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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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에 대한 연구

 


모든 천재들과 그들의 작품과 사상을 기리는 진정한 방법은 대상을 숭배하고 기념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그건 대상을 박제화하는 것이다.) 대상을 끊임없이 오늘에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말이다. 

20세기에 단 한명의 소설가를 뽑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보르헤스를 뽑겠다. 문학에 있어서 ‘천재’가 있다면(엄밀한 의미에서의 '천재‘는 수학과 음악에서밖에 나올 수 없다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보르헤스를 뽑겠다. 19세기를 살았던 21세기 철학자 니체가 오늘날에도 살아있듯, 20세기를 살았던 21세기 문학가 보르헤스도 오늘날 여러 모습으로 살아있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읽고 나는 그를 패러디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제목도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에서 땄다. 내 계획은 이랬다. 먼저 주석을 달아 또 다른 보르헤스를 만들어 낸다. 성이 다른 보르헤스를 중세에 살았던 가상의 인물로 설정하고, 그의 책 <픽션들>은 표절이나 패러디, 조금의 각색도 없는 번역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아 모두 불태워졌다고 전한다. 그 다음에는 진짜 보르헤스가(혹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쓰는 어떤 작가가) 어디선가 이 책을 구해서 그것을 그대로 베껴내게 되고 그는 포스트모던 문학의 기수로 칭송받게 된다. 이어 내가 쓰지도 않은 가상의 책, 혹은 실존하는 작가의 가상의 책, 혹은 가상의 작가가 쓴 진짜 책 제목을 언급하며 이것이 모두 두 번째 <픽션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하며 글을 끝낸다. 

하지만, 내가 이 천재의 작품을 오늘에 살아 있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재주 있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그의 작품은 오늘에 살아 있기 때문에,(사실 가장 큰 원인은 능력부족이자 그렇게 해봤자 더 이상 참신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오는 동기부족이다.) 나 한명 정도는 그의 작품을 숭배하고 기념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뭇 진지하게 <픽션들>, 그러니까 이 ‘구라의 향연’들을 대하기로 했다. 

 

이 책을 구라의 향연, 구라의 기술(skill)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부당한 지도 모른다. 책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 이것은 모두 <픽션들>이기 때문이다. 픽션은 구라다. 있지도 않은 책을 있다고 하거나, 가상의 작품에서 자신의 실제 단편의 영감을 받았다든가, 가상의 작가를 만들어 낸다거나, 실존하는 작가의 가상의 책을 이야기한다거나 하는 기술들은 오늘날의 소설의 작법에 있어서 이제는 그리 신선하지도 못한 시도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 이 거짓말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섞고, 때로는 자기 자신도 이 거짓말에 동참시키기도 하는 모습은 보르헤스를 범상치 않은 인물로 만들어준다. 그는 기존의 소설작법을 벗어났다.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그가 자주 사용하고 좋아하는 개념들은 무한, 반복, 미로, 역설과 같은 것들이다. 책을 읽다가 내가 떠올린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의 시공간(4차원)’-<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헤겔의 역사철학’-<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보들리야르의 시물라크르'-<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니체의 영겁회귀’-<바벨의 도서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

‘튜링테스트’-<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벤야민의 아우라’-<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제논의 역설’-<죽음과 나침판> 

<틀뢴…>에 나오는 ‘미래는 기다림이고 과거는 기억’이라든가, ‘모든 작품, 지식의 주체는 한 사람’이라든가, ‘신이 아닌 인간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든가 하는 개념들도 인상적이었다. 가상이 현실을 전복해버리는 것도 환상적이었다.

 

<알모따심…>은 순례의 대상이 순례자, 즉 찾으려는 대상이 찾는 자라는 생각도 흥미로웠고 허구적 텍스트인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에 대한 평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 자체가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사실도 나중에 여자친구를 통해서 듣고 놀랐다.

<삐에르 메나르…>는 다소 충격적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세르반테스가 쓴 작품과 글자하나 다르지 않은 ‘돈키호테’를 쓰고 새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오늘을 살고 있는 누군가가 김만중의 <구운몽>을 글자 그대로 베낀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을 새로운 작품, 더 나아가서 더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작품에서 ‘튜링 테스트’를 생각한 것은 기본적으로 착상이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질문자가 컴퓨터와 인간에게 동시에 질문을 던져 답을 받았을 때 어느 것이 기계의 것이고 어느 것이 인간의 것인지 알 수 없다면 컴퓨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 튜링 테스트다. 삐에르 메나르 혹은 구운몽을 베끼는 누군가를 컴퓨터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 생각은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까지도 연결될 수 있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질서에 우연을 개입시키는 이야기이다. 우리 삶의 혼돈과 무질서는 소설에 등장하는 ‘회사’에 책임이 있을 지도 모른다.

<바벨의 도서관>에 나오는 ‘영원과 불사’의 개념도 흥미로웠다. 영원은 시작도 끝도 없는 개념이고 불사는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개념이다. 전자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해당된다면 후자는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그리스 신들에 해당된다.

<끝없이…>는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개념과 상대성, 여기에 니체의 영겁회귀 개념이 더해진 듯 느껴진 환상적인 소설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역자 후기에서는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한 사건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언급하는 소설’에 대해 인터넷에서의 하이퍼 텍스트를 언급하고 있다. 어쩌면 ‘맥락’에 대한 강조는 구시대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기억의 천재…>는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잠들기 싫은 순간들’ 때문에 푸네스를 다소 부러워했던 소설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억하면서 어떤 차이점이나 공통점도 찾으려고 하지 않는 자세. 하지만 여자친구는 꽤나 다르게 읽었고 결말을 들어가며 푸네스처럼 모든 것에 의미부여를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내가 스스로 피곤해하는 이유도 아주 사소한 것에 의미를 두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자 후기 역시 기억 속의 재료들을 취사선택해서 소설을 써야하는 문제에 대한 소설이라고 쓰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푸네스는 분명 지향해서는 안 되는 존재일테지만 보르헤스의 시선은 따스하다.

<배신자와 영웅…>은 반란군의 지도자인 영웅이 사실은 배신자였고, 이 사실을 반란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역사의 암살 장면을 차용해 마치 연극처럼 꾸민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파헤친 화자 역시 이 연극의 일부였음을 깨닫는 것으로 끝이 난다. 화자는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랐던 힌트, 이를테면 ‘미끼’를 문 것이다.

<죽음과 나침판>은 내 생각에 보르헤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성이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 끝까지 다 읽고 나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직선으로 된 미로’는 제논의 역설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설’을 ‘미로’로 변형시킨 그의 재능에 정말 탄복했다.

<유다에 관한…>은 유다의 배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현실적 의미에서 기독교의 업적이나 과실에 대한 것보다는 기독교 자체에 대한 관심이 더 큰 나에게 흥미로운 텍스트였다. 유다는 예수를 반영하고 예수가 스스로를 낮췄듯 유다도 스스로를 낮춰 밀고자, 배신자가 되었다는 해석이나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이 찬탈할 수 없다는 겸손에서 비롯된 행동, 즉 선인이 되는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라는 해석 등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여기 언급하지 않은 소설들 중에 인상적이지 않은 작품은 하나도 없다.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역시 책은 혼자 읽고 끝내서는 안 된다.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되어준 여자친구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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