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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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이것은 나의 유일한 독서 목적이다. 결국은 재미로 통하는. 그래서 책은 내게 언제나 놀잇감이었다. 책보다 더 재미있는 뭔가를 발견하면 별로 망설이지 않고 거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게 게임이든, 드라마든, 만화든, 자수나 뜨개질이든, 술이든, 외출이든 그 밖의 등등 무엇이든 말이다. 무엇을 하든 내 시간을 즐겁게 보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행이랄까, 그중에 책은 대개 상위권에 포진해 있다. 물론 즐거움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함축적인 감정이고, 그 즐거움을 유발하는 요인들도 그때그때 너무나 변덕스럽긴 하다. 또한 그 즐거움은 온갖 형태의 감동에서, 설령 눈물을 쏟게 하는 슬픔이 구축한 감동에서도 빚어질 수 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결국 얼마나 내 마음을 장악하고 울려서 뒤흔드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작가의 명성과 작의(作意),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작품의 가치도 내 마음과의 공명 앞에서는 그 권위를 내세우지 못한다. 그러니까 일단 독자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 책은 온전히 그 책을 읽은 독자만의 것으로 유일해진다. 작가가 책을 쓰기 시작하지만 그 책을 완성하는 사람은 독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므로 독자에게는 책 속의 텍스트를 마음 가는 대로 해독할 수 있는 고유의 권리가 있다. 작가도 독자의 책 읽기를 위해 개인 교습을 해줄 것이 아니라면(개인 교습도 독자가 받아들여야 가능한 일이지만) 이래라저래라 관여할 수 없다. 작가의 명성이 아무리 높아도, 작의가 아무리 훌륭해도, 작품성이 아무리 뛰어나도 개인인 독자에게 아무런 감응이 없으면 그 독자에게는 의미가 없다. 물론 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배경 지식이 부족해 누군가는 새 지평이 열리는 경험을 했지만 또 누군가는 줄곧 하품만 해댔다면, 그것 또한 독자의 책임일 것이다. 설령 그렇더라도 ‘내 마음대로 읽기’는 독자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권리를 충분히 누리려면 의무도 다해야 하고 책임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이 책이 무척 반가웠고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끄덕 공감하거나 잇새로 키득키득 동조할 수 있었던 것도 닉 혼비의 책 읽기가 독서를 오직 재미와 즐거움을 위한 ‘취미’, 결국은 여가 시간의 놀이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책을 읽는 행위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라 ‘일’이다. 내 직업 때문에 읽어야 하는 책들을 내 독서 목록에 포함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책 읽기는 내가 아무리 책을 좋아해도 도무지 재미있지가 않다. 일은 결코 놀이가 될 수 없다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그러나 일과 놀이는 분명 다르다. 일로 책을 읽으면 재미없어 죽을 지경이 되어도 결코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다. 놀이로 책을 읽을 때는 재미없으면 언제든 책장을 덮어버리면 그만이지 않는가). 독서는 ‘놀이’, ‘취미’, ‘여가’로 남아 있을 때 가장 빛난다. 그때 독서의 가장 순수한 혜택을 얻을 수 있다.

어쨌든 닉 혼비는 ‘창작물에 대한 정당한 대가(책값)를 지불하고 내 소유의 책을 내 마음대로 읽겠다는데, 그래서 불만도 마구 터뜨리고 찬사도 맘껏 보내겠다는데 누가 뭐래! 작가도 감히 뭐라고 못 하지! (그게 싫으면 책을 팔지 말아야지!)’라는 배짱을 부린다. 닉 혼비의 독서 이야기들이 연재됐다는 잡지 ≪빌리버≫의 성스러운 의도(작가들의 안식처가 되도록 어떤 책도 비난하지 말지니!)도 온갖 엄살을 떨며 가볍게 물리친다.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도 잘 안 되는 90% 과장의 우스운 거짓말, 대개는 투덜투덜 불평, 가끔 전폭적인 찬사, 책을 읽지 못한 데 대해 줄줄이 이어지는 변명, 문학인들과의 부러운 인연(특히 커트 보네거트와 테라스에서 담배 피우기) 등등이 켜켜이 ‘농담’을 이룬다. 닉 혼비의 (읽은) 책들 중 한국에도 번역됐고 내게 없는데 읽고 싶어진 책은 제스 월터의 『시티즌 빈스』, 조슈아 페리스의 『호모오피스쿠스의 최후』, 마릴린 로빈슨의 『길리아드』다.

달별로 산 책과 읽은 책 목록을 나란히 기록해 둔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나도 시도하고 싶은 마음은 결단코 없다. 산 책 따로, 읽은 책 따로 목록을 정리하긴 하지만 두 목록을 합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산 책 목록은 그 양이 닉 혼비를 능가하고(그도 목록에 올리지 않은 책들이 많다지만) 읽은 책 목록은 엇비슷하니, 굳이 적나라하게 비교하여 읽은 책 목록을 더 초라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밀려들 때도 있는 죄책감도 느끼고 싶지 않다. 이런 나에게 위로가 되어준 글귀가 있으니, 닉 혼비가 소개한 가브리엘 자이드의 교양인에 대한 정의다. 그는 『So Many Books』에서 “진정한 교양인이란, 읽지 않은 수천 권의 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태연자약하게 더 많은 책을 원할 수 있는 이들이다”라고 이야기했단다. 그럼 나도 교양인? 그리고 이어서 닉 혼비는 “우리가 소유하는 책들은 읽었든지, 읽지 않았든지 간에 우리의 자유재량에 맡겨진, 가장 온전한 자아의 표현이다”라고 말한다. 내 책장의 책들이 진정한 나를 표현해 준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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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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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간 초등학교에서 재직했고 이후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페터 빅셀의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Heute Kommt Johnson Nicht Kolumnen』는 기다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대에 와서 실종되어 버린 기다림, 이것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다. 시간을 허투루 소비하는 것이 죄악처럼 여겨지는 요즈음 세상에서는 효율성이야말로 최고의 가치-특히 요 몇 년 사이 유난히 강조하긴 하지만-처럼 여겨지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어진 우리에게 75세 먹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어떻게 와 닿을까?

우리나라에서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죄악이다. 여유-금전적인-가 있으면서도 시간이 많다면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고 여유가 없으면서도 시간이 많다면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삶 때문에 시간을 갖기 힘든 우리나라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휴가를 쓰는 것인데도 온갖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 일에 지쳐 주말에는 녹초가 되어 쓰러지고 월요일이 되면 또 일을 하러 나간다. 아이들이라고 별다를까? 코흘리개 꼬마 아이들부터 자기 몸만한 가방을 메고 온갖 학원에 다니며 시간을 쪼개 활용하고 있다. 심각하게 잘못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남들에게 뒤쳐진다고 강요를 받을뿐더러, 요즘 세상이라면 실제로도 그렇게 되기 쉬우니 그저 안쓰럽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되면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삶에 시간과 여유를 가져야 했어'

페터 빅셀이라면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아직도 시간이 충분히 남았잖아?' 페터 빅셀의 사물을 보는 관점이 독특하다는 것은 『책상은 책상이다』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인간에 대한 관점은 굉장히 긍정적이다. 아니 인간을 바라보는 것 역시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기차 시간표를 외우고 있으며 시간이 많은 것처럼 보였던 에밀이라는 지적장애인을 보며 어린 페터 빅셀이 생각했던 것은 '에밀처럼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페터 빅셀은 동물원에서 아이에게 동물의 이름을 가르쳐 주려는 부모보다 동물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 아이들이 가진 삶의 원초적인 즐거움을 공유한다. 사물에 대한 것이건 인간에 대한 것이건 이런 새로운 관점이 우리가 쉽게 잊고 살아왔던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관조하듯 들려주는 페터 빅셀의 이 산문집에는 특별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아직 젊거나 어리기 때문에 담담히 들려주는 이 이야기에서 굳이 무언가를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페터 빅셀의 이야기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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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속삭여줄게 - 언젠가 떠날 너에게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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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에게 가장 부러웠던 것은 ‘밑줄 긋기’였다. 나는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이야기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 남는데, 그녀에게는 더불어 ‘문장’도 남는 것 같았다. 그 문장들은 아귀 맞는 퍼즐 조각을 찾아낸 듯 그녀의 이야기 안에 부드럽게 들어앉아 낯설게 빛난다. 나의 모든 이야기에 내가 읽은 문장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으려면 책과 얼마나 밀착되어야 하는 것일까? 사실 내 삶에도, 내가 읽는 책에도 잠깐 긴장을 늦추면 구경꾼으로 물러서 있는 나로서는 정혜윤의 재능이 부럽기만 하다. 어느 날은 문장을 건져 올리는 연습을 하기도 한다. 마치 낚시꾼처럼. 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리면 나는 어느새 문장들의 집합체인 이야기에 다시 몰두해 있다.

『런던을 속삭여줄게』를 읽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여행’에 대한 설렘, ‘런던’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그녀가 낚아 올린 그 문장들을 훔쳐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니까 여전히 나는 그녀에게서 여행기가 아니라 독서기쯤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런던 여행을 뒷전에 밀쳐두었기 때문일까. 그녀가 다녀왔다는 웨스트민스터사원, 세인트 폴 대성당, 대영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트라팔가르 광장,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런던탑, 그리니치 천문대는 저만치 물러나고, 시간의 경계를 그토록 쉽게 뛰어넘는 그녀의 이야기들만 또렷해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읽은 책의 문장들, 그녀의 독서 이력, 그 폭넓은 스펙트럼.

어느 곳에 머물든 자신이 읽어온 무수한 문장들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시샘은 정말 그곳에서 그 많은 책 속의 이야기들을 모두 토씨 하나 어긋남 없이 자연스럽게 기억해 냈을까에 대한 의구심으로 줄달음한다. 정말로 여행을 다녀온 후 책들에 둘러싸여 여행의 기억을 재구성한 게 아니라면 정혜윤은 놀라운 독서가다. 그리고 이 책은 또 하나의 매혹적인 독서기다.

예상치 못한 시공간을 넘나드는 그녀의 이야기와 인상,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연상 들을 따라가기는 조금 버겁다. 조금만 정신을 팔아도 그녀가 풀어놓은 문장들 속에 갇혀 오리무중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느긋하게 산책하듯이 그녀가 남겨놓은, 이 시공간의 이야기에서 저 시공간의 이야기로 건너뛰는 링크들을 천천히 따라가면 결국 그녀가 속삭여주려는 런던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이때 꼭 구체적인 런던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런던을 속삭여줄게』가 훌륭한 여행기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여행은 참 행복하겠구나 싶어진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도 꽤 자주 문장 낚는 연습을 할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좀처럼 낚이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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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못 읽는 남자 - 실서증 없는 실독증
하워드 엥겔 지음, 배현 옮김 / 알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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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 중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요긴하게 쓰고도 있는 감각은 ‘시각’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은 하나같이 ‘보는 눈’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책 읽기(혹은 글쓰기), 그림 감상하기, 드라마 보기, 예쁘거나 귀엽거나 아기자기하거나 멋진 영상의 게임 즐기기. 게다가 돈벌이까지 눈과 손(뇌는 물론)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아무것도 없는 암흑이라고 상상하는 것만도 끔찍하기 그지없다. 삶이 곧 악몽이 될 것이다. 지독한 근시이지만, 이렇게라도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마음껏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런데 시각을 잃게 된다면,에 대해 가정하려니 다른 감각들도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오긴 마찬가지다. 음식의 맛을 알지 못하는 삶도, 아름다운 음악과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삶도, 포근한 살결과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을 느끼지 못하는 삶도, 사랑하는 사람의 살내와 꽃향기를 맡지 못하는 삶도 싫다. 오감이 조화롭게 나를 자극할 때 나는 아마 가장 행복했을 것이다. 

어쨌든 하워드 엥겔의 『책, 못 읽는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지독한 독서광에 추리소설 작가인 하워드 엥겔이 어느 날 책을 읽지 못하게 된 것은 시각을 잃게 되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뇌졸중을 앓아 읽기 능력을 관장하는 뇌의 일부가 손상됐기 때문이다. 손상된 뇌는 멀쩡한 눈까지 아무것도 읽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까 시력에는 문제 없이 모든 것을 봐도 익숙한 세계의 친숙한 사물들이 이계(異界)의 낯선 사물들처럼 보였다. 하워드 엥겔에게 가장 비극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독서광으로서 본능처럼 읽었던 글자들이 세르보크로아티아어처럼 낯설게 보여 해독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작가로서 수만 단어들을 썼던 손 감각은 살아남아 여전히 쓸 수는 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리하여 하워드 엥겔은 실서증(失敍症) 없는 실독증(失讀症), ‘알렉시아 사이니 아그라피아(alexia sine agraphia)’ 진단을 받았다. 쓸 수는 있어도 읽을 수는 없는. 내가 직접 쓴 것도 읽을 수 없는. 

읽는다는 행위에는 시각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글자들의 상징 체계를 인식하고 통합할 수 있는 뇌의 해독 능력도 필요하다. 시각을 잃어 아무것도 읽지 못하게 된 것과 뇌의 해독 능력을 상실해 아무것도 읽지 못하게 된 것 중 어느 것이 더 비극적일까. 처음에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보이기는 하는데 책은 읽을 수 없다니 이거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읽기’에 대한 갈증을 쉽게 체념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일단 볼 수만 있다면 다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읽기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는 ‘보는 눈’이니까. 보는 눈이 없이는 ‘다시’도 결코 있을 수 없다. 

『책, 못 읽는 남자』는 실독증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읽기 위해 노력한, 그래서 다시 읽게 된 과정을 지극히 침착하게 서술한 기록이다. 읽을 수 없게 된 하워드 엥겔은 눈 대신 청각(오디오북)이나 손(읽지는 못해도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 써보면 인식할 수 있으니)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눈, 다시 눈으로 읽기 위한 재활 훈련을 선택했다.

   
 

병원에서 깨달은 것은 책 읽기가 아무리 느리고 어려울지라도―지독히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나는 어쩔 도리 없는 독서가라는 것이다. 뇌에 들이닥친 돌풍도 나를 바꿔놓지는 못했다. 나는 열혈 독서광이다. 심장을 멈출 수는 있을지언정 독서를 멈출 수는 없다. 독서는 내게 뼈이자 골수, 림프액이자 피다.

 
   

이미 읽는다는 행위가 주는 기쁨, 희열, 환희 등(이런 유사한 감정의 모든 단어)에 중독됐던 그가 살아 있는데, 눈앞에 암흑이 드리운 것도 아닌데 어찌 실독증에 굴복하여 눈으로 읽기를 포기할까. 나라도 결국은 하워드 엥겔처럼 선택했을 것이다. 눈이 아닌 다른 무엇에 의지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책장을 펼치고 눈을 고정한 채 읽기 시작하는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것들과의 교감, 오로지 나만의 것들을 체념하는 것은 죽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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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의 지혜>를 리뷰해주세요.
당나귀의 지혜 - 혼돈의 세상에서 평온함을 찾기
앤디 메리필드 지음, 정아은 옮김 / 멜론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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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메리필드의 『당나귀의 지혜』에 처음부터 매혹됐던 것은 아니다. 거의 방치하다시피 서랍장 위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있던 이 책에 문득 눈길이 멈춘 것은, 당나귀 그리부예와 함께 길을 나선 앤디 메리필드의 여행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당나귀 모데스틴과 떠난 세벤느 여행 기록인 『당나귀와 떠난 여행』에서 얼만큼 기인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기 때문이다.

스티븐슨의 『당나귀와 떠난 여행』은 그의 애인 패니 오스본을 미국의 남편 곁으로 떠나보낸 후에 밀려드는 상실감을 고스란히 안고서 구교와 신교의 종교 분쟁 중심지였던 프랑스 남부 세벤느 지역을 여행한 기록이다. 이 여행의 믿음직한 동행으로 그는 홀로 세벤느의 자연을 여행하기 위해 꼼꼼히 준비한 행장을 대신 져줄 암탕나귀 모데스틴을 선택한다. 스티븐슨의 여행에서 당나귀는 길벗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여행의 주체인 스티븐슨의 객체였다.

그러나 ‘그리부예’라는 정다운 이름을 붙여준 당나귀와 함께한 메리필드의 여행에서는 당나귀가 줄곧 예찬의 대상이다. 이 여행은 그리부예 없이는 결코 완성되지 못한다. 이 여행길에서 당나귀 그리부예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과 한 쌍을 이루는 동물이 하나씩 있다는” 메리필드의 “동물 자아”로 기꺼이 영혼의 짝꿍이 되어준다. 그 신비로운 침묵과 깊은 눈길로.

메리필드가 진정한 자아를 찾아 푸른 풍경 속을 그리부예와 더없이 순수하게 걷기 전에 그는 뉴욕의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공적인 소음 속에서 아침에 일어나기 바쁘게 인파에 치이며 일터를 향해 종종걸음 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일터에서는 물질적 부를 보장해 주고 타인의 위에 설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쟁탈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으로 하루를 채우고, 그로 인해 쇠잔해진 기력과 신경을 견디지 못하고 녹초가 된 몸을 잠자리에 뉘는 것으로 하루를 끝낸다. 이런 일상의 반복. 나의 내면에서 움트는 완전한 행복을 찾기보다,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의지해 말초적인 기쁨을 이끌어내는 일에 골몰한다.

언제 남에게 빼앗길지 모르는 현대 사회의 불안정한 자리와 그 덕분에 누리는 욕망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내 시선을 끊임없이 외부로 향해야 한다. 그 자리의 내 정체성은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작은 몸짓 하나까지 타인의 우호적인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기민하게 반응한다. 때로는 가식적인 행동으로. 이를 얼마나 잘 견디느냐에 따라 개인의 사회성이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닐까.

『당나귀의 지혜』를 읽을 즈음 내 말들은 허공에서 흩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들었다. 또 저렇게 듣는 타인의 시선에 날카로워지는 내 신경이 못마땅해서 견딜 수 없었다. 말과 말이 조응하지 못한 채 서걱이다가 낱낱이 흩어진 자리에 남는 것은 황망한 눈빛, 엇갈리는 마음, 갑자기 낯설어진 사람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이는 어떻게 들을까, 를 의식하기 시작하자 내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인데도 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럴 때 나는 ‘말을 줄일 것!’이라고 자동 경보를 울린다. 지금은 침묵해야 할 때라고. 이 방법은 대개 주효했지만, 언제 어느 때고 불시에 외로움이 깃든다.

메리필드와 당나귀 그리부예가 침묵과 함께 뚜벅뚜벅 걸어가는 푸른 풍경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침묵에 공명하는 자연의 소리는 예민한 신경에 부드럽게 내려앉고 고요한 평온함을 조금도 해치지 않는다. 내 말을 해석하는 타인의 말이 난무하지 않아도 외로움이 스며들 여지는 없다. 내 말을 신비로운 침묵으로 감싸 무슨 말이든 깊은 눈길로 온전히 이해해 주는 당나귀는 평화를 선사한다. 그렇다, 나도 이곳을 벗어나 당나귀와 푸른 풍경 속을 걸어가고 싶다.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행동을 해도 내 의도와 다르게 전해질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나를 안심시키는 당나귀의 침묵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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