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주트의 <재평가>에
영어권에선 (그러니 아마도 당연히 한국어권에서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20세기 유럽에서, 특히 유태인 지성사... 에 관심있다면 모를 수 없는 인물이라는 마네스 슈페르버
(Manès Sperber)의 3권 자서전에 대한 긴 서평이 있다.
"슈페르버에게 아우슈비츠의 고통엔, 독일적인 것들 특히 독일어와 그 사이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더욱 가혹한 무엇이 있었다. 이건 독일의, 영국의, 프랑스의, 러시아의 유태인들은 모르는 고통이며, 슈페르버가
발터 벤야민, 슈테판 츠바이크, 파울 첼란, 한나 아렌트 -- 이들 외에도 다수 -- 와 공유했던 고통이다. 독일어와
독일문학을 향한 사랑은, 특히 동화한 중유럽 유태인들의 특이한 면모였다. 히틀러의 집권 전후, 나치즘의 정체를
제대로 보길 거부했던 일에 대해 슈페르버가 하는 말은, 이 유태인들 다수가 했음직한 말이다. "나는 독일과의
절연에 저항했다. I was resisting a break with Germany." 하지만 재난이 일어난 다음, 독일어를 쓰던 이 유태인들이
정확히 바로 그 이유에서, 히틀러가 자행한 파괴에 대해 독일인들보다 더 특별하고 깊은 이해를 할 것이었다."
(*<재평가> 한국어판 없어서 영어판 보고 지금 번역해 보았는데, 어렵습니다. ; 이 단 한문단에서 중요한 것이 적지 않게 lost in translation.)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의 마지막 문장이
이런 굉장히 이상한 문장이다 : "포도주란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음미하며 마시는 철학자를 만나게 될 때 정녕 각별해지는 보편적인 것이로다. 디종, 1047년 10월" 바슐라르의 많은 문장들이 그렇지만 이 문장도, 프랑스에서만 그것도 바슐라르만 쓸만한 문장 아닌가. 그런 생각 들 문장. 영어권의 누구도, 심지어 포도주를 잘 알고 늘 즐기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쓰지 않을(못할) 것 같다. 이 문장만큼 이상한, 포도와 포도재배와 포도주를 찬미하는 그 앞의 많은 문장들을 감안하면 더더욱.
예전에 읽으면서 저 비슷하게 과잉 반응 했었다. 그러다 어제
바슐라르 삶에서 포도와 포도재배, 포도주가 하는 역할에 대한 두 페이지를 읽고, 거의 깜놀.
불어엔 저들과 관련해서 무수한 어휘들이 있으며, 그 어휘들 모두 자신의 전모와 함께 잘 쓰이고 있는가 보았다. 예를 들면 vendange, 이 말엔 세 개의 뜻이 있는데 1. 포도의 수확. 2. 포도 수확기. 3. 수확한 포도. vinicole, 이 단어는 "포도 재배의, 포도주 양조의"의 뜻인데 철자 하나를 바꾸어 viticole, 이 단어가 똑같은 뜻이다. (왜?) 두 페이지에, 거의 줄마다 포도 관련 어휘가 조금씩 모양을 바꾸며 등장.
포도와 포도재배, 포도주에 대해 바슐라르가 극히 개성적인 문장들을 쓸 수 있었던 게
그가 불어를 썼다는 것과 무관할 수 없지 않을까. 어떤 언어를 (특히, 모국어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적어도 일부는 이런 것이지 않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하게 해준 그 언어만의 자원. 그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