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은 안락사 논의의 진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미국안락사협회(the euthanasia society of america, ESA)는 안락사를 합법화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은 이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나치 치하의 유럽에서 사회 부적응자들을 살해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사실 나치 정권은 안락사가 아닌 우생학을 신봉하고 있었다. 안락사는 고통 없는 죽음을 의미하지만, 우생학은 정신적, 육체적 혹은 유전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솎아 내어 우수한 종족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미국안락사협회는 우생학의 오명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 안락사협회 회원 중 많은 사람들이 우생학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2.
카렌 앤 퀸란 사건은 세 가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카렌 앤과 같이 ‘영구적인 식물인간 상태’로 쇠약해져 가는 사람을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와 회복할 가망이 없는 환자의 죽을 권리 사이의 경계는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누가 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부모인가, 의사인가 혹은 판사인가?
…(중략)…
이 기간에 퀸란 가족은 수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이 사건은 너무나 유명해져서 받는 사람의 주소를 ‘카렌 앤 퀸란 가족 앞, 미국’이라고 쓴 편지도 배달될 정도였다. 편지를 보낸 사람들 대부분은 퀸란 가족의 고통에 동정심을 보냈다. 그런 사람들은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가족이나 친척이 있었고 퀸란 가족이 카렌 앤의 고통을 끝내 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카렌 앤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편지를 보낸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생명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는 명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3.
밖에 나가서 노는 아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놀다가 넘어져서 다친 아이는 어머니에게 돌아와서 울음을 터뜨립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고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법은 이런 일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법원으로 달려가서 슬픔과 고통을 없애 달라는 판결을 청구할 수 없습니다. 법은 이런 때에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회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입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법이 이러한 일을 없앨 수 있습니까? 법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까? 법은 이때에도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퀸란 가족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4.
종교의 자유에 관한 수정헌법 1조에서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인 불가침의 인권입니다. 국가는 이러한 권리에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따른 실천은 국가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만일 미국 내에 인간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믿는 종교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 종교를 믿는다고 합시다. 신자들이 그러한 종교를 믿는 것 자체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실행에 옮기려고 한다면 그들의 행동은 실정법에 저촉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때에는 실정법이 우선합니다.
-3,4번 ‘카렌 앤의 주치의들을 위한 랠프 포르지오 변호사의 변론’ 중에서
5.
이 자리에서 증언한 카렌 앤의 어머니의 증언처럼 온전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죽기를 원한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삶의 질이 이 사건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거나 혹은 삶의 질이 생물학적인 생명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삶의 ‘질’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삶의 질’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볼 수 있는 능력입니까? 들을 수 있는 능력입니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까? 생명의 존엄성을 잊고 삶의 질로 대체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일단 그 문을 열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법정에는 이 사건 하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건이 이 법정이나 또 다른 법정에서 제기될 것입니다. 만일 삶의 질이 이 사건의 결정에 한 요소가 된다면 또 다른 병든 아이들의 부모들이 법정에 와서 자신의 자녀는 이런 식으로 살기 원하지 않았다거나 온전한 삶을 살기 원했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심장마비로 혼수상태의 부모를 둔 자녀도 똑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고령으로 망령이 난 사람들을 두고도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입니다. 삶의 질조차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사람들-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 정신지체 장애인, 다운증후군-을 두고도 같은 말이 나올 것입니다.
재난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생명의 존엄성’이 ‘삶의 질’이라는 말로 대체되는 순간 재난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카렌 퀀란은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카렌은 고통을 겪을 것이고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느끼는 슬픔을 우리도 쉽게 잊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은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고 법을 지키는 데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일지도 모릅니다.
-5번, ‘모리스 카운티 도널드 콜레스터 검사의 변론’ 중에서
6.
세인트 마거릿 성당 지하실에서 열린 두 번째 기자회견에서 조 퀸란은 판결에 대한 좌절감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조는 뮤어 판사가 의사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선고한 것은 용기 있는 판결이었다고 말했다.
보수적 칼럼니스트인 조지 윌은 판결을 지지하는 칼럼을 썼다.
“퀸란 가족의 승소판결은 살인을 정당화하는 결정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판결이 법적으로는 올바를지 모르지만 “법의 경직성은 인간적인 비극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고 썼다.
-1~6번,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카렌 앤 퀸란과 인간답게 죽을 권리’ 중에서
7.
헌신적이고 노련한 변호사들에게도 중대한 약점이 있었다. 언어장벽 때문에 초보적인 의사소통만을 할 수 있는 의뢰인을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 예일대학의 언어학 전문가인 깁스 교수가 다시 아프리카인들을 방문했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쳐들고 말했다.
“하나”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한 아프리카인이 대답했다.
“이타”
이 획기적 진전에 용기백배하여 깁스는 멘데어로 열까지 세는 방법을 배우고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뉴헤이븐과 뉴욕을 뒤지기 시작했다.
-7번, ‘아미스타드 선상의 반란-자유를 되찾기 위한 흑인 노예들을 슬픈 항해’ 중에서
8.
나이저가 하나씩 질문을 던질 때마다 하트넷은 예민하게 반응했고 답변에는 짜증이 묻어났다. 마침내 나이저는 하트넷에게 명예훼손의 책임을 묻는 질문을 던졌다.
“나이저 씨” 하트넷이 말을 잘랐다.
“나는 피고인이 아니고 당신도 검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이저는 잠시 동안 하트넷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지금 제대로 이해한 겁니까? 지금 감히 저한테 증인신문 방식을 가르치려는 겁니까? 그렇습니까? 당신이 말입니까? 뻔뻔스럽게 검사와 피고인의 얘기를 꺼낸단 말입니까? 당신은 판사, 배심원, 검사, 사형집행인의 역할을 혼자 다하면서 수백 명의 죄 없고 애국적인 사람들의 인생과 경력을 파멸시켰습니다! 당신은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의 목에 올가미를 씌워서 그 자식들을 굶게 만들고 그의 평판을 끝장내려고 했습니다! 그런 당신이 저에게 사건진행 절차를 가르치겠다는 겁니까?”
나이저의 차가운 어조는 슈미트와 하트넷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트넷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하면서 대답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슈미트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답변을 막았다. 하트넷은 시가를 피워보려고 했지만 놀란 나머지 귀 쪽으로 시가를 가져갈 뻔했다.
9.
계속해서 분홍색 메모지를 꺼내 무엇인가를 적는 하트넷의 행동에 질린 나이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하트넷은 법정에 와서 재판을 방청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배심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눈에는 하트넷의 계획이 분명해 보였다. 하트넷이 폴크의 재판을 참관한 살마들을 폴크의 지지자이자 공산주의 동조자로 몰아붙이려는 속셈이었다.
볼란 변호사가 하트넷의 신뢰성을 회복하고자 그에게 분홍색 메모지에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냐고 질문했을 때 최후의 순간이 찾아왔다. 하트넷은 몇몇 사람들을 호명한 다음에 한 남자의 이름을 대면서 그가 폴크의 부인인 린의 옆자리에 앉았다고 주장했다. 나이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트넷에게 린 폴크를 가리켜 보라고 말했다. 하트넷이 한 여자를 가리키자 나이저는 극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에게 이름을 말해 보라고 했다. “제 이름은 헬렌 소퍼입니다. S-O-F-F-E-R이라고 쓰지요”
법정 안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10.
여러분이 법정에서 하트넷 씨를 직접 보고 그가 신문받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그가 힘 있는 거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독재자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직시하면 움츠려듭니다.
-‘나이저 변호사의 최종 변론’ 중에서
-8~10번, ‘우리 안의 적-매카시 선풍에 맞선 라디오 스타’ 중에서
11.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중략)…
자신들이 법을 어기고도 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사람들은 더 악하고 잔인해집니다.
-11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식민지 시대의 언론 자유를 위한 투쟁’ 중에서
12.
플린트가 언론의 주목을 받을 만한 기행을 즐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언론 자유와 표현 자유를 침해하는 법은 제정할 수 없다”는 수정헌법 1조에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미국이 그레나다를 침공할 당시 국방부가 기자들의 보도를 금지하자 전국의 신문사와 방송사가 정부를 성토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기관들이 정부에 항의를 했지만 실제로 정부가 수정헌법 1조를 위반했다고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래리 플린트였다. 물론 플린트가 <허슬러>의 기자를 그레나다에 보내서 침공작전을 보도하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정부가 취재 자유를 제한하려 한다는 데 격분했다.
13.
폴웰은 카터가 대통령이 되면 기독교 근본주의를 정책에 반영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플레이보이>와 인터뷰를 하고 소련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는 것을 보자, 폴웰은 카터 대통령이 기독교 근본주의를 대표할 만큼 보수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폴웰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카터에 반대하기 시작했고 카터 대통령을 “하느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사람”이라고 불렀다.
폴웰의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카터가 말하기를, 대통령은 전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직책이지 ‘도덕적 다수파’에게 책임을 지는 자리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제리 폴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달라는 집요한 질문을 받자 카터는 결국 이런 대답을 했다.
“독실한 기독교도의 시각으로 보자면, 제 생각으로는, 그는 지옥에 갈 거요”
14.
래리 플린트는 폴웰이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분노하였다. 플린트는 이 소송을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시도로 보았다. 그는 폴웰이 사회적 쟁점이나 공적 인물에 대해 기독교 근본주의적 관심을 설파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폴웰은 미국 보수주의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고 그러한 점에서 공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정헌법 1조는 스스로 비판의 광장에 나선 공적 인물을 놓고 일반 시민이 그 진실과 성격을 논평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였다.
일반적으로 영향력 있는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나 실수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수정헌법 1조가 아니면 미국인은 권력자들에 대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플린트는 자신의 패러디가 모욕적이고 도발적이고 두말할 나위 없이 비열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수정헌법 1조는 이러한 패러디도 보호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5.
화이트 대법관: 만일 이 사건에 공적 인물이 관련이 없다면 손해배상 책임을 감수하겠습니까?
아이작맨: 다행스럽게도 이 사건은 그런 사건이 아닙니다. 하지만 대법관님의 질문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사실관계에 대한 허위 주장이 없다면, 혹은 사실로 오인할 만한 내용이 없다면 설사 그 상대방이 공적 인물이 아니더라도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공적 인물이 관련되지 않은 사건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은 이미 시민들을 감정적인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공공 이익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이작맨: 이 나라의 국민이 각자의 의견을 표현할 자유를 보장받는 것은 공공 이익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중 하나입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글쎄요. 이것으로 표현된 의견은 무엇인가요?
아이작맨: 대법관께서 제시한 예 말씀입니까, 아니면 이 사건 말씀입니까?
스티븐스 대법관: 둘 중 어떤 것이든지,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습니까?
아이작맨: 이 사건에서 문제된 광고 패러디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점을 설명하기 전에 우선 이 패러디가 150쪽짜리 잡지의 한 쪽 정도라는 사실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이해합니다.
아이작맨: 그 말은, 즉 이 패러디가 학술논문이나 소설처럼 복잡한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이 패러디가 가지고 있는 의미 중 첫 번째는 캄파리 광고의 패러디라는 점입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아이작맨: 캄파리 광고를 패러디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적법합니다. 그 패러디가 캄파리 광고의 패러디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제리 폴웰에 대한 풍자입니다. 그는 이 광고 패러디에 등장하기에 딱 맞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도저히 그러한 광고에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폴웰은 음주나 섹스를 반대해 온 사람입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당신이 말한 공공 이익에 대해서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폴웰을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이 공공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재미있게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 공공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입니까? 공공 이익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이작맨: 여기에는 두 종류의 공공 이익의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패러디의 마지막 부분에서 암시되었듯이 폴웰이 하는 말들은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다는 <허슬러>의 견해가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허슬러>를 만드는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운동을 하면서 “그 잡지를 읽지 마시오, 그 잡지는 미국의 정신에 독 같은 존재입니다. 혼외정사를 하지 마시오, 음주를 하지 마시오.”라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을 두고 그가 하는 말은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 패러디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패러디의 첫 부분은 폴웰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폴웰은 뛰어난 설교자입니다. 그가 텔레비전에 출연할 때는 그는 멋진 표정을 짓고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성실한 목소리로 말을 합니다. 이러한 상황 대신에 <허슬러>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껍데기를 벗겨 보자. 이 사람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려 보자. 적어도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들을 만한 수준까지 끌어내리자”(웃음)
아이작맨: 대법원에서는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농담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지금의 답변은 내 질문 중에 앞부분에 대한 답변입니다. 공적 인물이 관련되지 않은 때에는 공공 이익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이작맨: 공적 인물이 관련되지 않은 때에는 물론 공공 이익과는 보다 적은 관련성만이 있습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적은 관련성? 어떤 관련성이 있다는 것입니까?
아이작맨: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공공 이익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러한 의견을 듣는다고 해서 공공 이익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변호사, 빈스 롬바르디(미식 축구팀 그린베이 패커스의 전설적인 감독. 최하위 팀을 맡아 최강의 팀으로 바꿔 놓았고 3년 만에 북아메리카프로미식축구리그NFL 챔피언을 차지했다. “승리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승리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 수정헌법 1조가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당연히 그것은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유일한 가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 생각에 당신은 또 하나의 중요한 가치를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훌륭한 사람도 공적 인물이 되고 공공에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 말입니다. 당신의 이론대로라면 공적 인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혹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공적 인물이 된 사람은 자신을 보호할 수 없고, 심지어 화장실에서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패러디로부터 어머니를 보호할 수도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한 가치도 보호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모욕을 참아내야 하는 것이라면 조지 워싱턴이 공적 인물이 되려고 했겠습니까? 수정헌법 1조의 가치를 지키면서 사람들 스스로 공공에 봉사하려는 마음이 들게 할 방법은 없습니까? 그 두 가지 가치를 조화시킬 방법은 없습니까?
아이작맨: 한 가지 방안은 이미 앞의 질문에서도 암시되었듯이 공적인물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법원이 그러한 구분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공적 인물이 되려고 했던 조지 워싱턴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조지 워싱턴이 당나귀에 탄 채 끌려가는 만화입니다. 그 밑에는 “누구든지 이 나귀를 끌고 가는 사람은 이 멍청이도 같이 끌고 가는 것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저라면 그런 만화를 참을 수 있을 겁니다. 조지 워싱턴도 참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자기 어머니와 화장실에서 근친상간을 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사이에 경계선을 그을 수는 없는 겁니까?
아이작맨: 내용 면에서 볼 때 그런 경계선은 없습니다. <허슬러>는 폴웰이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스칼리아 대법관님, 그것은 기호의 문제입니다. 대법관님이 ‘포프 대 일리노이’사건에서 말씀하셨듯이 기호라는 것은 논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호를 두고 소송을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그 패러디가 기호에 맞는지 혹은 맞지 않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폴웰이 그의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했다고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폴웰을 그렇게 묘사하고 그러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기호에 맞느냐는 것입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공적 인물이라면 괜찮다?
아이작맨: 그것은 아닙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아니라고요?
아이작맨: 만일 그것이 허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포하는 것이라면 괜찮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어떤 공적 인물에 대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제가 사실은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런 일은 금지되어야 마땅합니다.
제 주장을 정리하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사건은 단순히 <허슬러>와 제리 폴웰 사이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판결은 단지 <허슬러>가 지금까지 해 오던 이런 종류나 혹은 다른 종류의 터무니없는 유머를 금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의 판결은 전 국민의 생활에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윌킨슨 판사가 말했듯이 미국 사회에는 풍자적인 논평을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가판대에 있는 신문 중에서 사람들을 비판하는 만화나 사설이 없는 신문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제리 폴웰이 감정적인 고통을 겪었다는 이유로 소송을 한다면 공적 인물 누구나 그런 소송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표현의 허용 기준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품위나 도덕에 반하는지 여부라고 정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기준도 제시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기준대로라면 결국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표현은 전부 처벌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티븐스 대법관: 배심원들이 얼마나 자주 감정적인 고통을 줄 의도가 있다는 평결을 내릴 것 같습니까? 이 사건에서는 그런 평결이 있었는데요.
아이작맨: 다른 사람을 비판적으로 얘기하는 거의 모든 때에 그런 평결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상대방의 감정을 다치게 할 생각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을 비판적으로 말한다면, 그리고 그 내용이 심하게 비판적인 것이라면 당연히 상대방의 감정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상식입니다. 따라서 감정적인 고통을 줄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런 미가 없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16.
그루트먼은 언론 자유가 증오를 위한 방책이 되거나 혹은 사실을 왜곡하고도 책임을 면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표현의 자유는 소중한 것이지만 무제한의 권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폴웰의 관점에서 볼 때 언론 자유는 보다 좁게 해석되어야 하며 헌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이 명백하게 수정헌법 1조의 대상에 포함하려 했던 중요한 견해와 가치만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루트먼은 공적 인물이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오직 모욕을 주고 평판을 떨어뜨리는 데 목적이 있는 악의적인 공격으로부터는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작맨은 표현의 자유가 보다 넓게 해석되어야 하며 극히 제한적인 때에만 보호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적 인물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내용이 저급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피해를 주지 않은 이상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폴웰 목사가 패러디 내용과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가 입은 피해는 감정적인 상처밖에 없다. 아이작맨은 미국이 진정으로 언론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상대방이 분노를 느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침묵을 강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7.
1997년 플린트와 폴웰은 <래리 킹 쇼>의 인터뷰에 함께 등장했다. 사람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플린트는 그의 휠체어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도, 누구를 위해서도 내 다리를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을 영웅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18.
철학자와 현인과 포르노 제작업자 모두 똑같이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 한 명의 자유를 억압하려고 하면 결국 그들 모두의 자유를 억압할 것이다.
-12~18번, ‘포르노 황제와 전도사-언론 자유의 상징이 된 <허슬러>의 발행인’ 중에서
19.
캐리 벅이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녀의 선택이나 잘못에 기인한 것은 아니지만 캐리 벅은 자손이 없었고 그녀의 유전자를 지닌 사람은 남지 않았다. 대신 아직도 공식적으로 폐기되지 않은 판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20.
만일 캐리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일을 기뻐했을 것이고 이렇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설명도 마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캐리 벅은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고 장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쉽게 용서하는 성격이었다. 그녀가 기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자신은 아이를 더 낳고 싶었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또한 기자들에게 자신이 비탄에 빠져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기자들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50여 년 전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라고 말하던 모습이나 혹은 수용시설에 인도되는 절차, 이의제기 과정 등에서 결국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믿고 조용히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 그리고 불임시술을 한 의사에게마저 ‘당신의 친구’라는 서명을 한 편지를 보낸 그녀의 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캐리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저는 일생동안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노력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19~20번, ‘훌륭한 태생을 위한 유전자 개량-캐리 벅의 불임시술과 출산의 자유 제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