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인문학 전공자만의 스킬인 건 아니지만 

인문학 전공자인 경우라면 특별히 더, 특별히 인간을 웃게 하고 울게 할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을 스킬. 그것으로는 당연히 "writing"이 있을 것이다.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중 몇 권 오디오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데, 이것들 들어보면서 실감했던 게 그것이다. 이 문장이, 쓰려고 하면 그냥 바로 아무데서나 나오는 문장일 거 같습니까? 이 문장이 나오기 위해 무엇이 필요했겠습니까? 


........... 정말 정색하고, 누가 나를 들어준다면, 질문해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카뮈 주제 외에, capitalism, socialism, empire, postcolonialism, Adorno, 등이 있다.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를 잘 설명하기. 이 주제의 무엇이 인간적 관심의 대상인지 잘 이해하기. 저자가 이것들을  하고 있다고 조용히 감탄하게 되는 대목들이 있다. 



아무튼. 모든 인문학 전공자들이, ㅎㅎㅎㅎㅎ 야 이거뜨라.... 들어라, 

하여 걸작들을 쓰기를 

기원하면서 저는 물러가보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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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헤밍웨이가 쓴 가장 짧은 단편 소설이라 전해져 온 6단어 소설. 

<미국 단편 소설> 주제 강의가 있어서 들어보는 중. 단편 소설을 정의하고 그에 보태어 "미국" 단편 소설을 정의하는 대목에서, 이 전설적인 6단어 소설에 대한 긴 논의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헤밍웨이는 친구들과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누가 가장 짧은 소설을 쓸 수 있나 내기를 하게 된다. 나는 6단어로 쓸 수 있어. 그가 말했고 냅킨 위에 쓴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더 짧은 소설은 나오지 않았고 그는 판돈 전부를 가져갔다.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많은 편집자들과 작가들이 (특히 아서 C. 클라크) 반복해 말해 왔다. 그러나 아니다. 저 6단어는 실제로 광고로 나온 적이 있는 6단어이고 그 광고에 대한 (이건 얼마나 우리 가슴을 치는 광고인가...) 글들이 헤밍웨이의 소년 시절 이미 나와 있었다. 헤밍웨이를 이 6단어 소설의 원작자로 보고 싶어하는 미국 대중의 욕구는, 이 6단어 소설을 근본적으로 미국적인 소설로 보겠다는 욕구다. 여기 담긴 내용은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미국적이기도 하다. 자비를 향한 호소,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있다. 특히 20세기 전반 삶의 불확실성이 있다. 만일 가장 미국적인 작가로 추앙받은 헤밍웨이가 실제로 이 6단어 소설을 썼다면, 이 짧은 소설은 "patina of native genius"를 갖게 된다. 



새벽 캄캄할 때 별도 보고 하늘도 보면서 강의 듣는 건 제정신 유지에 가장 도움되는 활동이다. 오늘 새벽엔 위에 적은 저 내용에 특히 감탄했다. 오늘을 위한 제정신이 그렇게 확보되었. 


"patina of native genius" 이 구절은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patina, 구리 등 금속 물건의 표면에 생기는 녹색의 녹(?). 오래 아끼며 쓴 물건의 표면이 갖게 되는 윤기. 세월의 증거. 기억된 세월의 증거. 


"미국 원산 천재성의 은은한 증거"? 


어쨌든 "patina of native genius" 이것을 갖겠다는 게 얼마나 어디서나 사람들의 영원한 욕망인가. 이것을 찾고 규정하고 추앙하겠다는 그 욕망. 너무 자주 왜곡되거나 잘못 이용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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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스피 책에 

화학에 대한 장이 별도로 있고 

라부아지에 중요하게 다룬다. 아주 높이 칭송한다. 


바슐라르도 

라부아지에의 업적 높이 칭송함. 라부아지에와 함께 화학이 현대로 진입한다고 함. 

과연 진짜로 화학의 아버지인가 봄. 영국의 조셉 프리슬리와 함께 화학의 두 아버지. 

라부아지에의 저 책은 과학책 같지가 않다고 한다. 술술 매료되어 읽을 수 있다고 한다. 

부화뇌동되었고 이 책을 사고 싶어졌는데 가까운 미래에 무직이 예정되어 있으니 

사고 싶다고 척척 사지 못함. 5월부터 오늘 오전까지 책을 10권이 되지 않게 샀다. 7월 독보적을 끝내고 나서 

2200원 ㅎㅎㅎㅎㅎ 적립금 포함해 8월에 라부아지에의 책을 사겠다고 결정하는 하루를 보냄. 

책을 별로 사지 않으니 독보적 스탬프가 80장이 넘게 모였다. 2200원 적립금을 받을 즈음엔 독보적 스탬프만으로도 적어도 5천원을 받게 된다. 그 모두가 라부아지에의 이 책을 사는데 쓰일 것이다. 


이 책을 어떻게 살 것인가 결정하는 하루를 보내면서 

그리고 독보적 스탬프를 환전하지 않으면서, 6권쯤 주문한 거 같다. 어떤 달이든 1일엔 책을 사야지. 

무직이 예정된 게 아니라면 라부아지에 책도 오늘 샀겠지. 척척 다 샀을 것이다. 




화학이 진짜 신기하고 어렵고 매우 쓸모 있고 심오하고 

..... ㅎㅎㅎㅎㅎ (웃게 된다, 물리학이나 수학은 저런 게 아니란 말이냐) 

하튼 화학, 매력적이다. 물리학이나 수학이나 생물학도 저 모두의 특징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문학 연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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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2 05: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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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2 0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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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2 16: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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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2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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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브 벨은 버지니아 울프 언니 바네사의 남편. 

블룸스베리 그룹의 중요 멤버였다. 웃기고 활수하고 (약 이십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활수하다 이 말 썼더니, 그 말 실제로 쓰는 사람 처음 본다던 사람이 있었.... 누군가를 기억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말들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 그 웃김과 활수함으로 블룸스베리 그룹의 형성과 유지에 지대한 역할을 했지만, 결국 작가도 예술가도 지식인도 아니었던 사람. 버지니아 울프, 리튼 스트래치, 메이너드 케인스, 등등에게 "미만잡." 한참 미만잡. 


대강 저런 게 클라이브 벨에 대한 후대의 평가였다.  

그가 아무 것도 안 쓴 건 아니고 그가 남긴 예술 비평, 예술 이론 저술들이 있긴 해서, 그것들을 놓고 그를 모더니즘 미학 이론의 선구자로 읽는 시도들이 있기도 했다. 대세는 바뀌지 않음. 그런데 6백 페이지 분량의 전기가 올해 나왔고, 무슨 얘기가 여기 있을지 궁금하다. 



어제부터, 공기 청정기 아무리 돌려도 수치가 50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바깥 미세먼지 수치가 100-200 사이라면 틀고 10-30분이면 청정기 수치가 30 근처로 내려갔던 거 같은데 어제 오늘 같은 수치면 아무리 돌려도. 어제 밤에 틀고 잤는데 일어나서 보니 150 근처. 밤새 틀어도 "보통" 수준이 되지 못함. 바깥 수치는 오늘 600을 넘었었지. 몇 년 전 며칠 동안 200-400 그랬을 때,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는가, 우울하고 무력하다 한탄했었던 거 우스워지는 어제 오늘의 수치. 이런 수치에 익숙해지면 100-150까지는 좋은 공기로 느끼게 될 거 같다. 나가서 뛰고 깊이 들이마시고 그럴 것이다. 



니체와 과학. 니체의 과학철학. 이런 주제로 연구하고 글 쓰는 분들이 있고 

그 분들을 삐딱하게 보는 분들도 있다. 니체가 무슨 과학철학자야. 니체에게 무슨 과학철학이 있어. 진심이세요? 

그런데 삐딱하게 보기엔 니체가 과학을 정말 너무 많이 말한다. 독어 단어 Wissenschaft가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사회과학, 인문학도 포함하는 단어라는 것, 영어로 의미에 충실하게 저 단어를 말하라면 science가 아니라 scholarship, intellectual inquiry, 이런 쪽이 더 맞는 역어가 될 것이라는 게 사정을 복잡하게 만들지만, 어쨌든 Wissenschaft, 이것이 그에게 극히 중요한 주제였다. 


인간의 정신은 거대한 방이 되어야 한다. 예술과 과학, 상충하는 힘들이 그 안에서 공존해야 한다. 

더 높은 문화는 과학과 비-과학을 동시에 다루는 "이중 두뇌 double brain"를 요구한다. : 이런 게 그의 입장이기도 했다. 


"이중 두뇌." 바로 바슐라르가 연상될 법도 한 구절. 

실제로 니체 저술들 여러 곳에, 그가 말하는 "새로운 철학자"는 바슐라르 같은 철학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 대목들이 있다.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에, 이건 과학철학의 니체주의라고 볼 수 있는 여러 대목들이 있기도 하고. 이 모두를 앞에 놓고 "바슐라르, 니체의 후예" 이런 주제 페이퍼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아주 좋은 주제라고 생각한다. 극히 흥미로운 (그리고 심지어 중요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주제다. 그러나 그런 결과가 나오려면, 적어도 한 번의 생애가 필요하고 (....) 아마 대가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구상은 나도 (나따위도) 할 수 있지만, 구현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되는 주제인 것임. 


미미한 구현이라도, 구현하다 실패할 뿐일지라도 좋으니 해보겠다면 

거대한 방으로서의 정신들이 모인 곳에 있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만인이 만인을 가장 좁은 방에 가두려 하기. 이것이 한국의 경험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구상은 하더라도 구현은 하지 못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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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1-05-09 0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상에서 구현까지. 정말 한 사람의 생애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겠어요.
과학과 비-과학이라고 말하면 과학 아닌 분야를 과학과 너무 반대쪽에 놓는 느낌이 들때가 있어서, 비과학이란 말 대신 과학을 넘어선 분야라고 생각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몰리 2021-05-09 07:10   좋아요 0 | URL
정말 한 번의 생애는 무엇을 하든 제대로 하기엔 부족하지 않나는 생각도 듭니다. 내 손으로 집도 지어보고 싶고 목공도 배워보고 싶다면 그러면서 동시에 책도 읽고 글도 쓰기는 거의 불가능. 얼마 전에 윤회설에 대해 들으면서, 아 이것이 주는 막대한 위안이 있구나, 다른 삶에서 해보았다, 다른 삶에서 해볼 것이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했었어요.
 




아래 포스팅한 패트릭 리 퍼머의 책 표지들 중 

브뤼겔의 그림 아니면 브뤼겔 "풍"의 그림을 쓴 게 있었던 거 같은데 

다시 검색하면서 찾지 못함. 브뤼겔 그림이 그 자체로 수도원이지... 수도원에 실제로 가지 않아도 돼. 브뤼겔의 그림이 있다면. 이런 (아마 근거없는) 생각이 그걸 보면서 들기도 했으나.  


그래도 그의 책 조금 읽으면서 확신하게 되는 건 

집은 "성소"가 될 수도 있다는 것. 패트릭 리 퍼머가 칭송하는 수도원 삶의 요소들을 자기 집에서 가질 수도 있다는 것.  

브뤼겔의 그림이 그에 기여할 수 있다면 브뤼겔 그림을 집 어디에 모셔두면 좋을 거라는 것. 


몽테뉴의 서재. 둥근 탑 안에 있었던 그의 서재. 그곳이 그에게 성소이기도 했을 (그 자신은 그렇게 규정하지 않았을지라도. 보는 나의 관점에 따라) 거라는 것. 



Domaine de montaigne - Picture of Montaigne's Tower, Saint-Michel-de- Montaigne - Tripadvi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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