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radio3 5편의 에세이 중 Words에서 

줄리언 반즈가, 사람들이 잘못 쓰는 단어이며 

잘못 쓰고 있음이 애석한 단어의 예로 이 단어 든다. decimate. 

이것은 로마 군대에 있었던 처벌 방식에서 유래한 단어. 전쟁에서 형편없이 싸웠거나 

여하한 이유로 병사들을 크게 벌해야 했을 때, 전체 인원의 1/10을 죽였다고 한다. 10명 중 1명. 

지금 정확히 그 뜻으로 이 단어를 쓰는 사람은 없고, 심지어 영문과 교수들도 잘못 쓰고 있다. "학살하다 massacre"의 의미로. 9/10, 10명 중 9명을 죽이다. 정도의 의미로. 


"나는 이 단어를 원래 뜻대로 정확하게 쓰고 싶지만, 그런다면 아무도 내 말을 내 뜻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고 할 때 조금 웃김. 말에 까다로운 사람들이, 까다로운데다 해박한 사람들이 (어원, 원래의 의미, 오용의 역사) 무슨 말을 하든 단어 하나 어김없이 극히 정확하게 쓴다면, 그들의 말은 본의 아니게 조금 웃기기도 할 것 같다. 


반즈의 첫직장, 대학을 졸업하고 갔던 최초의 직장이 Oxford English Dictionary 편찬팀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c에서 g사이였던가, 조사해야할 어휘들 알파벳 배정을 받고 그 안의 단어들에 대하여, 찾을 수 있는 모든 용례들을 찾으며 3년 넘게 일했다. 작가가 되기 전 lexjcographer 였던 것. OED에서 일하기 전 그는 사전의 황금시대주의자, 세상의 무엇에든 그것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가장 정확한 말이 있다고 믿는 보수주의적 prescriptivist. 그러나 OED 시절이 끝날 무렵의 그는, 언어 사용과 관련해서 prescription 있을 수 없다는 자유주의적 descriptivist. 잘못 쓰이기도 하면서 의미가 풍요해지는 것이 말. 


왜 영어권 지식인들은 (그들만이 아니라 다들, 대체로 누구나들. 특별히 언어장애가 있지 않은 한) 

유창한데 한국의 지식인들이나 어쨌든 한국의 우리들은 그렇지 않은가. 여기 내놓을 수 있는 답 중에 

이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롭게 폭발적으로 미친듯이(미친듯이 즐기며) 표현력을 시험하며 방만하게 

하여튼 한국어를 풍요하게 써본 이전의 역사도 없으면서, prescriptivism이 강하게 존재했던 일. <우리말 바로쓰기> 

같은 책들. 영어에서 prescriptivism의 압박은, 그게 현실적 압박이라 느끼는 이가 누구라도 있었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겐, (사람들이 순해서? 아니면, 사람들이 지배를 사랑해서? 구속을 사랑해서?) 현실적이었고 현실적인 듯. 


답들 중에선 가장 사소한 답에 속할 듯. 

그리고 프랑스에서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불어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애쓰고 있다고 하고 

예전엔 좀 광적이기도 했다는 걸 보면, 그래도 불어 쓰는 사람들 역시 영어 쓰는 사람들처럼 아주 유창한 것 같은 걸 보면, 이건 답이 아닐 수도. 


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이렇게 오늘의 첫 포스트를 성사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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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뉴스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조금 전 뉴스룸에서 

이지은 기자, 우왕 발음이 어쩌면 넘넘 좋고 

한국어를 가장 아름답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여태까지, 내게. 하여튼............) 


그런데 계속 보고 있다보니 

기자들 문장들이 다 좋고, 발음도 정말 좋고 

뉴스 안보고 살던 내게, 놀랍고 신기하고 좋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용이 아주 황당함에도

표현이 아름다우니, 내용의 황당함을 더욱 명확히 황당하게 인식할 수 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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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6-12-20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놀라운 점 하나는 미국인들은 (남녀노소 흑백인을 가리지 않고) 왤케 말을 잘하냐는 것이에요. 유튜브 같은 데서 동영상 보면, 하나도 안 더듬고 일사천리로 좌르륵 말을 쏟아냅니다. 그게 짧은 말이든 기~인 말이든, 1분이 걸리든 1시간이 걸리든,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하나도 더듬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게 말을 이어갑니다.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할 수 있지? 어떻게 저렇게 말을 기름지게 ‘리드미컬’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감탄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아나운서든, 패널이든, 인터뷰어/인터뷰이든, 배우든 가수든, 일반인이든 지식인/학자/교수든, 기업가든, 누구나 다 가리지 않고 말을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왜 미국인들은 저렇게 말을 잘할까요? 영어라는 언어의 특징이 말의 유창함을 이끌어내는 것일까요? 영어 특유의 발음, 리듬, 문장 구조 따위가 유창한 언어 구사에 근원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미국인/서구인들의 토론논쟁 문화, 대화 문화 혹은 수다 문화가 저들의 뛰어난 언변이나 말재주를 키워준 것일까요?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은 저들에 비하면 정말 어눌하기 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직업상) 말깨나 한다고 하는 아나운서나 강사들, 교수들도 그닥 매끄럽게 말을 잘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학생들, 일반인들, 시장판 사람들, 상담사들, 등등 모두 말을 더듬는 게 보통입니다. 덜컹덜컹거리는 느낌,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 뭔가 빗나가는 느낌, 뭔가 핵심을 빼먹었다는 느낌 같은 게 청자뿐만 아니라 화자 자신한테도 계속 따라붙어, 청자는 청자대로 이해하는 데 더듬거리고, 화자는 화자대로 말하는 데 더듬거립니다. 왜 한국인들은 그렇게 더듬거릴까요? 왜 그렇게 말재주가 딸릴까요?

한국어는 과연 발음하기 어려운 언어에 속할까요? 한국어에 리듬적 요소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요? 한국어 문장 구조는 정형화/정식화하기가 영어보다 어려운 것은 아닐까요? (불확실하지만) 이런 한국어의 부정적 요소에 더해 한국의 토론논쟁 기피 문화, 빈약한 대화 문화 따위가 한국인 대부분이 계속 말더듬증을 일상적 병증으로 지닌 채 살아가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인 대부분이 말솜씨가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사실 같습니다.

몰리 2016-12-21 08:15   좋아요 1 | URL
정말 영어권(특히 미국) 지식인들 중에는
그가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음악 (아주 좋은 음악) 듣는 것 같은 사람들 있죠.

한마디로 정리하라면, 한국어와 정신의 삶. 이것의 문제 아닐까요.
여기선 정신도 사치인 판인데, 정신의 삶은? I saw the greatest minds of my generation destroyed by madness. 이런 문장이 한국에서, 어떤 진짜의 의미가 있게는 여전히 말해질 수 없는 문장이지 않나요. ˝우리 시대 최고의 정신˝이라고 말했을 때, 심지어 영어와 영어권 문화 잘 아는 지식인들도, 영어권 지식인들이 이해하듯이 이해하지 않을(못할) 것 같기까지 ;; 합니다. 한국에서 정신, 지성은 언제나 어김없이 ‘수단‘으로 환원되지 않나요. 그래서 수재, 수석.. (거의 노인네들을 두고 학력고사 몇 등, 사법연수원 몇 등. 서구에서도 이런 얘길 안하는 건 아니지만, 서구의 경우엔 그 세대에서 가장 똑똑했던 사람.. 정도 의미에서 그치잖아요. 지적 형성기에 bright, brightest 했던 것과 나중 great mind가 되는 것과 별개인. 그런데 우리의 경우엔 심지어 어린 시절의 ˝bright˝도 부모가 해줄 수 있는 무엇으로 변질되고 있기도 하고).

특히 현대사에서 내내 ‘진실‘이 짓밟히지 않았나요. 그렇다보니 ‘정확성‘이 가치가 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도 모두가 영원히 겪는 일 아닌가 합니다. 심지어 직장에서도요. 심지어 조직이 자기 담당의 일을 할 때도, 대강 어떤 ‘효과‘가 목적이지 분명히 제시되는 목적을 향해 명확히 정연하게... 이렇게 하지 않기(사실 무능함이죠. ˝열음을 자르는 철사의 힘˝ 이런 게 없는). 일 바깥의 사람들과도 비슷하게,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이미 정해져 잇는 몇 개의 대강의 지점들로 환원되는 일.

이런저런 이유에서 이 사회는
정확하게 아름답게 말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사회.

제가 늘 생각하는 주제인데, 쓰고 싶은 게 더 생각이 나면 이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포스트 끝의 질문에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포스트 쓴 다음 나가서 걷던 중 답해 보았다. 여기선 지식과 삶의 분리가 가능할 뿐 아니라 

분리해야만 견딜 수 있기 때문. 이 점에선, 가장 강한 사람만 버틸 수 있는 곳이기 때문. 틀린 삶, 부패한 삶과 

진리의 추구, 이게 어떻게 양립가능해. 틀린 삶을 옳게 살 수는 없다니깐.  


걷다가 벌써 한 두 달은 못 본 것 같은, 시로 닮은 고양이 봤다. 냐웅 냐아아아웅 냐웅 

애타게 부르며 쫓아갔지만 시로가 더 빨랐고 금방 사라졌다. 뚱냥이인데 뒤뚱거리면서도 아주 빠르게 사라진 시로. 

차오추르 사두고 간식으로 유인해야지. 친해져야지. 


파인만의 위의 조언은 

이건 또 어떻게 번역해야 오오 딱, 딱이네! 이럴 수 있을까. 


"네게 가장 재미있어 보이는 그것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무질서하고 불경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공부하라." 

이러면, 땡! 이죠. 다른 단어들도 그렇지만 특히 undisciplined와 irreverent, 이 두 단어는 어떻게 번역하든 

영어에서 그 단어들의 의미와 같은 의미를 전하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곳의 discipline과 이곳의 discipline이 

다르고 그곳의 reverence와 이곳의 reverence가 다르기 때문에. 사전적 의미로는 거의 같은 말들이 있다 해도 

실제로 그것이 행해지는 방식, 그 방식에 의해 (그것들이, 그 말들이) 갖게 되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박근혜가 대통령이라는 것만으로도 

아무 뉴스도 보거나 읽지 않고 아무튼 할 수 있는 한 모두를 차단해도 

그래도 스트레스 받는 일. 아예 모르는 사람이 아닌 한, 어쨌든 무슨 이유에서든 내가 상관을 해야 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의 사람됨(그 사람이 사는 방식, 그 사람이 하는 생각, 그 사람의 가치 체계...) 그것이 내 삶의 일부가 되는 일.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그 사람이 내 삶의 일부가 되는 그 끔찍한 일. 


불행히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접촉 최소화의 미션.. 이기도 하고 

그와 함께, be the change you want to see in the world, 아무리 조롱당해도 여기에도 진실이 있긴 하니까 그러기도 해야 하겠다.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나도 그런 끔찍함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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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이 어려운 책. 

그런데 제사는 아주 매혹적이다. "필멸인 존재는 필멸의 생각을 해야지 불멸의 생각을 해선 안된다. A mortal (being) must think mortal and not immortal thoughts." 출전은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희극 작가라는 Epicharmus. 


그 제사만 읽은 책. 

그의 다른 책들은, 그것들도 공히 어렵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철학에서 이전 읽은 것들이 많지 않아도 (심지어 거의 없다 해도) 열의가 있다면 읽을 수 있는데

이 책은 아니었다. 칸트와 헤겔을 몰라도 <부정변증법>은 읽을 수 있지만, 아마 이 책은 저 부제 속의 인물 

훗설, 훗설에 대해 꽤 잘 알아야만 읽을 수 있을 것같다. 


필멸의(필멸인) 생각 

불멸의(불멸인) 생각,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도 매혹적이지 않나. 

덧없이 사라질 생각, 영원히 죽지 않을 생각? 예를 든다면? 

덧없음에 관한 생각, 영원히 죽지 않음에 관한 생각? : 이건, 어쨌든 영어 문장만 놓고 보면 이런 뜻일 수는 없다. 

must think about the mortal and not the immortal, 혹은 must think about mortality and not immortality. 이런 식이어야 저런 뜻이 될 수 있겠지. 


매혹적이었던 건, 생각의 종류를 분류하고 

생각 앞에 붙일 형용사로 쓰이는 일은 거의 없을 두 형용사를 생각 앞에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마치, 우리가 우리가 하는 생각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 이 문장을 놓고 보면 

사람들도, 그들이 하는 생각들로 분류할 수 있겠구나 하게 되는 일. 


정신의 헤비급, 라이트급. intellectual heavy weight, light weight. 

이런 '체급'의 표현을 쓰는 것이 여기서도 적실해지지 않나. 자신이 혼자 스스로 하는 생각만이 아니라 

남의 생각을 이해하고 재현하는 데서도, 체급이 나뉘어지지 않나. 라이트급인 사람은 도저히, 수퍼헤비급인 저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 다른 데서는 몰라도 어쨌든 학문, 특히 인문학이면, 체급 판정이 정말 정체 파악의 거의 전부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쉽고 가장 얕은 생각만을, 그런 걸 생각이라 부를 수도 없지만 하여튼 그것만을 하는 

(그것 이상의 다른 어떤 생각도, 체급 미달이라 하지 못하는) 사람들. 놀랍게도 교수들 (심지어, 인문학 교수들) 사이에서도 드물지 않은 사람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서재에 좀 지나치게 많이 쓰는 듯. 

팔로하신 분들께 너무 자주 보일 듯. ;;; 트위터 식으로 '뮤트'하고 싶으실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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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두 권에서 호르크하이머도 강력하게 제시하고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 <미니마 모랄리아>(그리고 기타)에서 거의 그 주제의 끝까지 

탐구하는 주제 하나가 "멍청함은 주관적 이성의 과잉" 이것이다. 특히, 이 시대에 확산되는 종류의 멍청함. 


나는 이게 아주 중요하고 이에 대한 여러 방향, 여러 층위의 논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어디 받아줄 학술지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나라도 일단 초점을 명확히 저 지점에 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긴 했는데, 그러기 위해 필요한 책들을 세밀히 읽으면서 정리하는 일도 못하고 있는 실정. 


이것도, 모두가 언제나 겪는 일 아닌가. 

특히 갑과 을이 만날 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갑에게 을의 모두가 이미 알려져 있는 일. 

갑은 을에 대해 알아야할 모두를 이미 알고 있는 일. 다르게(틀리게) 알든 말든, 갑의 관심이 아니게 되는 일. 

을의 (을의 생각, 관점의) 무엇이든 그리 가게 되어 있는 소수의 도달점들이 있고, 그 도달점의 확장이나 수정은 

극히 드물게만 일어나는 일. 극히 드물게라도 일어난다면 그 갑은, 합리적 갑. 


여하튼, 도저히 대화할 수 없으며 

갑은 무사하지만, 을은 뇌가 녹는 듯 느끼는 일. 

뇌손상을 막기 위해서, 갑과의 접촉 최소화 미션을 절박히 껴안게 되는 일. 


*어쨌든 이 주제로 누가, 날카롭게 끝까지 가고 

방대하고 강인하고 예리하고 섬세한 지성. 그런 걸 보여주는 긴 글을 쓴다면 

매일 읽겠다. 매일, 울면서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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