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윤리란 궁극적으로는 희극적인 게 아닐까, 그런 깨달음만 얻었다. 결코 진지하게 표현되어질 수 없는, 쓴웃음 한 번 웃고 외면할 수밖에 없는 코미디 - 그것이 모든 비윤리적인 사태의 형상인 것 같다는 게 <강변부인>을 쓰면서 새롭게 터득한 명제라고나 할까.
2.
1970년대란 나에게는 박정희 대 김지하의 전쟁 기간으로 정리되는 것이었다. 우리 한국인들은 내 생각으로는 모두 그 두 진영의 어느 한쪽에 속해 있거나 아니면 그 두 진영에 동시에 속해 있었다. 1970년대는 참으로 처절한 갈등의 시대였고 그래서 위대한 시대였다.
-‘작가의 말’ 중에서
1.
‘자기 세계’라면 분명히 남의 세계와는 다른 것으로서 마치 함락시킬 수 없는 성곽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성곽에서 대기는 연초록빛에 함뿍 물들어 아른대고 그 사이로 장미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으리라고 나는 상상을 불러일으켜보는 것이지만 웬일인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 세계’를 가졌다고 하는 이들은 모두가 그 성곽에서도 특히 지하실을 차지하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 지하실에는 곰팡이와 거미줄이 쉴새없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내게는 모두 그들이 가진 귀한 재산처럼 생각된다.
-‘생명연습’ 중에서
1.
“빨갱이 시체 구경도 한 이태 만에 하는군.”
어느 영감이 그렇게 말하며 침을 탁 뱉더니 돌아서서 갔다. 몇 사람이 그 뒤를 이어 역시 땅에 침을 뱉고 가버렸다. 나도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땅바닥에 침을 뱉고 살그머니 사람들 틈을 빠져나왔다. 내가 몸을 돌렸을 때 두어 발짝 저편에 벽돌이 쌓여 있는 더미의 강렬한 색깔이 나의 눈을 찔렀다. 엉뚱하게도 나는 거기에서야 비로소 무시무시한 의지를 보는 듯싶었다. 적갈색과 자주색이 엉켜서 꺼끌꺼끌한 촉감의 피부를 가진 괴물이, 밤중에 한 남자가 몸을 비틀며 또는 고통을 목구멍으로 토하며 죽어가는 것을 바로 곁에서 묵묵히 팔짱을 끼고 보고 있다가 그 남자가 드디어 추잡한 시체가 되고 그리고 아침이 와서 시체를 구경하러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 나는 모든 걸 다 보았지, 하며 구경꾼들 뒤에서 만족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2.
한숨이 나오도록 유쾌했다.
3.
아아, 모든 것이 항상 그렇지 않았더냐. 하나를 따르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개 위에 먹칠을 해버리려 할 때,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보다 훨씬 앞서 맛보는 섭섭함. 하기야 그것이 ‘자라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乾)’ 중에서
1.
황혼과 해풍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누구나 고독했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중에서
1.
누구나 멋있는 옷을 입으면 꼿꼿이 걸어가게 되는 법이다. 옷을 입고 있는 사람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유니폼만 믿고 으스댄다.
2.
정직해보고 싶은 기회를 주지 않는 게 세상이다, 라는 생각도 퍽 흔한 생각이지만, 이젠 내 고정관념 중의 하나이다.
3.
그래서 나는, 너처럼 돈 자랑하는 놈들 보기 싫으니까 철저한 프롤레타리아 공화국이나 되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쏘아댄다. 그러면 그 녀석은, 야옹, 하고 고양이 소리를 흉내 내고 나서 너처럼 가난한 게 무슨 특권이라도 되는 듯이 까부는 놈 보기 싫으니까 무지무지한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응수한다. 그러나 어느 쪽도 되어서는 안 되리라. 팽창되어버린 감정의 의사는 살인적이다.
4.
망할 놈의 영화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압박하고 있다. 배우들 중에 자기가 닮은 배우가 있으면 자기도 미인이라고 생각해버린다. 아무리 못생긴 경우에도 말이다. 배우들 중에 자기가 닮은 배우가 없으면 자기는 미인이 아니라고 생각해버린다. 그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이쁠 경우에도 말이다. 그러다가 마침 자기와 닮은 배우가 하나 스크린에 나타나면 그제야, 아 나도 미인이라고 기뻐한다. 사람들을 영화의 압박에서 해방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이것도 이젠 내 고정관념 중의 하나이다.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중에서
1.
돈이 감촉을 갖고 있다는 건 기가 막힐 일이다. 호주머니 속에 별의별 게 다 들어 있는 경우에도 손은 콧종이와 오랫동안 넣고 다니어서 해진 종잇조각과 돈을 잘 구별해낸다. 그건 손의 신경이 예민해서가 아니라 분명히 돈에 감촉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 손을 만져본다. 그러면 손은 부끄러운 듯이 홍당무가 되면서 가늘게 떤다. 돈이 슬그머니 손을 집적거려본다. 손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우선 옷깃을 여미고 도사려 보인다. 싫으면 관둬라, 돈이 배짱을 내민다. 손이 주춤거린다. 그러다가 발작적으로 부들부들 떨며 돈을 부둥켜안아버린다. 돈은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슬슬 쓰다듬어준다. 그러다가 앗차, 하는 사이에 돈은 사라지고 손은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쥐고 쩔쩔매고 있다.
-‘싸게 사들이기’ 중에서
1.
그는 다 그려진 아톰X군의 얼굴을 다시 손가락 끝에 술을 찍어서, 지우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아톰X군. 어떻게 군의 힘으로 적진을 뚫고 나오기 부탁한다. 이제 난……힘이 없단 말야. 나와 헤어지더라도… 여보게, 우주의 광대하고,” 그러면서 그는 양쪽 팔을 넓게 벌렸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영원한 소년으로 살아 있게.”
2.
그는 두 팔로 아내의 상반신을 껴안았다. 그러면서, 앞으로 자기도 아내를 때리게 될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앞으로 다가올, 아직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무서워져서 그는 울음이 터질 뻔했다.
그는 아내를 껴안고 있는 자기의 팔에 힘을 주었다.
-‘차나 한잔’ 중에서
1.
속엔 들놀이 초대장을 넣고 겉에 사원들의 이름을 각각 쓴 하얀 사각봉투를 봉투에 적힌 이름에 따라서 나누어주며 사무실의 책상들 사이를 요리조리 꿰어다닌 것은 야간 여자상업중학교를 다니는 단발머리를 한 사환 계집애였는데 그애는 무슨 착각에서인지 시장개척과의 말단 자리를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불안스럽게 차지하고 앉아있는 맹상진군에게만은 그 사각봉투를 주지 않았다.
…(중략)…
잠시 후에 그 애가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빈손.
그 빈손이 사무실의 구석지에 있는 캐비닛 쪽으로 한들거리며 가더니 캐비닛 곁의 둥근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한 말들이 주전자를 부둥켜안고 컵에 물을 따르었다. 그리고 꼴깍 마셨다.
…(중략)…
맹군은 혹시나 자기가 잘못 안 게 아닌가 하고 자기의 책상 위를 찬찬히 살펴봤다. 하얀 사각봉투는 없었다. 그애가 잘못 던진 건 아닌가. 그래서 자기의 책상과 곁에 앉아 있는 이군의 책상 틈바귀를 살펴봤다. 없었다. 일어서서 의자를 집어들어 비켜 놓고 의자 밑을 살펴봤다. 없었다. 심지어 책상 밑, 거의 하루 종일 가련한 자기의 다리가 햇빛 한 움큼도 쐬어보지 못하고 처박혀 있는 곳의 바로 곁에 놓여 있는 대나무로 엮은 쓰레기 바구니 속도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없었다. 책상서랍을 모두 열어보았고 양복의 호주머니도 다 뒤져보았다. 그러나 쓰봉의 허리끈 밑에 도장을 넣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작은 호주머니가 있다는 것만 새삼스럽게 발견했을 뿐, 그 저주할 사각봉투는 아무 데도 없었다.
2.
그렇지만 사람이란 더구나 여자들이란 자주 오해를 하는 동물이다. 동물 중에서도 가장 흔히 가장 나쁜 오해를 하는 동물이다.
…(중략)…
그렇지, 언젠가 경리과에 가서 가불을 청하고 있을 때, 에잇 그놈의 가불이란 제 돈에서 받아먹으면서도 고개를 고개대로 숙여야 하는 치사한 것이다.
-‘들놀이’ 중에서
1.
염라대왕과 만나서 싸울 수 있는 것이, 우리 할머니라면 가능했다.
-‘염소는 힘이 세다’ 중에서
1.
무대에서는 텔레비전에서 본 가수들이 무식의 악취를 풍기며 슬픈 노래도 백치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부르고 있고, 개그맨들은 어젯밤과 똑같은 대사를 똑같은 표정으로 씨부렁거리고 있다. 운동 부족과 영양 과다로 비만증에 걸려 있는 사내들은 넥타이 매듭과 허리띠를 헐겁게 풀어놓고 헐떡이며 맥주를 들이켜고 나서 한 손으로는 옆에 붙어앉아 있는 호스티스의 허리를, 한 손으로는 자기의 튀어나온 배를 슬슬 어루만지고 있다.
2.
남녀관계란 근본적으로 경제적 관계야. 남자끼리의 관계만 사상적 관계지. 부자와 가난뱅이도 같은 취미로써 친구로 지내거든. 말 잘 했다. 내가 증오하는 것은 너희 남자들 그 경제구조를 엉망으로 만드는 사상구조.
3.
물론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전에도 항상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이건 내가 아니고 이전의 내가 나라고 한다면 이전의 나는 그 이전의 나를, 그 이전의 나는 그 그 이전의 나를……그리하여 나는 무(無)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건 내가 아니라고 하는 바로 내가 나임을 나는 안다. 어느 때가 돼야만 이건 나라고 할 수 잇을 것인가! 그건 꿈속의 꿈임을 나는 안다. 나는 이전의 나로부터 멀어져감으로써 아내 쪽으로 가까워지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떠내려가도 가까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
육지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자는 잠시 얕은 바다에 뛰어들면 되지만, 되돌아가고 싶은 육지도 없이 바다의 부력에만 존재를 맡기고 떠내려가는 자가 변화를 시도하려면 물 속 깊이 빠져버리는 수밖에 없다.
5.
가는 동안 나는 팔짱을 껴주지 않는 여자를 바싹 곁에서 느껴야 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이따금 그 여자의 팔과 부딪치곤 하는 내 왼팔이 어깨에서 손끝까지 마비된 듯 무거웠다.
-‘서울의 달빛 0章’ 중에서
1.
“그러니까 잘못된 거리니까. 자식 교육을 부모들의 돈벌이 경쟁에다가 맡겨버리면 그 경쟁에서 남아날 부모가 몇이나 되겠어.…(중략)…”
…(중략)…
“그래요, 전 바보예요. 그러니까 우리 그 얘기 그만둬요. 어쨌든 당신하구 아무 얘기나 주고받고 있는 순간은 즐거워요.”
당신하구 아무 얘기나 주고받고 있는 순간은 즐거워요. 살림살이에 관한 이야기밖에 하지 못하는 아내의 입에서 뜻밖에도 연애중인 처녀의 입에서나 들을 것 같은 말을 듣고 보니 정한은 슬그머니 슬퍼졌다.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