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살인자들과의 인터뷰
로버트 K. 레슬러 지음, 손명희 외 옮김 / 바다출판사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호러영화들, 특히 신체훼손 및 절단을 다루는 영화들을 못 본다. 그러다 어찌어찌 연쇄살인범에 관한 영화들 몇 편을 보게 된 뒤 그만 연쇄살인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뭐, 대강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겠지만 FBI의 활약상이라던가 범죄심리학, 법의학 같은 거. 굉장히 인기가 있음에도 의외로 한국에선 그닥 진전을 보고 있지 못한 학문분과들. 역시나 내가 연쇄살인범에 대해 관심을 가장 크게 갖게 된 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괴물성, 그리고 희생자의 거의 대다수가 여자라는 점 때문이다.
연쇄살인범 유모 씨의 검거를 계기로 시류에 편승하고자 급하게 출판된 듯한 이 책은 원래 1992년에 씌어진 책이다. 연쇄살인범(Serial Killer)이란 말을 처음으로 썼으며, 범죄용의자 프로파일링 기법을 FBI에 정착시킨 군인이자 FBI 요원이자 범죄심리학자 로버트 K.레슬러가 톰 샤흐트만과 함께 쓴 이 책은, 20여 년간 FBI에서 연쇄살인범들을 뒤쫓았던 그가 자신이 다루었던 사건들과 유명한 연쇄살인범들의 예 등을 거론하며 연쇄살인범들의 심연을 엿보게 해 준다. wishlist에만 올려놨다가 동생이 생일선물로 사준 덕에 좀더 빨리 읽게 됐다.
로버트 레슬러에 의하면, 모든 연쇄살인범죄는 섹스와 연결돼 있고 여성혐오적 측면이 강하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폭력과 섹스가 결합된 기괴한 상상을 즐겨왔으며, 이 환상이 한도를 넘어서면서 환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이러한 환상을 즐기게 되는 계기로는 주로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 성폭력 피해 경험 등이 있고, 그밖에도 친구와의 이별이나 부모의 이혼 등 극심한 트라우마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이 제대로 해소되거나 위안받지 못하는 출구없는 상황에서 점차 환상의 정도를 높여감으로써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극히 내성적인 성격과 인물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장애를 겪게 된다. 이성애자건 동성애자건 특히 성적 접촉에서 있어 다른 타인과 평등하게 합의를 거치고 사랑을 하는 방식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 하게 된다.
이런저런 연쇄살인범들의 특징을 읽고 있자니 가슴이 뜨끔해진다. 나잖아? 싶은 부분들.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예를 들어 아무리 미워도 뒷통수를 장도리로 깨부숴 죽이는 상상 따위는 해본 적이 없다는 것 정도인데... 그러나, 이런 타입의 모든 사람들이 연쇄살인범이 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H.P.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의 끔찍하고 기괴한 환상을 소설쓰기로 풀었으며, 팀 버튼은 기괴한 상상력과 악동기질을 가진 영화감독이 되었다. 서너 살때부터 가족들과 무대에 서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그리하여 실질적인 아동학대를 당했던 버스터 키튼은 또 어떤가? 극단의 대인기피증을 보이는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잘나가는 소설가이기만 하다. 연쇄살인범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에게는 자신의 소설 속에나 등장하는 인물일 뿐. 역시나 어릴 적부터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고 돈벌이 연주를 해야 했던 모짜르트나 베토벤이나 모두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다.
영화 <스크림> 시리즈에서 한 등장인물은 폭력적인 영화는 연쇄살인범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연쇄살인범에게 창의력을 높여줄 뿐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어찌보면 연쇄살인이란 연쇄살인범들에겐 나름의 예술행위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목숨과 인격을 극심하게 해칠 뿐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인격을 가진 주체로 대하지 않는 끔찍한 범죄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의 심연엔 갖가지 폭력과 끔찍한 환상들, 그리고 분노와 공포와 증오와 혐오가 놓여있다. 그 누구에게나.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해도, 어느날 문득 의식으로 떠오르는 그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 인간들 모두에게 깃들여있는 괴물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알고 있다. 또한 남탓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아마도 이것이 연쇄살인범과 아닌 사람의 차이일 것이다.
군 CID 등에서 비밀업무를 수행했던 저자는 반전운동이 거셌던 60년대 당시 자신의 활동을 합리화시키며 "실제로 반전단체 등에 엄한 테러리스트들이 껴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의 과거가 조금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나는 그가 육군 출신으로 군대가 체질에 아주 잘 맞는, 타고난 육군이었다가 FBI 등으로 옮기게 된 것을 보며 이 사람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큰 물음표를 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후반에 가면 이 사람은 사형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물론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에서긴 하지만.
연쇄살인범, 살인자들이라는 타자에 대한 호기심보다, 나는 내 안에 깃든 괴물성을 찬찬히 다시 반추해 보는 데에서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느꼈다. 행동패턴들을 연구해 양식화하는 작업들을 슬쩍 엿보는 것 역시 재미있긴 했지만. 다 읽고서 느낀 감상은 그래서, 이것이다. 역시, 인간이란 존재는, 참 재미있다는 것.
ps. 저자가 이 책을 쓸 때까지 미국에서 자신이 목격한 여성 연쇄살인범은 에일린 워노스 단 한 명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에일린 워노스의 이야기는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으로서 최근 <몬스터>로 영화화된 바 있다. 성매매 피해자로서 강간 위기에서 정당방위로 살인을 시작했던 에일린 워노스와, 여성혐오 및 타인에 대한 완벽한 지배의 욕구 및 자신의 환상 충족 욕구를 위해 살인을 했던 수많은 남성 백인 연쇄살인범의 차이. 인간과 사회라는 것의 본질, 그 양상에 특히 흥미를 가진 이들을 매혹하는 또 하나의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