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전5권 세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당당히 여행/레저 분류에 포함되어야 마땅한(ㅎㅎ) 이 책은, 이전에 커트 보네커트의 [타이탄의 미녀들]에다 대고 내가 붙였던 딱지, '전 우주적 차원의 거대한 농담'이라는 말이 또다른 의미에서 더없이 잘 어울린다. 정말로 전 우주를 오가는 내용 와중 대부분은 허허실실 유머의 농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담이야말로 인류 유산의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여타의 동물과 다른 건, 지능이 아니라 농담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훌륭한 농담일수록, 웃는 동시에 생각을 하게 만들고, 다종다양한 의미들에 기기묘묘한 느낌과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오래 전 출판된 바 있으나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한 채 절판돼 정작 너무 읽어싶어했던 사람들을 비탄에 빠뜨렸던 이 시리즈, 그나마도 4권까지밖에 안 나왔었다. 좋아하는 번역자들에 의해 이번에 재출간된 걸 알고 얼마나 기뻐서 날뛰었던지. 읽는 데에 참으로 오래 걸렸지만, 도중 종종 나도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다. 더글래스 아담스가 이 시리즈를 결코 쉽게 쓰건 아니겠지만... 그러나 친구가 말하길, "헛소리도 다섯 권 내내 일관되게 한다는 건 보통 공력이 아니라구!." 동의, 인정, 포기!

책을 읽다보니, 그리고 그 와중에 영화 <윔블던>을 보고서, 내가 좋아하는 농담의 종류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왜 내가 소위 '영국식 유머'를 좋아하는지도. 어리버리하고 소심하고 쫀쫀한 루저가 발악할 때엔 마지막 무기, 비꼬기라도 해야지 어쩌겠는가. 스스로를 비꼴 줄 아는 건 기본이고. 남들이 '고급 유머'네 '고상하네' 하는 영국식 유머의 실체란 사실 바로 그거다. 그리고 나는 그 어리버리하고 소심하고 쫀쫀한 마지막 발악의 비꼬기를 사랑한다. 나 역시 어리버리하고 소심하고 쫀쫀한 루저여서 그렇겠지. 클클. 다만 더글래스 애덤스가 대단한 부분이라면, 일단 비꼬기 내공이 꽤 높다는 것. 아주 신랄하다. 더 대단한 건, 그의 비꼬기 대상이 인류 전체, 나아가 인류가 쌓아온 역사와 문명의 속성 전체란 것. 배포 한번 크다.

너무 오랫동안 이 책을 읽다보니, 내 유머감각 역시 이쪽으로 재편되는 듯. (그, 그런 게 있, 있긴 했었냐. --;;) 얼마 전에 친구에게 그 농담을 시도했다가 '썰렁하다'는 핀잔만 들었다만... 그래도 나는 이런 감성의 유머가 좋다. 그 마지막 발악 속에 깃들어 있는 냉소와, 살짝 맛볼 수 있는 서글픔이, 마치 단 듯 해도 실은 쓰고 쌉싸름한 다크 초컬렛처럼. 광활한 우주에 점 하나에 불과한 태양계에 점 하나에 불과한 지구 위에 점 하나에 불과한 나란 존재의 소소함을 직면하는 것이, (번역자가 해설에서도 지적했지만) 지구를 폭파시키는 장면으로 시작해, 기어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전 차원을 걸쳐' 지구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것으로 끝내주는 막가파 정신이, 그 완전 소멸 와중에도 스타브로 물라 베타 '클럽'의 아그라작을 등장시켜 주시고야 마는 잔혹함이.

제 1권 맨 앞 챕터, '안내서를 위한 안내서'를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더글래스 애덤스가 직접 쓴 다양한 버전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존재한다. 애초에 라디오용으로 시작을 했으니 그 극본부터, 그의 생전 영화화를 위해 썼던 시나리오, 오디오북 등. 올해 4월말 미국에서 (드디어) 개봉 예정인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각본도 더글래스 애덤스가 죽기 직전에 다시 썼고, 그는 존 말코비치가 맡을 역을 위해 이전의 소설, 라디오 대본, 오디오북 등에는 없던 새로운 인물을 추가시키기도 했다. 그나저나 영화는, 과연 소설의 반 정도의 재미는 유지할 수 있을까? 애덤스식 이 농담을 영화 내내 유지한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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