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비저블 몬스터 메피스토(Mephisto) 7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척 팔라닉과의 첫 만남은, 당연하게도, [파이트 클럽]이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를 완전히 넋놓고 보며 완전히 빠져버린 뒤, 원작소설을 찾아 읽었다. 놀라웠다. 그러니까 영화 <파이트 클럽>은, 원작소설의 아우라를 갉아먹지 않고 괜찮게 스크린에 옮긴 드문 예에 속한다. 심지어 엔딩은, 소설보다 영화의 그것이 더 낫기까지 하다. (이건 척 팔라닉 스스로 인정했던 사실이다.) 하지만 소설은, 또한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영화와는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척 팔라닉의 소설은 마치 영화를 소설로 옮겼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눈앞에 생생히 보이는 듯 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전개와 경쾌한 문체(번역소설에서 이런 표현은 한계가 있지만)를 자랑한다. 1인칭 화자 시점을 즐기는 그는 여타 소설에서 작은 따옴표 안에 들어갈 구절들을 그냥 한 문단 짜리 한 문장으로 표현해 버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같이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는 주인공이 읽는 독자와 어느새 대단한 밀착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의 소설은 마치 전개 빠른 영화들을 보는 듯하지만, 그가 다루는 주제들은 현대 메트로폴리스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것들이다. 미디어, 정보화, 산업사회, 첨단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차 소외돼가는 왜소한 사람들의 기행, 혹은 그들이 휘말리는 기이한 사건들.
 
책세상 메피스토 시리즈를 통해 나온 총 다섯 권의 척 팔라닉의 소설 중 내가 가장 읽기 힘들었던 건 [질식]과 [인비저블 몬스터]다. 척 팔라닉의 소설은, 읽기 까다롭거나 난해한 건 아니지만 특유의 스타일에 익숙해지려면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섯 권 중 [질식]은 맨 마지막 작품이지만 영화로 일단 익숙한 [파이트 클럽] 바로 다음 읽은 터라 읽는 게 조금 지지부진했다. 반면 다섯 권 중 가장 마지막에 읽은 [인비저블 몬스터]는, 아무래도 그의 첫 작품이라 아직 그 스타일이 완결돼 있지 않아서 그랬던 듯하다.
 
[인비저블 몬스터]는 역자 소개에 의하면, 척 팔라닉의 첫 장편소설이지만 내용이 너무 센세이셔널해 출판을 계속 퇴짜 맞다가 [파이트 클럽]의 성공 이후 비로소 출판이 성사됐다고 하는데, 다섯 소설들 중에선 확실히 가장 덜 여물었다. 화자는 알고 있으나 아직 독자에게는 감춰져 있는 정보를 터뜨리는 시점이 조금 덜 교묘하달까. 하지만 이후 척 팔라닉 소설들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작품의 절대적 완성도가 낮다는 건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소설을 첫 작품으로 쓰는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괴물일까, 읽을수록 척 팔라닉이란 인간이 궁금해진다.
 
패션잡지를 보다가 착안을 해서 수많은 광고 페이지 사이사이에 띄엄띄엄 기사가 있는 방식을 소설에 적용시켰다는 이 소설은, 그래서 시점(時點)이 마구 왔다갔다 한다. 영화에서 마치 결말부터 보여주고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방식이, 이 소설의 시작이다. 그리고 패션모델로 막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할 때 누군가 쏜 총에 턱뼈가 날아가 '괴물'이 되어버린 화자와, 끝없는 수술 끝에 여자가 된 트랜스젠더 브랜디 알렉산더, 그리고 추후에 정체가 밝혀질 남자, 이렇게 셋의 로드무비, 아니 로드소설이 전개된다.
 
부모세대를, 사랑하긴 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증오와 부정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행각을 쫓아가다보면, 척 팔라닉의 여타의 소설들이 그랬듯 소설 속에 정신없이 빠져들어 다음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면서도 묘한 슬픔을 아니 느낄 수가 없다. 언제나 자식세대란 부모세대에게 그런 걸 느끼는 법이지만, 특히나 '몇 살 이상 먹은 사람들이 다 죽어야' 발언이 심심찮게 나오는 지금의 한국 땅에선, 척 팔라닉이 그려놓은 부모세대에 대한 부정이 조금 다른 의미로, 그리고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올 법하다. 또한 첨단화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종 미디어의 혜택(?)을 풍요롭게 누리고 있는(혹은 그 미디어 사회의 노예가 되어버린), 풍요 속의 빈곤에 허덕이는 우리 현대인들, 그 중에서도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게다가 척 팔라닉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도저히 밖으로 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선택하는 방법이 종종 자기파괴이다. 그의 주인공들을 향한 연민과 슬픔 역시, 실은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여성이 되고자 - 그리고 자신의 누이동생과 똑같은 외모를 갖고자 - 계속되는 성전환 수술을 했던 브랜디 알렉산더나, 또 히스테리컬하고 질투심 강한, 화자의 친구 이비나, 어느 날 턱뼈가 완전히 날아가며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음에도 무덤덤한 화자나... 또... 계속 중독되어 가는 약물. 그들의 '자기파괴'는, 기이하면서도 안쓰럽다. 일전에 트랙백을 걸면서 고백한 바 있듯, 나 역시 내가 몹시 몸이 아플 때, 비로소 온몸의 신경세포가 하나하나 살아있는 듯 느껴지면서 아, 나 살아있구나, 하는 느낌 때문에 지독한 감기에 앓는 기간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데 - 너무 오래 되면,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 아마도 나의 그런 습성 역시, 실은 저항방법을 결국 자기파괴에서밖에 찾을 수 없는 척 팔라닉의 주인공들의 습성과 비슷한 건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래서, 그의 소설들을 더욱 좋아하는지도.
 
끝으로, 내가 너무 감성이 무딘 건가. 나는 이 책이 왜 19세 구독불가 판정을 받고 서점 매대에 진열되지 못한 채 쓰레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무엇에든지 중독되어 있는 게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습성이라고 한다면, 허구헌날 각종 약품 - 게다가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대기업으로 군림하는 각종 대형 제약회사들의 제품으로 국가는 그 제품들의 유포를 어느 나라에서든 거의 방조하거나 암묵적으로 도와주고 있기까지 하지 않은가 - 에 취해있는 주인공들이 독자들에게 마약중독을 권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책을 읽어보면 분명히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ono 2005-01-19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도 서재가 있으셨군요. 이젠 자주 들러서 읽어야겠습니다.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다알리아> 같은 서평은 제 카페에 살짝 퍼가고 싶네요.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어제 한솔로님과 엘로이 얘길 하다 왔는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