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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최재천 지음 / 궁리 / 2007년 1월
평점 :
이비에스에서 6개월 동안 강의한 <동물의 세계>를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대학수준의 강의를 방송에서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하다보니, 또 그것을 다시 책으로 내다보니 그런건지 '~했다.'와 같은 대학교재를 비롯한 책에서 많이 쓰는 문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하더군요', '~했지요'와 같은 문체를 쓰고 있다. 그런데, 같은 대화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책 <대담>(도정일,최재천 공저)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 뭔가 흐름을 뚝뚝 끊는 것이 들어왔다. 비문(非文)이 왜 이렇게 많을까? 어쩌면 이런 느낌은, 이 텍스트를 짧은 시간에 굵게 읽는, 눈을 통해 읽는 것이 아니라, 6개월 동안 매주 1회씩, 정말 그의 목소리를 통해 귀로 들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과 글의 차이에 대해, 대상을 소화하는 시간에 대해 잠깐 딴 생각을 해본다.
동물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이 책은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최재천은 이 책을 대학교재로 사용해도 될 거라고 서문에서 쓰고 있다. 수업을 들으면서 일주일에 한 챕터씩 읽었다면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그리 훌륭한 교재는 아닌 것 같다. 풍부한 사진 자료 등 책에 들인 공은 느껴지지만 오히려 사례가 너무 풍부하다는 것이 읽는 이로 하여금 이 책을 '단순한 사례의 나열' 정도로 만들 소지가 다분하다. 물론 그 하나하나의 사례는 각각 모두 흥미로웠지만, 이쁜 부분만을 모아놓는다고 미인이 되지 않듯, 맛있는 것을 섞는다고 맛을 보장할 수 없듯 각각의 사례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동물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도 말이다.
같은 내용을 말로, 글로 접할 때의 차이나, 책으로서의 편집에 대한 것은 이 정도에서 멈추기로 하고 내용에 대해 생각해본다.
책을 읽으면서, 책을 다 읽고 이 수많은 사례와 실험, 연구들이 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듯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동물, 식물의 공존을 위해서일 것이다. 보호하고(인간이 자연을 보호한다는 말에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외에 인간이 만물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는 식의 의식이 깔려 있는 것 같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함께 살기 위해서는 이들을 사랑해야 하고 (최재천이 늘 말하듯이)알면 사랑하게 되므로 이들을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삐딱한 나는 아무래도 동물들이 불쌍하다. 실험실 실험 대상 동물은 물론이고 자연상태의 연구 대상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동물행동학도 결국은 인간을 위한 실용적인 학문이고(동물행동학 자체가 사람이 만든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공존'이니 하는 것들은 명목상 붙인 명분이자 이상이 아닐까? 어떤 학문이 응용분야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 학문이 그만큼 가치있는 학문이라는 의미겠지만 그 가치는 역시 인간의 기준에서 본 가치겠지. 동물 행동학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의 동물 행동학은 굉장히 실용적인 목적이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실용적인 학문이 되기 위해 달려가는 것 같다. '공존'을 위해서 정말 그렇게나 많은 실험과 연구들이 필요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인간만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인간만의 특징을 물어보는 질문에는 보통 두 가지 함정이 있다. 하나는 어떤 특정한 답 하나를 유도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 특징 때문에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전제를 깔아놓는다는 점이다. 인간의 특징이 어떻게 하나만 될 수 있겠는가. 그 특징 하나가 다른 모든 동물들과 인간을 결정적으로 구별해주지는 않는다. 다른 동물들이 그렇듯 인간에게도 몇 가지 특징이 조합되어 있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인식 역시 상대적인 것이다. 예전에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는 심지어 머리를 쓰는 간단한 테스트에서 인간과 침팬지를 대결시켰는데 챔팬지가 훨씬 잘했다. 인간과 동물은 그저 다를 뿐이다. (나는 늘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항상 되묻고 있다.)
다른 책들이 많이 생각났던 책이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잭 런던의 <야성이 부르는 소리>를 비롯한 동물이 주인공인 소설들과 너무 큰 기대를 가지고 봐서 실망했던 베르베르의 <개미>, 별로 유명한 책은 아닌 듯하지만 뜻밖의 보물같은 책이었던 마크 트웨인의 <동물과의 대화로 본 세상 다시보기>, 도정일, 최재천의 <대담> 등이 생각났다.
수많은 사례 중에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사례는 다른 곤충들도 함께 사는 개미 사회와 흰개미의 체액만 빨아먹고 시체를 흰개미집 입구에서 흔들어 더 많은 흰개미를 잡아먹는다는 자객벌레, 자기 딸을 물어죽이는 여왕벌, 그리고 자식들에게 싱싱한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먹이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마비만 시켜 그 위에 알을 낳는 기생말벌 등이었고, '흥미있었던' 사례는 개미와 벌들에게서 발견되는 '여왕물질', 다른 개체들로 하여금 판단의 착오는 물론 생리적인 변화(불임)까지 만들어내는 물질과 암컷이 나무구멍 속에 들어가 알을 낳으면 수컷이 진흙으로 구멍을 막고 먹이를 날라다주는 코뿔새와 가사분담을 정확히 반으로 나눈다는 갈매기 등이었다.
가장 무거운 이야기이자 나의 문제의식. 자연스러운 것은 다 좋은가? 아직까지 내 생각은 이렇다. 언뜻 생각하면 당연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이 이야기 역시 맥락을 따져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것이 다 좋다면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했듯 관용보다는 불관용 쪽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이 숭배해 마지 않는 다윈 역시 그렇다. 아래는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에서 인용한 글이다.
'우익의 물줄기를 흘려보내는 다윈이라는 샘. 이것이 첫 번째 다위니즘이다. 이 다위니즘에 따르면 다윈은 평등의 적이고 모든 진보주의의 적이다. 만약에 다윈이 옳다면 인간 사회의 불평등이나 약육강식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에 평등이나 진보를 향한 우리의 열망이 정당하다면, 다윈은 헛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다위니즘이 있다. ..(중략).. 토르에 따르면 다윈은 옳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진화론이나 그것의 현대적 버전인 사회생물학은 '진짜' 다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토르는 진정한 과학이 이데올로기를 낳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중략).. 이 지점에서 토르는 <종의 기원>의 인기에 가려져 사람들에게 거의 읽히지 않은 다윈의 또 다른 책 <인간의 계보>를 독자들에게 들이민다. 이 책에서 다윈은 문명화가 진척된 상황에서는 자연선택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다윈은 자연선택 이론의 창시자이지만, 그 선택의 법칙이, 특히 그 도태의 측면에서, 문명 상태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끝으로, 학문간 통섭은 가능할 것인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상 위의 생물들이 그러하듯 학문도 서로 모두 얽혀있다. 전문화라는 흐름 때문에 서로 다른 분야에서 하는 소리는 전부 해석이 필요한 시대. 학문간 경계 허물기는 재미있을 뿐더러 필요하고 학문 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위 공부한다는 사람치고 자기가 하는 공부에 자부심이 없는 사람이 없고 이런 자부심은 자칫 오만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간 경계를 허문다는 말은 경계를 허물고 함께 무언가를 하지만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물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은 생물학, 물리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은 물리학, 인문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은 인문학이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학문간 벽을 허무는 일은 이제 막 걸음마를 땠다. 말하기보단 '듣기'가 중요하겠다. 세상에 절대적인 학문은 없고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사회생물학의 득세는 다소 위험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