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여행책 - 휴가없이 떠나는 어느 완벽한 세계일주에 관하여
박준 지음 / 엘도라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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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를 꿈꾼다. 하지만 떠나기는 쉽지 않다. 처음에 마음먹기가 힘들 뿐 한번만 떠나 보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는 어느 여행기라도 등장할 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잠깐이라도 해 봤다면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현실성 없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더 어린 학생들이라고 다를까?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을 쓰지 않아야 그나마 여행을 떠나는 것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정말 그 마음먹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젊었을 땐 돈이 없었고 돈이 생기니 시간이 없더라’는 말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4박 5일 패키지로 여행을 떠나 유명 장소만 들러 사진만 찍고 허겁지겁 돌아오게 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 보면 즐거울 때가 있다. 책 속에서 다른 책의 이야기나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그렇다. 책 속의 등장인물이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장면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기억해 두었다가 언급한 그 책을 찾아 읽게 되고 음악을 듣게 된다. 영화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 속에서 언급된 영화를 직접 보거나 책의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고 싶은 사람 역시 많을 것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라는 문장을 읽고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을까. 대학 시절 심상대의 『묵호를 아는가』를 읽고 무작정 그곳을 찾아갔던 기억이 있어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박준의 『책여행책』에서는 이처럼 책 속을 따라 여행한다. 미국의 프로빈스타운을 시작으로 책을 통해 세계를 여행한다. 개인적으로는 에릭 파이의 『야간열차』 편에서 소개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거의 일주일간의 열차 여행 이야기가 흥미롭다. 다만 자신의 책 『온 더 로드』의 카오산 로드를 다시 언급하며 그곳에 가보고 실망했다는 독자 이야기를 꺼내며 억울하다는 투로 이야기한 것은 아쉽다. 자신의 지난 대한 이야기를 꼭 이 책에서 해야만 했을까?

작가의 말은 위험하다. 『온 더 로드』에서 박준은 자신을 위해 몇 달의 시간을 내라고 독자를 유혹했지만 현실의 퍽퍽함을 인정한 것일까? 『책여행책』에서는 한 발 뒤로 물러나 세상은 한 권의 책이고 세상은 책으로 통하니 꼭 떠나지 않고 ‘책여행’을 떠나도 세계를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찌 세상뿐일까. ‘책여행’을 통해서라면 히치하이킹을 통해 은하수를 여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책여행’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지만 저자는 다음 여행기에서 또 어떤 말로 사람들을 유혹할까 궁금해진다. 사람들은 여전히 여행기를 읽으며 꿈을 꾼다. 나 역시 언젠가 떠날 수 있음을 꿈꾸며 여행기를 읽는다. ‘책여행’은 꿈을 꾸는 다른 방법일 뿐, 진지하게 떠나는 여행이 쉽지 않음을 알기에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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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독서계획
클리프턴 패디먼.존 S. 메이저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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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독서’라고 하면 이렇게 일갈하는 사람들이 있다.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생활입니다.’ 그런데 과연 독서가 생활이 될 수 있나? 출퇴근 시간 빽빽한 대중교통 안에서 영어 교재나 업무에 관한 책을 보는 것을 설마 취미라 할 수는 없을 터이니 도무지 독서의 어디가 생활과 연결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독서가 이렇게 생활로 권장된 이유는 항상 되뇌어지는 ‘마음의 양식’처럼 책이 가진 좋은 의미가 주입된 덕분이다. 등산이 취미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독서가 취미라면 별종 보듯 바라보는 것이나, 갈수록 독서량이 떨어진다고 온갖 언론에서 한탄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떻게 독서가 취미가 될 수 있지? 하지만 독서는 좋은 취미다. 여유로운 시간에 차 한 잔 옆에 두고 읽고 싶은 책을 골라 드는 것이 좋은 취미가 아니라면 대체 어느 것이 좋은 취미일까?

클리프턴 패디먼, 존 S. 메이저의 『평생독서계획』은 이렇게 독서를 평생의 취미로 가진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고전은 어렵다.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해 내는 방식이 현재에 익숙하지 않은 까닭이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처럼 수많은 고전을 설명하는 고전에 대한 책은 찾기 쉽지 않다. 이 책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나 공자의 『논어』 같은 동서양의 영원한 고전부터 프로이트와 보르헤스 같은 작품들은 물론 저자가 ‘잠정적 고전’으로 정의한 20세기의 중요한 작가들 100명을 “더 읽어야 할 작가들”이라는 부록으로 소개하고 있다. 500여 페이지의 책에 수많은 작가들을 소개하려다 보니 각각의 작품들의 소개는 짧은 편이다. 게다가 각 작가에 대한 이야기-재미가 없거나 노인처럼 말을 반복한다는 등 작가에 대한 소개가 꽤나 솔직한 편이어서 이것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물론 작품들의 이야기를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각 작품들의 소개는 더욱 짧은 편이다. 그리고 이 책은 동서양의 고전을 함께 소개하고 있지만 동양의 고전은 매우 부족하다. 증보판을 거치면서 동양의 고전을 추가하고 있지만 중국과 일본의 작품-서양의 시각으로 보면 어쩔 수 없겠지만-이어서 동양의 고전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울 수 있다.

『평생독서계획』에서 소개된 133인의 작가와 장점적인 고전 100선을 읽는 것만으로도 고전과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고전은 읽기 어렵고 “고전을 다시 읽게 되면 당신은 그 책 속에서 전보다 더 많은 내용을 발견하지는 않”지만 “단지 전보다 더 많이 당신 자신을 발견한다”는 말처럼 고전 읽기는 어렵지만 즐겁고 평생 가는 즐거운 취미가 될 것이다. 책의 뒷부분에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번역된 작품을 소개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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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와 코기
타샤 튜더 지음, 김용지 옮김 / 아인스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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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몬트 주 30만 평의 대지를 꽃과 나무와 동물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지상낙원으로 가꾼 타샤 튜더의 삶은 내 오랜 동경의 대상이다. 그녀는 자연 자체를 존중하면서도 그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 없이 부지런히 몸을 놀려 자신만의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냈다. 계절마다 온갖 꽃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갖가지 과일나무들이 열매를 맺고 야채와 채소들이 커가는 그 정원에는 타샤가 키우는 염소와 닭과 거위와 공작비둘기와 앵무새와 고양이, 그리고 야생에서 자라는 야생 비둘기, 도요새, 종달새, 개똥지빠귀, 울새, 청개구리, 뱀, 생쥐가 어울려 살아간다.

또 그 풍경에 늘 등장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타샤가 그토록 사랑했다는 코기다. 코기는 타샤가 어디에 있든 그녀의 곁을 지킨다. 『타샤와 코기』는 타샤의 이야기들 중에서 “아폴로 신도 맥을 못 출(※『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거라는 코기에 관한 에피소드와, 타샤가 코기들을 기르면서 직접 찍고 그린 사진과 그림, 타샤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얼굴을 들이미는 코기를 찍은 리처드 브라운의 사진을 모아놓은 아름다운 책이다. 코기는 자그맣고 둥그스름한 몸집에 다리가 짧고 꼬리가 없는 견종인데, 영국 왕실에서도 사랑받아 엘리자베스 여왕도 길렀던 개로 유명하다.

타샤는 비아트릭스 포터를 아주 좋아해서 포터의 고향인 잉글랜드 윈더미어에 꼭 한번 찾아가고 싶어 했다. 1957년, 그녀의 나이 마흔두 살 때 타샤는 그 꿈의 여행길에 서식스에서 처음 코기를 만났다. 그 첫 코기가 ‘미스터 B’였고, 미스터 B에게 여자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미세스’를 데려왔다. 그 사이에 강아지들이 태어났고, 그 강아지들이 자라서 또 가족을 이루고 강아지들을 나았다. 또 타샤는 ‘오윈’과 ‘레베카’라는 코기 부부도 길렀다. 오윈은 아무래도 “엘리자베스 여왕의 코기와 같은 아비에게서 태어났다(※『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고 자랑한 그 오윈이 분명하다. 그 사이에도 강아지들이 태어났고, 그 강아지들이 자라서 또 가족을 이루고 강아지들을 나았다. 타샤와 함께 마지막으로 생활한 코기는 미스터 B를 빼닮은 ‘메기’였다. 타샤는 그런 메기를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는 듯해도 돌아보면 항상 곁에 있는 최고의 반려자”라고 말했다.

이 책에는 코기에 대한 타샤의 애정과 타샤에 대한 코기의 신뢰가 곳곳에 스며 있다. 동물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감해 본 사람들만이 귀중하게 기억하는 추억들을, 타샤는 자신이 길렀던 코기마다 흑백사진과 스케치로 보여주면서 짧게 이야기해 준다. 사실 남들에게는 시큰둥하고 별로 대단할 것이 없지만 나에게만은 너무나 특별해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지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타샤는 그 이야기들을 코기들의 평화로운 마을을 그린 그림책 『코기빌』 시리즈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했던 진저브레드로, 그리고 봉제인형과 마리오네트와 인형의 집 코기 인형으로도 되살렸다. 그 마음이 얼마나 예쁜지, 타샤의 마지막을 지켰던 메기가 지금도 건강하고 씩씩하게 열 살을 살아내고 있다는 세스 튜더(타샤의 딸)의 이야기에 눈물이 다 났다. 『타샤와 코기』는 “코기가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 없는” 타샤의 따사로운 추억 앨범이다. 아무래도 타샤가 없는 지금, 타샤와 코기와 함께 있을 코기빌에는 꼭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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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독서처방 - 매혹적인 독서가 마녀의 아주 특별한 冊 처방전
김이경 지음 / 서해문집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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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이야기를 하는 수많은 책들 중에서 『마녀의 독서처방』이 유독 돋보이는 것은 ‘마녀’와 ‘처방’ 때문이다. 어슷비슷한 책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이 두 단어로 인해 『마녀의 독서처방』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먼저, 김이경은 왜 책 이야기를 하면서 ‘마녀’를 자처할까? 그녀는 “마녀로 살겠다는 것은 남의 눈이 아니라 내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내 생각대로 판단하고,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겠다는 다짐”이라고, 자신이 읽은 책들을 본격적으로 풀어놓기 전에 미리 말한다. 마녀의 기원은 원시 샤머니즘의 샤먼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그리 태곳적부터 더듬지 않아도 ‘마녀사냥’이라는 말은 요즘도 곧잘 들을 수 있다. 이 말은 중세 유럽의 마녀재판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했던 기독교적 질서와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 방해되는 것들을 멸절시키거나, 교황을 위시한 귀족들의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다지기 위해 수많은 ‘마녀’들을 처형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순응하지 않고 남다른 생각(곧 사상)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그리하여 하늘에서 내려와 땅과 인간의 새 시대를 열었던 사람들, 그들이 모두 ‘마녀’였다. 그러니 마녀이길 꿈꾸는 김이경은 얼마나 당차고 옹골지고 용감한가.

의사가 환자에게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을 처방하듯 김이경은 책도 약처럼 ‘처방’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로지 그 책이었기 때문에 그때 위로받았다는 생각을, 사실 나는 별로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들로 성가셔진 현실에서 벗어나 책 속으로 도피하고 싶을 때는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코를 박았다. 꼭 특정 책이 아니어도 잠깐 현실을 놓아버리는 마법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면 우연히 골라 든 책이 유난히 가슴 뭉클하게, 눈물 나게 할 때가 있다. 그건 책과 마음의 주파수가 딱 들어맞아 증폭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데 그 말들이 서로에게 가닿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질 때가 있다. 말과 말이 조응하지 못한 채 서걱이다가 낱낱이 흩어진 자리에 남는 것은 황망한 눈빛, 엇갈리는 마음, 갑자기 낯설어진 사람뿐일 때. 그때도 꼭 그랬다. 때마침 앤디 메리필드의 『당나귀의 지혜』를 읽었다. 웃으면서 울게 됐다. 그리고 앤디 메리필드에게 위안이 되어주었던 당나귀 그리부예의 침묵이 나에게도 평화롭게 내려앉아 내 마음을 어루만졌다. 자가 진단 후 ‘처방’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 내 상처를 아물게 해줄 유일한 처방이었다고 생각한다.

『마녀의 독서처방』에서 마녀이길 꿈꾸는 김이경은 “이렇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어서” 책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책을 처방한다. 처음이라는 설렘과 두려움 사이를 종종거릴 때, 성공하고 싶어질 때, 은근히 잘난 척하고 싶을 때, 공짜 여행을 하고 싶을 때, 가슴 뛰는 인생을 살고 싶을 때, 온통 나쁜 뉴스에 울화가 치밀 때, 나만의 방을 갖고 싶을 때, 못생긴 내 얼굴을 탓하게 될 때, 바람을 피우고 싶을 때, 권태기와 찾아왔을 때, 마음이 지치고 숨이 막힐 만큼 인생이 흔들릴 때, 사랑을 잃었을 때, 세상의 모든 걱정을 혼자 떠안고 있는 것 같을 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이해가 오해를 부를 때, 세상에 딴지를 걸고 싶을 때, 회사에서 사표를 던지고 싶을 때, 뒷담화를 하고 싶을 때, 사람이 싫어질 때, 가출하고 싶을 때, 고배를 마셨을 때, 앞날이 캄캄할 때, 거울 속 내 얼굴 주름이 유난히 눈에 띌 때, 춘곤증에 몸을 가누기 힘들 때, 열대야에 잠을 설칠 때, 다이어트를 하고 싶을 때, 법을 확 뜯어고치고 싶을 때, 말싸움에서 이기고 싶을 때, 역사 교과서가 마음에 안 들 때, 책을 읽기 싫을 때, 거짓말이 듣고 싶을 때, 울음이 터질 때, 분노의 하이킥을 날리고 싶을 때, 슬픔이 목까지 차오를 때, 나를 알아주지 않는 남들이 원망스러울 때, 위로의 말이 오히려 상처가 될 때,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나이가 무서울 때, 마음에 빗장을 지르고 싶을 때…….

젊은 여성 독서가로 유명한 정혜윤과 비교하자면, 정혜윤은 모호한 어휘들을 감각적으로 엮어 알듯 말듯한 의미의 화려한 문장을 구사한다. 게다가 그녀 특유의 감성이 짙게 배어 있어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반면 김이경은 정혜윤에 비해 쉽고 명확한 단어들로 소박한 문장을 구사하지만, 책을 읽어내는 깊이는 모자라지 않고 책의 행간에서 짚어내는 위로는 월등하다. 그녀는 마치 아픈 환자에게 병에 대해, 그리고 치료법에 대해 조근조근 설명하는 젊은 아가씨 의사 같다. 갓 의사가 되어 첫 환자를 만난, 그래서 사명감과 열정이 넘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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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신야, 여행의 순간들
후지와라 신야 글 사진,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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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관심이 많거나 여행기를 많이 접해본 독자라면 이야기와 사진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이다. 유명장소를 찍은 사진 몇 컷에 에피소드 몇 개를 소개하고 끝내버리는 관광책자같은 부실한 여행기들을 읽다 분통이 터진 독자라면 후지와라 신야라는 이름이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의 여행기는 현지의 삶을 몸으로 느끼며 진지하게 사진과 글로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필름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기를 읽어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후지와라 신야, 여행의 순간들』이 기존의 여행기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직접 접해본 『인도 방랑』, 『티베트 방랑』, 『황천의 개』와 같은 여행기들이 무겁고 진중한 주제의식과 여행지에서의 삶과 죽음을 관조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을 통해 풀어내려 했다면 이 책은 저자가 말한 대로 ‘여행의 원석을 독자들 앞에 그대로 내던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여행기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작가의 솔직한 감정과 자신의 원초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내놓고 있다. 후지와라 신야는 단순한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피해왔지만 『여행의 순간들』에서는 오히려 그런 이야기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의 젊은 날의 치기와 무모함,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여행자를 기준으로 여행 본연의 원초적인 느낌을 살린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어 어찌 보면 이제야 여행기 같은 느낌이 더 든다고 해야 할 듯싶다.

『여행의 순간들』이 이처럼 달라진 이유로는 잡지에 연재가 되었던 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GEO’와 ‘PLAYBOY’에 연재되었던 이 여행기들은 작가가 연재를 시작하며 “짧은 문장으로 여행을 묘사할 것, 사실에 입각해서 최대한 단순하고 즉물적인 에피소드로 꾸밀 것”이라는 콘셉트를 정해 놓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 덕분에 기존 후지와라 신야의 이야기들과는 전혀 새로운 느낌의 글들로 채워지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여행기는 낯설지 않다. 평생을 방랑해 온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기라고 하면 놀랍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잡지를 통한 콘셉트 때문이라고 했지만 후지와라 신야 자신도 역시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여행은 떠나지 않았을 때는 환상이고 즐거움이지만 직접 발을 디디게 되면 현실이 된다. 어느덧 노년이 된 오랜 방랑자의 자취를 따라 그의 독특한 느낌의 사진과 솔직한 여행기를 읽다 보면 단순한 경험에서도 삶의 본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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