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뻐꾸기는 잘 아시다시피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이런 행동을 '탁란'이라고 하며, 대체로 알 크기와 모양이 비슷한 둥지에 낳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지요. 뻐꾸기 알은 의붓어미의 알보다 먼저 깨어나는데, 깨어나서는 본능적으로 의붓어미의 알들을 등에 업어 둥지 밖으로 밀어냅니다. 또 알들을 다 내몰지 못하고 둥지에서 함께 자란다 하더라도 다른 새끼들보다 목을 더 길게 뽑고 입을 크게 벌려 제일 큰소리로 울어댑니다. 그런 식으로 먹이를 독차지해 다른 새끼들을 제치고 결국 자신만 살아남지요.

 

2.

아직은 대부분의 동물이 다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아마 두뇌가 꽤 발달한 동물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생각한다'는 기준을 인간에 맞추다 보니 다른 동물들이 사고를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지, 그들 나름의 사고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략)..

여담이지만, 우리나라의 교육이 붕괴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교육은 가르치는 쪽이 주도권을 쥐어야만 교육이 됩니다. 이 세상에 나와서 우리가 행동할 수 있게끔 만들어가는 것이 교육이기에 대부분 일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너무 아이들이 배우고자 하는 것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미 새가 새끼 새가 싫어한다고 나는 법을 가르치는 걸 포기하나요?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3.

딱정벌레는 성충이 되었을 때에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이런 행동을 합니다. 일개미는 집 밖에서 반날개의 애벌레를 발견하면 자기 집으로 물고 갑니다. 마치 '너 왜 여기 나와 있니?' 하며 걱정하는 듯이 말입니다. 딱정벌레 애벌레는 개미 애벌레가 아양 떠는 모습을 그대로 흉내냅니다...(중략)..일개미는 딱정벌레 애벌레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자기들의 '아가방'에 집어넣습니다. 아기들을 기르는 방에 넣어놓으면 이 애벌레는 개미들의 아기를 먹고 삽니다...(중략)..개미는 왜 이렇게 손해만 보며 살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너무 야박하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개미 사회는 어느 정도 손해를 봐도 괜찮을 만큼의 여유를 갖춘 사회라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개미집을 파보면 딱정벌레 애벌레, 귀뚜라미 등 별의별 것들이 다 들어와 삽니다. 개미는 그만큼 성공한 동물입니다. 개미집에 들어와 사는 곤충들의 목록만으로도 두꺼운 책 한 권이 될 정도입니다.

 

4.

이들 중에 특별히 기막힌 노린재가 하나 있어 소개합니다. 자객벌레라고 부르는 노린재인데 종종 흰개미를 잡아먹고 삽니다. 이놈은 흰개미 굴에서 나온 흙덩이들을 먼저 온몸에 붙입니다. 흰개미 굴에서 나온 것이니 냄새도 비슷하지요. 이렇게 흙덩이 같은 모습으로 걸어가다가 들킬 것 같으면 납작하게 엎드리고 또 걸어가는 식으로 흰개미 굴 입구까지 접근한 다음, 지나가는 흰개미 한 마리를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몽땅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흰개미 몸에 구멍을 내서 체액만 빨아먹고 시체를 입에 물고 굴 앞에 가서 흔듭니다. 그럼 그 시체 냄새가 굴 안에 진동하게 되고, 동료가 죽은 것을 안 흰개미들이 우르르 몰려나옵니다. 그럼 그때 더 많이 잡아서 먹는 거죠.

 

5.

1970년대 말 미국의 어느 여류 생태학자가 생물학자들의 연구 주제들에 대한 통계를 내보았습니다. 재미있게도 남성 생물학자들은 거의 절대 다수가 동물이나 식물의 경쟁 관계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있었고, 서로 돕는 관계 즉 공생에 대한 연구를 하는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정말 흥미롭게도 공생 연구의 거의 대부분은 여성 생물학자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6.

곤충이나 우리 인간의 몸은 사실 튜브 형태의 몸입니다. 안팎이 서로 연결되어 있죠. 식도에서 위, 작은 창자에서 항문을 통해 몸 밖으로 나가는 장 속은 사실 몸 바깥입니다. 몸 안이 아니죠.

 

7.

우리 풍습에 결혼한 사람들한테 금실이 좋으라고 선물하는 원앙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새가 아닙니다. 원앙 수컷은 아내랑 함께 다니다가 다른 암컷을 보면 그냥 아무 때나 아내가 보는 앞에서 겁탈합니다. 원앙 사회에서는 수컷이 자기 아내는 지키면서 남의 아내는 겁탈을 하려고 합니다.

 

8.

마지막으로 자식을 보호하기는 하되 너무나 끔찍한 부모를 하나 소개합니다. 기생말벌은 굴을 만들고 곤충이나 거미를 잡아서 그 안에 넣은 다음 그 몸에 알을 낳습니다. 그런데 먹이가 될 곤충이나 거미를 완전히 죽이지 않고 독침을 쏴서 신경만 마비시킵니다. 그러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몸을 못 움직이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말벌 새끼들은 살아 있는 싱싱한 생고기를 먹고 자라게 됩니다. 자식한테 아주 신선한 고기를 먹이기 위해서 남을 생매장시켜 놓은 것입니다. 당하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9.

이렇게 해서 충분한 숫자의 일개미들을 키워내면, 어느 날 일개미들이 현관문을 뚫고 바깥 세상으로 나갑니다. 이들은 제일 먼저 식물이 분비해주는 음식물인 뮬러체들을 끌어들입니다. 불과 2~3일이면 나무에 있는 거의 모든 뮬러체들을 수거합니다. 그러니 2~3일만 늦게 굴 문을 뚫고 나오는 군락도 굶어 죽는 겁니다. 남의 집보다 하루라도 먼저 나가서 음식물을 모두 거두어들이는 게 바로 이들의 경쟁 목표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 말고 당장 먹을 것보다 더 많은 식량을 비축하는 동물이 바로 개미와 벌입니다. 이렇게 쌓아놓으니 늦게 나온 다른 집은 먹을 게 없어서 다 죽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나무 전체를 장악하게 되죠.

그런데 이때부터 여왕들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일개미들이 먹을 걸 가지고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여오아개미들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몸을 녹여 함께 자식을 기르던 그 사랑스런 동료가 이제는 음식을 축내는 미운 존재가 되는 겁니다. 여왕이 한 마리 남을 때까지 서로 물고 뜨는 혈투를 벌입니다. 이렇게 정치 싸움을 벌일 때 나무 아래를 보면 개미 머리들이 뚝뚝 떨어져 있습니다. 죽은 여왕의 시체를 일개미들이 내다버린 것인데, 다른 부분은 먹을 수 있지만 머리는 먹을 수가 없어서 머리만 밑에 떨어져있는 것입니다.

 

10.

예를 들어 아이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의사선생님이 항생제를 주면서 "몸이 나아지는 것 같더라도 끝까지 드십시오"하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사흘쯤 지나 아이 상태가 좋아지면 그만 먹여도 되겠지 하고 멈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몸 안에 들어온 병원균과 싸움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잡아야 하는데 어설프게 두들기도 내보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균들을 키워왔습니다. 우리 몸에 들어온 균 중에서 약한 놈들은 대충 죽였는데 독한 놈들은 못 죽인 상태로 약먹기를 멈춘 것이죠...(중략)..그러니 나중에 다시 병원에 가면 예전에 먹던 약으로는 듣지 않아 더 독한 약을 받아와야 합니다.

 

11.

먹은 것 대부분이 체온 유지를 위해 소모됩니다. 히터와 에어컨을 몸 안에 넣고 돌리며 사는 셈이지요. 변온동물은 양지와 그늘로 움직여 다니면서 조절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유지비는 굉장히 적게 듭니다. 뱀은 한 달에 웬만한 크기의 먹이동물을 한 마리 정도만 잡아먹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한 마리 먹고 앉아 있다가 따뜻한 데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한 달쯤 지나면 먹을 때 됐네 하고 또 한 마리 잡아먹습니다. 우리처럼 하루 세 끼 열심히 먹을 필요가 없죠. 이런 변온동물인 도마뱀도 병원균이 들어오면 햇볕이 있는 곳에 나가 오래 앉아서 몸의 온도를 올린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평소 이상으로 올려서 균들을 태워버리는 것이죠. 

 

12.

자연선택은 우리가 아름답게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자연선택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좀더 많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남기는 것입니다. 자연선택의 관심은 오직 번식입니다.

 

13.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우리 인간의 독특함에 매달리고 있습니다...(중략)..이 지구가 우리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존재했던 건 절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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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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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에 대한 연구

 


모든 천재들과 그들의 작품과 사상을 기리는 진정한 방법은 대상을 숭배하고 기념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그건 대상을 박제화하는 것이다.) 대상을 끊임없이 오늘에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말이다. 

20세기에 단 한명의 소설가를 뽑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보르헤스를 뽑겠다. 문학에 있어서 ‘천재’가 있다면(엄밀한 의미에서의 '천재‘는 수학과 음악에서밖에 나올 수 없다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보르헤스를 뽑겠다. 19세기를 살았던 21세기 철학자 니체가 오늘날에도 살아있듯, 20세기를 살았던 21세기 문학가 보르헤스도 오늘날 여러 모습으로 살아있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읽고 나는 그를 패러디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제목도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에서 땄다. 내 계획은 이랬다. 먼저 주석을 달아 또 다른 보르헤스를 만들어 낸다. 성이 다른 보르헤스를 중세에 살았던 가상의 인물로 설정하고, 그의 책 <픽션들>은 표절이나 패러디, 조금의 각색도 없는 번역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아 모두 불태워졌다고 전한다. 그 다음에는 진짜 보르헤스가(혹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쓰는 어떤 작가가) 어디선가 이 책을 구해서 그것을 그대로 베껴내게 되고 그는 포스트모던 문학의 기수로 칭송받게 된다. 이어 내가 쓰지도 않은 가상의 책, 혹은 실존하는 작가의 가상의 책, 혹은 가상의 작가가 쓴 진짜 책 제목을 언급하며 이것이 모두 두 번째 <픽션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하며 글을 끝낸다. 

하지만, 내가 이 천재의 작품을 오늘에 살아 있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재주 있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그의 작품은 오늘에 살아 있기 때문에,(사실 가장 큰 원인은 능력부족이자 그렇게 해봤자 더 이상 참신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오는 동기부족이다.) 나 한명 정도는 그의 작품을 숭배하고 기념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뭇 진지하게 <픽션들>, 그러니까 이 ‘구라의 향연’들을 대하기로 했다. 

 

이 책을 구라의 향연, 구라의 기술(skill)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부당한 지도 모른다. 책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 이것은 모두 <픽션들>이기 때문이다. 픽션은 구라다. 있지도 않은 책을 있다고 하거나, 가상의 작품에서 자신의 실제 단편의 영감을 받았다든가, 가상의 작가를 만들어 낸다거나, 실존하는 작가의 가상의 책을 이야기한다거나 하는 기술들은 오늘날의 소설의 작법에 있어서 이제는 그리 신선하지도 못한 시도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 이 거짓말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섞고, 때로는 자기 자신도 이 거짓말에 동참시키기도 하는 모습은 보르헤스를 범상치 않은 인물로 만들어준다. 그는 기존의 소설작법을 벗어났다.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그가 자주 사용하고 좋아하는 개념들은 무한, 반복, 미로, 역설과 같은 것들이다. 책을 읽다가 내가 떠올린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의 시공간(4차원)’-<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헤겔의 역사철학’-<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보들리야르의 시물라크르'-<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니체의 영겁회귀’-<바벨의 도서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

‘튜링테스트’-<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벤야민의 아우라’-<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제논의 역설’-<죽음과 나침판> 

<틀뢴…>에 나오는 ‘미래는 기다림이고 과거는 기억’이라든가, ‘모든 작품, 지식의 주체는 한 사람’이라든가, ‘신이 아닌 인간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든가 하는 개념들도 인상적이었다. 가상이 현실을 전복해버리는 것도 환상적이었다.

 

<알모따심…>은 순례의 대상이 순례자, 즉 찾으려는 대상이 찾는 자라는 생각도 흥미로웠고 허구적 텍스트인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에 대한 평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 자체가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사실도 나중에 여자친구를 통해서 듣고 놀랐다.

<삐에르 메나르…>는 다소 충격적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세르반테스가 쓴 작품과 글자하나 다르지 않은 ‘돈키호테’를 쓰고 새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오늘을 살고 있는 누군가가 김만중의 <구운몽>을 글자 그대로 베낀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을 새로운 작품, 더 나아가서 더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작품에서 ‘튜링 테스트’를 생각한 것은 기본적으로 착상이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질문자가 컴퓨터와 인간에게 동시에 질문을 던져 답을 받았을 때 어느 것이 기계의 것이고 어느 것이 인간의 것인지 알 수 없다면 컴퓨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 튜링 테스트다. 삐에르 메나르 혹은 구운몽을 베끼는 누군가를 컴퓨터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 생각은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까지도 연결될 수 있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질서에 우연을 개입시키는 이야기이다. 우리 삶의 혼돈과 무질서는 소설에 등장하는 ‘회사’에 책임이 있을 지도 모른다.

<바벨의 도서관>에 나오는 ‘영원과 불사’의 개념도 흥미로웠다. 영원은 시작도 끝도 없는 개념이고 불사는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개념이다. 전자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해당된다면 후자는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그리스 신들에 해당된다.

<끝없이…>는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개념과 상대성, 여기에 니체의 영겁회귀 개념이 더해진 듯 느껴진 환상적인 소설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역자 후기에서는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한 사건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언급하는 소설’에 대해 인터넷에서의 하이퍼 텍스트를 언급하고 있다. 어쩌면 ‘맥락’에 대한 강조는 구시대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기억의 천재…>는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잠들기 싫은 순간들’ 때문에 푸네스를 다소 부러워했던 소설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억하면서 어떤 차이점이나 공통점도 찾으려고 하지 않는 자세. 하지만 여자친구는 꽤나 다르게 읽었고 결말을 들어가며 푸네스처럼 모든 것에 의미부여를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내가 스스로 피곤해하는 이유도 아주 사소한 것에 의미를 두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자 후기 역시 기억 속의 재료들을 취사선택해서 소설을 써야하는 문제에 대한 소설이라고 쓰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푸네스는 분명 지향해서는 안 되는 존재일테지만 보르헤스의 시선은 따스하다.

<배신자와 영웅…>은 반란군의 지도자인 영웅이 사실은 배신자였고, 이 사실을 반란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역사의 암살 장면을 차용해 마치 연극처럼 꾸민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파헤친 화자 역시 이 연극의 일부였음을 깨닫는 것으로 끝이 난다. 화자는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랐던 힌트, 이를테면 ‘미끼’를 문 것이다.

<죽음과 나침판>은 내 생각에 보르헤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성이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 끝까지 다 읽고 나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직선으로 된 미로’는 제논의 역설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설’을 ‘미로’로 변형시킨 그의 재능에 정말 탄복했다.

<유다에 관한…>은 유다의 배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현실적 의미에서 기독교의 업적이나 과실에 대한 것보다는 기독교 자체에 대한 관심이 더 큰 나에게 흥미로운 텍스트였다. 유다는 예수를 반영하고 예수가 스스로를 낮췄듯 유다도 스스로를 낮춰 밀고자, 배신자가 되었다는 해석이나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이 찬탈할 수 없다는 겸손에서 비롯된 행동, 즉 선인이 되는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라는 해석 등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여기 언급하지 않은 소설들 중에 인상적이지 않은 작품은 하나도 없다.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역시 책은 혼자 읽고 끝내서는 안 된다.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되어준 여자친구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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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틀뢴의 한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현재란 규정될 수가 없는 거고, 미래란 현실적 실체가 없는 마치 현재적 기다림과 같고, 과거란 현실적 실체가 없는 현재적 기억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

그러나 그는 단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작업은 사기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어떤 타협도 맺지 않아야 한다>는. 버클리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도 우주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그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어했다.




3.

10년 전 그 어떤 대칭도-변증법적 유물론, 반유태주의, 나치즘-외형적 질서만 가지고 있으면 쉽게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 누가 질서정연한 혹성이라는 정밀하고 방대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서도 틀뢴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인가? 현실 또한 질서정연하다고 반박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리라. 아마 현실 또한 그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질서정연하다는 것은 여태까지 우리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신적인 법-나는 비인간적법이라고 번역한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말이다.




-1,2,3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중에서..




4.

또 다른 텍스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화가에, 햄릿을 까나비에르 거리에, 또는 돈키호테를 미국의 월 스트리트에 가져다 놓고 있는 그런 기생충 같은 작품들 중의 하나였다. 뛰어난 품격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메나르는 그러한 헛되고 소란스러운 행태를 혐오했다. 그에 따르면 그러한 것들은 시대착오적인 망상에 따른 천박한 즐거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거나, 또는 (보다 나쁜 것으로) 모든 시대가 동일하다거나, 또는 모든 시대가 서로 다르다는 그런 초보적인 지식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5.

그 어떤 지적인 활동도 종국에 가서는 쓸모없게 되기 마련이다. 하나의 철학적 원리는 시초의 세계에 대해 그럴 듯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철학사 속에서 단순히 한 장-만일 한 단락이나 명사로 되어버리지 않는다면-으로 남게 된다. 문학에 있어서 이러한 시간에 따른 쇠락현상은 더욱 치명적이다. 메나르는 내게 <돈키호테>가 무엇보다 우선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 그것은 애국주의적 취향, 문법적으로 오만함, 호화로운 장정으로 꾸민 각종 난잡한 판본들이 난무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될 뿐이다. 영광이란 일종의 몰이해에 불과하며, 아마 최악의 몰이해일는지도 모른다.




-4,5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중에서..




6.

나는 인류가 점차로 보다 대담한 일에 자신을 내던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곧 세상에는 전사들과 도적들밖에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고 싶다. <대담한 어떤 일을 수행하는 자는 자신이 이미 그것을 완수했다고 생각해야 하고, 마치 과거처럼 절대로 바꿔놓을 수 없는 미래를 자신에게 강요해야 한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중에서..




7.

그는 청회빛 말이 자신을 내동댕이쳤던, 그 비가 뿌리던 날의 오후 이전에는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일종의 소경, 귀머거리, 얼간이, 건망증 환자.




8.

그는 다형적이고 순간적이고 그리고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한 세계에 대한 고독하고 명증한 관찰자였다. 바빌로니아, 런던, 그리고 뉴욕은 자신들이 가진 잔혹한 현란함을 가지고 인류의 상상력을 압도해 왔다.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그곳들의 건물이나, 사람들이 바삐 지나가는 큰길에서는 아무도 남아메리카의 황량한 한 변두리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행한 이레네오 위로 수렴되는 것과 같은 전혀 지칠 줄 모르는 어떤 현실의 열기나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잠을 자기가 힘들었다. 잠을 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들여 버리는 것과 같다.

...(중략)...

또한 그는 자신이 늘 물살에 흔들리고 휩쓸려가는 강바닥에 있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라틴어를 습득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7,8 ‘기억의 천재 푸네스’ 중에서..




9.

그가 입을 열었다. 뢴로트는 그의 목소리에서 지친 승리의 감정, 우주의 크기만 한 증오심, 그 증오보다 결코 작지 않은 슬픔을 읽었다.




-‘죽음과 나침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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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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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이나 씨디장을 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기보다 책장과 씨디장에 있는 것들을 살펴보는 습성이 있는 나는 이 책도 그렇게 발견하게 되었다. 

수많은 책 중에 눈에 띄게 크지도 않고, 눈에 띄는 제목도 아니고, 눈에 띄는 표지도 아니었지만 책 등에 박힌 글자, '박형서 소설집-자정의 픽션'은 내게 익숙한 직감으로 다가왔다. '아, 이 책도 읽게 되겠구나' 

그렇게 머리에 박히는 책들이 있다. 작가와 제목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이런걸 인연이라 해야하나?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또 다른 젊은 소설가 김형중의 해설, 그리고 가장 실망스러웠던 작가 자신의 말까지 실려 있는 '친절한' 책이다. 유감스럽게도 단편 소설들의 경우 나는 불친절한 책들이 좋다. 작품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런 책 말이다.

김형중의 해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박형서의 소설은 기존의 소설에 대한 어떠한 정의에도 들어맞지 않으며, 현실에 대한 개연성은 물론 알레고리도 없고, 작가가 이 소설들을 통해 의도한 것은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이외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해설로 전하고자 하는 말이 이 정도라면 일기장에 적는 편이 낫겠다 싶다. 작가가 자신의 소설에 대해 의도한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래도 좀 이해가 간다.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서문에서 이를 얼마나 운치있게 표현했던가. 

이 이야기에서 주제를 찾으려는 사람은 고소될것이며
이 이야기에서 교훈을 찾으려는 사람은 추방될것이며
이 이야기에서 줄거리를 찾으려는 사람은 총살당할것이다.

작가가 아닌 사람(독자-그가 소설가든 뭐든 이 책을 쓴 사람이 아닌 한 그는 독자다.)이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의도하고 있는 바가 없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외에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유지만 내가 그런 소리를 활자로 읽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그렇다. 다 내 잘못이다.) 여덟개의 작품들에 바로 이어지는 이 해설은 여덟개의 단편들이 줬던 감흥을 무참히 깨버린다. 게다가 독자가 애써 찾아낸 현실에 대한 개연성과 알레고리, 작가의 의도 등을 순식간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그는 독자에 대해 무례하다. 나는 심적으로 반대편에 서고 싶은 사람이지만 수준낮은 독자에 대한 혐오는 때때로 작가의 천재성을 빛나게 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자기도 모르는 작가의 의도를 헛짚은 사람들을 가리켜 '병자, 강박증 환자' 등으로 치부하는 것은 지랄이다. 지랄.

작가의 말은 없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작가의 말은 여덟개의 소설에 대한 집필동기와 착안에 대해 스스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말처럼 뻔뻔하게 굴기로 마음 먹었다면 이런 구질구질한 말들은 왜 덧붙였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작가가 젊다는 걸 입증하기도 하는 것 같지만, 아무튼 안타깝다.('날개'의 착장 동기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에 있었다니!)


이제 각 소설들을 보면,

처음 등장하는 단편인 <논쟁의 기술>은 썩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의 대결이라는 구도가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진진하게, 결론을 궁금하게 만든다. 역시 결말은 이런 류의 소설들이 그렇듯 황당무개하지만 오히려 이 편이 더 마음에 든다. 단지 두 사람의 대결로는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뿐더러 논쟁으로 누군가가 승리한다면 그게 소설꺼리가 되겠는가. 소설 중간중간에 기술의 이름(유리한 주제의 선정, 은근히 겁주기, 무시하기, 얄밉게 웃기, 말허리 자르기, 반말하기 등등)을 소제목으로 넣는 것도 괜찮았다.  

두 번째 <날개>는 다 읽고 '아, 이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가상의 창작물은 작가의 집필 동기였다. 그는 애니메이션 광고에서 착안해서 소설을 썼다고 했다. 아무튼, 그다지. 

다음 <노란 육교>는 여덟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결말까지 아주 마음에 쏙 들었다. 감정을 이입하지 않는 건조한 관찰자 시점으로 '망자의 길'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어 죽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속으로 내내 '정말 이랬으면 좋겠다. 이런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 읽고 어쩐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던 소설이다.

<물 속의 아이>는 기절놀이를 즐기는 한 아이 때문에 평범했던 온 가족이 파멸한다는 내용인데 어떤 상황을 극한으로 밀고나갔다는 건 알겠으나 어딘가 좀 부족한 듯 싶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적인 장치 같은 것들이 조금 견고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만 웃겨버렸다. 첫 시작과 마지막이 쉼표 하나 없는 하나의 긴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나름 신선했다. 

다섯 번째<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는 일종의 패러디인데 유쾌하게 잘 읽었다. 달결에 대한 성적 은유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외할머니'를 통해 이 구조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밝혀내는 데에서는 솔직히 감탄했다. 그럴싸하단 말이지. 웃기는 부분들이 논문이라는 딱딱한 형식의 글 속에 숨바꼭질을 하듯 숨어있어서 은근히 읽는 재미가 있었다.
<존재, 혹은 고통 따위의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은 좀 에러였다. 노 코멘트다. 

<진실의 방으로>는 상당히 어두운 소설이다. 반전이 다소 충격적이지만 그렇게 새로운 반전은 아니다. 

마지막 <두유전쟁>은 제목만 보았을 때는 먹는 두유인 줄 알았으나 머리 두(頭)자에 기름 유(油) 전쟁이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고 바로 씨네21에 연재되고 있는 만화가 정훈이의 만화를 떠올렸다. 어떤 원본 영화에 대해 정훈이는 항상 패러디를 한다. 이 소설도 어떤 원본 영화에 대한 패러디 같다. 정훈이의 만화에서 남기남이 자주 납치되듯, 성범수 역시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고 코믹한 상황들이 이어진다. 결말 역시 패러디스럽다.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패러디라는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은 분명 흔한 경우는 아닐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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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화현상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역사학도로서 우리 사회에서 문화가 승리를 거두며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등장하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즐겁지 않다. 뿐만 아니라 우려를 금할 수 없고, 이런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 또한 많이 있다. 왜일까? 이유는 많을 테지만 가장 비중이 큰 문제점을 지적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문화가 왜곡된 형태의 문화라는 사실이다. 문화가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상품이 될 수 있고 언어마저도 그에 편승하여 자본 증식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문화에 대한 논의는 곧바로 상업화되고 소비화된 문화에 대한 논의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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