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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못 읽는 남자 - 실서증 없는 실독증
하워드 엥겔 지음, 배현 옮김 / 알마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오감 중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요긴하게 쓰고도 있는 감각은 ‘시각’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은 하나같이 ‘보는 눈’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책 읽기(혹은 글쓰기), 그림 감상하기, 드라마 보기, 예쁘거나 귀엽거나 아기자기하거나 멋진 영상의 게임 즐기기. 게다가 돈벌이까지 눈과 손(뇌는 물론)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아무것도 없는 암흑이라고 상상하는 것만도 끔찍하기 그지없다. 삶이 곧 악몽이 될 것이다. 지독한 근시이지만, 이렇게라도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마음껏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런데 시각을 잃게 된다면,에 대해 가정하려니 다른 감각들도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오긴 마찬가지다. 음식의 맛을 알지 못하는 삶도, 아름다운 음악과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삶도, 포근한 살결과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을 느끼지 못하는 삶도, 사랑하는 사람의 살내와 꽃향기를 맡지 못하는 삶도 싫다. 오감이 조화롭게 나를 자극할 때 나는 아마 가장 행복했을 것이다.
어쨌든 하워드 엥겔의 『책, 못 읽는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지독한 독서광에 추리소설 작가인 하워드 엥겔이 어느 날 책을 읽지 못하게 된 것은 시각을 잃게 되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뇌졸중을 앓아 읽기 능력을 관장하는 뇌의 일부가 손상됐기 때문이다. 손상된 뇌는 멀쩡한 눈까지 아무것도 읽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까 시력에는 문제 없이 모든 것을 봐도 익숙한 세계의 친숙한 사물들이 이계(異界)의 낯선 사물들처럼 보였다. 하워드 엥겔에게 가장 비극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독서광으로서 본능처럼 읽었던 글자들이 세르보크로아티아어처럼 낯설게 보여 해독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작가로서 수만 단어들을 썼던 손 감각은 살아남아 여전히 쓸 수는 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리하여 하워드 엥겔은 실서증(失敍症) 없는 실독증(失讀症), ‘알렉시아 사이니 아그라피아(alexia sine agraphia)’ 진단을 받았다. 쓸 수는 있어도 읽을 수는 없는. 내가 직접 쓴 것도 읽을 수 없는.
읽는다는 행위에는 시각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글자들의 상징 체계를 인식하고 통합할 수 있는 뇌의 해독 능력도 필요하다. 시각을 잃어 아무것도 읽지 못하게 된 것과 뇌의 해독 능력을 상실해 아무것도 읽지 못하게 된 것 중 어느 것이 더 비극적일까. 처음에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보이기는 하는데 책은 읽을 수 없다니 이거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읽기’에 대한 갈증을 쉽게 체념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일단 볼 수만 있다면 다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읽기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는 ‘보는 눈’이니까. 보는 눈이 없이는 ‘다시’도 결코 있을 수 없다.
『책, 못 읽는 남자』는 실독증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읽기 위해 노력한, 그래서 다시 읽게 된 과정을 지극히 침착하게 서술한 기록이다. 읽을 수 없게 된 하워드 엥겔은 눈 대신 청각(오디오북)이나 손(읽지는 못해도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 써보면 인식할 수 있으니)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눈, 다시 눈으로 읽기 위한 재활 훈련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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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깨달은 것은 책 읽기가 아무리 느리고 어려울지라도―지독히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나는 어쩔 도리 없는 독서가라는 것이다. 뇌에 들이닥친 돌풍도 나를 바꿔놓지는 못했다. 나는 열혈 독서광이다. 심장을 멈출 수는 있을지언정 독서를 멈출 수는 없다. 독서는 내게 뼈이자 골수, 림프액이자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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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읽는다는 행위가 주는 기쁨, 희열, 환희 등(이런 유사한 감정의 모든 단어)에 중독됐던 그가 살아 있는데, 눈앞에 암흑이 드리운 것도 아닌데 어찌 실독증에 굴복하여 눈으로 읽기를 포기할까. 나라도 결국은 하워드 엥겔처럼 선택했을 것이다. 눈이 아닌 다른 무엇에 의지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책장을 펼치고 눈을 고정한 채 읽기 시작하는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것들과의 교감, 오로지 나만의 것들을 체념하는 것은 죽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