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디작은 임금님 - 마술적 힘으로 가득한 한 편의 시 같은 동화
악셀 하케 지음, 미하엘 소바 그림, 조경수 옮김 / 미다스북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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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른 아이>




#1. 가와이 하야오, 마츠이 다다시, 야나기다 구니오가 공동으로 쓴 <그림책의 힘>이라는 책에 잠시 언급된 이 책에 대한 설명 몇 줄을 읽고, 내가 느낀 감정은 복잡한 것이었다. 뭔가를 도둑맞은 기분이었고(좀 심하게 표현하자면-거만하고 어처구니 없게도-선수를 빼앗긴 것에 분했다고나 할까),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으며,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무척이나 반가웠다. 보고 싶었다. 나의 상상이 그림으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




#2. 이 책을 사려고 알아본 결과 2005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미다스북스라는 출판사에서는 더 이상 찍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어느 서점에도 없었다. 아마존에서 구입할까 하였으나 번거롭고 돈이 많이 들 것 같았고, 결국 곧 한국에 돌아와 군대에 가는 친구에게 부탁하는 쪽지를 보냈으나 바로 그 다음날 우연히 들른 교보문고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문의를 하였고 지방에 있으니 도착하면 연락드리겠다는 확인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작디작은 임금님과 이렇게 만났다.




#3. 그림책의 힘을 말하는 책에 소개되어 있으니 나는 당연히 그림책이려니 생각했지만, 교보문고에서도 그 책은 ‘소설’코너에 문의하여 구할 수 있었고, 실제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 페이지에 삽화나 일러스트가 들어가 있는 커다란 판형의 그림책은 아니었다.(그래서 잠깐 원래의 그림책이 있고 이건 성인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게 원래의 책이 맞다.) 130페이지에 달하는 본문에서 그림은 겨우 17컷밖에 없었고, 판형도 아주 작았으며, 게다가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부분을 표현한 그림도 없었다.




#4. 나의 상상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아주 자그마하게 태어나서 점점 커졌다가 다시 조금 작아지고 죽게 되지만 반대라면 어떨까? 태어나자마자 커다란 몸집을 갖고 말도 하고 일도 하는 ‘어른’으로 태어나서,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몸이 작아지고 ‘아이’가 되어가는 상상. 이게 무슨 의미를 갖는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그냥 그런 공상을 했었다. 왜 늙으면 도로 애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이 상상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싶은 사람이라면(마크 트웨인 식이라면 고소나 추방을 당하거나 혹은 총살에 처해야겠지만) 다음에 인용하는 책 속의 대화가 조금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5. 이 책의 추천사에서 나는 또 삼천포로 빠져 혼자 좋아한다. 박이문 씨가 쓴 추천사에는 '양복 새끼 주머니'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물론 작디작은 임금님이 세상 구경을 위해 들어갔던 주인공의 '양복 상의에 달려 있는 작은 주머니'를 말하지만 그 단어만 떼어놓고 가만히 보고있으면 재밌는 생각이 든다. '양복'과 '새끼'를 붙여 생각하고 '주머니'를 따로 생각하는 것이다. 양복새끼는 '양복입은 새끼'를 말하고 주머니는 흔히 그렇듯 '개인의 경제사정'을 말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임금님네 나라에서는 어린 시절이 삶의 마지막에 온다는 거죠?

-생각 좀 해봐! 기뻐할 수 있는 뭔가를 내내 갖고 있는 거라고!


 

#6. 이 책이 간간이 자아내는 웃음의 성격은 독특하다. 작디작은 임금님은 어른이면서 아이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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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생각한다 - 과학 속 사상, 사상 속 과학
이상욱.홍성욱.장대익.이중원 지음 / 동아시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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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8년도 넘었다. 이과와 문과를 나누기 위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난 둘 다 배우고 싶은데 왜 한 과로 내모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답답함을 느낀 지는 10년이 지났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문과와 이과를 나누고 있다. 강산은 변했는지 모르지만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이쪽’ 세계에서 살면서 ‘저쪽’ 세계에서 쓰는 말들을 못 알아듣게 된 것은.




최재천 교수를 필두로 한 많은 학자들이 통섭을 외치지만 실제로 얼마나 열려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들은 모두 ‘전문가’들이며 내가 생각하는 전문가란 기본적으로 ‘편향된 사고를 훈련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얼마나 학문들을 수평적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물론 내 생각이 틀렸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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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화 1 - 동양의 마음과 상상력 읽기, 중국편
정재서 지음 / 황금부엉이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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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훌륭한 책이다. 아마 2권을 갖고 있었더라면 곧바로 2권을 펼쳤을 것이다. 동양신화를 공부한 학자의 시각을 충분히 담아내면서도 '옛이야기의 맛'을 놓치지 않고 있다. 




저자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시간 순으로 짜여있지 않다. 신화라는 시간을 초월한 주제를 연대를 의식해서 짜 맞춘다는 것은 저자의 말대로 '난센스'다. 대신에 그는 '쉽게 읽어나갈 수 있도록' 책을 구성했다. 그래서 그런지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책장을 넘기는 힘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화와 전설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책의 후반부에 다루고 있는, 이미 역사적으로 그 실체가 입증된 은나라나 강태공 등 '역사'와 가까운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재밌게 읽으면서도 '이게 신화 책인가?'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서양신화와 동양신화의 중대한 차이가 있다. 더불어 이런 의문은 우리의 사고 자체가 얼마나 서구화되었는지를 입증한다. 동양신화에는 신과 인간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서양의 신화처럼 신, 인간, 요정 이런 엄격한 종족(?)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동양의 상상력과 서양의 상상력을 비교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난센스지만 서양의 상상력에 길들여진 탓인지 동양의 상상력은 그 느낌이 자유분방하고 스케일은 더 크게 느껴진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접한 중국의 옛이야기가 주는 호방함과 거침없는 상상력에 동경의 눈빛을 보내던 내가 '재미있는 중국신화'가 잔뜩 있을 거라 기대하며 샀던 책은 민음사에서 나온 위앤커의 '중국신화전설' 1,2권이었다. 어찌나 책장이 안 넘어가던지, 그 답답함이란…. 




이 책을 읽고 가장 놀란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었는데 이 책에는 분명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가득하다. (2권의 목차를 보니 2권이 내 구미에 더 맞는 듯하지만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닌, 학문으로서의 동양신화도 접할 수 있다. 비판적 신화읽기라고 불러도 좋을 방법으로, 저자는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물음을 슬쩍 흘린다. 무겁지 않게.




저자의 비판적 신화읽기는 단지 서양신화에 익숙한 세태를 비판하는 차원이 아니라, 신화에 숨어있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그것도 그 의미를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이를테면 '선양'이라고 하는 왕위 계승 방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 그렇다. 지금도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말로 자주 쓰는 '요순시대'의 주인공 요 임금과 순 임금. 태평성대였던 만큼 요에서 순으로 넘어가는 과정도 평화로워 보인다. '태평성대'라는데 피비린내 나는 권력 싸움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비극적인 순 임금의 죽음을 두고 저자는 슬쩍 이런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무 생각 없이 서문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시작하며’를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동양신화 속으로 ‘확’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서문에서부터 이렇게 사람을 잡아당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쩐지 슬픈, 가슴이 뻥 뚫린 관흉국 사람들과 생각해볼수록 재미있는(동시에 그동안 왜 이런 생각은 못해봤는지 스스로도 의아한) 인어 아저씨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2권을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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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위에 대한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는 후세에 더욱 정교해져서 동아시아 전역에 확대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 한양의 서쪽에는 감옥과 처형장 등 형벌 및 죽음과 관련된 기관을 배치하였다. 가령 한양의 서쪽에 있던 ‘고태골’이라는 곳은 처형장이었다. 그래서 “고태골로 간다”라는 말은 죽음을 의미하였고, 줄여서 “골로 간다”, “골로 보낸다”라는 등의 속어가 이 지역으로부터 유래했다.







2.

이때 주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잔혹한 폭군의 모습을 인상 깊게 보여준다. 주는 인질로 도성에 와 있던 주문왕의 아들 백읍고를 끓는 물에 넣어 삶아 죽인 뒤 그 고기로 장조림을 만들어 주문왕에게 보냈다. 주문왕이 정녕 성인이라면 그것이 자식의 살인 것을 알고 안 먹을 것이니 죽여버리고, 만일 모른 채 먹는다면 평범한 인간이니까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주문왕에게 자식의 고기를 먹임으로써 그의 성인됨이 거짓임을 폭로하는 술책이기도 했다. 아들의 고기를 먹지 않으면 목숨을 빼앗고 먹는다면 그 명성에 먹칠을 하게 만드는 교묘한 시험이었던 것이다.

…(중략)…

마침내 주문왕이 고기를 먹자, 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제 아들을 잡아먹는 성인도 있다더냐. 도대체 어떤 놈이 희창을 성인이라고 했더란 말이냐, 하하.”

주는 통쾌해하며 주문왕의 명성을 무너뜨린 데 만족해서 그를 풀어주었다. 성인으로서의 정당성을 잃은 주문왕은 더 이상 결계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사실 주문왕은 고기가 자식의 살인 것을 알면서도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눈물을 삼키며 먹은 것이었다. 이러한 주문왕의 행동은 훗날 오히려 그의 비범함과 명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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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윤리란 궁극적으로는 희극적인 게 아닐까, 그런 깨달음만 얻었다. 결코 진지하게 표현되어질 수 없는, 쓴웃음 한 번 웃고 외면할 수밖에 없는 코미디 - 그것이 모든 비윤리적인 사태의 형상인 것 같다는 게 <강변부인>을 쓰면서 새롭게 터득한 명제라고나 할까.




2.

1970년대란 나에게는 박정희 대 김지하의 전쟁 기간으로 정리되는 것이었다. 우리 한국인들은 내 생각으로는 모두 그 두 진영의 어느 한쪽에 속해 있거나 아니면 그 두 진영에 동시에 속해 있었다. 1970년대는 참으로 처절한 갈등의 시대였고 그래서 위대한 시대였다.




-‘작가의 말’ 중에서




1.

‘자기 세계’라면 분명히 남의 세계와는 다른 것으로서 마치 함락시킬 수 없는 성곽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성곽에서 대기는 연초록빛에 함뿍 물들어 아른대고 그 사이로 장미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으리라고 나는 상상을 불러일으켜보는 것이지만 웬일인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 세계’를 가졌다고 하는 이들은 모두가 그 성곽에서도 특히 지하실을 차지하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 지하실에는 곰팡이와 거미줄이 쉴새없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내게는 모두 그들이 가진 귀한 재산처럼 생각된다.




-‘생명연습’ 중에서







1.

“빨갱이 시체 구경도 한 이태 만에 하는군.”

어느 영감이 그렇게 말하며 침을 탁 뱉더니 돌아서서 갔다. 몇 사람이 그 뒤를 이어 역시 땅에 침을 뱉고 가버렸다. 나도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땅바닥에 침을 뱉고 살그머니 사람들 틈을 빠져나왔다. 내가 몸을 돌렸을 때 두어 발짝 저편에 벽돌이 쌓여 있는 더미의 강렬한 색깔이 나의 눈을 찔렀다. 엉뚱하게도 나는 거기에서야 비로소 무시무시한 의지를 보는 듯싶었다. 적갈색과 자주색이 엉켜서 꺼끌꺼끌한 촉감의 피부를 가진 괴물이, 밤중에 한 남자가 몸을 비틀며 또는 고통을 목구멍으로 토하며 죽어가는 것을 바로 곁에서 묵묵히 팔짱을 끼고 보고 있다가 그 남자가 드디어 추잡한 시체가 되고 그리고 아침이 와서 시체를 구경하러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 나는 모든 걸 다 보았지, 하며 구경꾼들 뒤에서 만족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2.

한숨이 나오도록 유쾌했다.




3.

아아, 모든 것이 항상 그렇지 않았더냐. 하나를 따르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개 위에 먹칠을 해버리려 할 때,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보다 훨씬 앞서 맛보는 섭섭함. 하기야 그것이 ‘자라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乾)’ 중에서







1.

황혼과 해풍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누구나 고독했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중에서







1.

누구나 멋있는 옷을 입으면 꼿꼿이 걸어가게 되는 법이다. 옷을 입고 있는 사람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유니폼만 믿고 으스댄다.




2.

정직해보고 싶은 기회를 주지 않는 게 세상이다, 라는 생각도 퍽 흔한 생각이지만, 이젠 내 고정관념 중의 하나이다.




3.

그래서 나는, 너처럼 돈 자랑하는 놈들 보기 싫으니까 철저한 프롤레타리아 공화국이나 되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쏘아댄다. 그러면 그 녀석은, 야옹, 하고 고양이 소리를 흉내 내고 나서 너처럼 가난한 게 무슨 특권이라도 되는 듯이 까부는 놈 보기 싫으니까 무지무지한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응수한다. 그러나 어느 쪽도 되어서는 안 되리라. 팽창되어버린 감정의 의사는 살인적이다.




4.

망할 놈의 영화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압박하고 있다. 배우들 중에 자기가 닮은 배우가 있으면 자기도 미인이라고 생각해버린다. 아무리 못생긴 경우에도 말이다. 배우들 중에 자기가 닮은 배우가 없으면 자기는 미인이 아니라고 생각해버린다. 그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이쁠 경우에도 말이다. 그러다가 마침 자기와 닮은 배우가 하나 스크린에 나타나면 그제야, 아 나도 미인이라고 기뻐한다. 사람들을 영화의 압박에서 해방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이것도 이젠 내 고정관념 중의 하나이다.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중에서







1.

돈이 감촉을 갖고 있다는 건 기가 막힐 일이다. 호주머니 속에 별의별 게 다 들어 있는 경우에도 손은 콧종이와 오랫동안 넣고 다니어서 해진 종잇조각과 돈을 잘 구별해낸다. 그건 손의 신경이 예민해서가 아니라 분명히 돈에 감촉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 손을 만져본다. 그러면 손은 부끄러운 듯이 홍당무가 되면서 가늘게 떤다. 돈이 슬그머니 손을 집적거려본다. 손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우선 옷깃을 여미고 도사려 보인다. 싫으면 관둬라, 돈이 배짱을 내민다. 손이 주춤거린다. 그러다가 발작적으로 부들부들 떨며 돈을 부둥켜안아버린다. 돈은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슬슬 쓰다듬어준다. 그러다가 앗차, 하는 사이에 돈은 사라지고 손은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쥐고 쩔쩔매고 있다.




-‘싸게 사들이기’ 중에서







1.

그는 다 그려진 아톰X군의 얼굴을 다시 손가락 끝에 술을 찍어서, 지우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아톰X군. 어떻게 군의 힘으로 적진을 뚫고 나오기 부탁한다. 이제 난……힘이 없단 말야. 나와 헤어지더라도… 여보게, 우주의 광대하고,” 그러면서 그는 양쪽 팔을 넓게 벌렸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영원한 소년으로 살아 있게.”




2.

그는 두 팔로 아내의 상반신을 껴안았다. 그러면서, 앞으로 자기도 아내를 때리게 될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앞으로 다가올, 아직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무서워져서 그는 울음이 터질 뻔했다.

그는 아내를 껴안고 있는 자기의 팔에 힘을 주었다.




-‘차나 한잔’ 중에서







1.

속엔 들놀이 초대장을 넣고 겉에 사원들의 이름을 각각 쓴 하얀 사각봉투를 봉투에 적힌 이름에 따라서 나누어주며 사무실의 책상들 사이를 요리조리 꿰어다닌 것은 야간 여자상업중학교를 다니는 단발머리를 한 사환 계집애였는데 그애는 무슨 착각에서인지 시장개척과의 말단 자리를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불안스럽게 차지하고 앉아있는 맹상진군에게만은 그 사각봉투를 주지 않았다.

…(중략)…

잠시 후에 그 애가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빈손.

그 빈손이 사무실의 구석지에 있는 캐비닛 쪽으로 한들거리며 가더니 캐비닛 곁의 둥근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한 말들이 주전자를 부둥켜안고 컵에 물을 따르었다. 그리고 꼴깍 마셨다.

…(중략)…

맹군은 혹시나 자기가 잘못 안 게 아닌가 하고 자기의 책상 위를 찬찬히 살펴봤다. 하얀 사각봉투는 없었다. 그애가 잘못 던진 건 아닌가. 그래서 자기의 책상과 곁에 앉아 있는 이군의 책상 틈바귀를 살펴봤다. 없었다. 일어서서 의자를 집어들어 비켜 놓고 의자 밑을 살펴봤다. 없었다. 심지어 책상 밑, 거의 하루 종일 가련한 자기의 다리가 햇빛 한 움큼도 쐬어보지 못하고 처박혀 있는 곳의 바로 곁에 놓여 있는 대나무로 엮은 쓰레기 바구니 속도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없었다. 책상서랍을 모두 열어보았고 양복의 호주머니도 다 뒤져보았다. 그러나 쓰봉의 허리끈 밑에 도장을 넣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작은 호주머니가 있다는 것만 새삼스럽게 발견했을 뿐, 그 저주할 사각봉투는 아무 데도 없었다.




2.

그렇지만 사람이란 더구나 여자들이란 자주 오해를 하는 동물이다. 동물 중에서도 가장 흔히 가장 나쁜 오해를 하는 동물이다.

…(중략)…

그렇지, 언젠가 경리과에 가서 가불을 청하고 있을 때, 에잇 그놈의 가불이란 제 돈에서 받아먹으면서도 고개를 고개대로 숙여야 하는 치사한 것이다.




-‘들놀이’ 중에서







1.

염라대왕과 만나서 싸울 수 있는 것이, 우리 할머니라면 가능했다.




-‘염소는 힘이 세다’ 중에서







1.

무대에서는 텔레비전에서 본 가수들이 무식의 악취를 풍기며 슬픈 노래도 백치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부르고 있고, 개그맨들은 어젯밤과 똑같은 대사를 똑같은 표정으로 씨부렁거리고 있다. 운동 부족과 영양 과다로 비만증에 걸려 있는 사내들은 넥타이 매듭과 허리띠를 헐겁게 풀어놓고 헐떡이며 맥주를 들이켜고 나서 한 손으로는 옆에 붙어앉아 있는 호스티스의 허리를, 한 손으로는 자기의 튀어나온 배를 슬슬 어루만지고 있다.




2.

남녀관계란 근본적으로 경제적 관계야. 남자끼리의 관계만 사상적 관계지. 부자와 가난뱅이도 같은 취미로써 친구로 지내거든. 말 잘 했다. 내가 증오하는 것은 너희 남자들 그 경제구조를 엉망으로 만드는 사상구조.




3.

물론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전에도 항상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이건 내가 아니고 이전의 내가 나라고 한다면 이전의 나는 그 이전의 나를, 그 이전의 나는 그 그 이전의 나를……그리하여 나는 무(無)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건 내가 아니라고 하는 바로 내가 나임을 나는 안다. 어느 때가 돼야만 이건 나라고 할 수 잇을 것인가! 그건 꿈속의 꿈임을 나는 안다. 나는 이전의 나로부터 멀어져감으로써 아내 쪽으로 가까워지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떠내려가도 가까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

육지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자는 잠시 얕은 바다에 뛰어들면 되지만, 되돌아가고 싶은 육지도 없이 바다의 부력에만 존재를 맡기고 떠내려가는 자가 변화를 시도하려면 물 속 깊이 빠져버리는 수밖에 없다.




5.

가는 동안 나는 팔짱을 껴주지 않는 여자를 바싹 곁에서 느껴야 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이따금 그 여자의 팔과 부딪치곤 하는 내 왼팔이 어깨에서 손끝까지 마비된 듯 무거웠다.




-‘서울의 달빛 0章’ 중에서







1.

“그러니까 잘못된 거리니까. 자식 교육을 부모들의 돈벌이 경쟁에다가 맡겨버리면 그 경쟁에서 남아날 부모가 몇이나 되겠어.…(중략)…”

…(중략)…

“그래요, 전 바보예요. 그러니까 우리 그 얘기 그만둬요. 어쨌든 당신하구 아무 얘기나 주고받고 있는 순간은 즐거워요.”

당신하구 아무 얘기나 주고받고 있는 순간은 즐거워요. 살림살이에 관한 이야기밖에 하지 못하는 아내의 입에서 뜻밖에도 연애중인 처녀의 입에서나 들을 것 같은 말을 듣고 보니 정한은 슬그머니 슬퍼졌다.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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