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위대한 일들
조디 피코 지음, 노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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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들인 책들을 아직 다 읽지 못했다. 둘째 곰돌군이 잠든 시간과 첫째 곰돌군이 어린이집에 간 사이 짬짬히 읽는다고 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에, 먹고 치우는 일조차도 꽤 시간이 걸린다. 하원 후 아기들이 잠들기 전까지는 정말 쓰나미가 밀려오듯 정신이 없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그 기본적이고도 일상적인 일들이 사실은 굉장히 큰 일이라는 것을 아이들을 돌보면서 알게 되었다. 아기들이 잠들면 조용히 안방을 빠져나와 소파에 털썩, 시계를 보면 어느 새 밤 11시가 다 되어간다. 멍한 상태로 있다가 책이라도 읽어보려고 하면 몰려오는 졸음이란. 이런 와중에 이 [작지만 위대한 일들]은 나의 잠들을 포기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보통 그 해에 맞이한 책들은 언제 읽든 그 해의 리뷰로 표기하고는 하는데 이 작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느 해의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이 아니라, 새로운 해의 시작으로 표기하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조디 피코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고, 이번 작품 역시 지금까지의 작품만큼이나 강렬하고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한 병원 분만실에서 근무한 루스 제퍼슨. 그녀는 흑인이지만 뉴욕주립대학과 예일간호대학원을 졸업한 재원이자, 베테랑인데다 유능하고 책임감 또한 강한 간호사다. 어느 날 한 아기의 건강검진을 마치자마자 극렬한 백인우월자인 아기의 부모로부터 자신들의 아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돌보지 않게 해달라'는 요구를 듣게 된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루스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고, 이튿날 포경수술을 마친 그들의 아기와 우연히 단 둘이 남겨진 상황. 아기는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을 겪다 사망하고 말았다. 아기의 부모로부터 고소를 당하고 새벽에 경찰에 끌려간 루스. 열일곱 아들 에디슨만이 걱정인 가운데 그녀 앞에 국선변호사인 케네디가 나타나고, 케네디는 루스에게 법정에서 인종 문제를 들먹일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누가봐도 명백한 인종차별. 오랜 세월 내면의 자신을 억눌러온채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자 한 루스에게 닥친 인생 최대의 위기. 법정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루스와 인종 문제를 내세울 수 없다는 케네디의 대립으로 서로간의 불신이 쌓여가는 가운데 마침내 재판이 시작된다.

 

병에 걸린 언니를 살리기 위한 '도구'로 태어난 소녀가 부모를 고소하는 이야기를 그린 [마이 시스터즈 키퍼], 한 고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을 풀어낸 [19분], 자폐를 앓는 남자가 사건에 휘말리는 소설 [그림자 규칙]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잊지못할 소재로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조디 피코가, 이번에는 예민하고도 어려운 문제인 인종차별 문제를 소설 속에 녹여냈다. 누구보다 뛰어난 간호사임에도 불구하고 루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부당한 해고조치와 고소, 재판의 과정들에 나 또한 억울했다. 어떤 사회 속에서 자행되는 공공연한 차별과 멸시와 조롱.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견뎌가며 살아가는 걸까. 그러나 순간, 나도 백인우월주의자들에 대해 이렇게 분노하고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거리에서 흑인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흠칫하지는 않았는지,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아있는 흑인 옆에 감히 다가갈 생각도 못해 본 것은 아닌지.

그 때만 화난 게 아니에요. 지금도 화나요.

난 오랫동안 화가 나 있었어요.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죠.

당신은 몰라요.

난 1년 365일을 너무 흑인처럼 보이거나 너무 흑인처럼 말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그래서 연기를 했어요.

가면을 쓰듯 늘 억지 미소를 지었죠.

지겨워요. 아주 지긋지긋해요. 하지만 그래도 했어요.

내게는 보석금이 없으니까요. 아들이 있으니까요.

가장 슬프고 수치스러운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딱한 삶을 살면서

나도 그 쇼를 믿었다는 거예요.

내가 그걸 다 해내면 당신들의 일원이 될 줄 알았어요.

p553

재판에서 루스가 증인으로 나서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안도하는 케네디와는 달리, 루스는 자신이 숨긴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에 꽁꽁 묶어둔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피를 토하듯 말한다.

당신은 자기가 국선 변호인이고,

도움이 필요한 유색 인종을 도와준다는 사실을 아주 자랑스러워하죠.

하지만 우리의 불행이 당신의 행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있어요?

편견은 쌍방향으로 작용해요.

편견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있으면,

이득을 보는 사람도 있는 법이죠.

p554

나는 감히 루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내가 그녀로, 백인우월주의와 그로 인한 폭력이 만행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흑인이 아닌 이상 내가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나 또한 유색인종이고 백인들 사회에서는 그들에게 황인종이라 불리며 차별을 당하는 존재가 되겠지만 나는 피부색을 보지 않아요, 나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아요 라는 말들조차 어떤 이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조디 피코는 그녀 자신이 백인임에도, 그래서 이 작품이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 될 수 있음에도, 이 소설은 자신과 같은 부류, 네오나치족을 금세 알아보고 그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기 안에 있는 인종 차별주의는 알아보지 못하는 백인들을 위해 썼다고 밝힌다. 단지 피부색에 바탕을 둔 차별이 아니라 누가 권력을 가졌는가에 관한 문제. 유색인종이 불이익을 받아 성공하기가 더 어렵듯이, 백인은 이익을 얻어 성공하기가 더 쉬운 사회에 대해서. 하지만 이 작품은 또한 우리를 위한 책이기도 하다. 같은 유색인임에도 또 다른 유색인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우리 안의 못난 모습들을 위한. 그리고 비단 인종차별 뿐만이 아닌 다른 수많은 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울려줄 것이다.

 

죽은 아기를 잃은 깊은 슬픔과 분노에는 두말 할 나위없이 공감했다. 둘째 곰돌군을 낳기 전 겪은 한 번의 유산경험은 진정한 상실감이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엄청난 일이었다. 비록 9주밖에 되지 않은 아기였지만, 한 번 그 아이의 심장을 들은 이상 나는 그 심장 뛰는 소리, 심장이 들리지 않는 적막감, 어떤 물체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그 순간의 초음파 화면을 영원히 기억한다. 그런데 무사히 태어난 아기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 또한 분명히 병원을, 의사를, 간호사를 저주하고 또 저주하며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맹세했을 것이다. 죽은 아기의 부모들-커크와 브릿-의 아픔에 너무 마음 아팠지만 루스가 겪는, 그리고 겪었던 차별에 관한 고통이 굉장히 크게 다가와서 어느 정도는 그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아기가 소중하듯, 루스의 에디슨도 분명 소중한 아이이고 인간이므로.

 

재판이 끝이 아니다. 작가가 말하는 미래는 굉장히 극적이고 아름답다. 현실에서 과연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쩌면 책이므로 가능한 일이라고 누군가는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바로 그 책이므로, 어떤 이야기이므로 우리는 그 이야기에 위로받고 희망을 발견한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말 '만일 내가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면, 작은 일을 위대하게는 할 수 있습니다'에서 가져왔다는 제목이 주는 울림이 거대하다. 2019년에 이 작품을 뛰어넘을 작품이 있을까 싶다. 그만큼 내게는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가슴에 깊이 다가왔다. 역시 조디 피코라는 찬사를 아낌없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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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과 유튜브로 시작하는 5.6.7세 엄마표 영어의 비밀 - 영유도 학원도 필요 없는 가성비 갑 영어 교육
양민정 지음 / 소울하우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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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곰돌군은 올해 네 살이 되었다. 이제 만 32개월. 지금 다니는 어린이집은 네살 때까지만 다닐 수 있어 올해 하반기가 되면 유치원을 알아봐야 한다. 남자아이는 운동을 잘해야 한다(?)는, 내가 보기에는 다소 강압적인 요구를 하는 남편의 요구에 따라 유아체능단도 알아볼 생각이기는 하지만, 유아체능단에는 별로 마음이 가질 않아(얼마 전 유아체능단을 운영하는 시설 대부분에 CCTV가 없다는 기사를 보기도 했고, 시댁 근처에 있는 유아체능단에는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다) 웬만하면 집 앞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유치원에 밀어넣을 생각이라는 건 안 비밀.

 

 

영어유치원과 놀이학교를 고려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사실 유치원이나 유아체능단, 영어유치원보다는 놀이학교에 보내고 싶기는 한데 우리집에서 거리가 너무 멀다. 따로 셔틀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해도 작년 여름 일어난 사고를 떠올리면 아이들에게는 그저 집에서 가까운 데가 최고가 아닐까 싶다. 휴직기간에는 어찌어찌 데리고 다닌다고 해도 복직하면 친정부모님에게 어느 정도 부탁을 드려야할텐데 먼 거리를 자동차로 아이를 이동시키는 것도 커다란 노동이 될 터. 게다가 비용도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문제의 영어유치원. 크아. 아이있는 집이라면 한번씩 고민한다는 그 영어유치원. 나도 잠시 머리속에 떠올려보기는 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영어유치원은 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아이를 벌써부터 뭔가 전문적인 공부 느낌이 나는 곳에 보내고 싶지 않다는 다짐이랄까.

 

 

만약 내가 영어유치원을 선택했다면 최소 월 100만원의 원비에

교재비, 원복비, 방과 후 학습비 등으로 50만원,

게다가 월 80만원 전후의 도우미 비용이 필요했다.

다섯 살부터 일곱 살까지 8280만원.

.

.

영유를 포기하고 애프터스쿨이나 학원을 보낸다고 해도

1년에 최소 600만원에서 천만원이 들었다.

이 돈이면 온 가족이 매년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돈이었다.

그렇게 영어에 돈을 투자하게 되면

분명 투자 대비 효과에 목을 매게 될 것이고,

아이에게 엄한 잣대를 들이대게 될 것이 뻔했다.

p35

우리집은 저 비용을 댈 수 없다. 무엇보다 저 비용을 투자한 후 아이를 압박하게 될 내 모습이 눈에 선해 절대 영어유치원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영어유치원에 가서 모두 영어를 다 잘하게 된다면 이렇게 엄마표 영어를 선택하는 이들도 없지 않겠나. 어렸을 때부터 영어공부에 압박을 받은 아이들의 실패담도 많이 들었다. 예전 담임을 맡은 한 아이에게는 선생님은 너무 어렸을 때 공부 압박하지 말라고, 자기를 보며 잘 명심하라(?)는 조언 아닌 조언을 들은 적도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생각한 것이 바로 엄마표 영어다. 영어그림책과 노래를 이용하면 흥미를 가지지 않을까 싶어 알아보니 마침 '노부영'이라는 자료가 있어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스트레스나 거부감을 주고 싶지 않아 지금은 배경음악처럼 영어노래를 들려주고, 아이가 보든말든 나 혼자 영어그림책을 들춰보거나 노래를 듣곤한다. 여전히 빠방이에 빠져있는 터라 흥미를 가질 때도 있고 본 체 만 체 할 때도 있지만 가끔 스스로 책을 들고와 읽어 달라고 하니 이 어찌 기특하지 않을 수 있나.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불안감에 허덕일 때도 있었다. 좀 더 책을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 좀 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욕심을 이 제목이 긴 책을 보면서 다잡았다.

 

 

작가는 현직 교사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인용한 저 문구를 바탕으로 엄마표 영어를 실천하고 있다. 그림책과 유튜브를 어떻게 활용해서 아이를 교육시키는지 정말 궁금했다. 결론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것. 나와 일정부분 생각이 통하는 부분도 있고, 엄마표 영어 환경을 만드는 방법, 두 아이에게 영어를 노출시키는 방법, 다섯 살과 일곱 살 각각의 나이에 영어학습을 어떻게 진행시키면 좋을지에 대한 방법도 세세하게 나타나있다. 엄마표 영어를 진행하면서 느꼈던 두려움이나 조바심도 드러나 있어 엄마표 영어를 시도하려는 사람들의 얼룩진 마음을 잘 어루만져준다.

 

 

나 역시 대학 졸업과 동시에 영어는 졸업했다. 발음 무척 안좋다. 남편이 내가 영어노래 부르는 것을 듣더니 빵 터진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언어란 의사소통이 주된 목적.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발음에 신경을 많이 쓰는 탓에 영어 앞에 소극적이 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내 아이들에게는 그런 주눅듬, 두려움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내 발음을 놀리는 남편에게 일침을 가해주었다. 아이들을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마표 영어를 시작하겠다는 마음은 그런 각오에서 시작되었다. 단순히 대학을 잘 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십 몇 년 후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앞으로 2년의 휴직이 예정되어 있다. 그 동안 우리 아이들과 한글책도 많이 읽고 영어노래도 부르고 영어그림책도 부르면서 기반을 다져야겠다. 그 길에 이 책이 소중한 친구가 될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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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의 신
아가와 다이주 지음, 이영미 옮김 / 소소의책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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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막차를 타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워낙 아빠가 귀가시간을 독촉하시기도 한 탓도 있지만, 제 자신이 밤길 다니는 걸 무척 무서워했거든요. 그래서 학창시절은 물론 대학에 들어간 후,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후에도 저는 ‘알아서’ 집에 일찍 일찍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막차를 타기 위한 급박함, 놓칠 새라 빠르게 달리는 역동적인 숨들을 목격해보지 못했습니다. 막차라고 하면 조바심, 서두름 등의 단어가 생각나기 마련인데 [막차의 신] 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상하게도 따뜻함, 여유로움, 한숨돌리기 같은 편안함이었어요. 한구석에 달님이 자리잡고 있는, 뭔가 애잔한 표지 때문이었을까요. 막차와 관련된 사람들의 아직 늦지 않은 이야기가, 우연한 사고로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총 일곱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K역에서 발생한 인사사고로 인해 한밤의 지하철 운행이 잠시 멈춥니다. 누구 하나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그저 사고가 정리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시선과 숨결. 누군가는 그 와중에도 치한을 만나고, 누군가는 아버지가 위독해 급히 병원으로 가야하며, 납기가 코앞에 닥친 IT 업계 엔지니어도 있고, 연인에게 이별의 편지를 보내고 마지막 만남을 준비한 여성도 있습니다.

 

겨울이라 그런 걸까요. 원래 스릴러와 미스터리 장르를 즐겨보지만 요즘에는 이렇게 따뜻하고 사연 있는 이야기들에 끌리더라고요. 한 편 한 편을 정말 오랜만에 음미하며 읽었습니다. 사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약간 어리둥절하기도 했습니다만. 전 <고가 밑의 다쓰코>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사람을 웃기고 싶었대.

웃는 얼굴이 없는 집에서 커서 웃는 얼굴 보는 게 좋았대. 그

래서 시설에서 나와 개그계의 문을 두드린거래.

p222

자신의 슬픔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다쓰코. 그 수많은 슬픔의 시간을 뒤로한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그의 이야기가 이렇게도 가슴을 후벼파는 것은, 소설 속 인물이지만 부디 앞으로는 그에게도 웃을 수 있는 일들만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겁니다. 늘 죽음과 가까웠던 그지만 죽음이 그에게는 아주 나중에, 훨씬 나중에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그런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우리의 지나간 시간과 앞으로 남은 날들을 되짚어봅니다.

 

 

다른 이야기들도 좋았지만, 전 이 <고가 밑의 다쓰코>만으로 이 책에 만점 주고 싶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을지 모르지만 아우, 전 이 이야기 왜 이렇게 좋은 거죠. 뭔가 가슴에 팍 와 닿아서 퍽 꽂혀버렸는데 이 감정을 제대로 풀어낼 수 없어 방안을 서성거릴 뿐입니다. 고통과 슬픔에 찬 인생임에도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의지,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성숙함에 대한 존경이라고, 일단은 그리 적어보겠습니다.

 

‘아가와 다이주’라는 매우 낯선 이름의 작가이지만, 이 겨울에 포근한 책이 필요하다면 이 작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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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톰 말름퀴스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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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은 후 가장 두려운 것은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하게 남편과 이 아이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인명은 재천이라,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의 의지대로 어쩌지 못하니 걱정해도 소용없겠지만 첫째 아이를 낳은 순간부터 그 두려움은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무서운 것은, 내가 이 아이들과 남편을 두고 먼저 떠날 수도 있다는 것. TV에서 중병에 걸린 엄마가 아이들이 다 크는 것을 못보고 가는 것에 대해 무척 마음아파하는 장면을 몇 번 봤는데 그런 일이 나의 일이 될까봐, 생각만으로도 너무 두렵다. 저자인 톰은 그런 순간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와 함께 할 미래를 꿈꾸고 있었을 뿐, 그 아내가 급성 백혈병으로 딸만 남겨둔 채 먼 길을 떠날 거라고 감히 생각이나 했을까.

 

내가 네 몫까지 아이를 사랑한다는 걸 너는 알 테지만,

그래도 좋은 시절은 다 지나고

이제 내 앞에는 중요한 일들밖에 남지 않았다는

기분이 든다.

p372

임신 33주, 톰의 아내 카린이 급성 백혈병으로 병원에 입원한다. 급작스러운 아이의 출산, 제왕절개 수술 후에도 카린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아픈 아내는 병마와의 싸움에서 기진맥진한 순간에도 힘겹게 '리비아'라는 아이의 이름을 전달한다. 결국 출산 5일 만에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며칠 전만 해도 곁에서 웃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의 부재.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책임져야 하는 생명의 무게를 느낀다. 현재와 교차되는 과거의 톰과 카린의 대화들, 말다툼마저도 그립게 여겨질 그 순간들이 현재 톰이 느끼고 있는 슬픔과 대비되어 더욱 큰 아픔을 전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그녀와 나누었던 아름다운 추억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톰은 급박했던 순간들, 상실과 괴로움으로 가득찬 기억을 덤덤하게 서술한다. 소설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자신의 경험이 녹아들어있는만큼 전해지는 슬픔은, 덤덤한 기술 방식에도 사무치게 마음을 압박해온다. 모두 건강이 최고라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정작 그것을 항상 새기며 살아가지 못한다. 잃고 나서야 건강이 있어야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할 뿐. 죽음으로 헤어진 사람은 이제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 어디에서도 다시는 만날 수 없다.

 

나에게 만약 저런 일이 생긴다면 남은 나의 삶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리비아에 대한 책임과 사랑. 오직 그것만이 톰의 버팀목이 되었지만, 아무리 리비아를 사랑한다고 해도 카린이 주었던 온기와 사랑하는 감정은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은 흑백으로 변하고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만을 떠올리며 하루하루 버티지 않았을까. 아이가 주는 기쁨과 희망을 마음 속 깊이 느끼기에는 수없이 많은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게 될 터이다. 그러니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따뜻한 체온을 나누고 순간순간의 행복에 집중해야 한다. 톰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단 한 가지는 바로 그것이다. 바로 지금,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전달해야 한다고. 아낌없이. 주저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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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의 생일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책 1
이와사키 치히로 지음, 엄혜숙 옮김, 다케이치 야소오 기획 / 창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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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곰돌군은 케이크 위의 촛불 끄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후 100일 단위의 기념일과 생일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생일 케이크 위의 촛불마저 첫째 곰돌군 몫이에요. 언제부터인가 케이크 위에 초를 꽂으면 불을 끄라며 '불, 불' 외치기 시작했고, 이제 제법 말이 트인 지금은 '불 꺼~!'라며 부엌과 거실 천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촛불을 끄는 그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자신의 초를 기꺼이 넘겨주게 되죠. 그리고 엄마인 저는 어떻게든 기념일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 작은 케이크 위에 초를 꽂아주게 됩니다.

 

치이는 이제 다섯 살이 되는 여자아이에요. 촛불 다섯 개 한꺼번에 끌 거라며 다음 날 올 자신의 생일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오늘은 동무의 생일. 치이는 생일 카드를 써서 파티가 열리는 동무의 집으로 갑니다.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던 치이는, 그만 동무의 촛불을 대신 꺼버려요. 실수한 치이와 그런 치이를 놀리는 동무들. 당황하고 부끄러운 치이는 그 자리를 벗어나 도망칩니다. 너무 창피한 나머지 자신의 생일날 아무도 보고싶지 않아, 하지만 태어났던 그 날처럼 새하얀 눈을 보고 싶다고 별님에게 기도하는 치이. 그리고 드디어 아침이 됩니다. 과연 치이가 기도한 대로 새하얀 눈이 내렸을까요. 그리고 동무들은 치이의 생일을 축하하러 와주었을까요.

[눈 오는 날의 생일] 은 [창가의 토토]를 그린 이와사키 치히로 작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재출간 된 책입니다. 따뜻하고 순수한 색감으로 토토를 저의 마음 속에 데려단 준 작가의 동화책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첫째 곰돌군이 좋아할 것 같아 저도 마음이 설레었어요. 이와사키 치히로는 수채화와 수묵화를 결합한 화풍으로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가입니다. 평생 어린이를 작품 테마로 삼았던만큼, [눈 오는 날의 생일] 에서도 작가의 매력이 여과없이 발휘되어 있어요. 생일을 맞이한 치이의 두근거림, 동무의 생일에 가서 실수로 촛불을 불어버린 당혹감, 너무 창피한 나머지 아무하고도 어울리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 그럼에도 생일날 자신이 태어났을 때처럼 하얀 눈이 내리기를 기도하는 순수함이 따뜻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촛불을 끄는 아이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어른이 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일들이 아이에게는 아름답게, 빛나게, 기쁘게 다가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그런 행복감이 [눈 오는 날의 생일] 로 인해 더 가슴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책을 받아든 첫째 곰돌군은 역시 한 장 한 장 펼치며 촛불 그림을 발견하더니 '하나, 두울~' 세기 시작합니다. 조금 있으면 첫째 곰돌군이 태어난 지 1000일이 되는데 그 때도 커다란 케이크에 초를 가득 꽂아주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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