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터다이크 인터뷰집 Neither Sun Nor Death, 첫번째 인터뷰가 이 책 논의로 시작한다. 

"96년 출간된 당신의 책 <자기 실험>엔 뭔가 으스스한 느낌이 있다. 자발적 신체 훼손이 일어나는 차가운 실험실을 나는 연상하게 된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이것이 그 책의 주제같기도 하다.(...) 파편화와 통합성. 당신의 철학은 파편화와 통합성에 대한 개인적 경험에서 원천을 찾는가?" 


<자기 실험>은 영어 번역, 한국어 번역 안된 책이다. 인터뷰집 읽기 전 슬로터다이크 책들을 어느 정도 

읽으면서 영역된 그의 책들 서지 파악해 두었었고, 하여 독일어로만 존재하는 이 책 <자기 실험>은 

제목을 기억할 의지도 일지 않던 책. 모든 책은 바로 번역되어야 한다. 1언어로만 존재하는 모든 책에 역자를 보내라. 

올해 안에 모든 책에 번역이 있게 하세요. 


고달픈 재미라도 재미가 있는 책이긴 하겠지만 

고달픔이 지금 감당 안될 고달픔일 수도 있겠지. 아예 알지 말자. 

구글 번역 돌리면 어떤 책인가 대강은 알겠지만 구글 번역 돌리지 말자. 


했다가 어제 인터뷰집 다시 읽던 동안 아마존 독자 리뷰 찾아서 구글 번역 돌려 보았다.  

일단 표지가 마음에 든다. 독일어 책들 중에도 이런 표지 책들이 있구나. 주어캄프의 이런 책들 





2색, 3색이 다인 이런 표지와 달리 

색들의 축제 같은 표지를 한 책도 있구나. 


구글 번역 돌려 보니 <자기 실험>도 인터뷰집이었고 

한 리뷰에 따르면 너무도 재미있는 책, 파티같은 책이라고 한다. 

"즉석에서 이런 생각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일 것이다" 이런 말도 한다. 


파티같은 책. 그렇다면 그림의 책일지라도 구하기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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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4-30 0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미 표지가 파티각! ㅋㅋㅋㅋㅋ 원저자도 그렇지만, 이럴때는 번역자들도 칭송받아 마땅하지요.

몰리 2021-04-30 06:53   좋아요 0 | URL
번역가는 계몽의 전령이다??

굉장히 유명한 말이지만, 정확히 기억 못하겠는 유명한 말!
실러가 했다던가 괴테가 했다던가. 지금 막 별별 검색을 다 해봤는데 찾지 못했어요. ㅎㅎㅎ 그런데 어쨌든 정말 번역가가 하는 엄청난 역할. 뛰어난 번역을 남기신 분들에게 경의를. 비오는 금요일엔 빨간 장미;를 번역가에게.
 



이 책은 데릭 자만이 말년에 쓴 일기.

데릭 자만은 이름은 들어봤고 작품도 본 적이 있는 거 같지만 

그래도 어쨌든 나는 이름만 알고 있는 감독. 심란하고 집중하기 힘든 영화들이지 않았나? 아님? 

막연히 그런 인상 남아 있는 거 같지만 그게 실제로 보긴 보아서 남은 인상인지도 확실치 않음. 


그런데 알라딘 중고샵에 이 책이 있었고 아마존의 어떤 독자는 

"나는 그의 영화는 좋아하지 않고 견디지 못한다. 그런데 이 일기는 내가 읽은 

일기 중 최고의 일기다. 너는 빠져들 것이다"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일기, 편지, 회고록, 자서전 

이것들 중 호평 받는 거라면 바로 사둠. 해서 이것도 사두었다. 






그가 남긴 일기를 묶은 책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책. Modern Nature. 

89년 HIV 양성 판정을 받고 부친의 죽음을 겪고 나서, 그는 런던의 소음, 소문을 떠나 영국 해변 시골 마을에 정착했고 오두막에 살면서 정원을 가꾸었다고 한다. 5년 후 94년에 타계한다. 일요일마다 오는 Brain Pickings 이메일이 전해 준 내용. 


구글 이미지에서 그의 오두막과 정원 이미지들 다수 찾아진다. 




유튜브에 저렴한 시골집 매물을 주로 올리는 채널이 있는데 

어떤 집들은 "오 마음에 든다" 같은 느낌이 바로 들기도 한다. 3천만원 이하 매물이 그렇기도 하다. 

어떻게 100-300평 대지 집들이 2천, 3천만원에 나오냐. 평당 10만원. 혹은 이하. 그럴 수도 있군요. 버지니아 울프가 

남편과 만들었던 몽크스 하우스. 나의 집. 나의 정원을 이 부부 따라해서 만들어 보는 게 아주 큰 돈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 



요 집도 마음에 들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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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가 이 책 불어판을 위해 쓴 서문이 있다. 

이런 문장들이 나온다. 


"이 책의 모든 페이지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든 그에 빛과 찬란함을 보태는 화가의 시선, 현대 화가의 시선과 만난다. 그의 눈은 전설이 품은 어둠의 가장 깊은 곳을 투시한다. 지난 시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시대를 보는 우리 시대의 눈이 여기 있다. 생명의 여명기, 인간이 태어나면 가장 강인한 나무처럼 자라던 시대, 인간이면 바로 초인이기도 했던 시대. 이 시대 사람들을 그가 우리를 위해 발견하고 보여준다. (...) 샤갈의 그림 속에서, 성경은 초상화집이 된다. 이 책에,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한 가족의 초상화가 담겨 있다. 


형식의 창조자이며 천재인 화가에게, 천국의 (Paradise) 일러스트레이션을 하는 작업이란 어떤 특권일 것인가! 그러나, 볼 줄 알며 보는 걸 사랑하는 눈을 가진 이에게, 모두가 천국이다. 샤갈은 세계를 사랑한다. 세계를 볼 줄 알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더, 세계를 그릴 줄 알기 때문이다. 천국이란 아름다운 색깔들을 갖는 세계다. 새로운 색을 발견한다는 것, 화가에게 이것은 천국의 기쁨이다.  


그 기쁨과 함께 그는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을 응시한다. 그는 창조한다. 모든 화가에게 그의 천국이 있다. (....)" 






불어판 표지로는 이런 게 있는 거 같다. 


바슐라르가 쓴 이 서문, 거부감도 들고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었는데 

종교, 기독교에 대한 태도가 조금 바뀌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이해되기 시작하고 

심오하고 진실하다는 ㅎㅎㅎㅎㅎ 감탄이 일기 시작한다. 


아니 이렇게까지 말씀하실 일인가요, 부정직하게? 부정직한 거 아닌가요. 신과 성경과 

천국을 이렇게 말한다는 건. (....) 이런 쪽이었다가 

읽고 생각하고, 침묵할 줄도 알게 되는 쪽으로. 

샤갈의 그림들에 바슐라르가 경탄하며 쓴 논평들이, 전엔 잘 이해되지 않던 말들이 

이제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종교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끔 자극한) 

슬로터다이크에게 감사할 일이다. 





종교에 대해 조금이라도 열린 태도가 해방시키는 정신의 면모들도 있는데, 선, 면, 색의 체험도 

그에 속할 것이다.........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위의 책 이미지가 다르게 보인다. 

물론 세속주의가 수행하는 해방도 있을 것인데, 종류가 다르겠으니 

세속주의가 해주는 해방도 추구하고, 종교에 열린 태도가 가능하게 하는 해방도 추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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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르몽드가 슬로터다이크, 지젝과 한 인터뷰가 있다. 

"서구 문화의 위기를 빠져 나갈 출구가 있는가?" 


슬로터다이크는 명랑하고 낙관적인데 

내용이 명시적으로 그렇게 보일 내용이 아닐 때에도 

스타일 덕분에 (스타일이 다인 게 아니겠지만 편의상 이렇게 말합시다) 어김없이 그러함을 알게 한다.  

이 인터뷰에서, 유럽에서 좌파가 몰락한 혹은 부진한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데, 여기서도 그렇게 느낄 수 있다. 

자기를 좌파에 포함시키면서 우울감 내지 패배감을 넌지시; 비친다거나 아니면 자기를 우파로 여기면서 

schadenfreude 이걸 내비친다거나, 전혀 조금도 눈꼽만큼도 그러지 않고, 대신에 "모두를 이해하는" 자의 

냉혈함으로 슥슥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함. "지성은 존재한다" + "지성은 좋은 삶을 원한다"가 

배후에 언제나 있기 때문에 명랑하고 낙관적이라 느껴진다. 


하튼 명랑하고 낙관적으로 슬로터다이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좌파는 분노가 원한("르상티망" 망할 르상티망)으로 타락하는 걸 막지 못했음. 이제 좌파는 심리정치가 원한 너머로 나아갈 길을 찾아야함."


반응으로 지젝이 이런 말을 한다.

"르상티망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건 우리가 우리에게 득이 되는 것보다 남에게 해가 되는 걸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본성이 그렇다. 당신들도 아는 설화가 있다. 천사가 농부에게 나타나 묻는다. "소 한 마리를 줄까? 앗 잠깐만, 네가 소 한 마리를 받으면 네 이웃에겐 두 마리를 줄 거야." 슬로베니아 농부의 답은 "안 받아요!"다. (....) 슬로터다이크의 말에 동의한다. 르상티망을 넘어서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에 대해 나는 비관적이다. 사람들은 부패했다. 변화의 가능성은 없다. 변화가 가능한 때도 있겠지만 예외에 속한다. 전체주의의 공식이 있잖은가. "너는 추상형으로 인류는 사랑하지만 실제 인간들은 혐오한다." 이에 따르면 나는 전체주의자다. 나는 인류는 사랑하지만 실제 인간들은 약하고 사악하고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이 가진 우매함을 진정 깊이 염오한다. 나는 슬로터다이크가 말하는 영적 수련의 현실성을 믿지 않는데 그러기엔 내가 비관주의자라서다. (....)" 


지젝이 이렇게 명확히 "나는 인간을 혐오한다, 인류는 사랑하지만" 같은 말들을 흔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음? 하게 되던 말들이었다. 여기 슬로터다이크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은 동유럽에서 있었던 심리정치의 진화 과정의 피해자다. 러시아에서는 모두가, 한 세기 동안 있었던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재난의 무게를 자기 어깨 위에 지고 다닌다. 공산주의의 비극이 여전히 동유럽 사람들의 삶에 스며 있다. 여전히 그 비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재난과 비극의 무게, 이것이 자기 생산하는 절망으로 이어진다. 나는 본성이 비관주의자지만, 삶이 내 비관주의를 격파했다. 삶과의 2차전에서 낙관주의를 성취한 낙관주의자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엔 이 점에서 당신과 나는 가까운 사이가 된다. 시작은 아주 달랐을지라도 우리는 나란히 놓아볼 수 있는 삶들을 살아 왔다. 우리의 여정에서 우리는 같은 책들을 읽었다." 


우리는 같은 책들을 읽었다. (.....) 아 이 말. 이런 말을 감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겁니까. ㅜ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이런 말을 감동적으로 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까. ; 하튼 감동했고 그리고 "우리는 같은 책들을 읽었다" 말고도 지젝의 (땡깡부리는 애 같았던 지젝의) 말에 대한 슬로터다이크의 반응이, 이게 진짜 어른이고 문명인인 사람의 사유이고 말이라면서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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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1-30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로터다이크의 말... 정말 좋네요. 감동입니다... 지젝과 슬로터다이크라... 꺅.

몰리 2021-01-31 08:07   좋아요 1 | URL
경탄스러운 말들을 아무데서나 그냥 막 합니다.
고르고 버리고 할 거 없이 다 정신없이 주워담아야 하는 거 같은 느낌 자극해요.
몇날며칠 토론해도 끝이 없을 재미있어 보이는 주제들도 참으로 많이 제시해요! (한숨.....)

다리 2024-01-29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이 인터뷰 링크 좀 알 수 있을까요?

몰리 2024-01-30 09:42   좋아요 0 | URL
저는 Selected Exaggerations (Polity), 이 책에서 읽었는데 책 찾아보니 인터넷 링크가 책에도 있는데, 일단 여기 한 번 가보세요. https://www.lemonde.fr/idees/article/2011/05/27/comment-sortir-de-la-crise-de-la-civilisation-occidentale_1528306_3232.html

 


(*이 분은 독일 언론인, 율리아 엔케). 



슬로터다이크: 인류가 대면한 위협을 감지하기. 그것이 지난 3천년간 인류의 아방가르드가 살았던 상황을 요약한다. 위력적인 위협 앞에서 지성은 전율했다. "신"이라는 개념은 인류가 자기 보호를 위해 고안한 가장 강력한 방패일 것이다. 이 방패를 들고, 그 뒤에 숨어, 인류는 괴물을 막아냈다. 방패 너머를 똑바로 보았다면 누구든 소금 기둥으로 얼어붙었을 것이다. 


엔케: 가짜 안정을 떨치고 위험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인가? 


슬로터다이크: 어쨌든 적어도, 위험에 대해 더 의식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우리 앞에 놓인 고르곤 같은 계몽과 대적함이 우리의 과제다. 인류가 공유할 생존의 길, 그 길을 열어낼 지구적 면역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지구를, 그리고 인류와 인류의 기술 환경을 보호할 방패를 만들어야 한다. 지구적 차원에서 에콜로지의 관리가 필요하다. 그걸 나는 "공동 면역주의, 코-이뮤니즘 (co-immunism)"이라 명명했다. 


엔케: 그 명칭은 "공산주의(communism)"를 겨냥한 말장난이다.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좌파 선언문인가? 


슬로터다이크: 내가 신-공산주의 프로젝트를 구상한 건 아니다. 알다시피 공산주의는 정복의 종교였다. 말하자면 무신론적 이슬람 같은 거였다. 공산주의는 공격적인 팽창의 운동을 추구하면서 산업 국가 모두를 자신의 궤도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진정 원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정치 권력을 통해 미숙한 민중들을 위한 극단적 교육 독재를 실행하고자 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실험이 인류에게, 같은 일이 반복되어선 안됨을 알게 했다. 내가 내 책에서 제시하는 운동은 강요된 전향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성취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책에서, 수행하는 삶, 그리고 향상을 통한 자기 형성에 집중했던 것이다. 


엔케: 당신의 인간관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슬로터다이크: 나는 강한 존재론적 테제에서 출발한다. <지성은 존재한다>가 그것이다. 이것이 강한 윤리적 테제로 이어진다. <지성과 자기 보존 사이에는 긍정적 상관 관계가 있다>가 그것이다. 아도르노 이후, 이 상관 관계가 자명한 게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기 옛 비판이론이 내놓았던 강력한 아이디어가 있다. 인간의 지성은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자기 파괴를 자기 보존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20세기가 우리에게 준, 망각해서는 안될 교훈이다. 이 교훈과 함께, 그러나 지금 우리의 어젠다에는 지구적 공동-면역의 긍정적 이론을 올리도록 하자. 인류가 함께 추구할 생존, 그를 위해 필요한 수행의 토대와 방향을 제시할 이론을 올리도록 하자. 


엔케: 당신은 유토피아를 설계했는가? 


슬로터다이크: 이게 유토피아라면 내 머리털이 곤두설 것이다. 이게 유토피아라면, 나는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이 되기를 원했던 광인들의 명단에 속할 것이다. 유토피아이기는커녕, 내가 해보인 건 실용주의라고 생각한다. 



구해 둔 슬로터다이크 책 얼른 다 읽고 싶어진다. 그의 책들에 

논문에 필요한 것들도 있지만, 내게 개인적으로 해주는 말들도 있다. 

하튼 부랴부랴 읽는 중인데, 인터뷰 중에서 이 대목은 특히 더 옮겨 놓고 싶어졌다. 

인터뷰어가 율리아 엔케(Julia Encke)라는 언론인인데, 슬로터다이크의 다른 인터뷰들보다 특히 더 그녀의 인터뷰에서 질문이 다 저런 식, 다 용건만 간단히. 너무 간단히. 무뚝뚝하게. 가장 짧게. 


저렇게 가장 짧게 핵심만으로 반응하고 질문한다는 게 

갑자기 너무도 신선하고 마음에 든다. 웃기기도 하다. 

슬로터다이크의 답들도 주로 명답이기도 하고, 어찌나 답을 잘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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