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려움이 나서야 할 발을 뒤로 물리게 한다면 오만은 한 번 쉬고 디뎌야 할 걸음을 단번에 옮기게끔 만든다.




2.

‘유년기적 행동 경향’은 어린아이의 속성과 특권을 성년이 된 이후까지 이전시키는 것을 뜻한다. 어린아이는 개인화된 서구의 가정 구조에서 언제나 보호와 숭배의 대상이 되는 ‘작은 신’이다. 성인들은 어린아이의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지는 동시에, 어린아이를 티 없이 청결한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떠받들기도 한다. 그러한 보호 체계 속에서 어린아이는 스스로의 안전과 끝없는 탐욕을 타인에 의해 성취하는 기술과 습성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한 성인들이 ‘개인’의 이름으로 단자화되어가면서 온갖 분쟁과 핍박의 단초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인류를 지배하는 집단무의식적 경향을 갖는다는 게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논지이다. ‘희생화 경향’은 그것이 더욱 전면적인 양태로 드러나는 경우이다.

‘희생화 경향’은 한마디로 자신을 희생자라고 여기는 경향이다. 이것은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 식민주의 시대가 종결되면서 발생한 모든 문제들을 피지배자였던 제3세계 국가의 탓으로 전가시키는 정치적 목적과 결부되기도 한다. 요컨대 현대 서구 사회가 책임져야 할 문제들을 교묘하게 전이된 책임론으로 왜곡하며 스스로의 불행을 역설적으로 선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략)…

자신의 고통을 호소함으로써 안전과 쾌락을 동시에 보상받는 이러한 문화는 결과적으로 모든 육체적 정신적 불편을 약으로 해소하려는 성향으로 이어져 궁극적으로 발현되어야 할 에너지와 경쾌하고 즐거운 문화의 약진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게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진단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니체와 루소의 21세기형 적자라 할 수 있다.




3.

거울을 반성의 비유로 자주 쓰곤 하지만, 사실 거울을 보면서 가능한 건 반성이 아니라 변명이나 치장에 가깝다.




4.

전쟁이나 사고 등에 의해서 후천적으로 기형이 된 사람들이 육체적 고통 이상의 심리적 내상과 자기 파멸성, 그로 인한 고통의 현시욕이 강화되는 반면, 선천적 기형들은 타고난 고통으로 인해 오히려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들에겐 고통이나 절망이나 슬픔 등의 단어로 요약되거나 통합되지 않는 특별한 정서가 있다.




5.

따라서 정작 불행한 건 별 생각 없이 눈알만 굴리고 있는 기형들이 아니라 그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며 스스로의 정상성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 모든 정상적인 겁쟁이들이다.




6.

거울은 세계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아집과 망아에 휩싸인 자기 자신의 거짓된 영상을 보고 자기 자신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거울은 가면의 표상이다.




7.

그러나 삶의 무대란, 그리고 발현되지 못한 자아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숨겨져 있는 감정의 소리는 부지불식 삶의 기반을 흔들며 내 몸이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이라고 외친다. 그 외침이 솟아나오는 내 몸의 어느 한 지점엔 죽음이 아니라면 되돌릴 수 없는 진정한 나 자신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무대에 오르길 기다리고 있다. 자기 자신의 본연이란 그런 의미에서 늘 타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를 연기할 나의 배우는 아직 육체라는 분장실에서 대기 중이다. 되도록 빨리 그의 연기력을 확인하고 싶다.




8.

사상을 가장 확연하게 드러내는 건 물론 행동일 테지만, 그것을 정식화하고 논리화하는 데에는 글쓰기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흔히 정신적 작업이라고 알려진 글쓰기는 사실, 육체의 노동력이 부과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육체는 정신에 대한 대상으로서 존재하기보다는 정신을 이끌고 가는 하나의 근원적 추동장치인 것이다.




9.

따라서 흔히 말하는 내면이란 표면 속에 감춰진 이면이 아니라 표면들 간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10.

여기서 ‘순수 예술’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몰역사적인 편견과 오해를 새삼 곱씹어보자.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의도의 유무와는 별개로 예술의 궁극은 삶의 본연적 질서와 세계의 얼개를 통찰해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순수하다. 그 순수를 최대한 단순화시켜 반대말을 찾자면 허위나 가식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순수는 때 한 점 묻히지 않은 가공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때와 허물을 그 자체로 명징하게 사물화하여 나타내는 진실성과 자기반성적인 솔직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러한 순수성이 정직하게 발현된 예술은 삶과 세계의 질서로부터 이탈되기는커녕 그 모든 것의 심급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발언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무엇보다 순수하지 못하고 비참여적인 예술은 박물관이나 편협한 아카데미에 갇혀 느끼한 헛웃음이나 흘리고 있는 그 숱한 예술을 빙자한 화환들이다.




11.

그 소리가 설령 소음에 불과할지라도, 거짓을 말하느니 괴성을 지르는 게 더 인간답지 않겠는가.




12.

성룡과 이소룡이 맞붙어 싸우면 누가 이길 것이냐는 둥의 ‘소년다운’ 논쟁 끝에 온 동네 아이들에게 판정패한 이후 나는 오랫동안 이소룡을 잊고 있었다. 그 이후는 이소룡처럼 살기엔 힘이 달리고 성룡처럼 살기엔 유머가 달리는 웬만한 대한민국 남자들의 삶과 어슷비슷 피장파장이다. 그러다가 다시 이소룡을 만난 건 청춘이 남의 일로 여겨지며 불현듯 튀어나오려 하는 아랫배에 온 삶의 무게를 강퍅스레 우겨 넣던 스물아홉 살 무렵이었다.




13.

젊은 시절의 장정일이 어수선한 사회 상황과 절박한 생존 욕구로 빳빳하게 감각을 곤두세웠던 반면, 그보다 10여 년 이상 뒤처진 세대들의 시는 삶과 환상의 중간지대에서 자족적으로 이행되는 유희로서의 기능이 더 강하다. 때문에 “글쓰기가 직업이 아니라면, 구역질이 난다.”(‘인지 위에 쓴 시’ 말미에 붙은 첨언)는 장정일의 말에 대한 그들의 체감 온도는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장정일에 비하면 비교적 무난하고 고초 없는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문학은 삶의 향신료일지언정, 주식(主食)으로서의 기능은 다소 미약하다. 이건 그들이 문학의 위의(威儀)를 가벼이 여긴다는 뜻이 아니다. 대중문화 세례와 패셔너블한 감각, 미적 지적으로 리버럴한 사유 체계를 지닌 요즘 시인들에게 향신료와 주식의 차이는 그닥 크지 않다. 이 짧은 글에서 그들의 다종다양한 성향을 한꺼번에 운위하는 건 아전인수가 될 확률이 높지만, 거칠게 일반화하자면 배를 곯아 죽는 걱정은 않을지언정, 오로지 자신만의 향신료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자살할 수도 있는 게 요즘 ‘아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아마도 장정일의 발언에 이런 대구를 칠지도 모른다. ‘글쓰기가 직업이라면, 구역질나서 못할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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