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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0월
평점 :
책장이나 씨디장을 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기보다 책장과 씨디장에 있는 것들을 살펴보는 습성이 있는 나는 이 책도 그렇게 발견하게 되었다.
수많은 책 중에 눈에 띄게 크지도 않고, 눈에 띄는 제목도 아니고, 눈에 띄는 표지도 아니었지만 책 등에 박힌 글자, '박형서 소설집-자정의 픽션'은 내게 익숙한 직감으로 다가왔다. '아, 이 책도 읽게 되겠구나'
그렇게 머리에 박히는 책들이 있다. 작가와 제목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이런걸 인연이라 해야하나?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또 다른 젊은 소설가 김형중의 해설, 그리고 가장 실망스러웠던 작가 자신의 말까지 실려 있는 '친절한' 책이다. 유감스럽게도 단편 소설들의 경우 나는 불친절한 책들이 좋다. 작품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런 책 말이다.
김형중의 해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박형서의 소설은 기존의 소설에 대한 어떠한 정의에도 들어맞지 않으며, 현실에 대한 개연성은 물론 알레고리도 없고, 작가가 이 소설들을 통해 의도한 것은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이외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해설로 전하고자 하는 말이 이 정도라면 일기장에 적는 편이 낫겠다 싶다. 작가가 자신의 소설에 대해 의도한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래도 좀 이해가 간다.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서문에서 이를 얼마나 운치있게 표현했던가.
이 이야기에서 주제를 찾으려는 사람은 고소될것이며
이 이야기에서 교훈을 찾으려는 사람은 추방될것이며
이 이야기에서 줄거리를 찾으려는 사람은 총살당할것이다.
작가가 아닌 사람(독자-그가 소설가든 뭐든 이 책을 쓴 사람이 아닌 한 그는 독자다.)이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의도하고 있는 바가 없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외에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유지만 내가 그런 소리를 활자로 읽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그렇다. 다 내 잘못이다.) 여덟개의 작품들에 바로 이어지는 이 해설은 여덟개의 단편들이 줬던 감흥을 무참히 깨버린다. 게다가 독자가 애써 찾아낸 현실에 대한 개연성과 알레고리, 작가의 의도 등을 순식간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그는 독자에 대해 무례하다. 나는 심적으로 반대편에 서고 싶은 사람이지만 수준낮은 독자에 대한 혐오는 때때로 작가의 천재성을 빛나게 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자기도 모르는 작가의 의도를 헛짚은 사람들을 가리켜 '병자, 강박증 환자' 등으로 치부하는 것은 지랄이다. 지랄.
작가의 말은 없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작가의 말은 여덟개의 소설에 대한 집필동기와 착안에 대해 스스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말처럼 뻔뻔하게 굴기로 마음 먹었다면 이런 구질구질한 말들은 왜 덧붙였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작가가 젊다는 걸 입증하기도 하는 것 같지만, 아무튼 안타깝다.('날개'의 착장 동기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에 있었다니!)
이제 각 소설들을 보면,
처음 등장하는 단편인 <논쟁의 기술>은 썩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의 대결이라는 구도가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진진하게, 결론을 궁금하게 만든다. 역시 결말은 이런 류의 소설들이 그렇듯 황당무개하지만 오히려 이 편이 더 마음에 든다. 단지 두 사람의 대결로는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뿐더러 논쟁으로 누군가가 승리한다면 그게 소설꺼리가 되겠는가. 소설 중간중간에 기술의 이름(유리한 주제의 선정, 은근히 겁주기, 무시하기, 얄밉게 웃기, 말허리 자르기, 반말하기 등등)을 소제목으로 넣는 것도 괜찮았다.
두 번째 <날개>는 다 읽고 '아, 이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가상의 창작물은 작가의 집필 동기였다. 그는 애니메이션 광고에서 착안해서 소설을 썼다고 했다. 아무튼, 그다지.
다음 <노란 육교>는 여덟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결말까지 아주 마음에 쏙 들었다. 감정을 이입하지 않는 건조한 관찰자 시점으로 '망자의 길'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어 죽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속으로 내내 '정말 이랬으면 좋겠다. 이런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 읽고 어쩐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던 소설이다.
<물 속의 아이>는 기절놀이를 즐기는 한 아이 때문에 평범했던 온 가족이 파멸한다는 내용인데 어떤 상황을 극한으로 밀고나갔다는 건 알겠으나 어딘가 좀 부족한 듯 싶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적인 장치 같은 것들이 조금 견고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만 웃겨버렸다. 첫 시작과 마지막이 쉼표 하나 없는 하나의 긴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나름 신선했다.
다섯 번째<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는 일종의 패러디인데 유쾌하게 잘 읽었다. 달결에 대한 성적 은유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외할머니'를 통해 이 구조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밝혀내는 데에서는 솔직히 감탄했다. 그럴싸하단 말이지. 웃기는 부분들이 논문이라는 딱딱한 형식의 글 속에 숨바꼭질을 하듯 숨어있어서 은근히 읽는 재미가 있었다.
<존재, 혹은 고통 따위의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은 좀 에러였다. 노 코멘트다.
<진실의 방으로>는 상당히 어두운 소설이다. 반전이 다소 충격적이지만 그렇게 새로운 반전은 아니다.
마지막 <두유전쟁>은 제목만 보았을 때는 먹는 두유인 줄 알았으나 머리 두(頭)자에 기름 유(油) 전쟁이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고 바로 씨네21에 연재되고 있는 만화가 정훈이의 만화를 떠올렸다. 어떤 원본 영화에 대해 정훈이는 항상 패러디를 한다. 이 소설도 어떤 원본 영화에 대한 패러디 같다. 정훈이의 만화에서 남기남이 자주 납치되듯, 성범수 역시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고 코믹한 상황들이 이어진다. 결말 역시 패러디스럽다.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패러디라는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은 분명 흔한 경우는 아닐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