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문장론 -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하여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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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수레바퀴 밑에서』, 『유리알 유희』. 요즈음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지만 학창 시절 헤르만 헤세의 책이 필독도서에 빠지지 않았으며 최소한 헤세의 책은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헤르만 헤세는 그의 책을 읽어보았건 그렇지 않건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헤세를 읽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헤세의 문장이 섬세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생각해 보는 것은 『이방인』의 번역 관련한 광고로 볼 때 과연 우리가 읽은 헤세의 문장이 과연 헤세의 문장과 얼마나 비슷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헤세의 문장론』이라는 이 책은 이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궁금해진다.


<번역>이라는 글에서 헤세는 가장 번역이 어렵다는 시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번역이라는 것 자체가 원작의 본질적인 면을 상실시켜버린다는 것이고 그 점은 시만큼은 아니어도 소설 역시도 어느 정도는 적용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기이한 작가들>에서는 헤세의 소설에 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에드거 앨런 포나 쥘 베른, 웰스 등의 작가들―특히 쥘 베른이나 웰스에게―에게 무해한 기술자들, 기인 작가들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시대와 함께 몰락할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그리고 낯선 기이한 작가 몇몇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기술자라 이야기했던 쥘 베른이나 웰스의 작품이 여전히 읽히고 있는 것을 보면 헤세는 무슨 생각이 들까. 이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다.


이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있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문장론이라는 제목 보다는 다른 제목을 붙였어야 했다. 책의 부제이기도 한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하여’에 관한 헤세의 생각들을 모아놓은 글들이기 때문이다. 책의 부제가 오히려 책의 제목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문장론이라고 해서 전문적인 부분만을 파헤쳐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헤세 자신이 이야기하는 문장에 관한 이야기가 주가 되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부분은 드물고 책에, 글에 대한 에세이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사실 문장에 관한 전문적인 이야기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재미있고 헤세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있는 것처럼 흥미롭다. 번역이나 책 애호가나 독서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 현실과도 비슷하지만 번역에 대한 것도 문장에 관한 전문적인 글이 아니며 책 애호가나 독서에 대한 이야기도 그의 문장과는 별 관련이 없다.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헤세의 문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래서 더 재미있게 읽힐 수 있겠지만 제목을 보고 내용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헤세가 이런 제목을 본다면 ‘책의 제목 붙이기’와 같은 글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책의 제목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게 꽤나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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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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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갑자기 죽으면 어쩔 도리 없이 속수무책으로 남게 되는 것들을 생각해 본다. 엄마와 오빠가 나를 대신해 지워야 할 물건들, 내가 한때 살아 있었다는 온갖 자질구레한 흔적들, 평생을 애면글면 살아내면서 겨우 남긴 욕망들. 살아서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공유했던 것들은 아무래도 좋은데 그 외에 다른 것들을 끌어안고 있을까 봐 겁난다. 그 사이에서 예기치 못했던 것들이 발견되면 그것들이 나에 관한 다른 기억들을 전부 제압할지 모른다. 도대체 그이가 왜 이렇게 꽁꽁 쟁여뒀는지 알 수 없는 것들, 엄청난 약봉지, 사탕 봉지, 로또 뭉치 같은 것들 말이다. 내가 아닌 것 같은 것들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겨지고 싶지 않다.

김중혁의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에는 사후에 그런 것들을 아무도 몰래 감쪽같이 지워주는 ‘딜리터(deleter)’라는 직업이 나온다. 딜리터는 생전의 의뢰인과 계약한 대로 의뢰인이 지정해 놓은 온갖 물건들을 사후에 ‘딜리팅(deleting)’한다. 이 소설에는 전직 경찰이자 딜리터인 구동치가 딜리팅 과정에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으로 등장한다. 딜리터니 딜리팅이니 하는 직업과 일도 신기하고 재미있지만, 더욱 흥미로운 점은 딜리터에게 딜리팅을 의뢰하는 물건들을 의뢰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부재하는 자리에 남겨지는 것은 싫지만 자신이 존재하는 한은 소유해야 하는 것, 그것을 김중혁은 ‘비밀’이라고 말한다. 그 비밀들 중에는 세상에 공개되면 지금까지의 나를 무너뜨릴 약점뿐만 아니라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 상대와 협상하여 거액을 챙길 수 있는 약점도 포함된다.

김중혁은 자신이 죽은 이후까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딜리팅을 의뢰하는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 (328쪽)


그래, 어쩌면,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살아 있는 한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욕망” 자체는 아직은 살아 있어서 죽음 이후를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자만이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질 수 있는 욕망이 아닌가. 그 욕망에, 같은 한계를 지닌 동류로서 연민을 느낄지언정 추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 그리하여 자신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을, 알 수 없다는 것조차 모를 세상의 일까지 전전긍긍하는 신경이라니……. 만약 그 애처로운 욕망이 추해진다면, 그건 추한 사람이 추하게 욕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구동치가 본의 아니게 살인 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추한 사람이 추한 욕망으로 딜리팅을 이용하고, 구동치가 의뢰자의 본심을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대 엔터테인먼트 회장(천일수, 악당), 그를 무너뜨릴 수 있는 동영상이 담긴 태블릿 PC, 그 동영상으로 그의 재력을 탐하다가 살해된 사람(배동훈)과 계속 탐하는 사람(이영민, 악당이나 마찬가지) 사이에 휘말리는 것은 태블릿 PC를 딜리팅해 달라고 배동훈에게 의뢰받은 구동치뿐만이 아니다. 배동훈의 석연찮은 죽음을 파고드는 과격하지만 정 많은 열혈 형사와 원수도장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천일수에게 고용되어 궂은일에 나서는 사람들도, 명예와 부를 지키려는 자와 그것을 무너뜨려 빼앗으려는 자의 추악한 욕망에 휩쓸린다. (‘원수도장’, 인터넷 검색도 안 되는 낯설고 신기한 소재이다. 소설 속에 제공된 정보를 간단히 언급하자면, ‘무공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내세의 삶까지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하루 종일 무공만 연마하는 일종의 종교, 그러나 1980년대에 간첩 조작 사건에 휘말려 궤멸됐음.’)

소설은 단숨에 아주 잘 읽힌다. 딜리팅을 하는 탐정과 살해당한 의뢰인,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음모는 작가가 감질나게 조금씩 던져주는 단서를 좇아 책장을 쉼 없이 넘기게 한다. 그런데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한껏 증폭됐던 궁금증만큼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소설의 커다란 뼈대와 별 상관 없는 곁가지 에피소드들이 많이 나와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한다. 특히 정소윤, 그녀는 이 소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꽤 비중 있게 다뤄지고 뭔가 활약할 것 같은 기대감을 주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흥미로운 소재들을 많이 가져왔지만 꼭 그 소재들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졌다는 점이다. 소설 초반에는 구동치가 딜리터였을지 모르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딜리터이기보다는 탐정이었고, 원수도장 사람들은 처음에 정체 묘연한 무공의 고수들로 카리스마 넘치게 등장해 그에 걸맞게 행동할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실수투성이 오합지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애꿎게 사람이 하나 더 희생됐다. 나는 아직도 왜 그를 죽이기까지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잘 이해가 안 되긴 제목도 마찬가지이다. 제목과 연관된 문장들을 소설 속에서 발견했지만 말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알라딘 신간평가단으로 이 책을 받기 전에 이미 읽었지만, 리뷰는 신간평가단이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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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포스 신화 - 부조리에 관한 시론
알베르 카뮈 지음, 오영민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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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구나, 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책 제목인 듯싶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시시포스’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까뮈’가 ‘카뮈’로 된 것이야 납득하고 받아들일 사람이 있다고 쳐도 ‘시지프스’, ‘시지프’가 ‘시시포스’가 된 것에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할 사람이 꽤 될 거라는 사실을 장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으로, 그 충격적인 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로 시작하는 뫼르소의 이야기는 드러난 이야기에 비해 제대로 읽기가 힘든 소설이다. 『이방인』의 이야기 속에는 부조리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카뮈의 부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시시포스 신화』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책 역시 만만히 읽어내기 쉬운 것이 아니다.

시시포스는 꾀가 많은 인간으로 살아있을 때나 죽어서까지도 신들을 기만한 죄 때문에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바위는 정상에 올려놓으면 다시 아래로 굴러 내려가기 때문에 다시 올려야 하는 영겁의 형벌이기도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희망도 없는 무익한 행위, 이 부조리는 삶과 그대로 맞닿아 있다. 우리는 삶이 좀 더 희망적이고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사실도 함께 알고 있다. 이처럼 우리 삶이 곧 부조리이며 무의미해질 것을 알고 있다면 자살밖에는 답이 없는 것일까? 시시포스는 돌을 산 위에 밀어 올려 놓아도 바로 떨어질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 끔찍하고 의미 없이 보이는 형벌을 묵묵히 수행했다. 자살을 하는 것은 그 형벌을 끝내는 것, 종교적인 희망이나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 등은 도피일 뿐이라 이야기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부조리 속에서 살아야 하며 자살은 삶 자체를 의미 없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부조리로 가득한 삶 자체가 일상이며 실존을 유지시키는 근본이기도 하다. 이러한 고뇌마저도 없다면 자살만이 유일한 해답일 것이다.

살아나갈 수록 삶 자체가 부조리라는 것에 공감을 하면서도 무언가를 바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 자체가 시시포스를 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엔 죽게 되는 날까지 바위를 밀며 올라갈 수밖에 없는 삶이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을까? 삶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을.


“무수한 산정들을 향한 투쟁. 그것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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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 <자유로운 삶 1, 2>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들이 한둘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하진은 새로운 작품이 번역되면 꼭 읽고 싶어지는 소설가이다. 책소개를 읽는 것만으로도 매혹적이다.

 

출판사 책소개

《자유로운 삶》은 작가 하 진의 발걸음을 하나로 응축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생계를 위해 매일 십수 시간을 일하면서도 카운터 아래 자신의 이름이 적힌 시집 하나를 간직하고 있는 작은 식당 주인의 이야기를 소설로 옮기기 위해 20여 년이 필요했다는 하 진, 그 지난한 노력의 결과인 《자유로운 삶》은 언어적 어려움을 삶의 조건 중 하나로 부여받은 이민 1세대에서 그 언어권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기까지의 성공스토리를 그리고 있지 않다. 그랬다면 작업은 훨씬 간단했겠지만 우리의 인생은 그처럼 하나의 줄거리로 요약되지 않는다. 뉴욕타임스의 서평처럼 “삶은 하루 또 하루를 견뎌낼 때는 도저히 바꿀 도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년이 흐르면 어느 순간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인생의 경이로움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말하는 것 그 이상이 필요하다. 주인공이 성공한 작가가 되었건, 그가 만났던 식당 주인처럼 자비 출간한 시인으로 남았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 진은 이 작품에서 난의 하루하루를 천 페이지에 걸쳐 그려낸다. 거기에는 독자를 즐겁게 하기 위한 어떤 과장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난 우의 시(詩)가 수록된 마지막 장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자유로운 삶》 출간 당시 뉴욕타임스에 실렸던 <여기에 있어서 기쁜>이라는 서평의 제목에 공감하며 하 진이라는 작가가 여기에 있어주어서, 그리고 우리가 삶의 이 자리에 이르러서 기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로힌턴 미스트리 <가족 문제>

 

<그토록 먼 여행>과 <적절한 균형>에 이은 로힌턴 미스트리의 파르시 가족(페르시아 계통의 조로아스터교도) 3부작 <가족 문제>가 이제야 번역됐다! <가족 문제>는 2002년 맨부커상 Shortlist에 올랐던 작품이다. 그러고 보니 <그토록 먼 여행>은 1991년에, <적절한 균형>은 1996년에 모두 맨부커상 Shortlist까지 올랐구나.

 

알라딘 책소개

로힌턴 미스트리는 19세기 거장들에 비견되는 사실주의적 기법을 견지하면서도 따뜻한 시각으로 인도인의 삶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 왔다. 그가 그리는 인도인의 삶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면서도 일상의 깊숙한 내면에서 성스러움을 발견하는 감동적인 드라마다. 이번 소설은 그가 줄곧 선보였던 극사실주의적이면서 온정적인 리얼리즘의 절정을 이룬다.
<가족 문제>는 그의 장편 소설 3부작 중 우리 일상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필연적으로 관계 맺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가족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가족의 문제는 단지 가족 안에서만 발생하고 머물지 않는다. 사회와 국가의 문제들과 복잡하게 뒤얽혀 수많은 부정과 문제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작가는 보편적 인간애의 존재를 힘겹게 찾아 우리 앞에 내놓는다. 그것은 바로 일상에서 펼쳐지는 작은 승리들,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인간애이다. <가족 문제>는 로힌턴 미스트리가 추구하는 '적절한 균형'으로의 능력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토머스 핀천 <느리게 배우는 사람>

 

새물결에서 엄청난 가격으로 펴낸 <중력의 무지개>뿐만 아니라 '엄청나고 대단한 고전 작가'라는 인상이 새겨져 있어서 토머스 핀천이 생존 작가라는 사실을 자꾸 까먹는다! <Bleeding Edge>가 2013년 미국 National Book Award Finalist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무튼 그의 문학적 성장과정을 엿볼 수 있는 단편집이라니 반갑다.

 

알라딘 책소개

필립 로스, 코맥 매카시, 돈 드릴로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네명의 소설가로 꼽히는 핀천은 현대사회를 비판적으로 통찰하는 특유의 상상력과 과학소설에 끼친 영향으로 싸이버펑크 SF문학의 선조로 인정받는 소설가로서,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초기에 쓴 다섯편의 단편을 모아 작품을 쓴 때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84년에 출간한 것이다.
데뷔 장편이 나온 이듬해에 발표된 '은밀한 통합'(1964)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은 모두 핀천이 대학생 시절에 쓴 작품들이며 소설집에 실린 초기 다섯편의 작품을 보면 핀천이 이후에 발전시킬 주제와 스타일, 취향 등을 짐작할 수 있다.
핀천은 소설집 앞에 긴 작가 서문을 붙여서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 자신의 미흡했던 점, 즉 어두운 말귀 때문에 대화의 많은 부분을 망가뜨리고 있는 점, 개념이나 관념을 먼저 앞세운 탓에 등장인물의 생생한 형상화가 미흡한 점 등을 고백하고 있다. 작가 서문은 각 단편들에 대한 해설과 비평으로서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는 접하기 힘든 핀천의 문학적 성장과정을 자전적으로 소개하는 글이기도 하다. 

 

 

마크 트웨인 <얼간이 윌슨>

 

그동안 읽어보지 못했던 마크 트웨인의 작품이다!

'가장 위대한 문학 사기꾼의 원숙함', '추리소설 전통에도 닿아 있는 독특한 작품'이라니 더욱 궁금해진다. 

 

알라딘 책소개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같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작은 아니지만, F. R. 리비스 같은 평론가는 '무시당한 걸작',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고전'으로 꼽으면서, 이 작품만으로도, 또 트웨인의 다른 대표작들과 연결 지어 보아도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에 손색이 없는 걸작이라 평한 바 있다.
중편 정도의 길지 않은 분량에, 미국 남부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로 시작해 후반부로 가면서 탐정소설 분위기로 전환되는 이 작품은, 미국의 역사와 노예제 문제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한편 에드거 앨런 포우 이래의 추리소설 전통에도 닿아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또 각장 서두에 '얼간이 윌슨의 책력(冊曆)'이라는 허구의 문서를 인용하는 형식으로 아이러니한 경구를 섞는 등 마크 트웨인 특유의 신랄함과 유머가 곳곳에서 발휘되며 '가장 위대한 문학 사기꾼'의 원숙함을 엿볼 수 있다.

 

 

로버트 A. 하인라인 <우주의 개척자>

 

로버트 A. 하인라인, 일단 믿는 SF 작가!

출판사 책소개 중 마지막 단락, 재미있다.

 

출판사 책소개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1기의 대단원을 내리는 작품이자, 후대의 글 좀 쓴다고 하는 SF 작가들을 홍보할 때 언제나 표방하는 이름인 ‘제2의 하인라인’이 아니라 진짜 오리지널 하인라인이 쓴 1951년 레트로 휴고상 수상작.
흔히 미국적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라고 불리는 미국인들의 정신구조의 근간 중 하나인 개척자 정신을 우주시대에 대입한 작품으로, 시련과 고난이 올 때 ‘내 집’, ‘내 고향’의 의미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화두를 던지고 있다.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자연적 대재난의 모습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연구를 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한 과학적 묘사가 돋보인다.
멀쩡한 신림4동을 땅값을 위해 신사동으로 바꾸고, 아파트 이름도 최신 이름으로 바꾸려고 아우성이 넘치는 곳. 성공하면 힘겹고 초라했던 과거를 지우기에 급급하고,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강남으로만 가고자 하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자신이 자라고 떠나온 집과 고향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는 훌륭한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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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4-05-02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에 연결해두었군요. 호호 죄송합니다.
 
노예 12년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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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섬노예 사건에 관한 뉴스를 보다 보면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노예제도가 남아 있던 봉건시대나 미국의 남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실제로 아직도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곳이 허다한 것을 보면, 어쩌면 인간은 내면 깊숙이 악마적 심성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노예 하면 당장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다. 미국의 예를 들어 보자면, 가정부 복을 입은 퉁퉁하게 살이 오른 하녀, 웃통을 벗고 뙤약볕에서 일을 하고 있는 젊거나 혹은 나이가 든 노예들. 이들의 공통점은 흑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고,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았다. 이후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자유가 주어진 것은 노예 해방이라는, 어찌 되었건 명목상의 이유로 일어났던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부터이다. 전쟁이라고 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악의 행위 이후에야 노예 제도는 어떤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노예제에 관한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이야기라면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일 텐데, 이것이 백인의 눈으로, 관찰자의 입장에서 쓰인 이야기라면 지금 볼 이 책은 자유인에서 노예가 된 한 흑인 지식인의 눈으로, 삶으로 경험한 생생한 기록이다.

솔로몬 노섭의 『노예 12년』은 뉴욕의 자유 시민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솔로몬 노섭이 납치당해 루이지애나의 한 목화 농장에서 구출되기까지의 12년 동안의 노예 생활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자유민에서 노예가 되었다는 극단적인 대비와, 실화라는 충격까지 더해져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특이한 점은 자유민이자 지식인이기도 했던 흑인이 노예제를 경험하면서 느꼈던 그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료로의 가치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자유 시민 ‘노섭’은 노예 상인에 의해 ‘플랫’으로 그 바뀐 이름만큼이나 험난하고 고된 삶을 경험하게 되는, 노예로의 삶뿐만이 아니라 미국 남부 지역의 생활상과 단면들도 독특한 느낌으로 전달하고 있으며, 이것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세계를 직접 경험한 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현재에도 분명히 노예들은 존재한다. 현재의 노예들의 모습은 과거에 못지않다. 잔혹하고, 악랄하며, 비인간적이다. 사람을 납치하고, 폭행해서 죽지 않기 위해 자발적 노예가 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자유로웠다가 강제로 빼앗긴 사람들이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과거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비인간적이고 부조리한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쉬운 말처럼 이야기하는 개인의 저항과 같은 것과 같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와 같은, 보다 큰 힘밖에 없다. 그럴 의지가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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