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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법정
마이클 S. 리프.H. 미첼 콜드웰 지음, 금태섭 옮김 / 궁리 / 2006년 9월
평점 :
<변론은 아트다>
이 책을 번역한 금태섭씨부터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했더니 2006년 가을 <한겨레>신문에 1회 연재로 그 화약 냄새만 살짝 풍겨주고 폭탄이 되려다 말았던,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기획 연재물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수사 받는 법’이라고 줄여서 불리기도 한다.)을 썼던 사람이었다. 연재 중단에 대해 그는 검찰의 외압을 부인했지만 그걸 누가 믿겠는가? (1회 연재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피의자가 되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 모든 것을 변호사에게 맡기라는 것.) 그 후 그는 검사직에서 물러났고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며 CBS에서 토요일 오전에 방송되는 ‘뉴스레이다 스페셜-책과 문화’를 진행 중이다. (잠깐의 검색으로 이 모든 사실을 알 수 있는 세상이다.)
법조계에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번역이 아주 깔끔하다. ‘법정’이라는 어렵고 딱딱할 것 같은 제목에 635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이렇게 ‘열렬하게’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깔끔한 번역 탓이 크다. 낯선 법률 용어나 사건, 인물을 페이지 밑에 주석을 달아 설명해 독서의 흐름을 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괄호를 이용해 설명하고 있다.
변론은 아트다. 책에 별을 주거나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카렌 앤 퀸란과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절반도 읽지 않은 채 ‘이건 별 다섯 개짜리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 생각이 끝까지 책을 읽으면서 틀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고 내 예상은 맞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일단 하나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면 어떻게 끝날지 너무나 궁금해서 그 편을 다 읽기 전에는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책 제목에 무게감을 더해주고 있는 ‘법정’이라는 단어나 책의 두께는 내용의 흥미진진함에 날아가 버린다. 재판은 법정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다. 저자는 그 싸움의 현장을 독자의 눈앞에 펼쳐놓고 그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재판의 과정과 변론들은 물론 사건의 배경 설명과 재판이 있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세하게 다루고 있어서 싸움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기 있는 여덟 편의 재판에서 논의되고 있는 쟁점들은 ‘안락사에 대한 논의, 노예제도의 철폐, 냉전과 매카시즘, 여성의 투표권, 언론의 자유와 통제, 음란물에 대한 사회적 규제, 생명을 담보로 한 의료보험 회사의 횡포, 정신박약자의 불임시술’이다. 현재까지 논란이 되는 것들도 있지만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어느 편에 서야할지가 나온다. 오늘날 노예제도에 찬성하거나 여자는 법적으로 투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테니까. 물론 몇몇 쟁점은 국내에서는 상황이 좀 다를 수도 있고 심적으로 동조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작가의 방향은 꽤나 분명해 보인다. 앞에 배치된 일곱 개의 재판은 훌륭한 변론과 판결로 세상을 좀 더 ‘좋은 쪽’으로 바꾼 것들이고 마지막 재판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비극으로, 앞의 재판들과 대조를 이룬다. 간단히 말해 앞에 일곱 개는 ‘좋은 판결’이고, 뒤의 하나는 ‘나쁜 판결’이다. 물론 각각의 이야기 속에도 ‘우리 편’과 ‘저쪽 편’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책의 방향이 이렇듯 분명한대도 ‘저쪽 편’의 변론을 듣고 감동받거나 하는 건 내가 귀가 얇은 탓도 있겠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여기 실린 변론들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변호사들은 정의를 찾지 않는다. 그들은 의뢰인의 승소를 위해 헌신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변호사라는 직업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나 또한 그랬었고 영화에서도 종종 변호사들의 이런 모습이 비판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 책이야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변호사들이 훌륭한 변론을 해서 사건을 ‘세상을 바꾼’ 재판으로 만들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승소를 했을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판결을 받았을까? 세상 모든 사건은 시시비비가 있지만 세상 모든 변호사는 승소해야 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변론은 예술이 되고, 설사 상대방이라 하더라도 훌륭한 논리 전개와 마음을 움직이는 변론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혹자는 이 책에 제시된 ‘방향’ 중 몇몇에 심적으로 동조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가히 ‘아트’라 할만한 양측의 논리 공박은 책을 읽는 내내 흥미를 유지하게 해 준다.
세상에는 합의가 불가능한 쟁점들이 있다. 이를테면 사형제 폐지나 안락사 논쟁이 그렇고 신의 존재 여부가 그렇다. 사형제 폐지는 결국 “흉악범도 존중받아야 할 ‘인간’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고 이 질문에는 중간이 없다. 안락사 역시 “살아있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생물학적 생명과 죽을 권리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타협이 불가능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신의 존재 여부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길게 이야기를 해봐도 서로가 아예 기본 전제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끝없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질문들에는 자신의 신념이 있을 뿐이다. 이런 질문들에 법이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신념까지 바꿀 수 있을까?
일례로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인 안락사 논란만 봐도 그렇다. 주인공 카렌 앤 퀸란은 재판으로 이른바 ‘죽을 권리’를 얻었지만 그렇다고 이 판결에 판대한 사람들의 ‘생명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는 편지와 그 마음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안락사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나 또한 ‘죽을 권리’나 ‘편안한 죽음’에 동조하는 바이지만 이에 반대했던 변호사들의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듣고 어떻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자리에서 증언한 카렌 앤의 어머니의 증언처럼 온전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죽기를 원한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삶의 질이 이 사건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거나 혹은 삶의 질이 생물학적인 생명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삶의 ‘질’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삶의 질’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볼 수 있는 능력입니까? 들을 수 있는 능력입니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까? 생명의 존엄성을 잊고 삶의 질로 대체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일단 그 문을 열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법정에는 이 사건 하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건이 이 법정이나 또 다른 법정에서 제기될 것입니다. 만일 삶의 질이 이 사건의 결정에 한 요소가 된다면 또 다른 병든 아이들의 부모들이 법정에 와서 자신의 자녀는 이런 식으로 살기 원하지 않았다거나 온전한 삶을 살기 원했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심장마비로 혼수상태의 부모를 둔 자녀도 똑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고령으로 망령이 난 사람들을 두고도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입니다. 삶의 질조차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사람들-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 정신지체 장애인, 다운증후군-을 두고도 같은 말이 나올 것입니다.
재난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생명의 존엄성’이 ‘삶의 질’이라는 말로 대체되는 순간 재난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카렌 퀀란은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카렌은 고통을 겪을 것이고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느끼는 슬픔을 우리도 쉽게 잊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은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고 법을 지키는 데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일지도 모릅니다.”
여기 실린 재판들이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몇몇의 재판들은 정말 ‘세상을 바꿨다’고 할 만큼 재고의 여지가 없는 올바른 판결로 끝이 났다.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아미스타드 선상 반란을 일으킨 노예제도 관련 재판이나, 생명의 가격을 담보로 횡포를 부린 의료보험 회사에 대한 한 환자의 투쟁이 그렇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기소된 수전 B.앤서니의 재판은 조금 다른데, 사실 수전 B.앤서니의 투표권을 얻기 위한 투쟁은 당시의 사회적 벽 앞에서 사실상 실패했다. 그녀는 재판에서 패소했다. 하지만 그 재판이 있은 후부터 50여 년에 걸친 여성들의 투쟁 끝에 결국은 결실을 보았다.(우리가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오늘날 일정한 나이만 되면 누구나 얻게 되는 투표권이라 그런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거기 담긴 투쟁의 역사는 물론 그 소중함도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투표도 안 하고.)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한 래리 플린트 사건은 너무나 유명해서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미국 수정헌법1조를 언급할 때 항상 거론되는 사건이다. 수정헌법 1조는 이렇다. ‘연방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자유로운 신앙 행위를 금지하거나, 또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국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및 불만 사항의 구제를 위하여 정부에게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약화시키는 법률을 만들 수 없다.’ 나는 영화 <래리 플린트>도 보지 못했고 이 사건에 대해서도 이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사건의 전말을 보다 상세히 알게 되었고 손톱을 씹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영화도 곧 보게 될 것 같다. (플린트가 직접 출연할 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노튼이 나온다고 하니 볼 수밖에)
내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기념비적인 사건인 래리 플린트 사건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 했다고 하면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 나를 파시스트 정도로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표현의 자유는 물론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세계에서 법의 영토로 옮겨와서 그토록 강력하고 포괄적이고 절대적으로 사회에 부과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극과 극은 좋지 않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표현의 자유를 ‘이런 식으로’ 보장하는 것도 내 생각에 그렇게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수정헌법 1조와 더불어 세계최초의 언론 자유선언문으로 불리는 ‘아레오파지티카’를 작성한 영국의 존 밀턴은 ‘사상의 자유시장’을 주장했지만 자신이 의원이 된 다음에는 직접 언론을 검열했고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말로 유명한 토머스 제퍼슨 역시 후에 ‘신문에 난 것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진실 그 자체는 오염된 전달 수단에 실림으로써 의심스럽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거짓과 오류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 진리에 가까운 사람이듯이, 나는 전혀 신문을 읽지 않는 사람이 신문을 읽은 사람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것은 물론 상황의 차이에서 오는 사소한(?) 모순이고 이것이 ‘아레오파지티카’나 제퍼슨의 언론의 자유를 위한 노력에 먹칠을 하지는 않는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 수정헌법 1조는 심지어 인터넷을 통한 포르노를 규제하기 위한 ‘성인인증제도’의 도입 역시 부결시켰다. 단적으로 말해 ‘표현의 자유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우선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
책에는 수정헌법 1조와 관련한 예외적인 판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단순한 욕설(정치적 의견이 담긴 욕설은 수정헌법1조의 보호를 받는다.), 즉각적인 위협이 되는 말들은 표현의 자유를 보호받지 못한다. 미국은 이처럼 거의 무한대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다. 미국은 그런 나라다. 단지 그뿐이다.
촘스키가 자주 인용하는 조지 오웰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권력자들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는 말을 떠올리면, 더 나아가 베르베르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언급한 검열의 문제까지 생각해보면(‘절대적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결국 주목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단지 그뿐’이라는 말이 저절로 생각난다.
공적 인물은 비판을 감수할 만큼 낯짝이 두꺼워야 하며 단지 감정적인 고통을 겪었다는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공적 인물은 래리 플린트 같은 ‘쓰레기’(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고 이 책을 읽은 내 생각도 그렇다. 그는 위선을 증오했고 명백히 폴웰 목사를 공격하기 위해 광고를 패러디했지만 법정에서는 그것은 단지 술 광고를 패러디했을 뿐이고 폴웰 목사가 모델이 된 것은 그 패러디 광고에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아서라는 위선을 내보였다. 책에서는 소개되지 않고 있지만 이 사건 외에도 플린트의 수많은 사건을 맡았던 아이작맨 변호사는 결국 그를 떠나고 만다.)가 자기 엄마와 화장실에서 그 짓을 했다는 광고를 실어도 ‘사람들이 그것을 사실로 믿지 않는다면’ 허위 사실 유포가 아니며 이런 종류의 감정적 고통과 ‘부시는 꼴통이다’라는 종류의 감정적 고통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므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 수정헌법 1조는 미국에서 경찰이 네오나치의 거리 집회를 보호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저지하는 일까지 만든다. 미국은 정말 ‘특이한’ 나라다.
수많은 고민을 안겨준 6장 ‘포르노 황제와 전도사’의 표현의 자유와 짝을 이루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재판은 책의 3장 ‘우리 안의 적’ 매카시즘 광풍과 관련한 사건이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사실 굳이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지 않아도 당장 선거법93조-‘선거 180일 전부터 선거에 영향을 끼칠 목적으로 정당·후보자를 지지·반대하는 내용에 대해 게시 및 상영을 할 수 없다’-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판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상검증은 히틀러가 자행한 일과 마찬가지로 후대 사람들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 것이다. 8장 캐리 벅의 강제 불임시술에 대한 재판 역시 ‘왜’가 아니라 ‘어떻게’다. 선거법 93조 역시 ‘어떻게 21세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가?’라고 묻고 싶지만 ‘대한민국이라서 가능하다’는 우울한 대답이 고개를 든다. 7장 ‘생명의 가격’을 읽을 때는 정말 화가 나고, 8장 ‘훌륭한 태생을 위한 유전자 개량’을 읽을 때는 정말 마음이 아프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유념할 것은 여덟 개의 재판이 모두 미국 내에서 일어난 재판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재판 제도는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고 내년부터 도입할 예정인 ‘국민참여재판제’ 또한 미국의 ‘배심제’와는 많이 딴판이다. 8편의 예술을 보며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 어떤 영화보다 우리의 실제 삶이 훨씬 드라마틱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