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리커버 특별판)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평점 :
품절



대한민국에서 51일은 근로자의 날이다. 1890 5 1일 미국 시카고에서 첫메이데이 (May day) 대회가 개최된 이래로 전세계에서 이 날을 노동자의 날 (May day)’로서 기념해오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노동자의 저항을 기념하는 날에 한국에서는 저항의 주체인 노동자가 빠져 있는 것이다. 한국은 왜 노동자의 날이 아닌 근로자의 날일까?



이에 대한 역사적 근원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 치하였던 1923 5 1일 조선노동총연맹 주최로 2,000여명의 노동자가 모인 것이 한국에서 열린 노동절 최초의 행사였다. 이후 1958년부터는 대한노동조합총연맹의 창립일인 310일을 노동절로 정해 행사를 치러오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3년 노동법 개정과정에서 명칭을 '근로자의 날'로 바꿔 기념해왔다. 이후 노동단체들은 ‘5 1일 노동절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해오다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부터 3 10일에서 다시 5 1일로 옮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름은 노동절로 바뀌지 않고 근로자의 날 그대로 유지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실 사전적인 정의를 살펴보면 근로자노동자라는 용어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상의 정의에 따르면 근로자는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의미한다. ‘노동자는 사전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근로와 노동의 사전적 차이와는 달리 사회적 심리적인 거리는 너무나도 크다. 우리는 흔히  노동자라는 단어에서 능동적’, ‘저항’, ‘권리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고근로자라는 단어에서는 수동적’, ‘안정’, ‘사무직등의 긍정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심지어 범죄 피의자의 외모를 묘사하는 전단에 노동자풍의 외모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당신은 근로자풍의 외모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는 정부차원에서 노동근로로 대체시키며 이데올로기화해온 한국의 역사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유명 연예인들의 페미니즘 관련 발언과 행동이 언론을 통해 화제가 되면서 셀리브리티 페미니즘 (Celibrity feminism)이 이슈화되고 있다. 엠마 왓슨은 히포시 (HeForShe) 캠페인에서 인상적인 연설을 보여주었고, 애슐리 주드는 ‘여성 행진 (Women's March)’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여성비하 발언에 대해 강력한 문제제기로 주목을 받았다.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가진 유명인사들의 이 같은 행동은 분명 대중이 페미니즘을 가깝게 느끼도록 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페미니즘을 어려운 철학이나 정치적 운동으로 여겼던 많은 대중들이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문제가 바로 자신들의 문제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근로가 한국에서 갖는 이데올로기적 모호함과 오해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에는 많은 편견과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되고 보편화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페미니즘 운동이 어떤 것이고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지 분명히 해야할 필요가 있다. 영화배우 메릴 스트립은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요?’라는 질문에 저는 휴머니스트입니다. 균형을 추구하죠.’라는 대답을 하였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연기하고 영화판 밖에서도 성차별 문제를 끊임 없이 제기하고 여성 시나리오 작가들을 위한 펀딩을 진행하는 등 여성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명확히 선을 그은 것이다.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면서도 페미니스트임을 부정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비단 메릴 스트립 뿐만이 아니다. 레이디 가가와 켈리 클락슨도 같은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이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벨 훅스는 본서 모드를 위한 페미니즘 (Feminism is for Everybody)에서 페미니즘을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한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같은 정의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의 주체에 대해 주목할 뿐 그것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즉 페미니스트가 반대하는 것은 '남자'가 아니다.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남성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다. 또한 여성도 때론 성차별주의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궁극적으로 모든 형태의 성차별을 지양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자유와 평등, 해방을 위한 운동인 것이다.



페미니즘을 위협하는 적은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이다. 페미니즘이 반대하는 것은 성 그 자체가 아닌 성차별을 가져오는 행위이다. 여성도 자신의 성차별주의적 행동을 직시할 수 있고 성차별주의를 반대하는 남성과 연대할 수 있어야만이 페미니즘 운동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셀리브리티 페미니즘은 그 대중적 파급력으로 볼 때 큰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엠마 왓슨과 비욘세 팬들간의 페미니즘과 여성적 섹슈얼리티의 활용에 대한 논쟁은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적 패선업계와 화장품업계의 이익 반영하는 성차별주의적 미의 기준이 페미니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와 관련하여 중요한 이슈라고 본다. 하지만 페미니즘 용어 자체가 가지는 고정관념과 편견 등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하고 긍정적 페미니즘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부장제 대중매체에게 이를 빌미로 페미니즘 운동이 사랑 보다는 증오를, 평등 보다는 차별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떠들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지배와 복종, 강압, 억압과 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고 대등한 입장에서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고 상호성장과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페미니즘의 비전을 현실화하는 노력을 해나갈 수 있다. 물론 페미니즘으로 가는 길은 하나일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과 삶이 다르므로 각자의 삶에 말을 걸고 변화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개개인의 구체적인 관심사와 전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의 개혁이 중요하다. 이를 위한 첫 걸음은 페미니즘이 가진 부정적 이미지를 종식시키고 그것이 가진 비전을 제대로 알리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페이스 오디세이 완전판 세트 - 전4권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
아서 C. 클라크 지음, 김승욱 외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페이스 오디세이: A Space Odyssey》는 2001로 시작하여 2010, 2061, 3001로 결말을 맺는 장엄한 대서사시이다. 이 시리즈의 시작은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이 아서 클라크에게 함께 정말 괜찮은 SF영화를 만들어 보자고 한 제안에서 출발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의 큐브릭의 관심은 지성이 뛰어난 외계인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고 인류가 그러한 존재를 발견하였을 때 과연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였다. 큐브릭의 제안을 받은 클라크는 예전에 자신이 썼던 단편소설 '파수병 (The Sentinel)'에서 영화를 구체화할 아이디어를 찾았고 그것이 모티브가 되어 영화사에 길이 남을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SF소설의 전설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가 탄생한 것이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의 영화각본과 소설은 동시에 진행되었고, 세상에 공개된 것도 거의 비슷한 시점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영화와 소설은 세부내용이 조금 차이가 있다. 특히 차이가 나는 것은 디스커버리호의 목적지이다. 영화에서는 디스커버리호의 목적지는 목성으로 표현되지만, 소설에서는 토성으로 설정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감독 스탠리 큐브릭이 당시 특수효과 기술로 토성을 진정성 있게 묘사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목적지를 토성에서 목성으로 수정하였다고 한다.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인류의 진화과 과학기술, 인공지능과 우주라는 공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기존의 SF영화나 소설과 다르게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과학적인 사실을 토대로 엄밀한 고찰과 검증과정을 거쳐 표현되었고 특히 영화는 특수 효과 분야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화는 1968년 아카데미 시각 부문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우주라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광활한 공간을 소재로한 작품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스타워즈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도 있고 인터스텔라와 같은 시공간의 차원을 넘나드는 이야기도 있다.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스토리 자체나 소재 때문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에 대한 통찰을 텍스트로서 또 영상으로서 구체화한 측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2시간 3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이어지는 영화의 흐름과 전개는 굉장히 느리며 대사 또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첫 대사가 시작하고 25분이 지나서야 나올 정도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강점 또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영화의 강점은 스토리 텔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주얼로 미래에 대한 상상을 구체화하는데 있는 것이다. 행동 하나하나에 몇분씩 들어가는 건 긴장감 넘치는 전개보단 이미지의 나열로 전개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대사가 없는 이유도, 이 영화는 대사로 주제를 전달하는 게 아닌 이미지로 전달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인공지능과 미래의 디스플레이 기능 등을 토대로 구현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 모습은 저자 아서 클라크가 미래에 대한 통찰을 이미지화하여 구현한 것이다. 무한한 우주환경을 배경으로 인류의 도전과 희망을 표현한 부분은 현대인들의 삶과 대비되어 SF소설에서 느끼기 힘든 감동과 뭉클함 마저 느껴진다.

 

 

 

 

 

전 인류가 주목한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간의 인류와 기계의 세기의 대결이 펼쳐진지도 몇 년이 흘렀다. 인공지능 AI는 인류의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장미빛 미래? 암울한 미래?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현실화되었을 때를 가정하여 공포와 위협의 실체에 대해 논하기 전에 그러한 미래에 대한 해답을 그 아이디어의 시초이자 작품을 통해 미래 모습을 구체화하였던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통해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후속 시리즈이자 완결작인 완전판 세트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나쁜 쪽으로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싸구려 여인숙의 밑바닥 인생들 앞에 한 노인이 찾아온다. 노인은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독려한다.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점차 그의 희망 섞인 말에 기대를 걸고 꿈꿔왔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노인은 사라지고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이들은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 꿈꾸던 삶과 현실의 간극 (間隙) 만큼의 충격을 안고 이전보다 더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때론 희망도 어떤 이들에겐 독이 된다."

 

 

 

 

고리끼의 희곡 '밑바닥에서'는 희망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처절한 현실을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 섞인 말은 약이 될까? 아니면 독이 될까? 이는 결국 희망의 진정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들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는 것은 큰 비용이 소요되지 않는다. 희망에 부푼 이들이 현실과 꿈의 간극을 재확인하고 더 깊은 심연으로 침몰해도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러한 꿈을 꾸고 그러한 삶을 살아온 그 자신에게 있다. 희망은 이들에게 절실한 것이지만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장밋빛 희망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절망은 '헛된 희망'을 동반한다.

 

 


 


 

 


김사과의 두번째 소설집 <더 나쁜쪽으로>을 읽고 '희망' '절망' 그리고 '희망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3부로 나뉘어진 본 소설집의 1부는 김사과의 세계를 바라보는 비판적이고 냉철한 시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1부를 여는 첫번째 단편이자 표제작인 '더 나쁜쪽으로'의 주인공에게 삶은 하나의 거리로 요약된다. 주인공은 거리를 떠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자신은 이 거리, 도시, 세계 안에 속해있어 아무것도 넘어서지 못하고, 아무데도 닿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거리로 돌아온다. 거리 위에는 이 거리를 만드는데 기여한 똑같은 사람들이 가득하고, 그는 그들을 아니 '우리'를 저주한다

 

 

 

 

끔찍하게 쌓아 올려진 이 모든 것이자 그것을 쌓는데 인생을 탕진한 바로 그자들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가.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라니? 모두 그저 쫓겨 온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오직 그 점에서만 우리들은 동지가 아닌가? (p. 28)

 

 

 

 

'샌프란시스코'의 주인공은 여전히 시작에 머무르면서 시작을 반복하고, 결국 아무데도 닿지 못한 채 제 자리에 머무르며 점차 고립되어간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실패를 반복하고 누군가의 삶에 '내가 하는 말'이 영향을 주는 것이 두려워 적게 말하는 것을 선택하고 결국 말을 잃어간다. 결국 그가 신봉하는 것은 말이 아닌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로 국한된 단편적 분석에는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이해는 생략된다.

 

 

 

 

이미지는 살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를 덮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말을 걸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그것은 편리하고 편리한 것은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문득 그는 이미지의 바깥을 상상하고 있었다. 한 구체적인 정신을 그는 고려하고 있었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p. 37)

 

 

 

 

', 증기, 그리고 속도'의 인물들에게도 세상은 절망적이다. 그들은 파국이 닥치기 전 허용된 시간 동안 큰 의미 없는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내일은 저 멀리 있다

 

 

 

 

한동안 우리는 사이가 좋았다. 그러니까 그게 닥쳐오기 전까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거. 현실? 글쎄. 뭐 그런거. 우리가 유일하게 갖고 있지 않은. (p. 76)

 

 

 


 


 


 

'지도와 인간'은 내용의 상당 부분이 영어로 쓰여진 파격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형식과 언어의 파괴를 통해 작품의 주제의식이 잘 드러난다. 대화와 혼잣말이 뒤섞이고,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서술방식은 파편화된 개인의 소외감과 쓸쓸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지만 진화를 거치며 각자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퇴행적이고 자폐적인 고유어를 사용하여 결국 개인은 아무와도 소통할 수 없고 점차 고립되어간다.

 

 

 

 

전에는 인간들이 말이라는 것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자해에 가까울지라도, 하지만 내가 말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게임은 끝나 있었다. 지도는 완성되었고, 내 위치는 아무데도 없었다. ... 내가 꽃같이 활짝 피어나는 사이 모든 게 이렇게 철저히 무너져내리라고는... (p. 96)

 

 

 

 

2부는 동일한 시선을 유지하며 그 대상을 한국적 현실에 더 집중한다. '박승준씨의 경우'의 박승준씨는 고시원에 살지만 우연히 줍게된 신상 디올 슈트를 낡은 티와 운동화로 매치하면서 의도치 않게 반문화적, 진보적 성향의 자신만의 고유한 패션을 추구하는 힙스터(Hipster)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이 세계의 주류에서 벗어나려 한 시도의 결과는 파국이었다.

 

 

 

 

갑자기 민영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밀려나고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그는 어리둥절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검은 차가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엄청난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그가 그 차를 발견했을 때는 차가 이미 그를 덮치는 중이었다. (p. 121)

 

 

 

 

'카레가 있는 책상'의 주인공은 스스로 세계로부터의 고립을 택한다. 그는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채 별다른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살아간다. 또한 대중적인 햄버거나 샐러드 보다는 적당히 자극적이지만 라면보다는 몸에 좋은 카레를 즐겨 먹는다. 하지만 고시원의 이웃들은 그를 카레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린치를 가한다. 이 사건은 주인공이 타인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계기가 되고 실제로 카페에서 본 '버블티 여자'를 상대로 한 범죄를 계획한다. 하지만 또 다른 타인의 타인을 향한 혐오사건들을 목도하면서 주인공은 세계를 향해 완전한 굴복을 선언하게 된다.

 

 

 

나는 부드럽게 으깨어질 것이다. 소화될 것이다. 흡수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 이상 두렵지가 않았다. 나는 안전하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기분이 좋다. 나는(p. 145)

 

 

 

 

'이천칠십X년 부르주아 6'에서는 작품의 무대가 '2070년의 한국'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빈부격차로 인한 양극화 그리고 단절, 파편화, 소외감, 혐오의 정서는 여전하다. 소설 속에서 미래를 살아가는 주인공들도 끝없는 환상 속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천천히 사라져간다.

 

 

 

그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이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것임을 알았다. 현실을 역겨워하며, 죽음을 저주하며.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끔찍한 증오 속에서. 무력감 속에서. 천천히 썩어갈 것임을 직감했다. 영원한 그리움 속에서 (p. 174)

 

 

 

3 '세계의 개' 'apoetryendingmachine'은 작가가 쓴 몇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3부에서도 무심한 듯한 냉철함으로 세계의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작가의 시선은 여전하다.

 

 

 

 

 어차피 아무 의미 없는 것들, 영 움직이지 않는 세계, 무력한 자에게 인식이란 여기저기 널브러져 이상한 빛을 내는 광기일 뿐이다. 그것이 눈앞을 떠나지 않는 것은 악몽이다. 의지를 잃어버렸으므로... 우리는 세계의 개, 남은 것은 시간을 견디는 것, 아무 의미도 바닥도 천장도 없는 (세계의 개, p. 182)

 

 

 

 

우리에게는 아무런 생산능력이 없다. 먹고 쓴다. 오로지 누워 있다. 우리에게는 어떤 대항수단이 없다. 당신들에게 대적할 아무런 의지가 없다. 힘도 없다. 항복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원한 없이, 우리는 투항한다. (우리의 입장, p. 205)

 

 

 

 

책을 덮고 표지를 바라 보았다. 이 책 표지의 대부분은 노란색이 차지하고 있다. 노란색은 색채적으로 가장 밝은 색으로 기쁨, , 에너지를 상징하는 색이다. 하지만 밝은 원색의 표지에서 나는 기쁨과 에너지 보다는 역설적으로 어두움과 답답함을 느꼈다. 이는 비단 <더 나쁜 쪽으로>라는 소설집의 제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표지의 위아래, 양 옆 4개의 사다리꼴이 표현하고 있는 소실점은 모두 저 아래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또한 저 아래로 가는 길에는 레드카펫이 깔려 있다. 레드카펫은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개선해 돌아올 때 빨간 길을 걸은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레드카펫은 "극진한 대우" "환대"를 의미하는 것이고 일정한 자격을 갖춘 초대 받은 몇몇만 올라설 수 있다. 빨간색은 불 같은 열정과 광기, 피의 희생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 나쁜 쪽으로>라는 제목은 사무엘 베케트의 <가장 나쁜 쪽으로>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더 나쁜쪽을 논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에게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지금이 최악이 아니고 진정한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냉혹한 현실을 인식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나쁜쪽으로 걸어가는 것도 레드 카펫에 오르는 이들처럼 냉혹한 현실을 바라볼 용기와 열정, 희생, 광기가 선행되어야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냉철한 성찰 뒤에 우리가 선택하게 될 길이 설령 더 나쁜쪽이라고 해도 가장 나쁜쪽이 아닌 더 나쁜쪽으로 간다는 것은 아직 삶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표지를 보니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색의 삼원색 중 노랑과 빨강으로만 이루어진 표지에서 파란색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삶이란 불공평하고 잔인한 것이며, 현실 속에 파랑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파란색은 하늘, 대기, 우주, 꿈 등 심리적, 물리적으로 저 멀리 존재하는 것, 즉 희망을 대변하는 색이기 때문이다. 고리끼의 밑바닥에서처럼 헛된 희망은 진정한 절망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고난과 역경을 딛고 저 아래 어딘가를 향하는 레드카펫에 설 사람들에게 창문 틈에서 새어 나오는 한줄기 푸른빛 즉, 삶의 여지를 줄 수는 없었을까

 

 

 

 


 

 

 

 

밖에 나와 하늘을 향해 책을 들어올렸다. 책의 표지를 둘러싼 푸른 하늘이 배경으로 추가되자 색의 삼원색의 조화가 완성되었다. 옅은 푸른색의 하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어딘가에 아직 희망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월의 말 1 - 6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6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제6부 시월의 말 (The October Horse)은 그 이름이 유래한 전차경주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시월의 말은 매년 10월에 열린 전차경주의 우승마이자 동시에 신에 대한 제사의식으로 제물로 바쳐진 말을 의미하며, 전차경주는 공화정 로마의 세르비우스 성벽 바깥에 펼쳐진 마르스 평원의 초록빛 풀밭에서 개최되었다. 전차경주에서 그 해 최고의 군마들은 두 필씩 전차에 매여 무서운 속도로 경주장을 달렸고, 이긴 전차의 오른쪽 말 (가장 강하고 빠른 말)이 시월의 말이 되어 전통적인 의식에 따라 창에 찔려 제물로 바쳐졌다. 작가 콜린 매컬로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기억 못할 만큼 까마득히 오래된 이 의식에서, 로마가 가진 단연 최고의 것은 로마를 지배하는 한 쌍의 동력인 전쟁과 영토에 제물로 바쳐졌음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바로 이 쌍둥이 동력에서 로마의 힘, 로마의 번영, 로마의 영원한 영광이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시월의 말의 죽음은 과거에의 애도이자 미래에의 전망임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나는 시월의 말을 보며 로마를 지배하는 한 쌍의 동력이 아닌 한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그 인물은 바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는 공화정권의 파괴자, 또는 반대로 제정의 초석을 굳힌 인물 등 현재까지 일관되게 형성되어 있지 않다. 인물에 대한 평가의 범위도 정치인으로서, 장군으로서,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등을 남긴 문인으로서, 그의 인간적 매력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광범위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향방은 논외로 하더라도 비단 로마뿐만 아니라 서양사 전체에서도 카이사르라는 한 명의 인물이 가진 영향력은 그 어떤 인물과 비교했을 때도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더더군다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제6부 시월의 말은 카이사르의 최후와 그와 함께 몰락하는 공화정 로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가 시월의 말에서 카이사르를 연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는 7부까지 예정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카이사르의 최후가 담긴 6부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작가 콜린 매컬로는 시리즈의 마지막을 6부까지로 생각했고, 7부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른 외전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본 전국시대를 그린 대하 장편소설 <대망>을 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일본 전국시대 3대 명장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 냉철한 판단력과 유연한 사고,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지녔던 오다 노부나가의 최후를 보고나서 그 다음의 독서를 이어가기가 너무나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 제6부 시월의 말은 카이사르의 이집트 원정과 저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가 등장하는 소아시아 정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 3권에서 전개될 잔혹하고 비참한 카이사르의 최후와 그 이후의 로마 공화정의 몰락이 어떻게 묘사될지 정말 기대된다.



"베니, 비디, 비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 말을 모토로 삼을까 생각 중이네. 이 말에 들어맞는 상황이 걸핏하면 생기는데다 간명한 표현이기까지 하니 말이지." (제1권 p. 383)



승리의 아픔이란 전장의 유일한 생존자로 남는 것이다. (제1권 p. 5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35 일의 미래로 가라
조병학.박문혁 지음 / 인사이트앤뷰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얼마전 TVN의 인기 프로그램 알쓸신잡’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을 시청하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있다. 알쓸신잡은 작가, 미식평론가, 소설가, 과학박사, 가수이자 프로그램의 MC 5명이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문화와 예술, 정치, 과학 등 다방면의 주제를 놓고 수다를 떠는 프로그램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춘천편이었다. 춘천편에서 나왔던 책과 인쇄박물관 때문이다. 컴퓨터 베이스 인쇄가 대중화된 현재 세대들은 불과 몇십년 전에 문선공이란 직업이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기술 발전의 역사 속에서 밀려나야만 했던 구식 기술과 그 시기의 지식인들을 생각하며 4차산업 혁명의 현재와 AI,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보았고 고민끝에 본 도서 ‘2035 일의 미래로 가라를 펼쳐보았다.   

 

 

이 책은 현재의 산업구조가 기술발전으로 인해 미래로 개편되면서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 지에 대한 가능성을 검증하면서 우리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한 무지로부터의 궁금증과 두려움도 있지만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에 대한 부분도 존재한다는 저자들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미래에 대해 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책은 크게 4가지 Part로 구성되어 있다.


  1. ​Part1 : 보이는 미래, 보이지 않는 미래

  2. Part2 : 일의 해체 : 일이 사라지는 9가지 징후

  3. Part3 : 일의 융합 : 일을 융합하는 9가지 혁신

  4. Part4 : 일의 미래 : 미래의 일과 직업

 

Part1에서는 미래로 가는 가로축, 즉 미래로 가는 마일스톤을 그리고 있다. 2025, 2035, 2045년경에 일어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미래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고 예측하느냐에 따라 선택된 좌표들에 대해 논란이 제기될 수도 있다. 미래의 속도와 방향 모두 관점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과학기술의 관점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미래학자이자 구글의 엔지니어링 책임자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의 견해를 참고하여 이를 서술하고 있다.

Part2에서는 미래로 가는 마일스톤을 기준으로 펼쳐지는 주요 이슈들을 살펴본다. 구체적으로는 초연결사회, AI와 인간지능, 3D프린터의 등장, 가상현실, 저물어가는 탄소 에너지, 디지털화의 추세, 휴머니즘 등의 이슈들을 중심으로 현재의 일이 미래로 가며 해체되는 현상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Part3에서는 일을 중심으로 중요한 산업들의 변화를 서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융합되는 유통산업, 미디어의 미래, 금융의 변화, 우주산업, 식량과 에너지산업 등을 살펴보면 산업간 융합이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고 이 과정에서 일자리의 변화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저자들의 생각을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 Part4에서는 해체와 융합과정을 거쳐 일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분석한다. Part 2Part 3에서 본 것 처럼 일은 사라지기도 하지만 새롭게 탄생하기도 한다. 심지어 죽은 일이 살아나기도 한다. AI와 스마트 공장, GMO 등으로 대변되는 과학 기술의 변화가 미래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설명과 이 과정에서 휴머니즘은 어떻게 보존되고 발전할 것인지에 대한 저자들의 생각을 서술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