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 고양이 우리 시대 우리 삶 2
황인숙 지음, 이정학 그림 / 이숲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름이란 역시 중요한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사람을 보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슬금슬금 피하는, 바로 얼마 전까지 도둑고양이라고 불리던 녀석들을 보면 말이다. 이 녀석들이 언젠가부터 길고양이라 불리게 되었다. 어떻게 길고양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도둑고양이보다는 훨씬 좋은 이름임에는 틀림없다. 도둑고양이라는 이름이 주는 음침한 느낌도 없고 그저 사는 곳이 길일 뿐인 녀석들이라는 느낌이다. 어떻게 보면 낭만적인 이름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런 이름과는 상관없이 길고양이들의 삶은 만만치 않다. 자동차 밑이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밤이슬을 피하고 쓰레기들 뒤져 먹을 것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그런 음식 찌꺼기들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있는 셈이다. 물은 어떻게 마시나 늘 궁금했는데 비 오는 날 길에 고인 물을 핥는 고양이를 한참 지켜본 기억이 난다.

TV를 보거나 주위를 잠깐만 둘러봐도 알 수 있듯이 개와는 달리 유난히 고양이들이 집을 뛰쳐나온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길개’를 본 적이 많은가? 개를 찾는 광고지는 본 적이 많아도 고양이를 찾는 광고지들은 보기 힘들다. ‘길개’는 없어도 ‘길고양이’들이 많은 이유는 아마도 고양이들의 특징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제라도 훌쩍 떠날 수 있는 것 같은 녀석들, 아마도 그런 집시 같은 성격을 지닌 녀석들이 집을 떠나 길고양이가 되겠지 라고 제멋대로 상상해 본다. 사실은 고양이와 친해지지 못하거나 키우다 귀찮아진 무책임하고 무정한 주인들이 내다 버린 경우가 훨씬 많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버려진 녀석들이 주인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지고 노숙을 택하게 되는 것이겠지. 주인은 이젠 귀찮은 짐을 떼어 버렸다고 좋아할지 모르지만 주인 역시 고양이에게 버려진 것이다.

황인숙 글, 이정학 그림의 『해방촌 고양이』는 고양이 같은 책이다. 잘 접어진 상자 속―책갈피 역시 딱 어울린다―에 고양이처럼 숨어 있는 작은 책으로 1부 [고양이로 산다는 것]에는 고양이들의 이야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해 2부 [더듬더듬 나들이]에는 서울 근교의 소소한 나들이 이야기고 3부 [사노라면]은 요즘 아이들과 작가의 어린 시절 추억에 대한 이야기며 4부 [더듬더듬 책읽기]는 책에 관한 감상과 추억으로 마감하고 있다. 고양이 이야기가 1부에서 끝나버려 너무 짧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화려하지 않아도 작가의 착할 정도로 솔직 담백한 에세이와 펜의 느낌이 강한 눈이 즐거워지는 삽화가 함께 있어 햇볕 좋은 날 고양이처럼 드러누워 갸르릉거리며 읽으면 좋을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는 그녀의 문장들이 생각보다 평범해서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번역한 몇몇 소설들을 사랑하고, 그래서 내게는 신뢰하는 번역가로 먼저 다가온 그녀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나 보다. 게다가 그 이후에 그녀가 (들으면 그리 달갑지 않아 하겠지만) ‘장애인’ 영문학 교수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절로 경외심이 들었다. 세련되고 화려하고 유려한 문장을 뽐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토록 평범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남다른 무엇을 기대한다면 실망스러운 마음이 앞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쉬운 말들로, 젠체하지 않고 써 내려간 문장들에서 이내 단단한 심지와 따뜻한 연민과 꾸밈없이 소박한 진심이 느껴져 왔다. 그게 참 아름다웠다. 그녀의 이야기를 한 편 한 편 읽으면서 문득문득 울컥거렸던 것은 그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 이야기를 하는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집에 욕심껏 책 더미를 여기저기 쌓아두고서도 언제나 성에 차지 않는 책에 대한 내 목마름 때문이다. 내가 읽거나 사거나 한 책들 말고도 아직 내 눈에 띄지 않은 멋진 책들을 생각하면 조급해진다. 다른 사람은 어떤 책을 읽을까도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지만, 내가 몰랐던 ‘흙 속의 진주’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평소보다 한층 빨라진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기 시작하면서도 그런 잿밥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한 권 분량의 저작물에 집중하기보다 장편소설은 물론 시나 에세이 한 편, 작가의 말 한마디에서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책은 ‘문학 에세이’니만큼 그런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이 책이 감동적일 수 있는 것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인간과 삶’으로 귀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는 윌리엄 포크너의 말을 인용했다. 그 말은 곧 문학에 대한 그녀의 신념이리라. 내게는, 문학은 삶을 기반으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 말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와 닿는다. 사실 내 삶의 뭔가를 변화시키고 싶어서 문학(=거의 소설≒책)이라는 것을 읽어온 것은 아니었다. 문학이 인간의 삶과 결코 유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나와는 교집합이 없는 삶이라 생각하고 내 삶에서 그 삶으로 기꺼이 도망쳤다. 내 삶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게 해주는 놀잇감일 뿐이라고 고집스레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의 8할은 지금껏 내가 읽어온 책들임을 부정할 수 없다. 어떤 책을 읽었건 그때마다 책과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조응하면서 생각하고, 고집하고, 변화했을 것이다. 게다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 인류의 마지막 순간까지 천착해야 할 화두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지(※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인간 삶의 진실을 현실보다 더 명징하게 길어 올리는 문학은 그래서 위대하다. 문학은 훈계하지 않고도 어느새 정신에 스며들어 삶의 좌표가 되어준다. 문학의 무용성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다치바나 다카시는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지.

그녀는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이 소설이, 시가, 에세이가, 말이 자신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음을 이야기한다. 그녀가 들려주는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이, 그것들은 언제나 자기 삶을 오롯이 비춰주는 거울이었음을 이야기한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인데도 그 이야기 속에서 나 자신을 찾는 마법 같은 경험을 하면서 그녀가 마지막까지 믿은 “수십억의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고 자리싸움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적 보편성을 찾아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를 가르치는” 문학의 과업을 이제야 진지하게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이킹 우드스탁
엘리엇 타이버.톰 몬테 지음, 성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우드스탁 페스티벌 뒷이야기’와 ‘어느 성적 소수자의 성장기’ 중 무엇으로 엘리엇 타이버의 『테이킹 우드스탁』을 이야기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성장’에 먼저 방점을 찍기로 한다. ‘성장’은 그 자체로 반짝이는 무엇을 품고 있는 데다가 엘리엇 타이버는 분명 고통이었을 기억까지 천연덕스러운 유머로 어루만져 (올해 내가 읽은 성장 기록물 중에서) 가장 낙천적이고 유쾌한 성장기를 만들어냈다.

엘리엇은 “그 옛날 차르 군대한테 쫓겨 호주머니 속 얼음장 같은 감자로 연명하면서 6미터나 되는 눈더미를 헤치고 러시아민스크에서 줄창 걸어” 미국으로 이주한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를 부모로 두었다. 그 부모는 낯선 땅에서 삶의 터전을 새롭게 마련하고 자식들을 어떻게든 먹이고 입히려다 보니 절로 악착같아졌을 터인데, 그리하여 자식들에게 살뜰한 마음 한번 내비칠 새도 없이 돈만 그러모으는 수전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부모라도, 아니 그런 부모여서 엘리엇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부모가 그 전설적인 고생담 레퍼토리를 아무리 늘어놓아도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그리고 설령 그런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도 애정은 늘 고픈지라 사랑 한 자락 받아보겠다고 어른이 된 뒤에도 그 곁을 떠나지 못한 채 맴돌기만 한다.

그런 엘리엇을 족쇄처럼 얽어매는 것은 그가 ‘타이크버그가의 저주’라고 부르는 부모의 모텔 ‘엘 모나코’! 가짜 텔레비전 박스, 가짜 에어컨, 가짜 전화, 체모 몇 가닥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더러운 침대 시트, 그런데도 한 번 체크인 후 환불은 절대 불가인 모텔이다. 그러니 당신인들 그곳에 투숙하고 싶겠는가? 적자는 당연하고 모텔을 늘리느라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과 그 이자는 덤으로 엘리엇이 져야 할 짐이다. 엘리엇은 맨해튼에서 동성애자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벌어들인 수입을 전부 이성애자 모텔 사업가로 변신해 ‘엘 모나코’에 쏟아붓는다.

엘리엇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이중생활 사이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과 자아를 찾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우드스탁 페스티벌이다. 그 엉망진창 모텔에 우드스탁 본부를 두고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무사히 열리기까지의 그 모든 가슴 뛰는 이야기가 흥분과 열광과 희열과 긍지 속에서 요동친다. 자유와 평화와 음악을 사랑하는 히피들이 끝없이 모여드는 자리는 ‘너’와 ‘나’를 구분하는 성적 취향, 인종, 외모, 그 모든 차이를 초월하고 ‘사랑’ 하나만을 남긴다. 엘리엇의 지독한 애정 결핍도, 동성애자이면서도 소수자를 압도하는 다수자의 불합리한 편견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동성애 혐오증에 시달려야 했던 성적 취향도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엘리엇은 성장의 통로가 되어준 그 아름다운 축제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양성애든 사랑을 느끼는 대상의 성별이 다를 뿐 어느 ‘사랑’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또 자꾸 말하는 자체가 다수자의 오만한 시선(혹은 섣부른 동정)을 하고 동성애를 별종으로 바라보는 것이 될까 봐 개인적인 사생활에 속하는 성적 취향에 관해서는 되도록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엘리엇이 그에 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엇의 청년 시절에 동성애자라는 것은 백인일지라도 흑인보다 더 멸시받는 자리로 떨어진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경찰의 보호는커녕 동성애자라고 의심받는 순간 기본 권리도 박탈당했다고. 그리하여 ‘섹스’는 단지 동성애자의 성적 취향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들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치켜 올리는 가운뎃손가락”이고 “혁명적인 행위”였다. 엘리엇은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따뜻한 관심과 애정, 스킨십이 그리워서 그게 동성애라는 것인 줄 모른 채 가학적인 동성애에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극장에서 당한 추행조차 차가운 무심함보다는 아프지 않았다고.

세상의 어느 부모가 제 자식을 마음 깊이 사랑하지 않겠냐만, 어쨌든 ‘엄마가 일러바치는 소리’와 ‘아빠가 허리띠 푸는 소리’ 속에서 방치됐던 유년 시절을 지나면서도 엘리엇은 참 착하게 성장해 주었고, 운도 좋았다! 현대화가 마크 로스코와의 우정,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와의 하룻밤 스캔들, 트루먼 카포티와 테네시 윌리엄스와의 인연은 두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굉장했다. 이 책에는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이런 사람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그것도 이 책에 대한 흥미를 돋우었다.

이 책은 2007년 작품인데, 엘리엇이 1935년생임을 감안하면 일흔둘 할아버지의 회고록인 셈이다. 그런데도 청춘의 발랄한 감성은 올올이 배어 있고 페이소스 짙은 유머를 구사한다. 이런 멋진 글을 읽은 감상이 이토록 지루하게 늘어져서 정말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좀더 보태자면, 음악 축제를 넘어서 자유와 평화와 권리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영혼들의 나라 ‘우드스탁 네이션’을 상징하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가장 깊숙한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엘리엇의 회고록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개최하여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마이클 랭, 아티 콘펠드, 존 로버츠, 조엘 로젠먼 뒤에서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우드스탁의 또 다른 이야기들을 엘리엇이 스케치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고 스페인의 수호성인이기도 한 야고보(스페인식으로 하면 ‘산티아고’라고 한다)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의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너무나 유명한 순례길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자임을 알려주는 조개껍데기를 배낭에 매달고 지팡이를 짚으며 걸었던 그 길에 2008년 당시 예순여섯 초로의 소설가 서영은이 섰다. 그리고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는 개신교인인 그녀가 그 길을 걷고, 또 걸은 뒤 자신이 무엇을 체험하고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그 고백은 담담한 문체 안에서도 사무치게 절절하도록 울린다.

그런데 독실한 종교인이 아니라면 그게 사뭇 낯설어 그녀의 성스러운(이렇게 말할 도리밖에 없다. 그녀 자신의 마음가짐이 내내 그러했다고 무수히 암시하므로!) 순례길을 따라가는 일이 마음 한구석에서는 적이 불편해진다. 종교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 본위의 해석에 따른 체험이기에 다른 누가 깊이 공감하기도, 뭐라 섣불리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 잘못 집어 든 책에 대한 이 난감함을 어쩔까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와중에, 그녀가 ‘치타’라 지칭하는 동행에게 보이는 감정과 태도는 더욱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뿐인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릴 만큼 어찌나 치타를 대하기가 민망하던지.

산티아고로 함께 가는 내내 (서영은의 글대로라면) 두 사람은 마치 같은 길이 아니라 생판 다른 길을 걷는 듯 삐걱거린다. 하나의 길이라도 걷는 마음과 목적과 기원에 따라 만 갈래 길인 법이라서 같은 길을 걸어도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이지만, 그 길이 어느 길이라도 다른 무수한 길들보다 우월하거나 저열할 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내심 모든 세속적인 것을 내려놓고 신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자신의 길이, 여전히 박물관이나 미술관, 유명 건축물 등에 관심 있는 치타의 길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순전히 그녀의 일방적인 말만 들으면, 치타의 세속적인 행동은 그녀를 성가시게 하여 종교적인 명상, 혹은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을 방해한다. 그러면서도 치타는 눈치코치 없어 그녀가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려 할 때 자신이 그 길을 주도하지 못해 삐친다. 베트남에서 욕심껏 산 망고를 프랑스에서 먹으려고 무딘 칼로 깎으면서 망고 즙으로 범벅을 하는 치타가 창피하고, 알베르게에서 다들 커피 한 잔에 잼을 바른 토스트로 아침식사를 할 때 치타가 불을 차지하고 이것저것 요리를 하는 것도 마땅치 못하다. 치타에 대한 그녀의 불만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그럼에도 왜 편치 않은 마음으로 끝까지 동행했는가? 더더구나 이렇게 속속들이 공개적으로 고백할 요량이었다면 말이다. 치타는 손위 제자라고 소개되는데, 그렇다면 그녀는 일흔에 가까운 노인이다. 그런 그녀가 서영은을 위해(순전히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기꺼이 산티아고를 향해 걷기로 했다면, 그녀는 진작 치타에게 자기 마음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하지 않았을까? 혹시 이 책을 읽고 치타가 상처를 입을까 봐, 모욕감을 느낄까 봐 두렵다. 치타가 주인공이 아닌 책을 읽고서 줄곧 치타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 그건 이 책을 읽는 내내 치타에게 마음이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서영은의 신앙고백에는 깊이 교감하지 못했지만, ‘노란 화살표’ 이야기는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노란 화살표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 곳곳에 숨겨져 있다. 노랗게 빛나는 그 흔적들은 이전에 산티아고로 걸어갔던 모든 순례자들이 자신을 뒤따라 그 길에 설 다음의 모든 순례자들을 위해 산티아고 방향을 남겨둔 것이다. 담벼락, 나무, 돌멩이, 울타리, 팻말, 그들이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것이라면 어디든. ‘산티아고’라는 목적지를 품은 순례자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반갑게 튀어나오는 노란 화살표가 더 이상 숨겨진 표식이 아니다. 그들의 눈에는 유독 환하게 들어오는 이정표다. 또한 산티아고를 가리키는 그 화살표들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면 더 이상 길의 방향만 알려주는 단순한 표시가 아니다. 마음속의 노란 화살표들은 자신이 가닿고 싶은 삶의 방향을 향해 죽 늘어서서 다른 삿된 곳에 눈길을 빼앗기지 않도록 반짝인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삶의 목적이자 의미인 그 반짝임은 꼭 지켜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ife 라이프 - 카모메 식당, 그들의 따뜻한 식탁 Life 라이프 1
이이지마 나미 지음, 오오에 히로유키 사진 / 시드페이퍼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이이지마 나미가 영화 「카모메 식당」(원작 무레 요우코의 소설 「카모메 식당」)과 일본 드라마 「심야 식당」(원작 아베 야로의 만화 「심야 식당」)의 푸드 스타일리스트라는 데 마음이 사정없이 끌려서 나답지 않게 요리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실용서는 거의 사지 않고(사지 않는다는 말은 곧 읽지 않는다는 말! 아, 손뜨개 책은 몇 권 사서 봤구나!), 더더구나 먹는 일이라면 모를까, 요리 자체에는 도통 취미도, 소질도 없는 터라 요리책을 들춰 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래서 정겹고 따뜻한 이이지마 나미의 음식에 반해서 『라이프』를 펼쳐 들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참 난감했다. 도대체 그야말로 요리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책은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빠짐없이 읽어야 한다는 관성에 사로잡혀 있는 나에게 이보다 더한 난제는 없다.

나는 처음에는, 집 안에 있는 책들 중 두 번 읽지 않은 책은 카탈로그뿐이라 카탈로그까지 꼼꼼히 읽었다고 말한 앤 패디먼(‘카탈로그 독서’, 『서재 결혼시키기』)의 강박증으로 ‘이 책에 나오는 조미료에 대하여’와 이토이 시게사토의 ‘첫머리에, 잠깐’부터 한 글자라도 빠뜨릴 새라 꼼꼼하게 읽어 나갔다. 그러다가 다니엘 페낙(‘무엇을 어떻게 읽든…’, 『소설처럼』)을 따라 “건너뛰며 읽을 권리”와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다시 읽을 권리”,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를 마음껏 누렸다. 소담한 음식 사진들이 눈이 아니라 입으로 먼저 넘어갈 것 같은데 글자의 순서 따위를 지킬 겨를이 없었다. 일단 『라이프』에 담긴 요리들을 주욱 구경하고, 특히 맛있어 보여서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가는 음식들을 다시 구경하고 레시피를 여러 번 낭독했다.

왠지 요리책이니까 그 레시피대로 직접 만들어봐야겠다는 오기가 불끈 솟기는 했지만, 음식은 좋아해도 요리는 좀처럼 즐기지 않으니 그에게 부탁해야겠다. 이이지마 나미의 요리들 중에서 가장 먹고 싶은 것은 오하기! 『라이프』 속의 음식들은 모두 평범한 일본 가정에서 매일 먹는 것들을 이이지마 나미식으로 요리한 것이라고 하는데, ‘가정식’이라는 소박한 말에 담긴 어감은 나라를 초월하여 엄마의 손맛을 떠올리게 할 만큼 따스하고 친밀하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에서 느껴지는 이국적인 매혹이나 거부감과는 별개로 말이다. “할머니의”라는 관형격이 붙은 ‘오하기’도 그렇다. 오하기는 낯선 음식이지만, 찹쌀과 쌀을 섞어 지은 밥으로 조물조물 경단을 만들고 또 조물조물 팥고물로 정성스레 에워싸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끝을 상상하면 낯설었던 경계심은 어느새 사라져 그리워진다.

『라이프』는 분명 이이지마 나미의 레시피만으로도 충분한 요리책이다! 요리마다 그 음식을 먹을 최선의 상황을 정답게 묘사하고 있고, 일본 작가들의 짧은 에세이 4편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에세이들은 요리의 풍미를 더해 주는 향신료 역할을 한다. 단골이던 인도 카레집의 주인들이 우연치 않게 연이어 죽었다는 요시모토 바나나를 제외하고는 그리 친숙하지 않은 작가들이다. 그런 줄 알았는데, 핫케이크에 대한 집착을 재미있게 이야기한(핫케이크는 팬케이크와 다르다고, 이상적인 핫케이크를 줘!) 다니카와 슌타로는 『이십 억 광년의 고독』을 썼다. 이토이 시게사토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소울 메이트』를 공저했는데, 내가 반한 오하기에 관한 에세이(밥이든 간식이든 상관없다!)를 썼다. 양배추롤에 대한 추억을 잔잔하게 풀어놓은 시게마츠 기요시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꽤 많은 청소년 소설들이 번역되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