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법정
마이클 S. 리프.H. 미첼 콜드웰 지음, 금태섭 옮김 / 궁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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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은 아트다>




이 책을 번역한 금태섭씨부터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했더니 2006년 가을 <한겨레>신문에 1회 연재로 그 화약 냄새만 살짝 풍겨주고 폭탄이 되려다 말았던,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기획 연재물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수사 받는 법’이라고 줄여서 불리기도 한다.)을 썼던 사람이었다. 연재 중단에 대해 그는 검찰의 외압을 부인했지만 그걸 누가 믿겠는가? (1회 연재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피의자가 되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 모든 것을 변호사에게 맡기라는 것.) 그 후 그는 검사직에서 물러났고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며 CBS에서 토요일 오전에 방송되는 ‘뉴스레이다 스페셜-책과 문화’를 진행 중이다. (잠깐의 검색으로 이 모든 사실을 알 수 있는 세상이다.)

 

법조계에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번역이 아주 깔끔하다. ‘법정’이라는 어렵고 딱딱할 것 같은 제목에 635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이렇게 ‘열렬하게’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깔끔한 번역 탓이 크다. 낯선 법률 용어나 사건, 인물을 페이지 밑에 주석을 달아 설명해 독서의 흐름을 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괄호를 이용해 설명하고 있다.

 




변론은 아트다. 책에 별을 주거나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카렌 앤 퀸란과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절반도 읽지 않은 채 ‘이건 별 다섯 개짜리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 생각이 끝까지 책을 읽으면서 틀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고 내 예상은 맞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일단 하나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면 어떻게 끝날지 너무나 궁금해서 그 편을 다 읽기 전에는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책 제목에 무게감을 더해주고 있는 ‘법정’이라는 단어나 책의 두께는 내용의 흥미진진함에 날아가 버린다. 재판은 법정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다. 저자는 그 싸움의 현장을 독자의 눈앞에 펼쳐놓고 그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재판의 과정과 변론들은 물론 사건의 배경 설명과 재판이 있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세하게 다루고 있어서 싸움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기 있는 여덟 편의 재판에서 논의되고 있는 쟁점들은 ‘안락사에 대한 논의, 노예제도의 철폐, 냉전과 매카시즘, 여성의 투표권, 언론의 자유와 통제, 음란물에 대한 사회적 규제, 생명을 담보로 한 의료보험 회사의 횡포, 정신박약자의 불임시술’이다. 현재까지 논란이 되는 것들도 있지만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어느 편에 서야할지가 나온다. 오늘날 노예제도에 찬성하거나 여자는 법적으로 투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테니까. 물론 몇몇 쟁점은 국내에서는 상황이 좀 다를 수도 있고 심적으로 동조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작가의 방향은 꽤나 분명해 보인다. 앞에 배치된 일곱 개의 재판은 훌륭한 변론과 판결로 세상을 좀 더 ‘좋은 쪽’으로 바꾼 것들이고 마지막 재판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비극으로, 앞의 재판들과 대조를 이룬다. 간단히 말해 앞에 일곱 개는 ‘좋은 판결’이고, 뒤의 하나는 ‘나쁜 판결’이다. 물론 각각의 이야기 속에도 ‘우리 편’과 ‘저쪽 편’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책의 방향이 이렇듯 분명한대도 ‘저쪽 편’의 변론을 듣고 감동받거나 하는 건 내가 귀가 얇은 탓도 있겠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여기 실린 변론들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변호사들은 정의를 찾지 않는다. 그들은 의뢰인의 승소를 위해 헌신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변호사라는 직업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나 또한 그랬었고 영화에서도 종종 변호사들의 이런 모습이 비판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 책이야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변호사들이 훌륭한 변론을 해서 사건을 ‘세상을 바꾼’ 재판으로 만들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승소를 했을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판결을 받았을까? 세상 모든 사건은 시시비비가 있지만 세상 모든 변호사는 승소해야 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변론은 예술이 되고, 설사 상대방이라 하더라도 훌륭한 논리 전개와 마음을 움직이는 변론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혹자는 이 책에 제시된 ‘방향’ 중 몇몇에 심적으로 동조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가히 ‘아트’라 할만한 양측의 논리 공박은 책을 읽는 내내 흥미를 유지하게 해 준다.




세상에는 합의가 불가능한 쟁점들이 있다. 이를테면 사형제 폐지나 안락사 논쟁이 그렇고 신의 존재 여부가 그렇다. 사형제 폐지는 결국 “흉악범도 존중받아야 할 ‘인간’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고 이 질문에는 중간이 없다. 안락사 역시 “살아있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생물학적 생명과 죽을 권리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타협이 불가능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신의 존재 여부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길게 이야기를 해봐도 서로가 아예 기본 전제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끝없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질문들에는 자신의 신념이 있을 뿐이다. 이런 질문들에 법이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신념까지 바꿀 수 있을까?

 

일례로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인 안락사 논란만 봐도 그렇다. 주인공 카렌 앤 퀸란은 재판으로 이른바 ‘죽을 권리’를 얻었지만 그렇다고 이 판결에 판대한 사람들의 ‘생명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는 편지와 그 마음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안락사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나 또한 ‘죽을 권리’나 ‘편안한 죽음’에 동조하는 바이지만 이에 반대했던 변호사들의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듣고 어떻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자리에서 증언한 카렌 앤의 어머니의 증언처럼 온전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죽기를 원한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삶의 질이 이 사건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거나 혹은 삶의 질이 생물학적인 생명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삶의 ‘질’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삶의 질’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볼 수 있는 능력입니까? 들을 수 있는 능력입니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까? 생명의 존엄성을 잊고 삶의 질로 대체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일단 그 문을 열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법정에는 이 사건 하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건이 이 법정이나 또 다른 법정에서 제기될 것입니다. 만일 삶의 질이 이 사건의 결정에 한 요소가 된다면 또 다른 병든 아이들의 부모들이 법정에 와서 자신의 자녀는 이런 식으로 살기 원하지 않았다거나 온전한 삶을 살기 원했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심장마비로 혼수상태의 부모를 둔 자녀도 똑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고령으로 망령이 난 사람들을 두고도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입니다. 삶의 질조차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사람들-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 정신지체 장애인, 다운증후군-을 두고도 같은 말이 나올 것입니다.

 

재난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생명의 존엄성’이 ‘삶의 질’이라는 말로 대체되는 순간 재난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카렌 퀀란은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카렌은 고통을 겪을 것이고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느끼는 슬픔을 우리도 쉽게 잊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은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고 법을 지키는 데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일지도 모릅니다.”

 

 




여기 실린 재판들이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몇몇의 재판들은 정말 ‘세상을 바꿨다’고 할 만큼 재고의 여지가 없는 올바른 판결로 끝이 났다.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아미스타드 선상 반란을 일으킨 노예제도 관련 재판이나, 생명의 가격을 담보로 횡포를 부린 의료보험 회사에 대한 한 환자의 투쟁이 그렇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기소된 수전 B.앤서니의 재판은 조금 다른데, 사실 수전 B.앤서니의 투표권을 얻기 위한 투쟁은 당시의 사회적 벽 앞에서 사실상 실패했다. 그녀는 재판에서 패소했다. 하지만 그 재판이 있은 후부터 50여 년에 걸친 여성들의 투쟁 끝에 결국은 결실을 보았다.(우리가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오늘날 일정한 나이만 되면 누구나 얻게 되는 투표권이라 그런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거기 담긴 투쟁의 역사는 물론 그 소중함도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투표도 안 하고.)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한 래리 플린트 사건은 너무나 유명해서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미국 수정헌법1조를 언급할 때 항상 거론되는 사건이다. 수정헌법 1조는 이렇다. ‘연방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자유로운 신앙 행위를 금지하거나, 또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국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및 불만 사항의 구제를 위하여 정부에게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약화시키는 법률을 만들 수 없다.’ 나는 영화 <래리 플린트>도 보지 못했고 이 사건에 대해서도 이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사건의 전말을 보다 상세히 알게 되었고 손톱을 씹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영화도 곧 보게 될 것 같다. (플린트가 직접 출연할 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노튼이 나온다고 하니 볼 수밖에)




내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기념비적인 사건인 래리 플린트 사건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 했다고 하면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 나를 파시스트 정도로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표현의 자유는 물론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세계에서 법의 영토로 옮겨와서 그토록 강력하고 포괄적이고 절대적으로 사회에 부과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극과 극은 좋지 않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표현의 자유를 ‘이런 식으로’ 보장하는 것도 내 생각에 그렇게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수정헌법 1조와 더불어 세계최초의 언론 자유선언문으로 불리는 ‘아레오파지티카’를 작성한 영국의 존 밀턴은 ‘사상의 자유시장’을 주장했지만 자신이 의원이 된 다음에는 직접 언론을 검열했고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말로 유명한 토머스 제퍼슨 역시 후에 ‘신문에 난 것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진실 그 자체는 오염된 전달 수단에 실림으로써 의심스럽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거짓과 오류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 진리에 가까운 사람이듯이, 나는 전혀 신문을 읽지 않는 사람이 신문을 읽은 사람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것은 물론 상황의 차이에서 오는 사소한(?) 모순이고 이것이 ‘아레오파지티카’나 제퍼슨의 언론의 자유를 위한 노력에 먹칠을 하지는 않는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 수정헌법 1조는 심지어 인터넷을 통한 포르노를 규제하기 위한 ‘성인인증제도’의 도입 역시 부결시켰다. 단적으로 말해 ‘표현의 자유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우선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




책에는 수정헌법 1조와 관련한 예외적인 판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단순한 욕설(정치적 의견이 담긴 욕설은 수정헌법1조의 보호를 받는다.), 즉각적인 위협이 되는 말들은 표현의 자유를 보호받지 못한다. 미국은 이처럼 거의 무한대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다. 미국은 그런 나라다. 단지 그뿐이다.

 

촘스키가 자주 인용하는 조지 오웰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권력자들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는 말을 떠올리면, 더 나아가 베르베르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언급한 검열의 문제까지 생각해보면(‘절대적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결국 주목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단지 그뿐’이라는 말이 저절로 생각난다.

 

공적 인물은 비판을 감수할 만큼 낯짝이 두꺼워야 하며 단지 감정적인 고통을 겪었다는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공적 인물은 래리 플린트 같은 ‘쓰레기’(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고 이 책을 읽은 내 생각도 그렇다. 그는 위선을 증오했고 명백히 폴웰 목사를 공격하기 위해 광고를 패러디했지만 법정에서는 그것은 단지 술 광고를 패러디했을 뿐이고 폴웰 목사가 모델이 된 것은 그 패러디 광고에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아서라는 위선을 내보였다. 책에서는 소개되지 않고 있지만 이 사건 외에도 플린트의 수많은 사건을 맡았던 아이작맨 변호사는 결국 그를 떠나고 만다.)가 자기 엄마와 화장실에서 그 짓을 했다는 광고를 실어도 ‘사람들이 그것을 사실로 믿지 않는다면’ 허위 사실 유포가 아니며 이런 종류의 감정적 고통과 ‘부시는 꼴통이다’라는 종류의 감정적 고통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므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 수정헌법 1조는 미국에서 경찰이 네오나치의 거리 집회를 보호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저지하는 일까지 만든다. 미국은 정말 ‘특이한’ 나라다.




수많은 고민을 안겨준 6장 ‘포르노 황제와 전도사’의 표현의 자유와 짝을 이루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재판은 책의 3장 ‘우리 안의 적’ 매카시즘 광풍과 관련한 사건이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사실 굳이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지 않아도 당장 선거법93조-‘선거 180일 전부터 선거에 영향을 끼칠 목적으로 정당·후보자를 지지·반대하는 내용에 대해 게시 및 상영을 할 수 없다’-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판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상검증은 히틀러가 자행한 일과 마찬가지로 후대 사람들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 것이다. 8장 캐리 벅의 강제 불임시술에 대한 재판 역시 ‘왜’가 아니라 ‘어떻게’다. 선거법 93조 역시 ‘어떻게 21세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가?’라고 묻고 싶지만 ‘대한민국이라서 가능하다’는 우울한 대답이 고개를 든다. 7장 ‘생명의 가격’을 읽을 때는 정말 화가 나고, 8장 ‘훌륭한 태생을 위한 유전자 개량’을 읽을 때는 정말 마음이 아프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유념할 것은 여덟 개의 재판이 모두 미국 내에서 일어난 재판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재판 제도는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고 내년부터 도입할 예정인 ‘국민참여재판제’ 또한 미국의 ‘배심제’와는 많이 딴판이다. 8편의 예술을 보며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 어떤 영화보다 우리의 실제 삶이 훨씬 드라마틱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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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은 안락사 논의의 진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미국안락사협회(the euthanasia society of america, ESA)는 안락사를 합법화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은 이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나치 치하의 유럽에서 사회 부적응자들을 살해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사실 나치 정권은 안락사가 아닌 우생학을 신봉하고 있었다. 안락사는 고통 없는 죽음을 의미하지만, 우생학은 정신적, 육체적 혹은 유전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솎아 내어 우수한 종족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미국안락사협회는 우생학의 오명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 안락사협회 회원 중 많은 사람들이 우생학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2.

카렌 앤 퀸란 사건은 세 가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카렌 앤과 같이 ‘영구적인 식물인간 상태’로 쇠약해져 가는 사람을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와 회복할 가망이 없는 환자의 죽을 권리 사이의 경계는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누가 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부모인가, 의사인가 혹은 판사인가?

…(중략)…

이 기간에 퀸란 가족은 수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이 사건은 너무나 유명해져서 받는 사람의 주소를 ‘카렌 앤 퀸란 가족 앞, 미국’이라고 쓴 편지도 배달될 정도였다. 편지를 보낸 사람들 대부분은 퀸란 가족의 고통에 동정심을 보냈다. 그런 사람들은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가족이나 친척이 있었고 퀸란 가족이 카렌 앤의 고통을 끝내 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카렌 앤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편지를 보낸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생명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는 명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3.

밖에 나가서 노는 아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놀다가 넘어져서 다친 아이는 어머니에게 돌아와서 울음을 터뜨립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고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법은 이런 일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법원으로 달려가서 슬픔과 고통을 없애 달라는 판결을 청구할 수 없습니다. 법은 이런 때에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회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입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법이 이러한 일을 없앨 수 있습니까? 법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까? 법은 이때에도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퀸란 가족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4.

종교의 자유에 관한 수정헌법 1조에서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인 불가침의 인권입니다. 국가는 이러한 권리에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따른 실천은 국가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만일 미국 내에 인간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믿는 종교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 종교를 믿는다고 합시다. 신자들이 그러한 종교를 믿는 것 자체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실행에 옮기려고 한다면 그들의 행동은 실정법에 저촉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때에는 실정법이 우선합니다. 

-3,4번 ‘카렌 앤의 주치의들을 위한 랠프 포르지오 변호사의 변론’ 중에서




5.

이 자리에서 증언한 카렌 앤의 어머니의 증언처럼 온전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죽기를 원한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삶의 질이 이 사건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거나 혹은 삶의 질이 생물학적인 생명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삶의 ‘질’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삶의 질’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볼 수 있는 능력입니까? 들을 수 있는 능력입니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까? 생명의 존엄성을 잊고 삶의 질로 대체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일단 그 문을 열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법정에는 이 사건 하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건이 이 법정이나 또 다른 법정에서 제기될 것입니다. 만일 삶의 질이 이 사건의 결정에 한 요소가 된다면 또 다른 병든 아이들의 부모들이 법정에 와서 자신의 자녀는 이런 식으로 살기 원하지 않았다거나 온전한 삶을 살기 원했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심장마비로 혼수상태의 부모를 둔 자녀도 똑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고령으로 망령이 난 사람들을 두고도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입니다. 삶의 질조차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사람들-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 정신지체 장애인, 다운증후군-을 두고도 같은 말이 나올 것입니다.

재난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생명의 존엄성’이 ‘삶의 질’이라는 말로 대체되는 순간 재난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카렌 퀀란은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카렌은 고통을 겪을 것이고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느끼는 슬픔을 우리도 쉽게 잊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은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고 법을 지키는 데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일지도 모릅니다.

-5번, ‘모리스 카운티 도널드 콜레스터 검사의 변론’ 중에서




6.

세인트 마거릿 성당 지하실에서 열린 두 번째 기자회견에서 조 퀸란은 판결에 대한 좌절감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조는 뮤어 판사가 의사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선고한 것은 용기 있는 판결이었다고 말했다.

보수적 칼럼니스트인 조지 윌은 판결을 지지하는 칼럼을 썼다.

“퀸란 가족의 승소판결은 살인을 정당화하는 결정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판결이 법적으로는 올바를지 모르지만 “법의 경직성은 인간적인 비극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고 썼다.




-1~6번,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카렌 앤 퀸란과 인간답게 죽을 권리’ 중에서







7.

헌신적이고 노련한 변호사들에게도 중대한 약점이 있었다. 언어장벽 때문에 초보적인 의사소통만을 할 수 있는 의뢰인을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 예일대학의 언어학 전문가인 깁스 교수가 다시 아프리카인들을 방문했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쳐들고 말했다.

“하나”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한 아프리카인이 대답했다.

“이타”

이 획기적 진전에 용기백배하여 깁스는 멘데어로 열까지 세는 방법을 배우고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뉴헤이븐과 뉴욕을 뒤지기 시작했다.




-7번, ‘아미스타드 선상의 반란-자유를 되찾기 위한 흑인 노예들을 슬픈 항해’ 중에서




8.

나이저가 하나씩 질문을 던질 때마다 하트넷은 예민하게 반응했고 답변에는 짜증이 묻어났다. 마침내 나이저는 하트넷에게 명예훼손의 책임을 묻는 질문을 던졌다.

“나이저 씨” 하트넷이 말을 잘랐다.

“나는 피고인이 아니고 당신도 검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이저는 잠시 동안 하트넷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지금 제대로 이해한 겁니까? 지금 감히 저한테 증인신문 방식을 가르치려는 겁니까? 그렇습니까? 당신이 말입니까? 뻔뻔스럽게 검사와 피고인의 얘기를 꺼낸단 말입니까? 당신은 판사, 배심원, 검사, 사형집행인의 역할을 혼자 다하면서 수백 명의 죄 없고 애국적인 사람들의 인생과 경력을 파멸시켰습니다! 당신은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의 목에 올가미를 씌워서 그 자식들을 굶게 만들고 그의 평판을 끝장내려고 했습니다! 그런 당신이 저에게 사건진행 절차를 가르치겠다는 겁니까?”

나이저의 차가운 어조는 슈미트와 하트넷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트넷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하면서 대답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슈미트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답변을 막았다. 하트넷은 시가를 피워보려고 했지만 놀란 나머지 귀 쪽으로 시가를 가져갈 뻔했다.




9.

계속해서 분홍색 메모지를 꺼내 무엇인가를 적는 하트넷의 행동에 질린 나이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하트넷은 법정에 와서 재판을 방청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배심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눈에는 하트넷의 계획이 분명해 보였다. 하트넷이 폴크의 재판을 참관한 살마들을 폴크의 지지자이자 공산주의 동조자로 몰아붙이려는 속셈이었다.

볼란 변호사가 하트넷의 신뢰성을 회복하고자 그에게 분홍색 메모지에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냐고 질문했을 때 최후의 순간이 찾아왔다. 하트넷은 몇몇 사람들을 호명한 다음에 한 남자의 이름을 대면서 그가 폴크의 부인인 린의 옆자리에 앉았다고 주장했다. 나이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트넷에게 린 폴크를 가리켜 보라고 말했다. 하트넷이 한 여자를 가리키자 나이저는 극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에게 이름을 말해 보라고 했다. “제 이름은 헬렌 소퍼입니다. S-O-F-F-E-R이라고 쓰지요”

법정 안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10.

여러분이 법정에서 하트넷 씨를 직접 보고 그가 신문받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그가 힘 있는 거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독재자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직시하면 움츠려듭니다.

-‘나이저 변호사의 최종 변론’ 중에서




-8~10번, ‘우리 안의 적-매카시 선풍에 맞선 라디오 스타’ 중에서







11.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중략)…

자신들이 법을 어기고도 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사람들은 더 악하고 잔인해집니다.




-11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식민지 시대의 언론 자유를 위한 투쟁’ 중에서







12.

플린트가 언론의 주목을 받을 만한 기행을 즐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언론 자유와 표현 자유를 침해하는 법은 제정할 수 없다”는 수정헌법 1조에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미국이 그레나다를 침공할 당시 국방부가 기자들의 보도를 금지하자 전국의 신문사와 방송사가 정부를 성토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기관들이 정부에 항의를 했지만 실제로 정부가 수정헌법 1조를 위반했다고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래리 플린트였다. 물론 플린트가 <허슬러>의 기자를 그레나다에 보내서 침공작전을 보도하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정부가 취재 자유를 제한하려 한다는 데 격분했다.




13.

폴웰은 카터가 대통령이 되면 기독교 근본주의를 정책에 반영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플레이보이>와 인터뷰를 하고 소련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는 것을 보자, 폴웰은 카터 대통령이 기독교 근본주의를 대표할 만큼 보수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폴웰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카터에 반대하기 시작했고 카터 대통령을 “하느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사람”이라고 불렀다.

폴웰의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카터가 말하기를, 대통령은 전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직책이지 ‘도덕적 다수파’에게 책임을 지는 자리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제리 폴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달라는 집요한 질문을 받자 카터는 결국 이런 대답을 했다.

“독실한 기독교도의 시각으로 보자면, 제 생각으로는, 그는 지옥에 갈 거요”




14.

래리 플린트는 폴웰이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분노하였다. 플린트는 이 소송을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시도로 보았다. 그는 폴웰이 사회적 쟁점이나 공적 인물에 대해 기독교 근본주의적 관심을 설파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폴웰은 미국 보수주의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고 그러한 점에서 공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정헌법 1조는 스스로 비판의 광장에 나선 공적 인물을 놓고 일반 시민이 그 진실과 성격을 논평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였다.

일반적으로 영향력 있는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나 실수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수정헌법 1조가 아니면 미국인은 권력자들에 대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플린트는 자신의 패러디가 모욕적이고 도발적이고 두말할 나위 없이 비열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수정헌법 1조는 이러한 패러디도 보호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5.

화이트 대법관: 만일 이 사건에 공적 인물이 관련이 없다면 손해배상 책임을 감수하겠습니까?

아이작맨: 다행스럽게도 이 사건은 그런 사건이 아닙니다. 하지만 대법관님의 질문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사실관계에 대한 허위 주장이 없다면, 혹은 사실로 오인할 만한 내용이 없다면 설사 그 상대방이 공적 인물이 아니더라도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공적 인물이 관련되지 않은 사건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은 이미 시민들을 감정적인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공공 이익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이작맨: 이 나라의 국민이 각자의 의견을 표현할 자유를 보장받는 것은 공공 이익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중 하나입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글쎄요. 이것으로 표현된 의견은 무엇인가요?

아이작맨: 대법관께서 제시한 예 말씀입니까, 아니면 이 사건 말씀입니까?

스티븐스 대법관: 둘 중 어떤 것이든지,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습니까?

아이작맨: 이 사건에서 문제된 광고 패러디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점을 설명하기 전에 우선 이 패러디가 150쪽짜리 잡지의 한 쪽 정도라는 사실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이해합니다.

아이작맨: 그 말은, 즉 이 패러디가 학술논문이나 소설처럼 복잡한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이 패러디가 가지고 있는 의미 중 첫 번째는 캄파리 광고의 패러디라는 점입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아이작맨: 캄파리 광고를 패러디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적법합니다. 그 패러디가 캄파리 광고의 패러디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제리 폴웰에 대한 풍자입니다. 그는 이 광고 패러디에 등장하기에 딱 맞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도저히 그러한 광고에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폴웰은 음주나 섹스를 반대해 온 사람입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당신이 말한 공공 이익에 대해서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폴웰을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이 공공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재미있게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 공공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입니까? 공공 이익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이작맨: 여기에는 두 종류의 공공 이익의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패러디의 마지막 부분에서 암시되었듯이 폴웰이 하는 말들은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다는 <허슬러>의 견해가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허슬러>를 만드는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운동을 하면서 “그 잡지를 읽지 마시오, 그 잡지는 미국의 정신에 독 같은 존재입니다. 혼외정사를 하지 마시오, 음주를 하지 마시오.”라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을 두고 그가 하는 말은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 패러디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패러디의 첫 부분은 폴웰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폴웰은 뛰어난 설교자입니다. 그가 텔레비전에 출연할 때는 그는 멋진 표정을 짓고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성실한 목소리로 말을 합니다. 이러한 상황 대신에 <허슬러>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껍데기를 벗겨 보자. 이 사람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려 보자. 적어도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들을 만한 수준까지 끌어내리자”(웃음)

아이작맨: 대법원에서는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농담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지금의 답변은 내 질문 중에 앞부분에 대한 답변입니다. 공적 인물이 관련되지 않은 때에는 공공 이익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이작맨: 공적 인물이 관련되지 않은 때에는 물론 공공 이익과는 보다 적은 관련성만이 있습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적은 관련성? 어떤 관련성이 있다는 것입니까?

아이작맨: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공공 이익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러한 의견을 듣는다고 해서 공공 이익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변호사, 빈스 롬바르디(미식 축구팀 그린베이 패커스의 전설적인 감독. 최하위 팀을 맡아 최강의 팀으로 바꿔 놓았고 3년 만에 북아메리카프로미식축구리그NFL 챔피언을 차지했다. “승리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승리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 수정헌법 1조가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당연히 그것은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유일한 가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 생각에 당신은 또 하나의 중요한 가치를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훌륭한 사람도 공적 인물이 되고 공공에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 말입니다. 당신의 이론대로라면 공적 인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혹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공적 인물이 된 사람은 자신을 보호할 수 없고, 심지어 화장실에서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패러디로부터 어머니를 보호할 수도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한 가치도 보호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모욕을 참아내야 하는 것이라면 조지 워싱턴이 공적 인물이 되려고 했겠습니까? 수정헌법 1조의 가치를 지키면서 사람들 스스로 공공에 봉사하려는 마음이 들게 할 방법은 없습니까? 그 두 가지 가치를 조화시킬 방법은 없습니까?

아이작맨: 한 가지 방안은 이미 앞의 질문에서도 암시되었듯이 공적인물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법원이 그러한 구분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공적 인물이 되려고 했던 조지 워싱턴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조지 워싱턴이 당나귀에 탄 채 끌려가는 만화입니다. 그 밑에는 “누구든지 이 나귀를 끌고 가는 사람은 이 멍청이도 같이 끌고 가는 것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저라면 그런 만화를 참을 수 있을 겁니다. 조지 워싱턴도 참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자기 어머니와 화장실에서 근친상간을 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사이에 경계선을 그을 수는 없는 겁니까?

아이작맨: 내용 면에서 볼 때 그런 경계선은 없습니다. <허슬러>는 폴웰이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스칼리아 대법관님, 그것은 기호의 문제입니다. 대법관님이 ‘포프 대 일리노이’사건에서 말씀하셨듯이 기호라는 것은 논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호를 두고 소송을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그 패러디가 기호에 맞는지 혹은 맞지 않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폴웰이 그의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했다고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폴웰을 그렇게 묘사하고 그러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기호에 맞느냐는 것입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공적 인물이라면 괜찮다?

아이작맨: 그것은 아닙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아니라고요?

아이작맨: 만일 그것이 허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포하는 것이라면 괜찮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어떤 공적 인물에 대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제가 사실은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런 일은 금지되어야 마땅합니다.

제 주장을 정리하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사건은 단순히 <허슬러>와 제리 폴웰 사이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판결은 단지 <허슬러>가 지금까지 해 오던 이런 종류나 혹은 다른 종류의 터무니없는 유머를 금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의 판결은 전 국민의 생활에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윌킨슨 판사가 말했듯이 미국 사회에는 풍자적인 논평을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가판대에 있는 신문 중에서 사람들을 비판하는 만화나 사설이 없는 신문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제리 폴웰이 감정적인 고통을 겪었다는 이유로 소송을 한다면 공적 인물 누구나 그런 소송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표현의 허용 기준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품위나 도덕에 반하는지 여부라고 정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기준도 제시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기준대로라면 결국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표현은 전부 처벌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배심원들이 얼마나 자주 감정적인 고통을 줄 의도가 있다는 평결을 내릴 것 같습니까? 이 사건에서는 그런 평결이 있었는데요.

아이작맨: 다른 사람을 비판적으로 얘기하는 거의 모든 때에 그런 평결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상대방의 감정을 다치게 할 생각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을 비판적으로 말한다면, 그리고 그 내용이 심하게 비판적인 것이라면 당연히 상대방의 감정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상식입니다. 따라서 감정적인 고통을 줄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런 미가 없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16.

그루트먼은 언론 자유가 증오를 위한 방책이 되거나 혹은 사실을 왜곡하고도 책임을 면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표현의 자유는 소중한 것이지만 무제한의 권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폴웰의 관점에서 볼 때 언론 자유는 보다 좁게 해석되어야 하며 헌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이 명백하게 수정헌법 1조의 대상에 포함하려 했던 중요한 견해와 가치만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루트먼은 공적 인물이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오직 모욕을 주고 평판을 떨어뜨리는 데 목적이 있는 악의적인 공격으로부터는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작맨은 표현의 자유가 보다 넓게 해석되어야 하며 극히 제한적인 때에만 보호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적 인물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내용이 저급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피해를 주지 않은 이상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폴웰 목사가 패러디 내용과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가 입은 피해는 감정적인 상처밖에 없다. 아이작맨은 미국이 진정으로 언론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상대방이 분노를 느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침묵을 강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7.

1997년 플린트와 폴웰은 <래리 킹 쇼>의 인터뷰에 함께 등장했다. 사람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플린트는 그의 휠체어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도, 누구를 위해서도 내 다리를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을 영웅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18.

철학자와 현인과 포르노 제작업자 모두 똑같이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 한 명의 자유를 억압하려고 하면 결국 그들 모두의 자유를 억압할 것이다.




-12~18번, ‘포르노 황제와 전도사-언론 자유의 상징이 된 <허슬러>의 발행인’ 중에서







19.

캐리 벅이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녀의 선택이나 잘못에 기인한 것은 아니지만 캐리 벅은 자손이 없었고 그녀의 유전자를 지닌 사람은 남지 않았다. 대신 아직도 공식적으로 폐기되지 않은 판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20.

만일 캐리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일을 기뻐했을 것이고 이렇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설명도 마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캐리 벅은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고 장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쉽게 용서하는 성격이었다. 그녀가 기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자신은 아이를 더 낳고 싶었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또한 기자들에게 자신이 비탄에 빠져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기자들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50여 년 전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라고 말하던 모습이나 혹은 수용시설에 인도되는 절차, 이의제기 과정 등에서 결국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믿고 조용히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 그리고 불임시술을 한 의사에게마저 ‘당신의 친구’라는 서명을 한 편지를 보낸 그녀의 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캐리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저는 일생동안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노력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19~20번, ‘훌륭한 태생을 위한 유전자 개량-캐리 벅의 불임시술과 출산의 자유 제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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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려움이 나서야 할 발을 뒤로 물리게 한다면 오만은 한 번 쉬고 디뎌야 할 걸음을 단번에 옮기게끔 만든다.




2.

‘유년기적 행동 경향’은 어린아이의 속성과 특권을 성년이 된 이후까지 이전시키는 것을 뜻한다. 어린아이는 개인화된 서구의 가정 구조에서 언제나 보호와 숭배의 대상이 되는 ‘작은 신’이다. 성인들은 어린아이의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지는 동시에, 어린아이를 티 없이 청결한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떠받들기도 한다. 그러한 보호 체계 속에서 어린아이는 스스로의 안전과 끝없는 탐욕을 타인에 의해 성취하는 기술과 습성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한 성인들이 ‘개인’의 이름으로 단자화되어가면서 온갖 분쟁과 핍박의 단초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인류를 지배하는 집단무의식적 경향을 갖는다는 게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논지이다. ‘희생화 경향’은 그것이 더욱 전면적인 양태로 드러나는 경우이다.

‘희생화 경향’은 한마디로 자신을 희생자라고 여기는 경향이다. 이것은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 식민주의 시대가 종결되면서 발생한 모든 문제들을 피지배자였던 제3세계 국가의 탓으로 전가시키는 정치적 목적과 결부되기도 한다. 요컨대 현대 서구 사회가 책임져야 할 문제들을 교묘하게 전이된 책임론으로 왜곡하며 스스로의 불행을 역설적으로 선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략)…

자신의 고통을 호소함으로써 안전과 쾌락을 동시에 보상받는 이러한 문화는 결과적으로 모든 육체적 정신적 불편을 약으로 해소하려는 성향으로 이어져 궁극적으로 발현되어야 할 에너지와 경쾌하고 즐거운 문화의 약진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게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진단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니체와 루소의 21세기형 적자라 할 수 있다.




3.

거울을 반성의 비유로 자주 쓰곤 하지만, 사실 거울을 보면서 가능한 건 반성이 아니라 변명이나 치장에 가깝다.




4.

전쟁이나 사고 등에 의해서 후천적으로 기형이 된 사람들이 육체적 고통 이상의 심리적 내상과 자기 파멸성, 그로 인한 고통의 현시욕이 강화되는 반면, 선천적 기형들은 타고난 고통으로 인해 오히려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들에겐 고통이나 절망이나 슬픔 등의 단어로 요약되거나 통합되지 않는 특별한 정서가 있다.




5.

따라서 정작 불행한 건 별 생각 없이 눈알만 굴리고 있는 기형들이 아니라 그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며 스스로의 정상성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 모든 정상적인 겁쟁이들이다.




6.

거울은 세계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아집과 망아에 휩싸인 자기 자신의 거짓된 영상을 보고 자기 자신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거울은 가면의 표상이다.




7.

그러나 삶의 무대란, 그리고 발현되지 못한 자아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숨겨져 있는 감정의 소리는 부지불식 삶의 기반을 흔들며 내 몸이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이라고 외친다. 그 외침이 솟아나오는 내 몸의 어느 한 지점엔 죽음이 아니라면 되돌릴 수 없는 진정한 나 자신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무대에 오르길 기다리고 있다. 자기 자신의 본연이란 그런 의미에서 늘 타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를 연기할 나의 배우는 아직 육체라는 분장실에서 대기 중이다. 되도록 빨리 그의 연기력을 확인하고 싶다.




8.

사상을 가장 확연하게 드러내는 건 물론 행동일 테지만, 그것을 정식화하고 논리화하는 데에는 글쓰기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흔히 정신적 작업이라고 알려진 글쓰기는 사실, 육체의 노동력이 부과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육체는 정신에 대한 대상으로서 존재하기보다는 정신을 이끌고 가는 하나의 근원적 추동장치인 것이다.




9.

따라서 흔히 말하는 내면이란 표면 속에 감춰진 이면이 아니라 표면들 간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10.

여기서 ‘순수 예술’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몰역사적인 편견과 오해를 새삼 곱씹어보자.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의도의 유무와는 별개로 예술의 궁극은 삶의 본연적 질서와 세계의 얼개를 통찰해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순수하다. 그 순수를 최대한 단순화시켜 반대말을 찾자면 허위나 가식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순수는 때 한 점 묻히지 않은 가공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때와 허물을 그 자체로 명징하게 사물화하여 나타내는 진실성과 자기반성적인 솔직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러한 순수성이 정직하게 발현된 예술은 삶과 세계의 질서로부터 이탈되기는커녕 그 모든 것의 심급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발언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무엇보다 순수하지 못하고 비참여적인 예술은 박물관이나 편협한 아카데미에 갇혀 느끼한 헛웃음이나 흘리고 있는 그 숱한 예술을 빙자한 화환들이다.




11.

그 소리가 설령 소음에 불과할지라도, 거짓을 말하느니 괴성을 지르는 게 더 인간답지 않겠는가.




12.

성룡과 이소룡이 맞붙어 싸우면 누가 이길 것이냐는 둥의 ‘소년다운’ 논쟁 끝에 온 동네 아이들에게 판정패한 이후 나는 오랫동안 이소룡을 잊고 있었다. 그 이후는 이소룡처럼 살기엔 힘이 달리고 성룡처럼 살기엔 유머가 달리는 웬만한 대한민국 남자들의 삶과 어슷비슷 피장파장이다. 그러다가 다시 이소룡을 만난 건 청춘이 남의 일로 여겨지며 불현듯 튀어나오려 하는 아랫배에 온 삶의 무게를 강퍅스레 우겨 넣던 스물아홉 살 무렵이었다.




13.

젊은 시절의 장정일이 어수선한 사회 상황과 절박한 생존 욕구로 빳빳하게 감각을 곤두세웠던 반면, 그보다 10여 년 이상 뒤처진 세대들의 시는 삶과 환상의 중간지대에서 자족적으로 이행되는 유희로서의 기능이 더 강하다. 때문에 “글쓰기가 직업이 아니라면, 구역질이 난다.”(‘인지 위에 쓴 시’ 말미에 붙은 첨언)는 장정일의 말에 대한 그들의 체감 온도는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장정일에 비하면 비교적 무난하고 고초 없는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문학은 삶의 향신료일지언정, 주식(主食)으로서의 기능은 다소 미약하다. 이건 그들이 문학의 위의(威儀)를 가벼이 여긴다는 뜻이 아니다. 대중문화 세례와 패셔너블한 감각, 미적 지적으로 리버럴한 사유 체계를 지닌 요즘 시인들에게 향신료와 주식의 차이는 그닥 크지 않다. 이 짧은 글에서 그들의 다종다양한 성향을 한꺼번에 운위하는 건 아전인수가 될 확률이 높지만, 거칠게 일반화하자면 배를 곯아 죽는 걱정은 않을지언정, 오로지 자신만의 향신료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자살할 수도 있는 게 요즘 ‘아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아마도 장정일의 발언에 이런 대구를 칠지도 모른다. ‘글쓰기가 직업이라면, 구역질나서 못할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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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취향 - 문예중앙산문선
강정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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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을 읽는다는 것>

토할 것 같았다. 새빨간 표지에 새파란 띠지. ‘드물게 재미있고 유쾌한 문화잡설’이라는 표지의 부제와 ‘한국일보 화제의 연재물’이라는 띠지의 글은 이 책을 다 읽은 나에게는 모두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표지의 부제를 ‘드물게 재미없고 불쾌한’이라고 뒤집을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다거나 유쾌해서 웃은 적이 없다는 것뿐이다. 한국일보 연재물이라는 것도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알겠지만 ‘화제의’라는 수사에 ‘인기 있는’이라는 이성적으로 따지면 전혀 상관없는 의미를 무의식중에 갖다 붙인 나는 애먼 새파란 띠지를 노려본다.


350쪽 정도의 분량에 연재물이라고 하니 금방금방 읽히겠지 했던 내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신문의 연재물을 모아놓은 에세이집이나 단편소설집의 경우 읽다보면 어느새 절반 이상 읽은 것을 확인하게 되는데 모두 43개의 글이 실려 있는 그닥 두껍다고 할 수 없는 이 빨간 책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토할 것 같았다. 누구는 보르헤스의 [픽션들]이 짧은 소설들의 밀도 때문에 한 번에 읽기가 힘들었다고도 하지만 그 기본이 되는 ‘이야기’가 주는 흥분 때문에 나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이 책에는 책을 손에 붙잡고 완독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없다. 물론 그것은 일주일에 한번 읽어야 소화가 될까 말까한 글들을 다 모아놓은 탓이 크다.



거기다가 제목이 말해주듯 이것들은 ‘나쁜’ 취향이다. 작가는 이 ‘나쁜’이 ‘좋다, 올바르다’의 반대말이 아니라 ‘제 멋대로의’, ‘독단적인’의 의미와 더 잘 어울린다고 쓰고 있다. 나쁜 취향은 결코 친절하지도 않고 대중적이지도 않다. 평범한 일반인(그러니까 일간지의 독자층이라고 하자.) 중에 여기 소개된 43개의 취향(실제로는 그 이상이다.) 중에서 절반 이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이건 이 책이 의도하는 바이니 존중해줘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여기에 소화불량의 원인을 또 하나 보태자면 이 글을 쓴 사람은 시인이다.(나는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한 번도 강정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시인의 산문을 읽는다는 것은 어쩐지 민망하다. 민망한데다가 고역이기까지 하다. 시인이 선택한 어휘라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 현학적이고 화려한 수사란. 본인은 무겁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글쎄다. 마크 해던의 소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이 생각났다. 그 소설에는 자폐아 크리스토퍼가 어떤 문학 작품의 ‘화려한’ 문장을 보면서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부분이 나온다. 통쾌했다. 진보 논쟁이 한창일 때 노무현 대통령이 최장집 교수를 비롯한 진보학자들의 말에 대해 ‘아무리 읽어봐도 어려워서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도 일종의 통쾌함이 있었는데 그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거의 끝부분에 이르러서는 정말 ‘악에 받쳐서’ (어지간해서는 다 읽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끝까지 다 읽었고 묘한 후련함과 승리감까지 느끼면서 새벽 3시가 넘어 잠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나에게 굉장한 인상을 남겼다. ‘토할 것 같았다’거나 ‘소화불량’, ‘친절하지도 대중적이지도 않다’ 등의 표현으로 전체적으로 부정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이런 책이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 자체가 ‘문화’의 저변을 넓히는 시도라는 점에서 존중했다. ‘나쁜 취향’이라는 책은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비주류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취향이란 결국 ‘나쁜 취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 책은 나에게 창작욕을 일으켰다.(물론 ‘-욕’이 들어가는 것들이 그렇듯 잠깐이었지만.) 대중적인 코드를 맞출 필요도 없으며 대상에 대해 A부터 Z까지 꿰고 있는 전문성은커녕 A만 알고 있어도 연재를 하고 이렇게 책을 낸다면 출판의 자유는 한층 넓어질 것이다. 아마 당신도 같은 제목으로 30개쯤 혹은 그 이상 되는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써도 괜찮을 것이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분명 좋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장정일쯤 되니까 이런 잡설도 책으로 내주는 구나’하고 생각하며 읽었던 [생각]의 첫 장 ‘아무 뜻도 없어요.’가 생각났다. 물론 연재물인 만큼 그보다는 훨씬 균일한 글이었다. 독자가 모르는 것을 말하고 있는 이 책의 운명은 다루고 있는 내용들처럼 비주류로 남을 수밖에 없지만 바로 그 점에서 이 책은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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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낯선 이를 좋아하기란 쉽다. 잘 아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어렵지.

 

2.

왠지 난 맹인들 앞에선 부끄러운 느낌이 든다.

 

3.

살면서 가끔은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고 차라리 폭탄처럼 터져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4.

어떤 반응이든지, '난 관심없어'라든가 '나랑 상관없어'하는 태도보다는 훨씬 낫다.

 

5.

한순간은 엄격하고 또렷하며 고집 세 보이지만, 다음 순간 수줍고 부드러우며 연약한 얼굴이 된다.

 

6.

"...(중략)...죄 그 자체가 곧 형벌이지. 내 말 알아듣겠나?"

 

7.

문제는 어떤 일이든 하루하루 되풀이 하다보면 그 당시에는 그렇게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게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한 일을 고백할 때다.

 

8.

내 안 깊은 곳 어딘가에 내가 세상 모든 것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있다. 그 모든 것이란 단지 나무나 풀, 동물뿐 아니라 빌딩과 계단, 바위와 도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말한다. 그곳은 죽음처럼 조용하고 그 누구와도 나눠보지 못한, 아마 공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그런 장소일 것이다.

 

9.

"최소한 내 관점으로 봐서는 두 사람이 삶을 깊게 탐구하려는 진실한 열망을 갖지 앟는 한 결혼 생활이 잘 풀려가는 것 같더라." 어머니가 무릎 위의 가방을 불안하게 움켜쥐고서 말했다. "외향에 진짜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결혼이 가장 성공적으로 보였어. 너는 그런 타입이 아니라서 걱정이 되는구나.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난 잘 모르겠다."

 

10.

진심으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단지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럽고 실망스러운 일이다.

 

11.

웬일인지 난 뭔가가 고장났을 때가 좋다. 바퀴가 펑크난다거나, 기차가 멈춰서서 움직이지 못한다거나, 기상 조건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되는 데에는 뭔가가 있다. 지구가 평소처럼 돌아가지 않을 때 비로소 긴장이 풀린다. 그럴 땐 호기심 많고 혼란스럽고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는 아이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그 짧은 동안은 책임질 일이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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