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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 관한 bbc 다큐멘터리. 

1918년 11월 독일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두 달 뒤인 19년 1월 파리에서 

전쟁의 종식을 위한 강화회의가 열린다. 그 후 6개월에 걸친 쉽지 않았던 협상 끝에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된다. 

이 평화의 노력에서 주도적이었던 사람은 셋인데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프랑스 수상 조르주 클레망소, 영국의 수상 데이빗 로이드 조지가 그들이다. 이들의 노력에 대해 후대는, 그들의 시야가 좁았고 복수가 그들의 목적이었으며, 이들이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히틀러와 2차대전으로 귀결했다고 보아 왔다. 


시작할 때 저런 말을 하는데 끝의 문장은 영어로 이렇게 되어 있다. 

These peacemakers have often been seen as short-sighted and vindictive, whose bungling led to a chain of events which ended with Hitler and the Second World War.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 

하지만 마가렛 맥밀란을 포함해 한 세대의 역사학자들이 

1919년 파리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재검토하면서, 베르사이유 강화회의를 실패로 보는 이 관점에 도전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강화회의는 유럽의 지도를 정하기 위한 현실적 시도였다. 강화회의는, 세계를 위한 자유주의적, 진보적 어젠다를 공유했던 세계 정상회담이었으며, 우리는 지금 우리도 암울하게 잘 알고 있는 그 딜레마를 마주했던 1919년의 지도자들을 더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부분은 영어로: 

But a generation of historians like Margaret MacMillan, revisiting the events in Paris, are challenging this view of a failed peace with Germany. These historians argue that the peace conference was a realistic attempt to shape the map of Europe. They have seen Paris as a global summit for the liberal, progressive agenda for the world and urged a greater understanding of the peacemakers of 1919 as they faced dilemmas which remain grimly familiar to us today. 



이런 얘기하면 

영어 잘한다는 잘난척으로 보이기도 하고 (박사까지 전공이 영문학이고, 긴 세월 영어로 공부했던 것임에도. 하여튼) 서구 추종으로 보이기도 하던데, 그렇게 보이든 말든 


하여튼 이런 문장들에서도 영어의 표현력이 한국어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것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연하고 명확하게, 할 말을 하기. 말들로 할 수 있는 전부를 하기. 한국어가 본원적으로 표현력이 약한 게 아니고, 억압당하고 있다고도 생각하고 그 억압을 밀어낼 한 방법은, 영어식 표현을 (영어의 관사를 대신할 "그" 등) 포함해서 어색하고 거추장스럽더라도 정확하게 말해보기, 사치스럽게 말해보기....... 를 장려하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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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사람들이 많은 실수를 하지. 

세상이 실제로 그렇게 멍청한 곳임을 믿지 못하다 보니." 


이것, 이것도 진실 아닌가. 샹포르, 만인의 영웅이어야 한다. 

사람 안 변한다. 이 말을 달리 말한 거 같기도 하다. 세상의 누구든 

자신의 그릇, 자신의 색깔 이외의 무엇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의 거의 모두가 

변변찮은 그릇이고 대단찮은 색깔이라서, 그들의 합이라봐야 언제나 너를 실망시킬 것이다. : 이런 얘길 

하는 것처럼도 내겐 들린다. 


그런데 정말 인생의 큰 실망 중에 이것 있지 않나. 사람의 한계라는 것. 

그 사람은 영원히 그 사람이라는 것. ;; 그 사람이라는 클리셰라는 것. ;;  


*음 더 이어서 써야할 것 같은데 일단 이 정도를 오늘의 두번째 포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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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radio3 5편의 에세이 중 Words에서 

줄리언 반즈가, 사람들이 잘못 쓰는 단어이며 

잘못 쓰고 있음이 애석한 단어의 예로 이 단어 든다. decimate. 

이것은 로마 군대에 있었던 처벌 방식에서 유래한 단어. 전쟁에서 형편없이 싸웠거나 

여하한 이유로 병사들을 크게 벌해야 했을 때, 전체 인원의 1/10을 죽였다고 한다. 10명 중 1명. 

지금 정확히 그 뜻으로 이 단어를 쓰는 사람은 없고, 심지어 영문과 교수들도 잘못 쓰고 있다. "학살하다 massacre"의 의미로. 9/10, 10명 중 9명을 죽이다. 정도의 의미로. 


"나는 이 단어를 원래 뜻대로 정확하게 쓰고 싶지만, 그런다면 아무도 내 말을 내 뜻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고 할 때 조금 웃김. 말에 까다로운 사람들이, 까다로운데다 해박한 사람들이 (어원, 원래의 의미, 오용의 역사) 무슨 말을 하든 단어 하나 어김없이 극히 정확하게 쓴다면, 그들의 말은 본의 아니게 조금 웃기기도 할 것 같다. 


반즈의 첫직장, 대학을 졸업하고 갔던 최초의 직장이 Oxford English Dictionary 편찬팀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c에서 g사이였던가, 조사해야할 어휘들 알파벳 배정을 받고 그 안의 단어들에 대하여, 찾을 수 있는 모든 용례들을 찾으며 3년 넘게 일했다. 작가가 되기 전 lexjcographer 였던 것. OED에서 일하기 전 그는 사전의 황금시대주의자, 세상의 무엇에든 그것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가장 정확한 말이 있다고 믿는 보수주의적 prescriptivist. 그러나 OED 시절이 끝날 무렵의 그는, 언어 사용과 관련해서 prescription 있을 수 없다는 자유주의적 descriptivist. 잘못 쓰이기도 하면서 의미가 풍요해지는 것이 말. 


왜 영어권 지식인들은 (그들만이 아니라 다들, 대체로 누구나들. 특별히 언어장애가 있지 않은 한) 

유창한데 한국의 지식인들이나 어쨌든 한국의 우리들은 그렇지 않은가. 여기 내놓을 수 있는 답 중에 

이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롭게 폭발적으로 미친듯이(미친듯이 즐기며) 표현력을 시험하며 방만하게 

하여튼 한국어를 풍요하게 써본 이전의 역사도 없으면서, prescriptivism이 강하게 존재했던 일. <우리말 바로쓰기> 

같은 책들. 영어에서 prescriptivism의 압박은, 그게 현실적 압박이라 느끼는 이가 누구라도 있었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겐, (사람들이 순해서? 아니면, 사람들이 지배를 사랑해서? 구속을 사랑해서?) 현실적이었고 현실적인 듯. 


답들 중에선 가장 사소한 답에 속할 듯. 

그리고 프랑스에서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불어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애쓰고 있다고 하고 

예전엔 좀 광적이기도 했다는 걸 보면, 그래도 불어 쓰는 사람들 역시 영어 쓰는 사람들처럼 아주 유창한 것 같은 걸 보면, 이건 답이 아닐 수도. 


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이렇게 오늘의 첫 포스트를 성사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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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뉴스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조금 전 뉴스룸에서 

이지은 기자, 우왕 발음이 어쩌면 넘넘 좋고 

한국어를 가장 아름답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여태까지, 내게. 하여튼............) 


그런데 계속 보고 있다보니 

기자들 문장들이 다 좋고, 발음도 정말 좋고 

뉴스 안보고 살던 내게, 놀랍고 신기하고 좋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용이 아주 황당함에도

표현이 아름다우니, 내용의 황당함을 더욱 명확히 황당하게 인식할 수 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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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6-12-20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놀라운 점 하나는 미국인들은 (남녀노소 흑백인을 가리지 않고) 왤케 말을 잘하냐는 것이에요. 유튜브 같은 데서 동영상 보면, 하나도 안 더듬고 일사천리로 좌르륵 말을 쏟아냅니다. 그게 짧은 말이든 기~인 말이든, 1분이 걸리든 1시간이 걸리든,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하나도 더듬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게 말을 이어갑니다.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할 수 있지? 어떻게 저렇게 말을 기름지게 ‘리드미컬’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감탄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아나운서든, 패널이든, 인터뷰어/인터뷰이든, 배우든 가수든, 일반인이든 지식인/학자/교수든, 기업가든, 누구나 다 가리지 않고 말을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왜 미국인들은 저렇게 말을 잘할까요? 영어라는 언어의 특징이 말의 유창함을 이끌어내는 것일까요? 영어 특유의 발음, 리듬, 문장 구조 따위가 유창한 언어 구사에 근원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미국인/서구인들의 토론논쟁 문화, 대화 문화 혹은 수다 문화가 저들의 뛰어난 언변이나 말재주를 키워준 것일까요?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은 저들에 비하면 정말 어눌하기 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직업상) 말깨나 한다고 하는 아나운서나 강사들, 교수들도 그닥 매끄럽게 말을 잘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학생들, 일반인들, 시장판 사람들, 상담사들, 등등 모두 말을 더듬는 게 보통입니다. 덜컹덜컹거리는 느낌,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 뭔가 빗나가는 느낌, 뭔가 핵심을 빼먹었다는 느낌 같은 게 청자뿐만 아니라 화자 자신한테도 계속 따라붙어, 청자는 청자대로 이해하는 데 더듬거리고, 화자는 화자대로 말하는 데 더듬거립니다. 왜 한국인들은 그렇게 더듬거릴까요? 왜 그렇게 말재주가 딸릴까요?

한국어는 과연 발음하기 어려운 언어에 속할까요? 한국어에 리듬적 요소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요? 한국어 문장 구조는 정형화/정식화하기가 영어보다 어려운 것은 아닐까요? (불확실하지만) 이런 한국어의 부정적 요소에 더해 한국의 토론논쟁 기피 문화, 빈약한 대화 문화 따위가 한국인 대부분이 계속 말더듬증을 일상적 병증으로 지닌 채 살아가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인 대부분이 말솜씨가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사실 같습니다.

몰리 2016-12-21 08:15   좋아요 1 | URL
정말 영어권(특히 미국) 지식인들 중에는
그가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음악 (아주 좋은 음악) 듣는 것 같은 사람들 있죠.

한마디로 정리하라면, 한국어와 정신의 삶. 이것의 문제 아닐까요.
여기선 정신도 사치인 판인데, 정신의 삶은? I saw the greatest minds of my generation destroyed by madness. 이런 문장이 한국에서, 어떤 진짜의 의미가 있게는 여전히 말해질 수 없는 문장이지 않나요. ˝우리 시대 최고의 정신˝이라고 말했을 때, 심지어 영어와 영어권 문화 잘 아는 지식인들도, 영어권 지식인들이 이해하듯이 이해하지 않을(못할) 것 같기까지 ;; 합니다. 한국에서 정신, 지성은 언제나 어김없이 ‘수단‘으로 환원되지 않나요. 그래서 수재, 수석.. (거의 노인네들을 두고 학력고사 몇 등, 사법연수원 몇 등. 서구에서도 이런 얘길 안하는 건 아니지만, 서구의 경우엔 그 세대에서 가장 똑똑했던 사람.. 정도 의미에서 그치잖아요. 지적 형성기에 bright, brightest 했던 것과 나중 great mind가 되는 것과 별개인. 그런데 우리의 경우엔 심지어 어린 시절의 ˝bright˝도 부모가 해줄 수 있는 무엇으로 변질되고 있기도 하고).

특히 현대사에서 내내 ‘진실‘이 짓밟히지 않았나요. 그렇다보니 ‘정확성‘이 가치가 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도 모두가 영원히 겪는 일 아닌가 합니다. 심지어 직장에서도요. 심지어 조직이 자기 담당의 일을 할 때도, 대강 어떤 ‘효과‘가 목적이지 분명히 제시되는 목적을 향해 명확히 정연하게... 이렇게 하지 않기(사실 무능함이죠. ˝열음을 자르는 철사의 힘˝ 이런 게 없는). 일 바깥의 사람들과도 비슷하게,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이미 정해져 잇는 몇 개의 대강의 지점들로 환원되는 일.

이런저런 이유에서 이 사회는
정확하게 아름답게 말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사회.

제가 늘 생각하는 주제인데, 쓰고 싶은 게 더 생각이 나면 이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포스트 끝의 질문에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포스트 쓴 다음 나가서 걷던 중 답해 보았다. 여기선 지식과 삶의 분리가 가능할 뿐 아니라 

분리해야만 견딜 수 있기 때문. 이 점에선, 가장 강한 사람만 버틸 수 있는 곳이기 때문. 틀린 삶, 부패한 삶과 

진리의 추구, 이게 어떻게 양립가능해. 틀린 삶을 옳게 살 수는 없다니깐.  


걷다가 벌써 한 두 달은 못 본 것 같은, 시로 닮은 고양이 봤다. 냐웅 냐아아아웅 냐웅 

애타게 부르며 쫓아갔지만 시로가 더 빨랐고 금방 사라졌다. 뚱냥이인데 뒤뚱거리면서도 아주 빠르게 사라진 시로. 

차오추르 사두고 간식으로 유인해야지. 친해져야지. 


파인만의 위의 조언은 

이건 또 어떻게 번역해야 오오 딱, 딱이네! 이럴 수 있을까. 


"네게 가장 재미있어 보이는 그것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무질서하고 불경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공부하라." 

이러면, 땡! 이죠. 다른 단어들도 그렇지만 특히 undisciplined와 irreverent, 이 두 단어는 어떻게 번역하든 

영어에서 그 단어들의 의미와 같은 의미를 전하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곳의 discipline과 이곳의 discipline이 

다르고 그곳의 reverence와 이곳의 reverence가 다르기 때문에. 사전적 의미로는 거의 같은 말들이 있다 해도 

실제로 그것이 행해지는 방식, 그 방식에 의해 (그것들이, 그 말들이) 갖게 되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박근혜가 대통령이라는 것만으로도 

아무 뉴스도 보거나 읽지 않고 아무튼 할 수 있는 한 모두를 차단해도 

그래도 스트레스 받는 일. 아예 모르는 사람이 아닌 한, 어쨌든 무슨 이유에서든 내가 상관을 해야 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의 사람됨(그 사람이 사는 방식, 그 사람이 하는 생각, 그 사람의 가치 체계...) 그것이 내 삶의 일부가 되는 일.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그 사람이 내 삶의 일부가 되는 그 끔찍한 일. 


불행히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접촉 최소화의 미션.. 이기도 하고 

그와 함께, be the change you want to see in the world, 아무리 조롱당해도 여기에도 진실이 있긴 하니까 그러기도 해야 하겠다.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나도 그런 끔찍함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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