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 캐링턴의 

이런 그림들. 






영국 시골이 어쩌면 절묘하게도 

내 고향 촌구석 마을과 같은지. 길, 돌담, 나무, 흰옷을 입은 모녀. 푸른색 높은 지붕. 

현실에서, 현실의 세부에서 아예 다르더라도 그 다름이 사라지는 일. 이렇게밖엔 못 쓰겠지만 

하여튼 처음 이 그림 봤을 때, 70년대 중반 충청도 산골의 그 마을 같고 그 흙길 다시 걷는 거 같다며 놀람. 





<화니와 알렉산더>에서 웁살라. 겨울 웁살라. 우선 그 웁살라 같지만 

이 그림 역시, 실제(실재)와 무관하게 내가 가보고 알았던 모든 성당, 수도원 

그 비슷한 시설들 기억하게 한다. 



*이건 맨 위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습작이었던 건가. 


그런가 하면 

그랜마 모세스의 이런 그림들. 







초딩 시절, 그림 잘 그리고 미술대회란 대회에서는 언제나 상받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그림 생각나게 한다. 그냥 슥슥 집도 그리고 집 앞에서 썰매타는 아이도 그리고 

집 뒤에서 빨래 너는 엄마도 그리고 오른쪽엔 학교와 학교 담장도 있고 왼쪽엔 가게가 있고. 

종이와 연필 크레파스 있으면 그냥 슥슥, 그리던 아이. ㅋㅋㅋㅋㅋ 옆에서 놀라며 매혹되던 나. 

이미 36색, 48색 크레파스를 색을 섞어서 (내건 아마 24색) 오묘한 색도 만들던 아이. 뛰다가 넘어지거나 

주저앉는 아이를 정말 넘어지거나 주저앉는 게 실감나게 그렸다. 내가 그리던 건, 서 있는 거 정도? 차려 자세로. 

그 시절 그 매혹, 놀라움 그대로 (아니 몇 배로) 다시 살아보게 하지 않나, 그랜마 모세스 그림들. 





<솔라리스>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 

영화에, 이 그림 속 인물들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연출된(의도된) 장면 있지 않나. 


아래 포스트에서 마네스 슈페르버, 이 분 책 찾아보다가 God's Water Carriers란 금시초문인 책에 끌린 건 

제목도 참, 매혹적이긴 한데 (무슨 뜻일까 궁금해지고) 표지의 그림 때문이었다. 물 지고 가는 사람들. 겨울 골목. 

초등학생 아이라도,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는 종이 위에 바로 마법을 실현하던 그런 일들...... 기억하게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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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주트의 <재평가>에 

영어권에선 (그러니 아마도 당연히 한국어권에서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20세기 유럽에서, 특히 유태인 지성사... 에 관심있다면 모를 수 없는 인물이라는 마네스 슈페르버

(Manès Sperber)의 3권 자서전에 대한 긴 서평이 있다. 


"슈페르버에게 아우슈비츠의 고통엔, 독일적인 것들 특히 독일어와 그 사이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더욱 가혹한 무엇이 있었다. 이건 독일의, 영국의, 프랑스의, 러시아의 유태인들은 모르는 고통이며, 슈페르버가 

발터 벤야민, 슈테판 츠바이크, 파울 첼란, 한나 아렌트 -- 이들 외에도 다수 -- 와 공유했던 고통이다. 독일어와 

독일문학을 향한 사랑은, 특히 동화한 중유럽 유태인들의 특이한 면모였다. 히틀러의 집권 전후, 나치즘의 정체를 

제대로 보길 거부했던 일에 대해 슈페르버가 하는 말은, 이 유태인들 다수가 했음직한 말이다. "나는 독일과의 

절연에 저항했다. I was resisting a break with Germany." 하지만 재난이 일어난 다음, 독일어를 쓰던 이 유태인들이 

정확히 바로 그 이유에서, 히틀러가 자행한 파괴에 대해 독일인들보다 더 특별하고 깊은 이해를 할 것이었다." 


(*<재평가> 한국어판 없어서 영어판 보고 지금 번역해 보았는데, 어렵습니다. ; 이 단 한문단에서 중요한 것이 적지 않게 lost in translation.)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의 마지막 문장이

이런 굉장히 이상한 문장이다 : "포도주란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음미하며 마시는 철학자를 만나게 될 때 정녕 각별해지는 보편적인 것이로다. 디종, 1047년 10월" 바슐라르의 많은 문장들이 그렇지만 이 문장도, 프랑스에서만 그것도 바슐라르만 쓸만한 문장 아닌가. 그런 생각 들 문장. 영어권의 누구도, 심지어 포도주를 잘 알고 늘 즐기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쓰지 않을(못할) 것 같다. 이 문장만큼 이상한, 포도와 포도재배와 포도주를 찬미하는 그 앞의 많은 문장들을 감안하면 더더욱. 


예전에 읽으면서 저 비슷하게 과잉 반응 했었다. 그러다 어제 

바슐라르 삶에서 포도와 포도재배, 포도주가 하는 역할에 대한 두 페이지를 읽고, 거의 깜놀. 

불어엔 저들과 관련해서 무수한 어휘들이 있으며, 그 어휘들 모두 자신의 전모와 함께 잘 쓰이고 있는가 보았다. 예를 들면 vendange, 이 말엔 세 개의 뜻이 있는데 1. 포도의 수확. 2. 포도 수확기. 3. 수확한 포도. vinicole, 이 단어는 "포도 재배의, 포도주 양조의"의 뜻인데 철자 하나를 바꾸어 viticole, 이 단어가 똑같은 뜻이다. (왜?) 두 페이지에, 거의 줄마다 포도 관련 어휘가 조금씩 모양을 바꾸며 등장. 


포도와 포도재배, 포도주에 대해 바슐라르가 극히 개성적인 문장들을 쓸 수 있었던 게 

그가 불어를 썼다는 것과 무관할 수 없지 않을까. 어떤 언어를 (특히, 모국어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적어도 일부는 이런 것이지 않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하게 해준 그 언어만의 자원.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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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명의 면면을 규정하는 여성혐오. 

그것은 남자들이 부정했으며 그러므로 알 수 없는 것, 공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제도화된 두려움과 증오다. 여자들이 살고 있는 그 야성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주는 깊은 충족감을 알고 나면

이해하지 않음, 이해를 거부함을 특권으로 아는 사람들을 

견딜 수 없게 되지 않나. 


심정적으로는 어디서도 신분제 척결되지 않은 한국에서는 

너도 나도 은밀히든 명백히든, 이해를 거부함("부정함")을 자기 권리로 삼으려 애쓰지 않나. 

그래서, 남자들의 거의 전부, 갑들의 전부가 언제나 저런 태도이지 않나. 


교수들 중에도 참 많은데 

저런 사람이 한다는 공부가, 공부이긴 한가. : 이런 생각을 하며 보게 되던 교수들. 


몰라도 됨, 모르겠음이 특권이 되면 (갑들 사이에서 더더욱 그렇다면) 

평가의 객관성, 공정성... 같은 건 아예 성립할 수 없지 않나. ;;;; 네. ;;;; 


"탁월함"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 (통상적인 기준과 다르다.. 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기 경험을 통해 사유되고 축적된. 정도의 의미에서), 이거 있는 사람 극히 드물지 않나. 

그게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기준이 부재할 때, 천경자 작품 위작 판결이 무시되고 

멋대로 진품 판정 내리는 인간들이, 그래도 되는 줄 아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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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 르네상스"라고 하면 오글거리기도 하고 

사실 과장이기도 할텐데 어쨌든 오래 절판 상태였던 그의 책들이 하나씩 재간되고 

연구서들도 연달아 나오고 있어서, 어떤 책들이 새로 나왔나 미국 아마존도 찾아보고 아마존 프랑스에서도 

가끔 찾아본다. 그러다 위의 책 발견.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입문>. 이자벨 위페르의 그 무슨 영화였나, L'avenir, 이게 불어제목. 영어 제목이 Things to Come? 그녀가 고교 철학교사로 나온. 몇 번 봤고 연달아 여기 포스트로 썼음에도 지금, 감감. 감감. 감감. <다가오는 것들>! 이게 한국어 제목. 적으면서 기억에 성공했다. 토탈리콜! 파셜리콜! 이 영화에서 그녀 제자가 <미니마 모랄리아>에 대한 책을 쓰는데, 본격 연구서기보다 입문서로 짐작되는 책. 


하여튼 그 책이 바로 연상되었다. 108쪽. 얇다. 영어로 이런 책, 가벼운 분량 <미학이론> 입문서는 아직 없는 듯. 

<미학이론> 영어판에 "서론 초고"가 있는데 이게 책 끝에 배치되었다. 이 "서론 초고"에서 시작해서 하루에 1/3 쪽 정도 읽는 걸 그러니까 지금 몇 년째 하는 중인데 지금 와 있는 쪽이 186쪽. 한국어판과 같이 보는데, 한국어판으로는 283쪽이고 아주 많이 진도 나가보인다. 거의 얼마 남지 않아 보임. 영어판으로는 중간 지점. (한국어판에, 독어판에 있지만 번역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미학이론> 정말 엄청난 괴작이라서, 그런데 내 경우 조금씩이지만 매일 읽는 정도로 (초기엔 독어판도, 문법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단어를 모르면서 찾아보았고) 지속적으로 투자해왔다보니, 이 괴작에 남들은 무슨 얘기 하는지 쉽게 설명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해지기도 하는 책. 위의 책을 바로 도서관에 구입신청함. 


어설프게만 아는 외국어로 책을 읽는 일에, 사실 그 자체에 매력이 있긴 하다. 

얼마나 많은, 새로운 단어들이 여기 있을까! 이런 게 자극하는 기대, 있지 않나. 이해라는 섬에 가기 위해 

해결이라는 무수한 돌들로 다리를 놓아보는 과정. 하여튼 그런 것. 그렇긴 한데, 그 섬이 가까워지거나 해결이 아주 빨라지거나. 그랬으면 해서, 비교문학 전공 학부 시절 1년 동안 문걸어잠그고 불어와 독어 공부했다던 로버트 훌롯-켄터처럼 공부할 수 있음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본 순간이 있던 저녁이었다. 


*원래 쓰려던 게 이런 내용이 아닌데 어쩌다 여기 와 있나 어리둥절하면서, 그만 쓰기로 함. 

남아 있는 하고 싶은 말은 다음 포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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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막대한 양의 작업을 해냈고 

새로운 방식의 날카로운 즐거움을 우리에게 주었으며 

어둠에 맞서 영어라는 언어의 빛을 조금 더 밀었다. 


이것들은 사실이다. 울프 같은 예술가의 묘비명을 

속된 정신이나 아니면 쉽게 슬픔에 압도되는 사람은 쓸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이 쓰려고 시도할 것이고, 아니 이미 시도한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써낸 말들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작가로서 그녀의 삶을 승리의 삶으로 

보는 것이 더 현명하고, 더 안전하다. 고상하게도 "역경"이라 불리는 것에 맞서 그녀는 승리를 거두었고 

그리고 그녀의 승리는 실제적인 의미의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전리품을 가져왔다. 가끔 내게 그녀의 작품이

한 줄로 세워진, 반짝이는 은잔들로 보이곤 한다. 그 잔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이 우승컵은 정신이, 자신의 

적이자 친구인 물질에게서 (물질에 맞서, 이기고) 받은 것이다. These trophies were won by the mind from matter, its enemy and its friend." 



울프가 타계했던 해 41년에 케임브리지의 유명한 Rede Lecture에서 

포스터가 울프를 주제로 강연했다. 위에 옮겨 온 건 그 강연 마지막 문장들. 


나도 포스터는 "쿰쿰하고 퀴퀴하고 케케묵은" 작가라 생각하다가 저 강연 보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었다. 

저 문장들이 딱히, 대단히 재치있거나 하여튼 독자의 관심을 확 끌 문장들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표현이 개인적일 뿐이지 담긴 생각들은 그렇지 않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문장들 포함해 강연 전체가 적어도 기존 울프 비평들보다, 그들 다수보다 낫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사람은 울프의 작품들을 진짜로, 가장 모호하고 도전적일 대목들까지 전부, 이해하며 깊이 읽었다... 고 느껴진다. 이 강연 처음 읽을 때 내겐 그게 참 놀랍기도 했다. 한국의 남자 영문학 교수들 중 울프를, 이해는 고사하고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아마 1인도 없을 텐데? : 이런 생각도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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