도 거기에 선뜻 동의하고 공감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지니아에 대한 묘사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그렇다고 하니까, 지니아가 환상적인 미모에 늘씬하고 육감적인 체형, 사회적인 관습이나 타인의 시선에 속박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거침없이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단지 거기까지일 뿐, 지니아는 토니와 웨스트, 로즈와 미치, 캐리스와 빌리를 사로잡았을지라도 독자인 나까지 매혹하지는 못한다. 물론 지니아의 불가사의한 매력이 나에게 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도둑 신부』의 매력까지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감정이입한 대상은, 그 이유와 감정이 충분히 납득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지니아를 동경하고 휘둘리다가 상처 입은 토니와 로즈와 캐리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지니아가 토니의 시점으로도, 로즈의 시점으로도, 캐리스의 시점으로도 그려지지만 정작 지니아 자신의 시점으로는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둑 신부』에서 일방적으로 악의 역할을 떠맡은 지니아는 아무런 변명의 기회도 얻지 못했다. 지니아에 대한 내 판단은 그러므로 불완전하고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 이야기가 그녀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역시 그녀의 죽음으로 끝날지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피해자는 지니아가 아니다. 그녀의 올가미에 사로잡혀 호되게 당한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있는 토니와 로즈와 캐리스이다. 세 사람은 ‘우리 셋에게 공통점이라고는 지니아뿐’이라고 생각한다. 똑똑한 머리와 냉정한 이성으로 무장한 채 자신만의 아성에 틀어박힌 전쟁사학자 토니, 사업 감각이 탁월하고 활력과 배려와 자선으로 여유 만만해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끊임없이 계산하는 여성 사업가 로즈,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고 세상 모든 사물과 영혼의 영기를 느끼고 명상을 즐기고 얼마간 애니미즘에 빠져든 신비주의자이자 채식주의자 캐리스는 외모도, 성격도, 취향도 딴판이고 일상의 반경도 그리 교차하지 않는다. 그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에 의아해할 법한 조합이다. 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독자만 아는 또 하나의 강력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뿌리 깊은 결핍감이다. ‘지니아’도 그다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핍감의 옵션이랄까. 결핍감이 자석처럼 지니아를 끌어당겨 그들의 인생에 끼어들게 했다.
어린 시절, 토니는 ‘우리 결혼은 전쟁의 애꿎은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부모의 불화 속에서 아이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을 요구하기는커녕 부모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눈치를 살피며 ‘착한 아이’처럼 행동하려고 애쓴다. 끝내 엄마를 잃었을 때도 냉담해진 부부 사이나 엄마의 불륜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는 어린아이들의 반응이 대개 그렇듯이 자기 잘못 탓이라고 자책한다. 역시 전쟁둥이인 로즈는, 하숙을 쳐서 생계를 근근이 꾸려가면서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아빠만 기다리는 엄마와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언제나 돌아오려나 알 수 없지만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는 남편을 위해 항상 깨끗한 집을 준비해 놓고 싶은, 혹은 남편이 언젠가 돌아오리라고 믿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불어나는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속이고 싶은 욕망은 강박적인 결벽증으로 표출된다. 불안한 기다림의 시간 동안 엄마의 사랑 대신 결벽증을 온전히 견뎌야 하는 것은 ‘착한’ 딸의 몫이다. 캐리스는 미혼모의 아이일 가능성이 크다. 엄마가 얼굴 윤곽마저 뭉그러진 빛바랜 사진 한 장 속의 무표정한 군인이 아빠라고 말했지만 결혼사진도 없을뿐더러 캐리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전사했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캐리스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그래서 극도로 예민한 엄마의 유리 같은 신경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존재로 자신을 억누른다. 그리고 아빠를 대신해 캐리스를 때리면서도 캐리스에게 아빠 대신 자신을 챙기고 위로해 주길 바라는 엄마를 위해 가혹한 매질을 견디는 ‘착한 아이’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한다. 캐리스는 엄마의 매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예민한 신경 탓이라고, 그러니 엄마도 어쩔 수 없으므로 자신이 견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자신을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다고 믿고 싶다.
건강한 가정에서 아이의 본능적인 욕구를 표출하며 마음 편히 응석을 부리는 대신, 토니와 로즈와 캐리스는 ‘착한 아이’의 가면 아래 진짜 자신을 감춘다. 그리고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부모의 위태로운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혹은 더는 악화되지 않길 기대한다. 그것은 어린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최선의 생존 전략이었다. 슬픈 일이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의 기대도 보상받지 못한다. 그들은 각자 살아남았지만 똑같은 상처를 가졌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비슷한 구석이 너무 없다고 서로서로 말하는 그들이 실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진실을 독자가 알 수 있는 것은 지니아 덕분이다. 그들은 가장 근원적인 상처를 서로에게도 내보이지 않는다. 그들 안에 꽁꽁 감춘, 도저히 채워질 길 없는 결핍감으로 상처가 점점 깊어지는 ‘작고 연약한 아이’, 즉 진짜 자신을 지니아에게만 보여준다. 그리고 지니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상처의 잔상을 투영해 자신이 바라보고 싶은 대로 규정한다. 거울은 하나이다. 단지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달라져 거울에 비치는 얼굴들도 제각각일 뿐이다. 지니아는 그녀 자신을 내보이는 대신 상대방을 되비추는 거울을 온몸에 두르고 상대방이 그녀를 보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여실히 보게 한다. 세상의 모든 얼굴을 품은 거울이나 다를 바 없는 지니아가 다중인격장애자처럼 그들에게 각각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은 어쩌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
여하튼 애트우드의 표면적인 이야기 속에서 내밀한 상처를 간파하고, 그로 인해 왜곡되어 나타나는 욕망을 부추기고, 스스로 그 실현체가 되어 환심을 사고는 그 호의를 서슴없이 등치는 지니아는 분명 ‘나쁜 년’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몰염치와 파렴치와 거짓말 같은 단어들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듯 거침없이 행동하는 지니아에게 너무나 화가 나고, 그런 지니아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토니와 로즈와 캐리스가 답답해 견딜 수 없어진다. 그런데 그들이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결국은 같은 질문을 하기 위해 한 사람씩 마지막으로 지니아를 찾아갔을 때, 지니아는 그들이 보려 하지 않았던 진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치부까지 잔인하게 헤집어 보인다. 토니와 로즈와 캐리스의 이야기만으로는 그 개연성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그제야 제 연결 고리를 드러낸 듯 조금 후련해진다. 그러나 지니아에게 확인한 실체들은 그것이 아무리 진실일지라도 겨우 딱지가 꾸덕꾸덕 앉은 상처를 벌겋게 벌려놓는다. 상대방에 대한 연민은 사라지고 오로지 자기감정에 따라 제 욕망을 채우는 데 필요해서 함부로 놀리는 입은 끝없이 잔혹해진다. 여과 없는 지니아의 입은 솔직함을 가장한 양면의 칼날이다.
그렇다면 지니아의 마지막 칼날을 맞은 토니와 로즈와 캐리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뭐,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지니아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야기한다. 알리고 싶지 않은 말은 빼고 전부. 지니아의 사악함을 다시금 확인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은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그들의 지니아는 일단은 사라지고, 그들은 또 다른 지니아가 나타날 때까지 그럭저럭 상처를 딱지로 덮으며 안간힘을 다해 살아갈 것이다. 한 번 생긴 상처는 어쨌거나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 상처를 안고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인 것이 때론 무자비한 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